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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의태자의 풍경산방 원문보기 글쓴이: 풍경 송은석
안녕하십니까??
송은석입니다... 지난 가을 임고서원 답사기를 간략히 한번 정리해보았습니다..
圃隱는 聖之淸者也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 강당에 걸려 있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최후의 작품인 단심가(丹心歌) 시판입니다..
1392년 3월 삼짇날 밤.. 이방원은 포은선생을 초청한다.. 선생의 고견을 듣고 싶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초청한 자리에서 이방원은 포은 선생을 회유할 목적으로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선생의 마음을 떠본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두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좌중에선 박수가 터져나오고... 선생은 그 뜻을 알아차린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丹心歌’를 읊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좌중엔 적막이 흘렀다.. 누군가가 “임이 누구입니까??”하고 묻자, 선생은 “임이란 나라일 수도 있고, 임금일 수도 있고, 내 마음일 수도 있는데 그 모두는 하나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오니 이것으로 해서 선생의 갈 길이 정해지고 만다..
1392년 4월 4일 이미 자신의 명이 다했음을 느낀 선생은 끝까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려는 녹사 김경조와 동행하여 선생의 막역한 친구인 성여완의 집으로 간다. 때마침 친구는 부재중이였고 그의 부인이 차려준 술상을 받아 잠시 시간을 보낸 뒤 길을 나선다...
성여완의 집 문 앞에서 선생이 말을 거꾸로 타자 김경조가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선생曰...
“ 이 몸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차마 맑은 정신에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나를 죽일 흉한이 앞으로 달려들 것이기에 차마 그것을 볼 수 없어 말을 돌려 타는 것이니라...”
선생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의 쇠도리깨에 의해 선죽교에서 선혈을 뿌리며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1392년 4월 4일... 고려의 큰 별.. 아니 동방의 큰 별이 지고,, 불과 3개월 후인 7월에 34대 475년의 역사를 이어온 고려왕조가 비로소 문을 닫고 만다...
맹자 만장장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孟子曰 伯夷는 聖之淸者也오 伊尹은 聖之任者也오 柳下惠는 聖之和者也오 孔子는 聖之時者也시니라 (孟子 萬章 章句下)
맹자는 백이,숙제를 두고 淸에 있어 성인의 경지에 이른 분이라 했고,, 이윤을 두고는 任에 있어 성인이며,, 유하혜는 和에 있어 성인이며,, 이 모두를 초월해 時中之道를 이룬 이는 오직 공자뿐이라고...
임고서원은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향리 494-1에 있는 서원으로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1337-1392)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선 명종 8년(1553)에 이곳 부래산(浮來山) 자락에 세워진 사액서원입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6년(1603)에 현 위치로 이건하여 재사액을 받았으며 이후 인조21(1643)에 여헌 장현광선생을 배향하고, 정조11년(1787)에 지봉 황보 인을 추배하였으나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이 되었습니다.. 고종 16년(1879)에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고,, 1965년에 서원을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복향하고 이후 2001년에 지봉 황보 인을 다시 배향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죠..
묘우인 문충사(文忠祠)로 통하는 내삼문 유정문(由正門)
묘우 문충사... 현재는 포은선생을 主로 하고 지봉(芝峯) 황보 인(皇甫 仁)선생을 배로 하여 모셔져 있습니다..
알묘(謁廟)...
인조기사모본(仁祖己巳摹本) 정몽주 영정..
임고서원에 봉안되어 있는 이 인조기사(1629)모본 영정은 여러 곳에 봉안되어 있는 포은선생 영정들 가운데 제작 연대가 가장 빠른 영정이며, 현재 보물 제 111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문충사에 모셔진 포은 선생의 위패...
배향되어 있는 지봉 황보 인 선생의 위패...
알묘 시 집례자가 들고 있던 알묘 홀기판입니다... 괜찮아 보였습니다...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하하하~~ 기회를 엿보아 한 컷 찍어 보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이 곳으로 다시 옮겨진 임고서원은 원래 저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군요... 현 위치로 옮기면서 그 내력을 밝혀놓은 글이 있는데,,, 뒤쪽에 여헌 장선생께서 쓰신 임고서원 이안문(移安門) 자료가 있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참고하시길...
신도비(神道碑)
꿈에서 난, 용 그리고 주공(周公)을 보았다하여 선생의 이름은 몽란,몽룡,몽주로 바뀐다..
오랜만에 답사자료를 정리하는 셈입니다.. 올해 가을 여기저기 다녀온 곳은 많은데.. 아직도 정리를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정리를 하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쯧쯧...
자료집(포은 정몽주 선생, 포은선생숭모사업회발행)을 보니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약간 각색을 해서 정리해봅니다...
[ 영천이씨 부인이 임신 중에 난초화분을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다가 놀라 깨어나 낳았기에 몽란(夢蘭)이라 이름 지어진 포은 정몽주 선생은.....(중략) 어깨에 검은 점 7개가 북두칠성의 모양으로 있어..... (중략) 선생이 9세 되던 해에는 어머니께서 물레질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을 때 검은 용이 뜰 가운데 있는 배나무를 기어올라 황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배를 따먹기에 유심히 쳐다보니,, 용 또한 머리를 쳐들고 빙그레 웃는 모습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뒤꼍으로 가니 포은 선생이 배나무에 올라 앉아 배를 따먹다가 어머니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 모습이 흡사 꿈속에서 본 용의 모습이었기에,, 이름을 몽룡(夢龍)이라 고쳤다고 한다...(중략) 관례를 치를 즈음에 또 한번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번에는 아버지 운관(云瓘)공이 꿈을 꾸게 되는데, 꿈속에서 신선이 나타나기에 무릎을 꿇고 ‘어디서 오신 어른이십니까?’하고 물으니, 신선이 빙그레 웃으며 ‘나는 주공(周公)이다. 그대 아들 몽룡은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길 소중한 사람이니 잘 길러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깬 운관 공은 곧 관례를 치를 것이니 아명을 버리고 꿈속에서 주공을 만났다 하여 몽주(夢周)라 고치게 되었다... ]
佛法의 時俗이나 부모의 喪을 한결같이 <가례(家禮)> 대로 행한
포은 선생
포은 선생은 흔히 충절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효행의 실천으로 우리의 禮學史에도 큰 족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선생 생존 시절.. 그러니까 수성파와 창업파가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극심한 대립양상을 보이던 여말선초 대는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이죠.. 선생은 불교중심의 시속(時俗)을 유학으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죠.. 당시의 상례는 오직 불법(佛法)에 따라 백일탈상(百日脫喪)이 주류였지만,, 선생은 주자가례에 따라 열아홉에 부친상을 당하매 묘소 앞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를 했고, 벼슬길에 나아가 있던 스물아홉에는 모친상을 당하자 벼슬을 내어놓고 다시 3년 시묘살이를 실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에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조정에서는 선생의 출생지인 임고면 우항리에 효자리(孝子里,공양왕 원년,1389)라는 비를 내렸고 현재까지 보존 되고 있죠..
도통의 연원으로 문묘에 종사되다..
여말선초의 대개의 역사서들은 이성계의 창업혁명세력에 대립하였던 포은선생을 간신 또는 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선생의 충절과 의리를 인정받게 되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로 선생의 암살을 배후 조종한 태종 때부터다. 권근이 최초로 선생이 강상수절(綱常守節)의 의리人임을 칭송하며 그 정신을 높일 것을 상서한다...(중략)
이에 태종은 권근의 상소를 받아들여 선생을 ‘영의정부사’에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 증시(贈諡)하여 그 충절을 높이 평가 하였다. 실로 선생 사후 9년 만에 일어난 이 일은 태종의 왕권 유지를 위한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으나, 평소 선생의 인품을 흠모하셨던 영향도 있다고 할 것이다...(중략)
세종 때 ‘충신도(忠臣圖)에 삽입하여 강상정신을 또 한번 높였다...(중략)
조선왕조실록 중종 12년 8월 경술조에 성균생원 권전 등이 상소를 하였는데 대략 이러하다.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도학(道學)이 전해진 것은 요순으로부터 시작하여 공자의 문하에서 융성했는데 맹자이후로는 적막히 1천여 년 동안 계승하는 자가 없었고, 이따금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얻는 일이 있더라도 만분의 일에 불과하여 거의 다 흠이 없지 못하고, 참으로 도통(道統)을 잇기 어려웠습니다..... 기자가 나라를 세우고서야 겨우 팔조를 시행하였을 뿐이었는데,, 다행히 하늘이 도와 고려 말에 유종(儒宗) 정몽주가 태어나 성리(性理)를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서, 오지(奧旨)를 혼자 알되 선유(先儒)와 절로 맞았으며 충효의 대절(大節)이 당대를 용동(聳動)하였으며, 부모의 상을 입고 사당을 세우는 것을 한결같이 <가례(家禮)> 대로 하였으며, 문물,의장이 다 그가 다시 정한 것이였으며, 학교를 세워서 유학을 크게 일으켜 사도(斯道)를 밝혀서 후학에게 열어 준 것은 우리나라에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니, 학문을 주자,정자에 비하면 참으로 차이가 있겠으나 공로를 주자,정자에 비하면 거의 같습니다........ 정몽주, 김굉필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하여 우리나라의 만세토록 이어갈 도학의 중(重)함을 밝혀서 ...... 이러한 상소에 대해 중종은 조정 대신들의 의논을 통해 중종12년(1517) 포은 선생을 최치원 다음 자리에 종사하고...... 충신의 호를 받은 지 100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이상 인용(자료집,포은 정몽주, 포은선생숭모사업회)
대구향교 大成殿 先聖,先賢位牌(25位) 奉安位次圖
대구 향교 대성전 先聖,先賢위패(25위) 奉安位 西從... 문창후 최치원(고운), 위국공 주희(회암), 문충공 정몽주(포은).......
[ 영천의 노상사(盧上舍) 수(遂)가 포은 정선생의 구거(舊居)에서 서원을 주창하여 짓고 낙성할 무렵에 서울에 와서 널리 서적을 구하거늘 황(滉)이 심히 그 뜻을 가상히 생각하고 그 일을 우러러 보았다. 돌아보건데 우거(寓居)하고 있는 곳이 쓸쓸하여 거기에 합당한 다른 책이 없으므로 삼가 근래 내사(內賜)받은 성리군서(性理群書) 한 질을 보낸다. 혹 임금이 하사한 물건을 남에게 준다고 의아해 할지 모르나 아! 서원을 위하여 책을 받들어 간직하는 것은 하나는 선현(先賢)을 위함이요, 하나는 후학(後學)을 위하는 것이니 어찌 남에게 기증했다 하겠는가?
가정(嘉靖) 갑인(1554) 맹하(孟夏,4월) 기망(旣望,음16일)에 진성 이황은 삼가 쓰다. ]
사찰도 그렇고,,, 서원도 그렇죠.. 옛 사람들의 숨결이 남아 보존되고 있는 자리에는 늘 한그루의 노거수(老巨樹)가 서 있기 마련이죠... 이 곳 임고서원 은행나무도 예외는 아니네요..
[ 경상북도 기념물 제 63호인 이 은행나무는 높이 약 20미터 가슴높이의 둘레가 5.95미터에 이르는 수령 약 500년의 노거수이지만 생육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수관폭(樹冠幅)은 동서방향이 약 22미터, 남북방향이 약 21미터에 이르고 있다.. 이 나무는 본래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었을 당시 그곳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임고서원을 1600년 경 이곳에 다시 지으며 옮겨 심은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
(자료집,충효의 고장영천 임고서원, 포은선생숭모사업회)
무자년 연말입니다... 잦은 모임 탓에 몸도 마음도 많이 수고로우시죠?? 어려운 경기에 술값도 만만찮게 들어가고... 포은선생의 시 한수를 읊어보며 씁쓸한 마음 달래봅니다...
飮酒 (술을 마시며)
客路春風發興狂(나그네길 봄바람에 흥취가 마구 일어)
每逢佳處卽傾觴(좋은 곳 만날 때면 술잔을 기울이네)
還家莫愧黃金盡(돌아갈 때 돈 다 쓴 것 부끄러워 마라)
剩得新詩滿錦囊(새로 지은 시 비단주머니에 가득하니)
(포은집 권1)
송은석이었습니다...
저물어 가는 무자년,, 다가오는 기축년,, 가슴 속에 뜨거운 열정을 품고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