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6일 (고전11 새 언약의 전달자).hwp
2018년 8월 26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고린도전서 11:23-29
새 언약의 전달자
벌써 8월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예배 중에 성찬식이 있습니다. 사실 “예배 중”이라는 말은 적합한 말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모든 예배가 성찬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드시어...” 주님이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의미 있게” 나누어 주신 사건에 대하여서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말을 할 시점에는 아직 어떤 복음서도 책으로 발표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지금 하는 말은 그 역시 누구에게로부터 전해들은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따른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님으로 전해 받은 것”이라는 말도 자기 눈으로 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를 통해서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최후의 만찬 사건은 예수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결정적인 의미를 지녔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제자들은 이후부터 모일 때마다 주님을 기억하기위하여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진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빵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먹으며 나를 기억하라. 이 잔은 내 피로세운 새 약속이다. 그러니 잔을 받을 때마다 마시며 나를 기억하라.”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주님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성만찬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경배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을 단번에 발휘하여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쉽고 빠른 길을 버려두고, 힘들고 어려운 방식을 선택하였습니다. 아들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죽게 하는 사건을 구원의 방편으로 사용하시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예배는 당연히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야합니다.
종교개혁시대에 유명한 화가가 비텐베르크에 살았습니다. 루카스 크라나흐(Lukas Kranach) 부자입니다. 아버지 크라나흐가 그린 제단화가 지금도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인 성 마리아교회에 걸려있는데, 1547년, 즉 루터가 죽은 그 다음해에 그린 제단화입니다. 예배당 전면에 T자 모양으로 네 개의 그림판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좌측에는 세례 주는 장면, 우측에는 고백하는 장면을 배치하고, 아래쪽에 루터가 설교하는 장면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앙에 가장 큰 그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함께 둘러앉아서 성찬을 나누는 모습입니다.
이런 그림을 그려서 예배당 전면에 설치한 이유가 있습니다. 글을 모르는 신자들이 그림이라도 보고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깨우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세례와 고백은 가톨릭과 동일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하지만 성만찬과 설교는 전혀 다른 의미를 주기 때문에, 이 제단화에서는 중앙과 하단의 두 그림이 중요합니다.
설교하는 루터는 설교단에 올라서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청중들은 루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리키는 예수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고 있는 예수”입니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습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사제인 루터가 신자들의 무릎을 꿇게 하고 입에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식탁위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나누어 먹습니다. 평화롭습니다. 그리고 평등합니다. 그들이 기억하며 나누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그 몸이고,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 피입니다.
이제 예배가 무엇인지 그 내용이 납득되시지요? 예배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그 역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슴깊이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 직전까지 구약의 희생제사의 개념을 바탕으로 예배를 미사라고 불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구약의 제사 또는 가톨릭의 미사와 개신교 예배가 다른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사와 미사는 매번 “제물”이 필요합니다. 제사상을 차리는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가톨릭의 미사에서는 성만찬 시간이 예수의 몸을 제물로 희생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는 희생제물을 반복적으로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번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주어진 구원을 감사하고 기억하는 예식입니다. 루카스 크라나흐의 제단화는 바로 이란 의미를 가르치기 위하여 제작된 그림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빵과 잔은 먹고 마실 때에 “합당하게” 먹어야한다고 합니다. 만일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면,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고 “몸을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시면, 그것은 자신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다소 무서운 말도 남겨두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있는데, 그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만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만찬을 오용하는 예를 들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주장입니다.
첫 번째 핵심은 이미 설명을 드렸습니다. 성만찬은 제사처럼 제물 드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찢기고 흘리신 살과 피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예배입니다. 즉, 주님은 주님을 믿는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반복해서 선포하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두 번째 핵심은 내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세가 “합당한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합당한지”의 여부는 “몸을 분별함이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어려운 해석입니다. 여기서 몸이란 “주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몸을 분별하고 성찬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주님의 몸은 바로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성경 하단 각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교회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성만찬을 거룩하게 행해도, 성만찬을 하면서 아무리 큰 은혜와 감격을 느낀다고 해도.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그 성만찬은 “그 교회에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일 뿐”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쉽게 말하면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배와 신앙은 “본질”이고 “정신”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리스도의 편에 서도록 지탱하게 해주는 “기준”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기억하고 우리 교회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바로 “성찬식” 시간입니다.
이 본문에서 정확하게 사도 바울이 지적하려고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11장 17절부터 읽고 나서 다시 30절 이후를 읽어보면 금방 이해하게 됩니다. “합당하지 않게”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차별”을 극복하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처음에 초대교회에서의 예배는 모여서 만찬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 과정에서 부유한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차별이 생겼습니다. 집에서 음식을 싸오는 것이니까, 자기가 싸가지고 온 것을 자기들만 먹고 돌아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려면 집에서 먹으면 되지 왜 교회에서 그러느냐는 것이 바울의 일침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가난한 자가 보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합당하지 않게”라는 말의 신학 사전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정신에 맞지 않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에서 이 상황을 해석한다면, 문자 그대로 교회 안의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를 넘어서는 해석이 나와야합니다.
앞서 소개한 루카스 크라나흐의 그림에서 성찬을 나누는 모두가 한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미 성만찬이 형식화된 이후였습니다. 교인들은 제단 앞 사제에게 걸어 나와서 무릎을 꿇고 입을 벌려 빵 조각을 받아먹습니다. 신자에게 잔은 주지도 않고, 사제들만 마실 자격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을 주는 자와 받는 자로 양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피를 못 마시는 자와 마시는 자로 구분한 것입니다. 바로 “신앙적 신분” 차이를 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차별이 있던 것을 극복해야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 한 식탁에 둘러앉은 모습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가 고민해야할 문제도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성만찬을 함께 나누는 것은 교회가 교회다울 때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다는 말은 기독교 교리준수이거나, 교회가 만들어 놓은 규정준수로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구성하는 단위인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대할 때,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대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앙적 연륜이 깊은 사람은 신심이 깊지 못한 사람을 인내로 대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아야하고, 반대로 신앙으로 인내하며 온유한 삶을 사는 선배들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품을 줄 알아야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들이 주님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우리가 결정한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은 교회에서 사라지고 말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의 온 몸으로 선포해야하는 의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찬을 통해서 성찬의 본질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성찬은 전체 예배의 상징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삶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찬을 받을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약속을 마음에 되새겨야합니다. 그 약속은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는 사랑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 달에 한 번 성만찬을 하게 되는데, 그때만이라도 지난 한 달 간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죽으심을 통하여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고, 내가 이 사랑을 세상에 어떤 방식으로 선포하며 살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언약은 우리가 전하지 않고 감추어 버리면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몸과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의 전달자가 되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