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8. 3. 23. 02:23
■ 19世 이성림(李成林)
◇시대 : 고려 후기
◇직업 : 문관
◇출생 : 미상
◇졸년 : 1388년(우왕 14) 정월
◇경력 : 감찰집의, 군부판서, 문하시중
◇관련사건 : 홍건적 제2차 침입, 신돈의 수원 유배
◇본관 : 경주(慶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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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본관은 경주(慶州). 밀직(密直) 이수덕(李壽德)의 아들이다. 이암공(怡庵公) 관(琯)의 손자(孫子)이고, 염흥방(廉興邦)의 의붓 아우이며, 원주목사(原州牧使) 서신(徐信)과 동서 간이다.
사위는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낸 성주이씨(星州李氏) 이존성(李存成)과 평양윤(平壤尹)·예문춘추관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를 지낸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상질(韓尙質/韓明澮의 祖父)이다.
[생애 및 활동상황]
공민왕∼우왕 때 감찰집의(監察執義)·대호군(大護軍)·좌상시(左常侍)·군부판서(軍簿判書)·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판삼사(判三司)·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역임한 고위 문신이다.
1363년(공민왕 12) 윤3월 홍건적(紅巾賊, 紅頭賊)의 침입에 따라 복주(福州: 경상북도 안동시)로 피난한 국왕을 호종한 공적을 인정받아 신축호종일등공신(辛丑護從一等功臣)으로 책봉되었다.
1364년 5월 중국 강소(江浙: 강소성과 절강성) 지역에서 원(元)나라에 저항하며 독자적 세력을 구축했던 장사성(張士誠)을 접견하려 고려 측의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371년 7월 신돈(辛旽)이 수원(水原)으로 유배될 때 왕안덕(王安德)과 함께 신돈을 호송하였다.
1373년 10월에는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를 재임하면서 왜구의 침입을 막지 못한 죄로 유배되었다.
이후 1375년(우왕 원년) 7월에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李仁任)에 의해 유배되었다. 1385년 2월우왕이 해주(海州: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에서 사냥할 때 최영(崔瑩)과 함께 호종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한편, 1381년 3월∼1384년 윤10월 개경(開京)의 십자가(十字街) 근처에 이궁(離宮)으로 수창궁(壽昌宮)을 다시 창건할 때 최영 등과 함께 조성도감판사(造成都監判事)로 활동하였다. 우왕 때에는 임견미(林堅味)와 더불어 실록편수(實錄編修)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388년(우왕 14) 정월 사전개혁(私田改革) 문제를 함께 인식하고 있던 우왕과 최영에 의해 전민(田民) 점탈의 표본으로 지목되어 옥에 갇혔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문선(東文選)』
『목은문고(牧隱文藁)』「한문경공묘지명병서(韓文敬公墓誌銘幷序)」
『고려묘지명집성』(김용선, 한림대학교 출판부,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