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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군 상월 그리스도의 교회는 1947년 7월 1일 진성구 씨가 자신의 건물을 예배 처소로 제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초대교역자 신덕철 전도사의 열심 있는 전도와 헌신적인 노력이 상월교회 부흥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성도들은 성령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공산당들은 지형이 험한 월출산으로 모여들었고 상월교회는 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이들은 1950년 11월 이홍길 장로 댁으로 교인들을 모으고 그들을 전기줄로 굴비 엮듯 묶어서 교회 근처의 야산으로 끌고 갔다. 교인들은 끌려가는 중에도 굳건한 믿음으로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상월교회 신덕철 전도사와 교인들은, 영암읍교회와 매월리교회에서 끌려 나온 교인들과 함께하였다. 이들에게는 ‘죽으러 간다.’는 생각보다는 ‘천국으로 이사 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현장에 도착한 순교자들은 시간을 달라고 간청하여 예배를 드린 후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
영암군 합동추도예배
반면, 독이 오른 공산당들은 예수쟁이들에겐 총알도 아깝다며 주변 숲에서 대나무를 잘라 만든 죽창으로 무참히 성도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임신 9개월의 임신부까지 포함하여 26명의 상월교회 교인들은 죽창 앞에 쓰러지면서 찬송하면서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내 영혼과 온 가족의 영혼을 받으소서. 우리 교회를 기억하소서.” 간절히 중보 기도를 했다고 한다.
순교자 명단은 신덕철 전도사를 비롯해서 서석근 집사, 김춘동 집사, 윤성진 집사, 임유상 집사, 조인심 집사, 이복만 집사, 임항우 집사, 이 일 집사, 조재윤 집사, 신장모 집사가 있고 일반 교인으로는 이재조, 이춘만, 송복윤, 임화상, 진사울, 조정덕, 김길상, 임여상, 임남상, 요셉, 전야곱, 조윤기, 마리아, 진대식, 임태광 제씨가 순교 당했다. 특히 광주 양림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박석현 목사와 그의 부인 김귀남과 외아들 박원택과, 박석현 목사의 장모 나옥매 전도사도 고향에 피신해 왔다가 순교하였다.
태풍처럼 잔혹했던 한국전쟁이 끝나고, 상월리 성도들의 눈물어린 기도와 헌금으로 1972년 지금의 위치에 석조건물을 세웠으며, 1981년 지금의 상월그리스도의 교회 예배당 건물을 완공하게 되었고, 1993년 순교자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순교신앙으로 무장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조선 땅에서 1801년부터 1871년까지 순교자가 8천명 이상 되는 것을 정확히 알고도 찾아온 자들이니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 위해 찾아온 자들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가족의 생명을 잃는 아픔이 있었지만, 선교 현장을 지켰다.
일제강점기에 지도자들은 온갖 핍박과 역경 속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감사하며 헌신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남한에서 2600여 명과, 북한에서 2여만 명 이상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 순교신앙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강하게 세웠고, 선교 지향적인 교회들이 되게 하였다.
순교비 앞에서 상월교회 교인들
이제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이어받기 위해, 날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 다니엘 같은 예배 생활이(단6:10) 뒷받침 되어야 한다. 상월교회 시무하는 이성배 목사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는 말씀을 소개하며 순교신앙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바른 신앙고백을 위하여 성령 충만하기를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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