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밝혀주는 사서가운데서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특히 중요한 사서들이다. 그러나 이 두 사서는 여러가지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른 역사상을 보여 주고 있다.
삼국사기는 1145년 고려 인종 23년에 왕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관하에 崔山甫 등 이하 8명의 참고와 鄭襲明 등 이하 2명의 관구 등 10여명이 金富軾의 책임 아래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어느 한사람에 의해 개인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왕명에 의해 사관들에 의해 공동 분찬된 것이다. 그 속에서 김부식이 직접 집필한 것은 머리말(進三國史表),論贊,志의 서론 정도이다. 그러나 편찬의 책임자로서 김부식은 사관의 선정,사료의 선정,편목의 작성,사료의 채록여부 결정,칭호,표현방식의 결정 등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그 당시의 역사의식을 반영한 김부식의 사관의 영향력아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역사서술에 있어서 정사를 편찬하는 표준적 체재인 기전체를 수용해 紀,表,志,傳으로 구분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전 5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 1-12권까지는 신라본기(12권),제 13-22권까지는 고구려본기(10권).제 23-28권까지는 백제본기(6권),제 29-31권까지는 연표(3권),제 32-40권까지는 잡지(9권),제 41-50권까지는 열전(10권)으로 되어 있다.
본기는 분량상 대체로 삼국이 비슷하나 志와 列傳은 거의가 신라의 내용이다. 이는 편찬자의 주관적 편견때문으로 보기보다는 신라측 자료만이 존속,고구려,백제측 자료의 결핍에서 온 객관적 한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는 그동안 사대주의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기전체의 체제에 있어서 삼국을 世家에 넣지 않고 本紀를 세운 것은 삼국을 중국과 대등한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의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서 신라 특수의 제도 (동성결혼)를 옹호하였으며 방언(거서간,차차웅,이사금) 사용을 주장한 것,지리지의 비중을 크게한 것,삼국이 외래 침략세력에 대항해 싸운 것을 높이 평가한 것,열전에 망라된 다수 인물이 국가관,애국관에 투철한 인물이었다는 것,즉위년 칭원법을 따른 것 등으로 보아 현실적이며 국가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는 모두 5권으로 이루어져 모두 9개의 편목으로 되어 있다. 王曆은 간략한 제왕의 연대기,紀異는 불교신앙에 관한 서사를 다소 포함하고 있지만 주로 국가와 사회에 관한 역사를 싣고 있는데 이 한편의 내용이 전체의 절반 가량 차지하고 있다. 興法이하 孝善에 이르는 7편은 불교신앙의 사실이 중요한 바탕이 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신앙 그 자체보다는 국가 사회속에서의 신앙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전편에 담겨진 내용은 국가사회의 것과 불교신앙관계의 것이 대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유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국사기와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이 두 사서는 150여년 가량의 간격을 두고 저술된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사서의 쌍벽이라 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우선 삼국사기가 왕명에 의해 쓰여진 정사였던데 반하여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私撰書이다. 이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체제를 성격이 매우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즉 삼국사기가 기전체인데 반하여 삼국유사는 저자 개인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나타낼 수 있는 극히 자유로운 형식의 사서류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일정한 목적 밑에 기사를 선택하고 이에 대한 편찬자의 해석을 가미시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사로서의 성격상 왕실 중심,통치자 중심의 사료가 주된 편집 대상이 되었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는 아무런 제약없이 관심의 대상이 된 사료들을 수집하여 수록하였다.
둘째는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과를 구별하여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기존사료의 편찬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때로 필요에 따라서 본문의 서술자체를 편찬자의 목적에 맞추어 수정가필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편찬은 전거를 밝혀서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편찬 방식에 따라 일연은 자연히 많은 사료를 수집하지 않으며 안되었다. 이것이 또하나의 특징이다. 이것은 일연이 삼국유사의 저술을 위하여 오랜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여러 사료들을 널리 수집하여 그들 사료 사이에 개재되는 차이점을 가지고 나아가 자기의 고증을 첨가함으로 해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