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인 흐름에 있어서는 미나모토노님의 의견에 공감이 가지만 몇가지 걸리는 것이 있어서 반론을 합니다.
첫째. 평양 일대에 낙랑군 봉니와 점제현 비가 발견되는 점,,,이것에 관해서 지금 제가 자세히 기억은 나질 않지만 낙랑군 봉니와 점제현 비는 이미 북한학자와 남한 재야학계에서 이미 터무니없는 일제의 조작이다,,라는 가설을 편 바가 있습니다. 봉니건은 지금 생각이 거의 안나서 설명을 못하겠습니다만 점제현비의 경우는 그 석재가 평양 일원에서는 절대로 나지 않는 석재라고 하더군요. 그 석재는 바로 요녕성 일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죠?
둘째. 현 낙랑군 치소로 비정되는 평양은 최소한 전한시대에는 낙랑군이 될 수가 없습니다.
96년 요녕성 금서시에서 발견된 임둔태수장 봉니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임둔군은 기원전 108년에 낙랑군,진번군과 함께 설치된 이후 기원전 86년에 철폐되는 군으로 이 임둔군의 태수장 봉니가 요서의 금서시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초기 한사군의 위치가 요서 일대에 있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관한 논문으로 복기대 선생이 쓴 논문이 있으니 참고해보십시오. 조만간 카페에 자료를 올리겠습니다.
이 증거 이 외에도 제가 듣기로는 현 평양 일원에는 전한시대의 유물은 나오지 않고 후한시대의 유물만이 나온다고 하던데요? 전한 때 설치했고 전한시기에 가장 번성했던 낙랑군이 그때는 유물이 나오지 않는다? 거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것은 고구려 대무신왕이 정복한 낙랑국을 후한 광무제가 낙랑국을 복국 시킨다는 명분하에 현 평양 일원으로 침공하여 평양 일원에 가 군현을 설치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점을 드셨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약간의 할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낙랑국 유무에 대한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는 못됩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볼 수 있는 증거임에는 분명합니다.
단군과 고조선이라는 책에 실려있던 자료인데 저번 정모에서 김용만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것을 제가 정모 끝난 뒤에 시간이 좀 남아서 본 겁니다. 거기서 본 것인데(저희 학교는 워낙 꾸진 학교라 이 책이 없었습니다. ㅠㅠ 나중에 사서라도 다시 확인을 해야 할거 같네요) 북한 고고학계에서 확인한 바로 낙랑 벽돌에서 발견된 문자가 있는데 이 문자는 한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갑골문이라고도 볼수 없는 이상한 형식의 문자였습니다. 발견된 문자에 대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을 책에서는 하지 않고 다만 확인 불명의 문자에 대한 자료를 몇가지 더 언급하는 수준이라 이것으로 확신은 할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후한 시대에 만들어진 평양 일대의 낙랑군은 설치되기 이전에 상당 수준의 문화를 보유한 국가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증빙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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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논리에 오류가 생기고 각 사서마다 안맞는 이유는 사람들이 대개는 1개 낙랑군 1개 낙랑국이라는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사군은 중국와조가 바뀌고 정책이 바뀌면서 이리저리 폐지되고 옮겨지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수백년간 낙랑이나 현토 따위들이 꼭 그자리에만 있었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유가 아닙니다. 안동도호부가 이리저리 옮겨다녔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 되시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저는 1장소 1낙랑 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는 뜻에서 드린 말씀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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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낙랑군 봉니가 발견된다는 점..!!
물론 평양에는 낙랑군의 봉니가 발견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낙랑군>이라고 쓰여진 봉니가 아니라 낙랑군의 속현의 봉니들이 평양에서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님 논리대로라면 요녕의 낙랑군의 20개가 넘는 속현들이 평양에 있는 낙랑국에 뭐하러 공문서를 보내죠ㅡ.ㅡ??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지역에서 대부분의 낙랑군의 속현의 이름이 나오는 봉니가 발견되는 것은 하위 행정단위가 상급 행정단위로 공문서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각 동사무소는 해당 구청에 공문을 보내고 많은 서울의 구청들은 서울시청에 공문서를 보냅니다. 마찬가지로 낙랑군의 속현들은 낙랑군청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에 공문을 보내었다..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거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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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평양의 중국식 유물은 교류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보이는 중국식 유적 유물이 교류에 의한 것이라면 본래 낙랑국의 유적 유물은 어디있는 것입니까..왜 중국식만 보이고 낙랑국식은 없는 것일까.......
더군다나 성격상 가장 변하지 않는 묘제까지도 마구 수입해서 평양에다 중국식 무덤을 조성했던 것일까요??? 부장품도 중국식 일체로..
특히 중국식 묘제가 보인다는 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중국계 집단이 이주해왔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은 기자족이 이동해 오면서 그랬던 것이다?? 준왕이 이동해 와서 낙랑국을 세운 것이라고 이해하시는 듯 하지만 사료에는 그가 낙랑국왕이 아닌 엄연히 한왕이라 칭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낙랑국왕의 이름은 최리..기씨인지 여부는 거의 불확실하다고 봐야죠. 아무리 낙랑이라는 이름이 보통명사였다 하더라도 평양이 韓이 되지는 않죠.
이주해와서 그러한 유물을 남긴 집단이라면 이동해 오기 전에 살던 지역에도 그러한 문화유적을 남겨야만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거니와 봉니는 모두 평양지역을 향해서 배달된 낙랑군이 속현들의 이름을 나타냅니다.
즉.....고고학적으로는 거의 100% 평양이 낙랑군청 소재지인 셈입니다. 그리고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문헌학적인 비교분석은 ..낙랑이 오로지 1개..혹은 국, 군의 구별을 두어 2개뿐이라고 믿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연구되어야 합니다. 낙랑이 존재한 오랜 기간동안 중국의 왕조가 여러번 바뀌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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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제 공부에 의하여 고조선이 3세기까지 존재했다는
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결론은 단군조선의 맥은 이미 해모수의 부여가 이었고,
요서 지역의 번조선이 망해서 그 곳에 한사군이 설치 되었으며,
(여러 사서들이 낙랑군이 요서에 있다고 한 것은 아시죠? 갈석산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위만에게 왕권을 빼앗긴 준왕이 한반도 평양에 내려가
마한의 일부를 할애 받아서 낙랑국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낙랑국은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멸망하죠.
어떤 분은 낙랑군과 이 낙랑국을 같은 것이라 말하시는데,
사실 낙랑이라는 것이 고대에는 보통명사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 곳에서 낙랑이라는 지명이 보이며,
(제 생각이지만 "나라"를 한자의 음을 빌려 낙랑이라 한 것 같습니다.)
결정적으로, 당시 낙랑군에는 본토인 왕조가 반란을 일으키어 태수 유헌을 죽이고
자칭 '대장군낙랑태수'라 하면서 일시 군내를 호령한 일은 있었지만,
낙랑왕 최리란 사람은 한적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평양에 낙랑군의 봉니가 발견 된다는 점입니다.
봉니는 그 성격상 도착지에서 발견되는 것이 확실합니다.
결국 요서의 낙랑군과 평양의 낙랑국 사이에 어떤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류에 의해 현재 평양의 낙랑국 유물이 중국식이 되어있고,
중국의 화폐가 나오는 것이겠죠.
또 이런 생각도 있습니다.
번조선의 왕이 기자의 후손이 된 후부터 중국식 무덤, 생활도구를 사용했는데,
평양에 이동하면서 그런 풍습을 가져간 것이죠.
암튼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럼...
P.S. 삼국지와 후한서가 한반도 남부의 상황을 적었지만,
답사를 통해 적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소문에 소문, 다녀온 사신의 말을 빌어서
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유는 그후에 발행하는 여러 지도에 한반도가 있어야 할 곳에
세개의 섬(방장, 봉래, 영주)이 나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이유로 중세 이전에 한반도 지리와 상황에 대해
거의 지식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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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와 후한서를 비교해 보면.. 딱 나오는데...
삼국지에 나오는 조선의 위치가 후한서에 나오는 낙랑의 위치하고 똑같습니다.
예의 남쪽에 조선이 있다고 삼국지에 나오는데 후한서엔 예의 남쪽에 낙랑이 있다는 식으로...
아마 삼국지를 보고 3세기 까지 조선이 존재했다 보시는거 같은데요.
삼국지부터 한반도 남부상황이 나올겁니다.(제 판단으론)
그러니깐, 한반도 중남부의 상황이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이 삼국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종욱 교수님 주장대로 삼국지에 나오는 수십개의 소국들은 낙랑군과 교류하던 소국들이고 당시 사로국이나 백제들은 소국들을 다스리면서도 소국들에게 독자적으로 교류할수 있던권한을 줬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간에... 후한서는 평양지방의 낙랑군을 그대로 낙랑이라 적었고 삼국지의 진수는 이미 낙랑은 조선의 유민에게 넘어간 판국에 낙랑이라 적기에도 뭐하니 그냥 조선이라 적은게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위만조선이 중국정부의 제후국정도다..? 따라서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사군 설치라는 사건은 우리역사가 될 수 없다...
흐음..위만조선이 왜 중국의 제후국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그리고 조선이 3세기까지 존재했었다는 근거가...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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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학기에 과제물로 낸 것입니다...
길지만 주제를 보시고 부분부분을 골라 보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그럼...
고조선과 국가형성
서론 : * . 인류의 사회 형성과 발전 과정
본론 : 1 . 고조선의 건국시기와 당시 세계의 상황
2 . 여러 문헌에 나타난 조선
3 . 단군 설화의 해석
4 . 우리민족의 혈통과 북방유목민족과의 관계
5 . 고조선인들의 생활과 풍습
6 . 고조선의 붕괴
결론 : * . 민족의 역사와 뿌리를 아는 것의 중요성
인류의 사회 형성과, 발전 과정
인류(人類)는 진화 과정에 있어 원시단계에서부터 군집생활을 해왔으며, 그 무리는 혈연관계로 일정한 종족(種族)적 단위를 이룬다. 이것을 씨족(氏族)이라 하며, 이는 다시 부족(部族) 또는 민족(民族)으로 발전한다. 인류는 이러한 생활을 함으로써 문화를 발전시켰다. 도구를 만들고 수렵(狩獵)이나 어로(漁撈)에 의해 먹을거리와 생활용품을 얻으며, 신앙과 기타 사유(思惟)에 의한 정신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오로지 사회적인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생활이 오랫동안 혈연적인 종족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므로 일정한 종족은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인류의 군집생활은 무리사회(Band Society)에서 시작하여, 부족사회(Tribe Society)를 지나, 부족집합사회(Chiefdom Society)로 발전했다. 무리사회 기간 동안은 인류 사회의 초기 단계로서 아직 정착생활을 하지 못하고 소수의 혈연 집단이 무리를 지어 이동생활을 하였다. 이때 인류의 경제생활은 수렵, 어로, 채집에 의존하였으며 도구는 돌에 깨뜨려 만든 타제석기와 나무를 원시적으로 가공한 목기, 동물의 뼈나 뿔을 깨뜨리거나 그대로 이용한 골각기(骨角器)를 사용하였다. 이 시기는 이동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지역적인 문화의 특수성이 분명하지 않다.
부족 사회는 홍적세(빙하기)가 끝나는, 약 1만년 전에 출현했다. 그 시기에는 기후가 따뜻해짐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고, 자연환경이 변하여 초원이 숲으로 변하고, 큰 동물이 사라지고, 작고 날랜 동물이 출현하여 사냥하기에 어려움을 겪어 식료(食料)의 원천에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인구의 증가와 식료의 위기는 인류에게 새로운 경제생활을 개척하도록 강요하였다. 그 결과 농경과 목축이 출현하였다. 농경과 목축으로 인류는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혈연집단인 부족이 부락을 형성하여 부족사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부족사회의 특징은 개개의 부족(부락)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독립된 단위였고, 그 구성원이 평등하였으며, 아직 사유재산제도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인류는 돌을 연마하여 만든 마제석기(磨製石器), 돌을 쪼아서 만든 타제석기(打製石器) 및 흙으로 만들어 구운 질그릇을 사용하였다.
부족집합사회는 약 5500년 전 , 후기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출현했다. 이 사회 단계에서는 부족 내의 구성원 사이 및 연맹부족들 사이에 경제적인 빈부의 차이와 사회적 신분의 차이 등 계층분화가 일어났다. 연맹부족들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한 부족이 최고 지배부족이 되었으며, 그 부족의 족장이 그 사회를 통괄하는 추장이 되었다. 이 사회에서는 점을 쳐서 신의 뜻을 파악하는 종교적 권위자가 출현하였는데 그는 추장과 결합하여 추장의 정치 권력을 강화하는 보조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전쟁이 출현하고, 조직적인 장거리 교역이 행해지며, 기술의 전문화에 따른 직업의 분화가 일어났다. 부족집합사회는 인류사회에 계층분화가 일어난 시기라는 점에서 이전 단계의 사회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며, 사회 발전상의 분기점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사회 다음의 사회는 국가 단계의 사회가 되는데 여러 개의 부족집합사회가 또다시 연맹체를 형성하여 국가가 성립되므로 개개의 부족집합사회는 각 지역의 정치 단위로서 제후국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고조선 역시 부족집합사회가 모여 세운 국가단계의 사회였다.
고조선의 건국시기와 당시 세계의 상황
고조선이 B.C.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기록은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이 연대는 고조선 당시의 기록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고조선이 붕괴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의 기록에 나타난 것이므로,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은 편의상의 연대일 뿐이다. 이것이 편의상의 연대라는 말은 믿을 수가 없으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가 서기전 2333년인지 또는 그보다 몇 년 앞이나 후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대해서 언급한 가장 오랜 문헌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먼저 삼국유사의 고조선 조를 보면,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阿斯達 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일컬으니 당고(唐高(堯))와 동일한 시기라고 하였다.
고기(古記)에, .....,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는데 당고(唐高 (堯))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 선이라 일컬었다고 말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저자인 일연(一然)은 위의 내용 가운데 당고(요)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 이라는 기록에 대하여 "당고(요)의 즉위 원년(元年)은 무진(戊辰)인즉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庚寅)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 라고 주석을 달아 놓고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대해서, "제고(帝高(堯))와 같은 해인 무진년(戊辰年)에 나라를 세웠다." 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기록된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중국의 요와 동일한 시기, 요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 또는 정사년, 요와 같은 해인 무진년 등으로 그 내용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중국의 요시대에 해당한다고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요는 중국 전설시대의 오제(五帝)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 자신이 전설적 인물로서 실존했었는지 의문시되기 때문에 그의 연대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고고학이 서구로부터 수입되기 전 한국이나 중국의 학자들은 선사시대의 역사를 신화나 전설에 의존하여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요의 연대도 그들에게는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오늘날 요의 실체나 그 연대가 의문스럽다고 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기록한 다른 연대까지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의 저자인 일연은 불교 승려였고, 제왕운기의 저자인 이승휴는 유학자(儒學者)였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학문 경향을 지녔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요시대로 기술하고 있다는 것은 고대에 그연대가 상당히 널리 인식되어 있었을 것임을 시사하여 준다. 그리고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말하면서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 책들은 현존하지 않지만 위서는 중국의 역사책이고, 고기는 한국의 역사책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국과 한국의 고대 역사책에 동일하게 고조선의 건국 연대가 요(堯)시대로 기록되어 있었다면 그 연대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2333년을 정확한 연대라고 말할 수는 없고 서기전 2400-2300년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시기는 중국은 요(堯)임금이 다스리던 시절이었고, 하(夏)나라가 건국되기 직전이었다. 인도에서는 모헨조다로를 중심으로 한 인더스문명이 꽃피우고 있었고, 이집트 역시 나일강을 중심으로 하는 이집트 문명이 번성하고 있었다. 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그 지역 북쪽에 살던 아카드인들이 주변 국가를 정복하고 통일왕국을 세웠고, 이로 인해 이곳에 살던 슈메르인들은 아카드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에는 에게문명이 청동기를 바탕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여러 문헌에 나타난 조선
중국문헌에 나타난 가장 이른 시기의 조선은 서주(西周) 초기에 기자(箕子)가 망명하였다는 기록이다. 흔히 중국문헌 가운데 가장 먼저 조선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관자(管子)라고 소개되고 있다. 관자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보다 이른 시기에 편찬된 중국문헌에서는 조선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관자에서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패자였던 환공(桓公)과 관중(管仲)의 대화내용 가운데 조선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 조선은 춘추시대의 조선이다.
그런데 사기(史記)와 상서대전(尙書大傳)에는 기자와 관계를 가진 조선에 대한 언급이 있다. 사기와 상서대전은 서한시대(西漢時代)에 편찬되었으므로 관자보다는 편찬연대가 늦다. 그러나 기자는 서기전 12세기경 상(商)과 서주(西周) 교체기의 인물로서 환공이나 관자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따라서 기자와 관계를 가지고 나타난 사기와 상서대전에 나타난 조선보다 그 연대가 훨씬 앞서는 것이다. 사기와 상서대전의 기록을 보면 사기에,
이에 (서주의) 무왕(武王)은 바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는 아 니었다.
라고 하였고, 상서대전에는
(서주의) 무왕은 은(殷)을 이긴 후에 공자(公子) 녹부(祿父)로 하여금 (은 을) 계승하게 하고 기자를 풀어 주었다. 기자는 주에 의해서 풀려난 (부 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도망하였다. 무왕이 그 소식을 듣고 그 를 조선에 봉하였다. 기자는 이미 서주로부터 봉함을 받았는지라 신하로 서의 예가 없을 수 없어서 (무왕) 13년에 내조(來朝)하였는데...
라고 사기보다 자세히 기자가 조선에 가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는 것은 무왕이 기자의 망명을 서주에 대한 배반으로 다루지 않고 조선에 거주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었다는 중국식 표현이다.
중국 문헌에 기록된 기자의 조선망명 내용은 한국 사학계에 두 가지 다른 반응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고려말부터 조선시대를 통관한 견해로서, 기자가 조선에 와서 고조선의 통치자였던 단군(檀君)들의 뒤를 이어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중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모화(慕華), 사대의식(事大意識)에서 나온 것이었다. 기자 같은 어진 인물이 고조선의 통치자가 되었다면 한민족도 문화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중국문헌의 기록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것으로 되어 있을 뿐 고조선의 통치자가 되었다고는 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대일(對日) 항전시대 이후 주류를 이루었던 견해로서 기자가 조선으로 이주했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꾸며낸 거짓이야기에 불과할 것으로 본 것이다. 이 견해는 일본과 한국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다. 일본 학자들은 고대에 한국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통하여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그들의 조작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기자의 조선망명설이나 고조선통치설을 부인했던 것이다. 한국 학자들은 기자가 아무리 어진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중국의 망명객이 한민족을 통치했다는 것은 민족 자존심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일본 학자들도 부인한 것이므로 귿이 인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역사는 사료에 의하여 복원되는 것이므로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하였다는 사기나 상서대전 등의 기록을 부인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당시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정식 국가명인 조선이라 하지 않고, 주로 동이(東夷)라는 동쪽 오랑캐를 총칭하는 말로 표현했다. 또 조선이란 말은 밝은 땅, 혹은 넓은 땅이라는 뜻의 지명으로 광범위하게 쓰였다. 이런 여러 이유로 기자가 우리 민족의 국가인 고조선에 망명해서 통치자가 되었다는 견해 역시 옳은 것이 아니다. 결국 지금까지의 결론을 요약하면,
고대 중국인들은 지금의 난하( 河) 동부 지역의 일정한 지역을 조선이라 고 불렀는데 서기전 12세기경에 기자가 그 일족과 함께 그 지역으로 망명 하였으며 서기전 108년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자 그곳은 낙랑군(樂 浪郡)의 조선현(朝鮮縣)이 되었던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중국문헌의 가장 정확한 해석이라고 본다.
또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열전(東夷列傳) 예전(濊傳)에,
옛날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는데, ..... 그 후 40여(餘) 세(世)에 조 선후 준(準)에 이르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한(漢) 초에 크게 어지러 우니 연(燕), 제(齊), 조(趙)의 사람들로서 피난을 간 사람들이 수만 명이 되었는데,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 어 나라를 전하기를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렀다.
고 하였고, 삼국지(三國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는,
옛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갔는데 8조의 가르침을 만들어 그들을 가르치니 문을 닫지 않아도 백성들은 도적질하지 않았다. 그 후 40여 세에 조선후 (朝鮮侯) 준은 외람되이 왕이라 칭하였다. 진승(陳勝) 등이 일어나 천하가 진(秦)을 반대하니 연, 제, 조의 백성들로서 조선으로 피난을 간 사람이 수 만 명이나 되었다. 연인 위만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오랑케 옷을 입고 와 서 그곳의 왕이 되었다.
고 하였으며, 위략(魏略)에는,
옛날에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퇴한 것을 보고, 연이 스스로 왕호를 사용하면서 동쪽의 땅을 침략하고자 하자 조선후 또한 스스로 왕 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오히려 연을 공격함으로써 주왕실(周王室)을 받들고자 하였다. ..... 진이 천하를 병합함에 이르러 몽염(蒙恬)을 시켜 장 성을 쌓았는데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왕 부(否)가 섰는데, 진 이 쳐들어올 것을 두려워하여 진에 복속한 척하면서 조회(朝會)는 수긍하 지 않았다. 부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준이 섰다.
고 되어 있다. 위 기록들은 준이 기자의 후손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한국사 교과서 등에 부와 준을 고조선 왕으로 서술하여 그들이 마치 단군왕검의 후손인 것처럼 인식되도록 한 것은 잘못이다.
위만의 건국 과정을 보면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서한의) 연왕(燕王) 노관(盧 )이 (서한에) 반항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 자 (위)만도 망명하였는데,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머리를 틀어 올리고 오랑 캐 옷을 입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국경의) 요새를 빠져 나와 패수(浿水)를 건넜다. 진(秦)제국의 옛 공지(空地) 상, 하장(障)에 거주하면서 처음에는 겨우 변방의 수비를 맡아 진번(眞番)과 조선에 속해 있었으나 오랑캐 및 연, 제 망명자들이 그를 왕으로 삼았다.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
고 하였고, 삼국지(三國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碑東夷專) 한전(韓專)에는,
(조선)후 준이 외람되이 왕이라 칭하더니 연의 망명자인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그의 좌우 관인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韓) 땅 에 거주 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하였다. 그 후손은 끊기어 없 어 졌으나 지금도 한사람 가운데는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들이 있다.
고 하였으며, 위략(魏略)에는 더 구체적으로,
노관이 (서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에 들어감에 이르러 연사람 위만도 망 명을 했는데 오랑캐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로 나아가 항 복을 하고 준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살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해 주면 중국 망명인들을 모아 조선의 울타리가 되겠다고 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벼슬과 토지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에 봉(封)하여 서쪽 변 경을 수비하도록 명하였다. 위만은 망명인들을 유치하여 무리를 만들었는 데 무리가 점차 많아지자 곧 사람을 보내어 준에게 거짓으로 보고하기를 한(漢)나라 병사들이 열 개의 길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들어가 궁궐을 지키 겠다고 말하고는 마침내 거꾸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만을 맞아 싸웠으 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들은 위만이 기자의 후손인 준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기자 일족은 서주로부터 망명하여 난하 동부유역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후에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이 되었다. 위만조선은 기자의 후손인 준의 정권을 빼앗아 건국되었고 한사군은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그 지역에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위만조선의 건국지는 당연히 난하하류 동부유역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만조선의 건국지는 후에 낙랑군 조선현이 된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 조선이 우리의 고조선과는 다르다는 근거는 바로 위만의 옷에 있다. 이 기록을 남긴 인물은 위만의 옷을 오랑캐 옷이라 강조하며 중국에 속한 나라(제후국)에 이민족이 침입했고, 정권까지 찬탈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후에 한무제가 조선을 치게 된 명분은 오랑캐의 반란 평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자조선부터 위만조선은 우리의 고조선과는 별개의 중국의 한 지방이었을 것이다.
이제 한국 문헌인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를 보면, 한(韓), 부여(夫餘), 비류(沸流), 고구려(高句麗), 북옥저(北沃沮), 남옥저(南沃沮), 예(濊), 신라(新羅) 등 여러 국가들이 단군으로부터 이어졌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전 시대에 이 국가들은 고조선에 속해 있다가, 고조선 말기나 붕괴된 후 각각 독립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 국가들이 이전에 고조선에 속해 있지 않았고 이전부터 독립국들이었다면 이들은 단군의 후손이었다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기록은 고조선의 세력권이 만주와 요동에 넓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문헌들의 기록들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고조선은 만주와 한반도의 넓은 세력권을 가지고 존속하고 있었는데, 북경 근처의 난하 유역에도 조선이라고 불린 지역이 있었다. 그곳은 기자 일족이 망명하여 거주했었고 위만도 그곳에서 기존 세력을 물리치고 건국했었다. 그곳은 후에 한무제의 평정 후에 한사군 낙랑군의 조선현이 되었다.
단군 설화의 해석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오는 단군설화는 우리 민족의 기원을 전하는 중요한 문헌 자료이다. 이 기록은 분명히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경위를 거쳐 조선이라는 나라를 처음으로 창건하였다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귀중한 자료가 종래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이유 없이 무시되어 왔다. 고조선 연구에 있어서 이웃 나라의 고문헌들이 전하는 구구한 단편적 자료들이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우리나라 역사의 기원이나 전통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단군설화에는 비록 간단하지만 고조선의 종족 문제, 지역 문제, 사회제도 문제, 국가 기원을 비롯한 각종 연대 문제, 고대 문화와 관련된 자료적인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다. 단군 설화는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에 전한다. 단군설화가 실려있는 대표적인 문헌인 삼국유사를 보면,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나간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 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환국(桓國)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 가 있어 자주 나라를 가져 볼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지망하더니 그의 아 버지가 그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三危太伯) 땅을 내려다보니 인간 들에게 큰 이익을 줄 직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어 여기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여기를 신시(神市)라 이르고 그를 환웅천왕이라 했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들로써 농사,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맡게 하고, 무릇 인간살이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살면서 정치와 교화를 베풀었다.
때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 러운 환웅에게 사람으로 화하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이 때에 환웅은 영험 있는 쑥 한 자루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 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쉽사리 사람의 형체로 될 수 있으리 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스무 하루 동안 기를 하여 곰 은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기를 못해서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곰처녀는 혼인할 자리가 없었으므로 매양 신단수 아래서 어린애를 배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화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 으니 이름을 단궁왕검이라 하였다.
그는 당나라 요임금이 즉위한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 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 는데 그 곳을 또 궁홀산(弓忽山) 이라고도 하고 또 금미달(今彌達) 이라고 도 하니 천오백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우선 환국의 서자 환웅이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나오는 환국(桓國)은 환인(桓因)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환국과 환인' 이 다른 기록에서 오는 단군설화의 해석 차이는 엄청나다. 우선 환국이라고 써있었을 경우 환웅은 하늘의 나라를 뜻하는 환국에서 이동해 온 지도자가 된다. 하지만 환인일 경우 그것은 하나의 신격 인물로 환웅 역시 하느님의 아들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격 존재가 된다. 그 두 가지의 차이는 뒤의 서자(庶子)의 해석에도 영향을 준다. 환국일 경우 서자는 나라의 관직명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환인일 경우 서자는 환인이란 인물의 아들중의 하나나 또는 첩에게서 나온 아들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런 상고시대에 적서를 구분하는 것도 이상하고, 아들중의 하나라면 굳이 서자(庶子)보다는 그냥 자(子)로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서자는 나라의 관직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고 본다. 환국이 적당하다는 또 다른 근거는 기록 중의 부지자의(父知子意)에 있다. 만약 환인이 맞다면 하느님을 뜻하는 환인을 불경스러운 다른 표현인 부(父)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환인지자의(桓因知子意)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국일 경우에는 그 부(父)는 환인이 아닌 서자환웅(庶子桓雄)의 친아버지를 지칭한 말로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 된다. 환국이라고 적혀있는 기록이 맞는 것이라면, 환국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어느 한 부족국가였을 것이다. 환국이란 국명은 고기(古記)를 쓴 후손들이 모국(母國)을 위대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환국인지 환인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위의 내용은 환국이 맞다는 학자들의 견해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견해가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택했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또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라는 명칭이 적혀있다. 이 기록은 보통 바람과, 비, 구름이 농사에 필요한 것이라고 하여, 환웅이 발달된 농사기술을 가지고 이동해 왔다고 보고 있다. 물론 이 견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세 가지가 꼭 농경민족에만 필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사냥을 하는 수렵족, 배를 타는 해양족에도 그것들은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풍백, 우사, 운사는 꼭 농사나, 사회 구조에 관련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그냥 관직명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곰과 호랑이의 기록은 환웅부족이 이동해 왔을 때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두 부족을 두 가지 동물로 상징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환웅족이 만주와 한반도에 왔을 때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이 있었는데, 곰 부족은 그들에게 호의를 보여 쉽게 융화되었는데, 호랑이 부족은 적의를 보여 저항하다가 다른 지역으로 쫓겨갔다고 해석된다. 또 곰이 여자가 된 웅녀는 환웅과 혼인한 여자로 기술되었는데, 이는 곰 부족과 친밀해지기 위한 환웅족의 혼인정책으로 보인다.
위의 글을 바탕으로 단군신화를 다시 해석해 보면,
옛날 이곳에서 먼 나라의 고관 환웅이 자주 나라를 세울 뜻을 갖고 있었 다. 이에 그의 아버지는 그의 뜻을 알고 태백산 주위의 땅이 사람들이 살 기 좋은 땅이니 그곳에 나라를 세우라고 하였다. 이 말에 환웅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 삼천명을 이끌고 태백산에 당도해서 그곳을 신시라 이름지었 다. 또 그는 관리를 뽑아 그들로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는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이 있었는데, 곰 부 족은 호의적이었으나, 호랑이 부족은 적의를 보였다. 이에 환웅부족은 곰 부족과는 대대로 족장의 딸들과만 혼인하는 혼인정책으로 융화하였고, 호랑이 부족과는 융화를 시도하다 실패하여 점차 무력으로 밀어냈다. 이 후 몇 대가 지나서 환웅을 조상으로 여기는 부족의 족장이 아들을 얻었는 데, 이 사람이 중국 요임금이 재위할 적에 평양에 도읍하고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군설화가 일반인들의 생각처럼 허무맹랑한 설화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 민족의 혈통과 북방유목민족과의 관계
오늘날의 세계 인류는 크게 세 종족으로 나뉜다. 백인종을 포함하는 코카소이드(Caucasoid)와 황인종을 총칭하는 몽골로이드(Mongoloid) 및 흑인종을 총칭하는 니그로이드(Negroid)가 그것이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이러한 세 종족으로 분리된 것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단계로서, 지질연대로는 후기갱신세(後期更新世)에 해당된다.
우리 민족은 몽골로이드에 속하는데, 몽골로이드의 형질적 특징이 형성된 곳은 시베리아의 바이칼호 부근이라고 한다. 몽골로이드의 형질적 특징으로는 광대뼈가 나오고, 눈꺼플이 겹쳐진 것(epicanthic fold)을 드는데, 이는 시베리아와 같은 추운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시베리아의 몽골로이드는 다시 형질적, 언어적으로 서로 다른 두 그룹으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옛사베리아족(Palaeo-Siberians) 또는 옛아시아족(Palaeo-Asiatics), 옛몽골족(Palaeo-Mongolians)이고, 다른 하나는 새시베리아족(Neo-Siberians) 또는 새몽골족(Neo-Mongolians)이다. 시베리아의 몽골족이 언제 이와 같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는지는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그 뒤로도 분화되어 오늘날과 같은 많은 수의 민족을 이루었다. 즉, 옛시베리아족에는 축치족(Chuk-chee), 코리악족(Koryak), 캄차달족(Kam-chadal), 길리악족(Gilyaks), 아이누(Ai-nu), 아메리카 인디언 등이 있다. 새시베리아족에는 사모예드족(Samoyeds), 위그르족(Uigrians), 핀족(Finns), 터키족, 몽골족, 퉁구스족 등이 있다. 그리고 새시베리아족은 다시 언어학적으로 우랄어족(Ural language family)과 알타이어족(Altai language family)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가운데 우리민족은 알타이어족에 속할 개연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우리 민족은 같은 알타이어족 속하면서도 몽골족이나 퉁구스족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 민족은 알타이어족의 한 갈래로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중국 장성지대의 동북부와 요령지방 및 한반도에 정착하여 하나의 민족 단위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산재하는 난하( 河), 대릉하(大 河), 요하(遼河), 노합하(老合河) 등 여러 하천의 유역에 펼쳐진 충적평야에 정착하여 취락을 형성하고 농경문화를 시작했다. 아울러 농업생산력을 배경으로 한 청동기문화로 발전하면서 읍락국가(邑落國家)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읍락국가 가운에 가장 강성하였던 고조선(古朝鮮)이 여러 읍락국가의 맹주국(盟主國)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신화와 습속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우리 민족의 기층문화가 주로 시베리아지방에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기층문화가 주로 시베리아지방에 있는 여러 민족의 원시문화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기원과 계통이 그들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걸어온 고고학적 특징 또한 중요하다. 우리 민족은 현재 한반도를 삶의 주된 터전으로 삼고 있지만, 원래는 여러 경로를 거쳐 이동해 와서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민족이 이동한 경로를 밝히면 우리 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실마리가 자연적으로 풀리게 된다.
한반도에 구석기시대가 물론 존재했으나, 구석기 시대의 주민이 우리 민족의 직접적인 선조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들이 한반도에 살면서 문화를 남긴 것은 분명하지만, 세계 다른 지역에서처럼 이 구석기문화는 그 뒤에 오는 신석기문화와 연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민족의 형성 문제와는 시간적 공백이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구석기문화는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에 끝난 홍적세(빙하기)와 함께 없어졌으며, 그 뒤로는 새로운 자연환경에 적응해서 나타나는 중석기문화가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중석기문화가 있었다는 뚜렷한 흔적이 아직 보고된 적이 없어 우리와 관련되는 직계조상은 서기전 4천 년경에 시작되는 신석기시대의 주민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의 신석기문화로는 2가지의 큰 흐름이 주류를 이룬다. 그 하나는 만주를 거쳐 북중국에 연결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시베리아의 문화가 만주를 거쳐 남하한 흐름이다. 그 외 남방적 문화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도 있으나 그것은 극히 적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인데, 이것은 핀란드와 서북 소련의 오카-볼가 상류지방에서 동쪽은 바이칼지방에 이르는 시베리아 일대에 퍼진 소위 '피트 콤 웨어(pit-combwore)'의 전통에 연결된다. 빗살무늬토기는 형태가 반 달걀형이고, 표면에 찌른 자국과 빗 같은 것으로 누른 빗살무늬가 있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빗살무늬토기로서 대표되는 문화의 분포 지역은 시베리아에서 대체로 북위 55도 이북이다. 이 문화는 주로 수렵과 어로에 의존하는 빈약한 신석기문화였지만, 스키나 썰매를 이용하여 그 기동력은 의외로 컸다. 이 문화가 볼가강과 그 지류인 오카강 상, 중류 일대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우랄산맥을 넘고 중부 시베리아의 오브강 하류의 지류인 라핀강 유역으로 진출한 후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서 예니세이강 중류를 거쳐 바이칼호에 도달하고, 거기서 남으로 꺾어 흑룡강을 타고 두만강 하류 지역에서 나타난 것이 우리나라의 빗살무늬토기문화라고 추정된다.
1952년이래 바이칼 남쪽 흑룡강 상류의 쉴카 유적지에서는 우리나라의 것과 똑같은 빗살무늬토기들이 나왔다. 물론 문화 내용에서 세부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 자료와의 비교에 의해 우리나라의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 빗살무늬토기의 동쪽 끝 형색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처럼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는 시베리아와 연결되고 그 시대의 상한은 서기전 4천 연대로 본다.
한편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동이족들은 회하 유역과 산동반도에 걸치는 중국 동해안 일대, 남만주. 발해만 일대, 한반도 북부에 걸쳐서 거주하면서 동이문화권(東夷文化圈)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북아시아 문화의 주체를 이루는 동이문화는 동이족에 의해 창조되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 자료와 역사 문헌에 기록된 내용 및 연구성과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동이족에 속했던 민족임이 분명하다. 중국인 학자인 여진우는 사전시기중국고대문화(史前時期中國古代文化)에서 동이족의 발상지를 지금의 바이칼호 일대로 보았다. 그 후 점차 남하하여 요녕성 서부에 와서 한 갈래는 동북으로, 다른 한 갈래는 발해를 따라 산둥반도로 진출하였다고 했다. 또 중국의 고고학 자료와 학계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요녕성 서부의 홍산문화는 동이족의 문화라고 본다.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하자 만리장성 이북에 분포하는 동이족은 계속 동이족으로 불리고 샤머니즘을 기초로 한 동이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면서 오늘의 우리 민족을 비롯하여 몽골족, 일본민족, 만주족, 위그르족, 다월족, 어원커족, 오룬춘족, 나나이족들로 분화되었다고 한다.
동이문화가 지닌 기본 특징으로 새를 토템으로 하는 난생설(卵生說)과 암각화 및 수렵과 관계되는 활 문화의 발전을 들 수 있다. 동이족의 원시문화에서 기원한 암각화도 중국의 동북, 내몽골, 신강, 광서지역, 러시아의 레나강 일대 및 한반도 등 동이족의 이동과 관계되는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동이족의 문화권에 거주하고 있던 종족 중에서도 후에 우리 민족을 형성하는 데 주류가 된 것은 맥족와 한족이었다.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라고 하나, 그 퉁구스족과 분화된 시기는 상당히 일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으로 퉁구스족(만주족 포함), 몽골족, 터키족을 알타이(Altai)족이라 하는데, 이 세 민족의 언어는 같은 알타이어족에 속하고, 오랜 어느 시기에 같은 종족에서 갈라진 것이라 한다. 알타이족은 원주지로부터 서쪽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나 유럽의 동쪽에까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시베리아의 레나강 유역까지 이르렀다. 이런 과정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일파가 만주를 거쳐 한반도와 일본의 서쪽에까지 이동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알타이족이 본주지로부터 동쪽으로 또는 북쪽으로 이동 확산하기 전에 북방 아시아에는 이전부터 살고 있던 종족들이 있었다. 이 선주 종족들은 알타이족의 이동에 밀려 동해안과 북극지방의 불모의 땅으로 옮아갔다. 이들을 통틀어 고아시아족 또는 고시베리아족이라고 부른다. 북극지방의 축치족이나 사할린 남부와 북해도의 아이누족, 멀리 동북쪽으로는 베링해협의 양안에 분포하고 있는 에스키모들이 그들이다. 이들 고아시아족은 알타이족에 밀리기 전에는 아시아의 내륙에 있었다. 따라서 만주와 중국 북부 역시 고아시아족의 일파가 점거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우리 민족와 만주족 등의 알타이족에 밀려 동쪽과 북쪽으로 이동하였을 때에, 그 일부는 한반도로 밀려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을 두고 일부 학자는 우리 민족을 고아시아족이라 한 일이 있으나, 다른 연구 경과에 의하면 우리 민족의 구성에 고아시아족의 요소가 있을 가능성은 있으나 고아시아족은 아닌 것이 여러 모로 분명하다.
한편 보편적으로 우리에게 통용되는 것이 퉁구스족 설이지만 이는 학문적 근거와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한 추론에 불과하다. 우리 민족이 몽골족와 퉁구스족의 잡종이라든가 또는 한족(漢族)와 몽골족의 후예라든가 하는 이설도 있으나, 이것 또한 '만선사관(滿鮮史觀)'을 내세운 일제시대 식민사학의 영향이며, 과학성이 결여된 학설인 것이다.
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여러 기록에 나타나듯이 예와 맥들이 우리 민족의 선조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중국 사서에 우리 민족을 예맥이라고 일컫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아무튼 예맥족은 넓은 의미에서 동이족에 포함된다.
예맥족은 발달된 농경문화의 경제력은 기반으로 하여 먼저 홍도 계통의 문화와 그 종족들을 흡수하여 보다 넓은 문화기반을 만들면서 우리 민족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한편 산동반도와 회하 유역에 있던 동이족들은 동이족과 관계가 깊던 은(殷)이 망하고 서쪽에서 진출하여온 주나라의 침입을 받아 싸우게 되었다. 그 결과 동이족의 일부는 중국 한족(漢族)에게 흡수되고, 그 일부는 남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산동반도 지역과 회화 유역에 계속 남아 있다가 한족에게 흡수된 동이족은 주나라 이후에도 상당기간 세력을 유지하고 있어서 전국시대 말기까지 많은 부족국가를 건설하였다. 후한시대에 건설된 산동성 가상현 소재의 무씨사당 석실의 화상석에 삼국유사가 전하는 단군설화의 내용이 그대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은(殷)주(走) 교체기에 동으로 한반도에 이동했던 동이족은 이 지역 선주민과 결합하여 고조선을 성립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의 야요이인과 후에 등장하는 고분시대인은 동이족의 일파와 한반도의 선주민이 결합한 고조선인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이주설은 클라스트분석법이라 불리는 통계학적 방법으로 그것이 타당한 견해임을 보여준다. 이 방법은 각 민족의 치아의 특성을 특정한 도형으로 나타내 준다. 그 패턴의 유사성으로 민족간의 근원관계를 판단할 수 있다. 그 결과, 야요이인과 고분시대인은 현대 일본인보다 현대 한국인에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 한국인의 일본 이주설이 타당하다는 다른 근거는 일본열도 인구의 급격한 증가이다. 그곳에는 야요이시대 전까지 약 7만5천명이 살았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야요이시대에 이르면 갑자기 70만명으로 늘어난고 고분세대에는 500만에 이른다. 이는 절대로 자연증가로 해석될 수 없고, 다른 민족의 이주로 여겨진다. 아직 확실시 된 바는 없으나, 고조선인들의 최종 도착점이 일본이라는 학설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
고조선인들의 생활 풍습
고조선인들의 풍습, 전통에 있어서도 시베리아와 몽고지역, 만주, 한반도가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테면 샤머니즘, 오보(서낭당), 솟대나 입석신앙(立石信仰), 복식(服飾) 등을 들 수 있다.
시베리아의 샤먼 복장은 방울을 단 것 등 여러 가지 형식에서 우리민족 전통무당과 비슷하다. 또 나무를 세우고 울긋불긋한 천 같은 것을 걸어놓은 것도 우리민족 샤머니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입석신앙은 우리나라에서는 산 위나 동구에 세우는 일이 많은데, 시베리아나 몽고지역에도 나타난다. 돌에 얼굴을 새겨놓은 것도 많은데, 이는 우리의 장승과 같은 것으로 본다. 오보는 우리나라의 서낭당과 같은 것으로 행인들의 길을 가다가 돌을 던져 돌무지가 된 것을 말한다. 이것 역시 시베리아 등 여러 지역에 나타난다. 그리고 아직도 그 신앙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긴 나무에, 끝에 새의 형상을 한 물체를 단 솟대 역시 우리 나라만의 소유물은 아니다. 신채호는 상고시대 우리의 민족신앙을 수두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신앙은 유일신 사상으로 아시아의 넓은 지역에 걸쳐서 존재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위의 공통된 것들은 수두의 전통일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인들은 매우 발달된 옷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실은 출토된 유물과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서포항유적의 청동기문화층(고조선시대)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남자 인형은 모두가 서 있는 형태인데, 아랫도리가 넓게 퍼져 있다. 이로 보아 고조선에서는 남자들이 두루마기와 같은 겉옷을 입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열전(東夷列傳) 부여전(夫餘傳)에는,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고 하였는데, 부여는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다고 여겨지므로 위의 도포는 고조선 때부터 입었던 두루마기 같은 겉옷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기록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그들의 공공모임에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예 사람들은) 삼을 심고 누에를 기르며 길쌈을 할 줄 안다.
마한 사람들은 양잠을 할 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
(한(韓) 사람들은)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 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고 하였다. 비록 이 기록이 고조선 말기나 붕괴된 후의 고구려, 예, 한 등에 관한 것이지만, 이들은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이었고, 단군을 시조라 여겼으므로 그들의 이러한 복식 풍속은 고조선의 그것을 계승했을 것이다.
고조선에서는 직물 생산을 위해 베틀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북 회령군 회령읍 오동유적의 8호 집자리와 자강도 강계시 공귀리에서는 베틀의 일부일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고조선이 베틀을 사용했다는 것은 직물 생산이 매우 높은 단계에 도달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조선의 주택은 여러 주거지 발굴 결과 지상식 건물도 있었으나 대개 지하 50에서 60 센티미터 정도로 깊지 않은 반지하 움집이었으며 장방형이 주류를 이루었다. 집자리 바닥의 면적은 80 평방미터의 큰 것과 10 평방미터 이하의 아주 작은 것도 있었으나 20 평방미터 정도의 것이 가장 많았다. 고조선의 주택은 지붕을 대개 짚이나 풀 같은 것으로 이었고 그 위에 두텁게 진흙을 바른 것도 있었다. 그리고 고조선인들은 성도 쌓았는데 내몽고 자치구 적봉시의 대전자 성을 예로 들면 판축한 흔적이 보인다. 판축성은 돌처럼 단단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잘 무너지지 않는다. 이는 성을 쌓는 기술 역시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고조선의 붕괴
일반적으로 우리는 고조선이 한(漢)의 정벌로 멸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내용은 위만의 손자 우거가 한무제를 알현하러 가는 진번과 진국을 막아서 무제가 타일렀으나 끝내 듣지 않아서 조선을 정벌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만조선은 우리의 고조선과는 관련이 없는 중국의 제후국이었으므로 위의 내용이 우리역사라 볼 수 없다.
단재 신채호는 고조선이 멸망한 이유를 단군을 자칭하는 자들의 건국으로 인한 열국시대와, 주변 흉노와 중국의 잦은 침략 등으로 보고 있다.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이 멸망하지 않고 열국들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만주에서 지금의 평양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은 서기 3세기까지 주위 국가들의 보호를 받으며 명목상의 국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예전의 최고 통치자와 그 일족을 보호해 주는 것은 동아시아 고대 봉국제의 통치조직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한(韓), 부여(夫餘), 비류(沸流), 고구려(高句麗), 북옥저(北沃沮), 남옥저(南沃沮), 예(濊), 신라(新羅) 등 여러 국가들이 단군으로부터 이어졌다고 하였다. 이는 고조선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은 열국시대의 시작과 주변의 흉노, 중국의 잦은 침략으로 세력이 약화된 후 밀려나 지금의 평양에서 명맥만 유지하다가,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해짐에 따라 그들과 융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뿌리를 아는 것의 중요성
어느 민족이든 자신들의 조상의 역사와 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찬란했고, 그 세력권이 엄청나게 넓었다고 한다면 그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믿고 싶을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그런 맥락의 책이다. 이 책은 '우리 민족(동이족)이 세계 최대, 최초 국가를 건설했고,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을 갖고 있었으며,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이룩한 슈메르인은 동이족이고, 북아메리카 인디언과 마야문명을 이룩한 마야인들 역시 동이족이다'라는 내용이라고 재야 사학자들은 해석하고 많은 관련 서적을 출판하고 있다. 이 것을 바탕으로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다'는 정의를 내렸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는 충분한 사료가 있어야 역사로 인정된다. 환단고기란 책은 사학계에서 진실하지 못한 위서로 평가받고 있다. 근거로는 그 책에는 연개소문의 숙부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이 근대에서 밝혀진 것이란 것이다. 또 문화라는 말 또한 근대에 생겨난 말인데 책에 나왔다는 것을 다른 근거로 들고 있다. 하지만 위서라고 단정하기엔 위의 근거들이 아직 부족하다. 그러므로 책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 책에는 가장 발전된 문명을 가졌다거나, 슈메르인과 인디언, 마야인이 동이족이란 내용은 없다. 이 것들은 재야 사학자들의 추론에 불과한 것이다. 예를 들면 수밀이국과 우루국이란 제후국명이 나오는데 이를 슈메르인의 국가로 해석 한 것이다. 이는 매우 위험하고 비과학적인 해석이다. 이런 것들이 역사로 인정된다면 역사학이란 학문은 없어질 것이다. 이유는 역사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틀려짐에 따라, 정사(正史)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책은 우리 역사에 대해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준다. 그러므로 그 책이 우리 민족 상고사의 사료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바로 해석하고 그것을 입증해줄 고고학적 근거들을 찾는 일이 필요하다.
얼마 전에 한 광고에서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우리 역사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광고는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첫 번째, 근거로 역사적으로 부여는 매우 호전적인 국가로 주변 국가와 자주 전쟁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고구려는 주변 국가를 정벌하였다는 여러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광개토대왕은 주변의 국가를 정복해 엄청난 영토를 얻어 후에 광개토란 시호를 얻었다. 셋째로, 백제는 요서와 산동반도, 양쯔강 유역에 진출했다고 중국의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 광고는 거짓이다. 이 광고와 같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수탈, 당쟁, 한 등의 역사다'라고 각인 되어 있는 것은 일제의 식민정책의 영향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지배되는 것이 당연시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자신들이 유리하게 해석했고, 유용하게 이용했다. 그 결과 가장 피해를 본 것은 우리 역사의 뿌리인 고조선사와 고대사로 아직까지 그 둘은 논란이 되는 부분이 많다. 심지어 일본은 고조선을 우리가 거짓으로 꾸며낸 국가라 하고, 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것이 우리의 역사라고 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들이 우리의 뿌리에 관한 역사를 왜곡하려고 애썼던 것을 보면, 상고사와 고대사가 우리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과거가 있어야 현재가 있고, 조상이 있어야 후손이 있듯이, 현대 한국인의 조상이 옛날에 어디서, 어느 경로를 통하여 온 누구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줄 역사학자들의 책임이 가장 막중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