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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호수와 백암 양대의 추증을 청하는 상언[請贈先祖湖叟柏巖兩世上言]
신해년(1731)
삼가 아룁니다. 충렬忠烈을 포상하는 것은 국가의 좋은 법이고, 선조의 행적을 현양하
는 것은 자손의 지극한 정리입니다.
신臣의 5대조 진사 신臣 세아世雅1)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아들 생원 신 의번宜藩2)을
데리고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켰으니, 아버지는 왜적을 토벌하여 성을 수복한 공이 있고
아들은 국가와 아버지를 위하여 순사殉死한 절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당시 보고가
사실과 달라서 세아는 찰방에 임명되는 데 그치고 의번은 낭서郎署에 추증되는 데 그쳐
서, 남달리 우대하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이는 영남 인사들이 다 같이 탄식하고
애석해하는 바입니다. 이에 주상 전하께서 거둥하는 날에 맞추어 저의 간곡한 심정을
감히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살펴주소서.
1) 정세아(鄭世雅, 1535~1612) :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叟), 본관은 영일이다. 1558년 진사시에 입격
한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으로 참여하였다. 천거되어 황해도 찰방을 지냈다. 시호는 강의(剛
義)이며, 저서로는『호수실기』가 있다.
2) 정의번(鄭宜藩, 1560~1592) : 자는 위보(衛甫), 호는 백암(栢巖). 본관은 영일이다. 아버지 정세아(鄭世雅)
를 따라 경주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1784년 정려가 내려졌으며, 영천의 환고사(環皐祠)에
봉향되었다.
아! 섬 오랑캐가 일으킨 전란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연이은 성벽이 와해되고
팔도가 붕괴되어 당시 군대를 책임지는 장수와 영토를 지키는 신하가 모두 새나 쥐처럼
도망가 숨어서 왜적의 흉악한 창칼을 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아는 바로 이조
좌랑 종소從韶3)의 현손玄孫이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4)의 방손傍孫으로서, 정몽주의
고향에서 생장하여 충의忠義의 가르침을 물려받았습니다.
어가가 서쪽으로 몽진한다는 소식5)을 듣고는 분연히 일어나 아들 의번에게 “주상께서
몽진하였는데, 우리들이 어찌 풀숲에서 살기를 찾아야 하겠느냐? 만약 불행하여 일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비분강개하며 소매를 떨쳐
일어났다. 한 지방의 젊고 뛰어난 선비들이 모두 몸을 일으켜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세아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세아가 눈물을 뿌리며 단상에 올라 하늘을 가리켜
태양에 맹세하고 의기義旗를 한 번 휘두르니, 장사들이 그림자처럼 따랐습니다. 이에
가산을 다 출연하여 병기를 수리하고 군량미를 모아, 더러는 기묘한 계책을 내어 적을
습격하고 더러는 복병을 숨겨서 적을 측면 공격하여 참수와 포획이 갈수록 많아지니,
찌를 듯한 적의 기세가 조금 꺾였습니다.
왜적이 군위軍威에서 봉고어사封庫御史6)라 호칭하며 신녕新寧으로 달려내려 가자, 여러
장수들 중에 알아차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아만이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하고는, 추격하여 박연朴淵에 이르러 잽싸게 공격하여 대파하니, 이로부터 의병의 명성이
더욱 떨쳐졌습니다.
좌병사左兵使 박진朴晉7)도 왜적을 많이 저지하였는데, 세아가 사람을 시켜 낮에는 숨고
3) 정종소(鄭從韶, ?~?) : 자는 가정(可貞), 호는 정헌(靖軒), 본관은 영일이다. 1447년 문과에 급제, 이조
좌랑 영천 군수 성균관 사성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오천금석록(烏川金石錄)』이 있다.
4) 정몽주(鄭夢周, 1337~1392) :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본관은 영일이다.
5) 어가가……소식 : 임지왜란에 선조(宣祖)가 의주로 몽진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6) 봉고어사(封庫御史) : 봉고는 물품의 출납을 못하도록 창고를 봉하여 잠그는 것이니, 곧 그런 일을 하는
어사를 말한다.
청원하고, 또 수비하는 여러 장수들이 내심 왜적 막음을 외면하고 있는 상황을 진술하였
습니다. 김성일이 무릎을 치며 탄식하기를 “충의가 마음속에서 북받친 것이 아니라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당시 왜적이 영천성永川城에 주둔하며 사방으로 나가 노략질하였다. 세아가 족제族弟
대임大任9)과 “성 안은 초가집이 서로 이어있어서, 만약 바람을 타고 불을 놓는다면 영천
을 수복할 수 있다.”라고 모의하자, 사람들이 모두 “옳소.” 하였습니다.
계책이 확정되고 나서 권응수權應銖에게 원군을 청하였습니다. 권응수가 그의 병사를
이끌고 와서, 세아가 드디어 응수 대임 등과 세력을 합쳐서 함께 진격하였습니다. 여러
의병들에게 성 밖에 분산하여 매복하기를 명한 뒤, 세아는 몸소 병사를 이끌고 산에
올라 바람의 방향을 따라 먼지와 모래를 날리니, 왜적이 혼란해도 감히 나오지 못하고
성안에 개미떼처럼 모여 있었습니다. 세아가 죽음을 각오한 병사 수십 인을 보내어
성벽을 넘어 들어가 불을 놓게 하니, 불길은 거세고 바람은 세차서 일시에 불길이 성
전체를 뒤덮었습니다. 타 죽은 자가 거의 절반을 넘겼습니다. 불길과 연기를 무릅쓰고
도망쳐 나오는 자는 성문을 나오는 대로 베어 죽였으며, 그 나머지 물에 빠져 죽은
자도 역시 많아,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간 자가 없었습니다.
버려진 시체가 언덕처럼 쌓여 비린내 나는 피가 냇물처럼 흘렀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10)이 “왜란이 일어난 뒤 10년 동안 영천과 명량鳴梁에서 거둔 승리가 가장
통쾌하다.” 하였으니, 이 전투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로부터 이후로 왜적의 길이 중간에
7) 박진(朴晉, 1560~1597) : 자는 명부(明夫). 본관은 밀양이다.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
어 적을 저지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왜적과 싸운 장수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의 하나이다.
8) 김성일(金誠一, 1538~1593) :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9) 정대임(鄭大任, 1553~1594) :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 본관은 영일이다. 선무원종공신(宣武
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10) 이항복(李恒福, 1556~1618) :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본관은 경주이다
끊겨서, 군위의 왜적은 개령開寧으로 물러나 주둔하고, 안동 예천 의성의 왜적은 상주로
물러나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경상좌도의 여러 고을이 온전하고 사기가 조금이나마
회복된 것은 모두 영천에서 크게 승리한 힘이었습니다.
이해 8월에 좌병사 박진이 여러 고을의 관군을 이끌고 장차 경주를 공격하려 하니,
세아와 대임이 의병 5천인을 거느리고 권응수 병사와 연합하여 함께 진격하였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왜적의 많음을 두려워하여 기꺼이 선봉에 서려는 사람이 없자, 세아가
말에 채찍질하여 선봉장이 되어 깃발을 휘날리고 칼을 휘두르며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
를 독려하니, 왜적의 무리 중에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이 기병奇兵을 내보내어 아군의 뒤를 습격하니, 관군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세아의 휘하 의병 십여 인은 모두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고, 세아 혼자서
포위된 채 왜적과 혈전을 벌였습니다. 의번이 아버지가 위급해진 것을 보고 말을 급히
달려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활을 당겨 적을 향하여 쏘는데, 쏠 때마다
적의 가슴을 꿰뚫으니, 왜적이 갑자기 크게 혼란해져서 뿔뿔이 흩어져 성 안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세아는 바로 병사를 지휘하여 조금 후퇴하였으나, 의번은 다시 빠져 나오
지 못하였습니다.
세아는 더욱 분발하여 눈물을 뿌리며 다시 여러 장수들과 마음을 모아 전략을 짜서
적을 습격하여 섬멸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왜적이 버티지 못할 것을 감안하여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습니다. 이 일이 비록 박진의 진천뢰震天雷의 위력
때문이라고 말하나, 세아 등이 힘껏 싸워 쳐부순 공로가 실로 많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류성룡柳成龍11)의 『징비록懲毖錄』 에 “경주를 수복한 뒤에 응수와 대임 등이
함께 포상의 은전을 입었다.”고 한 글을 살펴보면, 의병이 공을 세운 사실은 또한 실재
입증할 수 있습니다.
11) 류성룡(柳成龍, 1542~1607) :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그가 지은『징비
록』은 임진왜란 동안에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왜적의 예봉이 조금 느슨해져서 어가가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 세아는 자양紫陽의
옛 은거지로 돌아와 담담히 소신을 지키며 그대로 생을 마칠 듯하였는데, 고 상신 이원익
李元翼12)이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아들 수번守藩13)이 존귀해졌기 때문에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지, 그의 전공을 포상한
것은 아닙니다.
아! 영천과 경주 두 고을은 실로 왜적이 다니는 길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고을이
수복된 뒤에 안동 등지의 여러 왜적은 낙동강 오른쪽으로 물러나 주둔하고, 울산 연해의
왜적은 감히 다시 경주로 향하지 못하게 되니, 경상도가 회복되어 안정될 수 있었습니다.
그 공적의 우뚝함과 의열의 숭고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은전이 그에게만 내려지지 않은 것은 또한 이유가
있습니다. 세아는 어려서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받아 오직 가전家傳의 학문으로 자신을
지켰습니다. 섬 오랑캐가 쳐들어오는 날에는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일어나 국가의
위급한 상황에 헌신한 것도 실은 가슴 속의 하나의 ‘의義’ 자가 북받쳐서이지, 예를 들어
저 왜란을 틈타 공을 노려서 영달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전공을 보고할 때에 모든 의로운 전투에서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을 다 자처하지
않아서 마치 애초에 같이 싸우지 않은 자처럼 하였습니다. 때문에 여러 장수 가운데
군君에 봉해진 자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차례대로 관질官秩이 올랐으나 세아는 거기에
들지 않아서 마침내 이름이 묻혀 일컬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진실로 당대 모든 사람들
이 개탄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문목공文穆公 신臣 정구鄭逑14)는 일찍이 김성일의 행장을 지으면서 그 사실을
12) 이원익(李元翼, 1547~1634) :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이다.
13) 정수번(鄭守藩, 1580~1621) : 자는 정보(貞甫), 본관은 영일이다. 1598년 무과에 급제, 부호군(副護
軍)을 지내면서 신무기를 제조하고 신병법을 만들어 보급한 공로로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제수되었다.
14) 정구(鄭逑, 1543~1620) :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이다
소천(小川)에서 전사하였다. 사후 참의에 추증되었다
또 경주로 옮겨가서 토벌할 때도 앞 다투어 달려간 정의번 등 17인이 같은 날 전사하였으
니, 유생의 충렬을 높일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고故 관찰사觀察使 신臣 최현崔晛은 체찰사體察使 이원익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천에서
승리하고 나서 낙동강 왼쪽에 있던 여러 왜적이 차례로 후퇴하여 한 지역이 회복되었습
니다. 이후 복병을 배치하여 왜적을 토벌하는 작전이 끊임없이 나왔으니, 이는 모두
영천에서 맨 먼저 그 작전을 펼쳐서입니다. 게다가 영천 고을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맨 먼저 창의를 모의한 자가 모두 영천 경내의 선비들이었고 보면, 온 군에 오백 의사에
들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다른 공적을 포상하는 은전은 두세 명의 의병장과
의사에게만 더해져서 공적에 대한 평가가 공론을 따르지 못하고, 읍의 호칭이 주州나
부府로 승격되지도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공론이 상당히 억울해하며, 그 당시 순찰사께
서 조정에 올린 보고가 실상을 놓친 것을 매우 애석해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구와 최현은 다 같이 높은 덕을 지닌 큰 유학자로서 영남에 살며 당시의 일을 목격하
였습니다. 그들의 말이 이와 같고 보면, 천고의 단안斷案이 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의번이 목숨을 바쳐 절의를 다한 경우는 더욱 슬프고도 남다른 점이 있습니다. 아버지
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앞뒤로 왜적을 토벌한 공로도 매우 많았습니다. 경주 전투에서
아버지가 적의 포위망에 빠진 것을 보고는 말을 달려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적을 쏘면
반드시 다 맞히니, 왜적이 또한 크게 혼란해지며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의번은 아버지와
서로 만나지 못하여 몸에 수십 군데의 창상을 입은 채 좌충우돌하며 아버지를 찾느라,
적진을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것이 세 차례였습니다.
종 억수億壽를 돌아보며 “아버지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니, 나도 아버지를 따라 함께
죽을 것이다. 너는 나를 두고 가거라.”라고 하니, 억수가 울면서 떠나지 않고 “종과 주인
의 의리가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의리와 어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며, 마침내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가 더욱 비분강개하며 적을 토벌하였습니다. 이윽고 화살이
다하고 활이 부러져 종과 주인이 다 같이 적에게 잡혔으나 굽히지 않고 격분하여 욕하다
가 죽었으니, 이는 군중을 따라 전쟁터로 나갔다가 갑자기 창칼에 맞아 죽은 자와 비교할
일이 아닙니다.
고故 승지承旨 신臣 신지제申之悌가 이른바 “충성이 크고 효성이 도타웠다.”고 말한 것에
서 그 당시의 공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초 행재소에서 김성일의 장계狀啓 때문에
관례에 따른 증직만 추서하고 말았습니다. 그 외의 절의를 지키다 죽은 신하들은 전란이
평정된 뒤에 다함께 특별한 예우를 입었으니, 예를 들어 류종개柳宗介15)는 같은 시기에
관례대로 추증된 사람으로서 높은 관질官秩이 더 추증되고 정려旌閭도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의번의 효열孝烈이 찬란한데도 아직까지 넉넉한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이는
또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지난 을유년(1705)에 영천 선비들이 발을 싸매고 대궐 앞까지 올라와서 사당을 세워
제향祭享할 것을 호소하니, 숙종대왕께서 특명으로 해조該曹에 품처稟處하라고 하였습니
다. 해조에서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공론을 수렴하여 계문啓聞하게 하니, 도신이 경상도
안의 공론을 수렴하고 명현들의 유고를 조사 참고하여 상세히 계문하였습니다. 그러나
해조에서 즉시 복계覆啓하지 않아서 공론이 지금까지도 계속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바로 사림의 일이지, 참으로 자손들이 참여하여 논의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작위의 추증과 시호의 추서 및 정려문을 세우는 경우는 자손들이 우러러
호소함으로 인하여 남다른 은전을 받음도 또한 많았기에 감히 옛 사적을 대략 기술하여
억울한 심정을 우러러 토로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굽어 살펴주십시오. 세아가 창의하여 영천성을 수복한
공로를 생각하시고, 의번이 나라에 순국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렬忠烈을
가엾게 여겨주십시오. 그들에게 증직을 내리거나 정려문을 세워주셔서, 세도世道를 격려
하고 인심을 정화하여 주십시오.
15) 류종개(柳宗介, 1558~1592) : 자는 계유(季裕),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홀로 향병
수백 명을 모아 고을을 보전하였고, 함경도 지역에서 태백산맥을 타고 퇴각하던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소천(小川)에서 전사하였다. 사후 참의에 추증되었다
伏以奬褒忠烈。國家之令典。顯揚先蹟。子孫之至情。臣之五代祖進士臣世雅當壬辰之亂。率其子生員臣宜藩。首倡義旅。父有討賊復城之功。子有殉國死親之節。而只緣其時登聞之爽實。世雅止於督郵之除。宜藩止於郞署之贈。未蒙別㨾優異之典。此南土人士之所共惜者也。玆因動駕之日。敢籲私悃。伏願聖明垂察焉。嗚呼。島夷之變。尙忍言哉。列壁瓦解。八路橫潰。一時握兵之將。守土之臣。擧皆鳥鼠竄伏。莫敢有抗其兇鋒者。而世雅卽吏曹佐郞從韶之玄孫。而文忠公鄭夢周之旁裔也。生長夢周之鄕。世襲忠義之訓。及聞大駕西廵。奮然語其子宜藩曰。主上蒙塵。吾輩豈宜草間求活耶。若不幸而事不濟則有死而已。遂慷慨投袂而起。一鄕年少才俊之士。皆挺身響應。推世雅爲義兵將。世雅雪涕登壇。指天誓日。義旗一揮。壯士景從。於是傾盡家財。修器械募兵食。或出奇而抄擊。或設伏而旁攻。斬獲漸多。充斥少挫。賊自軍威稱封庫御史。馳下新寧。諸將莫有悟者。世雅曰此詐也。追至朴淵。急擊大破之。自是兵聲益振。左兵使朴晉頗沮遏之。世雅使人晝伏夜行。奉書于招諭使文忠公臣金誠一。願奉節制。且陳諸守將意忌沮抑之狀。誠一擊節歎曰。非忠義內激。能若是乎。時賊屯據永川城。四出剽掠。世雅與族弟大任謀曰。城中茅屋相接。若乘風縱火。則永川可復也。衆皆曰諾。計策旣定。請援于權應銖。應銖率其兵而至。世雅遂與應銖,大任等合勢並進。令諸義士分伏城外。世雅躳率兵登山。順風勢飛塵沙。賊迷亂不敢出。蟻聚內埤。世雅遣敢死者數十人。踰城縱火。火烈風迅。一時蔽城。賊兵爛死者殆過半。冒焰烟而逃者。隨出隨斬。其餘溺水死者亦多。無一人生還。伏屍丘積。腥血川流。故相臣李恒福所謂倭變後十年。惟永川,鳴梁之捷。最爲快壯者。是役之謂也。自是以後。賊路中斷。軍威之賊。退屯于開寧。安東醴泉義城之賊。退屯于尙州。嶺左列邑之得全。氣勢之稍蘇者。皆永川大捷之力也。是年八月。左兵使朴晉率諸邑官軍。將攻慶州。世雅與大任領兵五千人。合應銖兵並赴。諸將畏賊盛。莫肯居前。世雅策馬爲先鋒將。揮旗奮劒。殊死督戰。賊衆死者過半。俄而賊出奇兵襲後。官軍大潰。世雅幕下義士十餘人。皆力戰死之。世雅獨在圍中。與賊血戰。宜藩見其父危急。躍馬揮劒而進。張弦射賊。發必洞胷。賊忽大亂橫潰。走入城中。世雅乃麾兵少退。而宜藩則不復出矣。世雅益發憤揮涕。更與諸將協心規畫。以爲掩擊殲滅之計。賊度不能支。遂棄城遁走於西生浦。此雖曰朴晉震天雷之力。而世雅等力戰摧破之功。實爲居多。以故相臣柳成龍懲毖錄所謂收復慶州後應銖,大任等幷蒙褒典者觀之。則義兵立功之實。亦可驗矣。逮賊鋒稍緩。車駕還都。世雅歸臥紫陽舊隱。淡然自守。若將終身。故相臣李元翼以遺逸擧。爲黃山察訪。歿後以其子守藩貴。贈兵曹參判。非賞其戰勞也。嗚呼。永慶二邑。實爲賊路咽喉。故兩邑旣復之後。安東諸賊。退屯江右。蔚山沿海之賊。不敢更向慶州。一路得以蘇安。其功績之超卓。義烈之磊落。爲如何哉。而旌美之典。獨不及焉者。葢亦有由焉。世雅早承家庭之訓。惟以詩禮自持。當島夷搶攘之日。奮不顧身。以徇國家之急者。實由於胷中一義字有以激之。而若夫乘亂幸功。以爲榮進計則非其志也。及上功之時。凡義兵所斬獲。皆不以自居。而有若初不同事者然。故諸將或有封君者。餘皆次第陞秩。而世雅則無與焉。畢竟名堙沒而不稱。此固當世之所共慨然者也。是以故文穆公臣鄭逑嘗著金誠一行狀。而略述其事曰。永陽之捷。專由士子倡義先登。及移討東都。爭先馳赴。鄭宜藩等十七人。同日被害。儒生忠烈可尙。故監司臣崔晛與體察使李元翼書曰。永邑旣捷之後。江左諸賊。次第退遁。一路獲蘇。設伏討賊者。比比不絶。是皆永川爲之先倡也。况永邑起事之時。首謀倡義者。皆是一境士子。則環一郡。無非五百義士也。然而褒異之典。只加乎二三將士。而課績不循乎公論。邑號不升於州府。以此公論頗鬱。深惜其時廵察轉聞之失實也。夫鄭逑,崔晛。俱以碩德鴻儒。居在嶺南。目擊當時之事而其言如此。則此足爲千古斷案矣。至於宜藩之捐軀效節。則尤有悲切卓異者。隨父起義。前後討賊之勞甚多。而慶州之戰。見其父陷圍中。躍馬潰圍。射賊必中。賊亦大亂崩挫。而宜藩與父相失。身被數十創。橫突遍求。旣出復入者三矣。顧其奴億壽曰。父已亡矣。吾將隨父俱死。汝盍去之。億壽泣而不去曰。奴主之分。與君臣父子奚間焉。遂策馬而前。益慷慨討賊。旣而矢盡弓折。奴主俱爲賊所獲。奮罵不屈而死。此非隨衆赴戰。倉卒罹鋒鏑者比。故承旨臣申之悌所謂忠之大孝之篤者。可見其一時公論。而當初行朝因金誠一狀啓。只循例贈職而止。其他節死之臣。亂定後俱蒙異數。如柳宗介以同時例贈之人。加贈崇秩。樹以棹楔。而以宜藩孝烈之彪炳。尙未蒙優異之典。此又輿情之所共傷憐者也。頃在乙酉年間。本郡章甫裹足叫閽。請建祠以享之。肅宗大王特令該曹稟處。該曹請令道臣採公論啓聞。道臣採取道內公論。搜考名賢遺稿。詳細啓聞。而該曹未卽覆啓。公論鬱抑。至今未已。而此乃士林間事。固非子孫之所可與論者矣。至於爵諡之贈。門閭之旌。則因子孫仰籲而特蒙異典者。亦多有之。玆敢略擧故蹟。仰㬥慜鬱之情。伏乞聖明俯賜澄省。念世雅倡義復城之功。憐宜藩殉國死親之烈。或加其贈典。或表其門閭。以礪世道。以淑人心事云云。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 樂民(장달수) 영일정씨 영천화수회 카페 정정용 게사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