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서쪽 서원으로 가다(1)
하목정과 육신사는, 성주 농협을 가끔 방문하던 때에, 명패만 자주 확인하던 곳이다. 지나 다니면서 마음속으로는 늘 선비께서 아주 어린 시절을 보내신 곳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빈이란 낱말은 낮설지 않는 단어였다. 그러나 선비께서는, 실제로는 만주로 이주하여 외가가 떠돌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어린시절은 중국에서 보낸 셈이다.
특히 이번에 탐방하는 장소인 금호강과 와룡산 주변은, 실제로 나에게 직접-간접적으로 깊은 인연이 닫는 곳이다. 과거에 와룡산에 개구리 소년들의 실종과 주검이 있는 곳이지만, 이름만 듣던 곳으로 막상 도착하여 확인하여 보니 감회가 새롭다.
그런데 이번의 탐방사원과 많이 관련된 성씨가, 주로 도씨들의 집성촌이란 것도 처음 확인했다. 마치 과거 74년에 청송P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담임을 경험하면서 출석부에 85%이상이 청송심씨여서, 말로만 듣던 집성촌의 위력과 강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번 탐방을 다닌 곳이 나와의 인연이 깊다. 다시 말하면 직접-간접적으로 상당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나의 선친의 고향이 즉 나의 고향(실제로는 대구출생임)이된 칠곡의 지천(삼남이셨던 증조부께서는 마을 훈장님을 지내셨음)이다. 또한 외가의 선산이 있는 곳이 하빈이고, 모교가 계명대학교이며, 큰이모집이 다사의 세천이고, 문중의 일부가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지역이 논매기 매운탕으로 유명한 부곡(문양역 근처임)이다.
나는 주로 4개의 도서관을 이동하면서, 중요한 강좌를 청강하고 있다. 그 중에도 수성도서관을 제외하고는, 중앙과 용학과 범어도서관에는, 모두 H 전교장님의 추천으로 다니고 있다. 지금도 고산과 수성대학과 다른 몇 곳을 추천하면서, 쓰러진 후에 지병으로 여전히 불편한 몸이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열심히 청강을 다니는 남다른 정열을 지닌 고희를 훌쩍 넘긴 분이다.
처음에는 H씨가 추천하는 도서관을 방문하는 것을 거부하였다가, 3년 전 부터 열심히 함께 수강하고 있다. 내가 방문을 거부한 이유는 간단하다. 먼저 이동하는데 몸이 불편하기 때문이며, 가장 큰 이유는 낯가림이 심하기 때문이다. 나이 70에 가까워도, 어린 시절 몸에 밴 성격은 어디 딴 곳으로 가지 않는다. 내성적인 성격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강의를 들을 때면, 언제나 강사님에게 질문을 묻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평상시에 독서를 생활화한 덕택에 쉽지 않지만, 강의에 집중하면 질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나의 집중방법은 찰스 다윈의 유명한 말 “적자생존”법(강좌 내용을 노트에 적어야, 질문하는데 살아남는다)이다. 강의에 집중하려면, 강사의 공들여 가르치는 성의에 보답하기 위해서, 거의 80%이상을 노트에 적는다,
2008년 2월부터 대학노트에 필기한 권수가 51권에 이른다. 평균 연간 5권의 노트가 적자생존에 사용된다. 강사가 평생 힘들여 쌓은 형설의 공이, 강의에서 향기로 묻어난다. 특히 가장 강조하는 책이 숨어있는데, 이러한 자신의 철학의 결정체가 되는 책은 반드시 구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이번의 와룡산 근처의 서원들을 방문하기 전에, 향교의 전의를 거친 C대학교의 K교수의 유학강의를 들었다. 최근에 심해진 무릎 통증으로 지팡이에 의존하기 때문에, 탐방을 거부하다가 지인으로부터 가보자는 강요에 못이겨서 참여하였다. 친절하신 교수님과 도서관장을 비롯하여, 참여자도 모두 선비정신이 가득 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말로 듣던 병암서원(대원군의 서원철폐때 헐림)에서는 문중의 재력(약 700억원대)을 활용하여, 60억 규모의 서원을 증축하고 뿌리교육과 더불어 국제규모의 손님들도 초청한 것을 확인하면서, 부러움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K교수로부터 병암서원(屛巖書院. Byeongam Confucian Academy)과 용호서원은, 영남의 제3기(1570년생의 유학자들)에 형성된 것임을 알았다. 유학자들이 1기는 1530년생들이고, 2기는 1550년(or 1553년)생들이 만든 서원들이었다. 병암서원은 유학자 서재 도여유선생에 의해서, 서재라는 마을(원래는 1750년 이전에는, 칠곡 태전교의 팔거천과 현재 칠곡중학교의 향교가 본거지였음)이 형성된 것도 알았다.
이락서당(伊洛書堂. 이수伊水와 낙강洛江의 합류지점을 말함)에서는 9개 성씨(성주도씨, 밀양박씨, 순천박씨, 달성서씨, 일직손씨, 광산이씨, 광주이씨, 전의이씨, 함안조씨)에 11개 마을(서재- 서촌, 덕산, 묘동, 남산, 수성, 술곡, 상지, 상곡- 하당, 원대)이 공동 연구하는 곳이다. 이락서당규약을 세우고, 서른 군자들이 모여서, 경전의 유학과 강론으로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인격도야에 힘썼다. 벽에는 모한당(한강정구선생을 사모하는 집)과 경미재(낙재이종문의 넓은 활동을 공경하는 집)의 편액이 걸려있다.
용호서당은 서재 도유여선생이 서재를 세운 동네에 있는 서당이었다. 특히 18세기에 서재의 3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 70호의 성주도씨(현재 20호)가 되었다. 한편 하목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을 지낸 낙재 이종문선생이, 1604년에 세운 정자로서, 배롱나무가 유명하다. 우리 일행과 주인이 서로 만나서 맞절을 하였다. 집은 인조(실제로는 능양군때 방문함)에 의해서, 그 당시에 사가에 금지된 부연(장연만 허락되었음)도 설치(내탕금 200냥을 하사받음)하였다.
힘들었지만 무척 보람이 있어서, 백문이불여일견을 체험한 하루였다. 감사할 뿐이다. 다행히도 무사히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서, 지인들과 더불어 관장님과 교수님께 감사를 드린 다음에, 세워둔 승용차로 귀가하였다. 더위에 잠이깨자 새벽에 일어나서 읽던 책을 펼쳤다. 일요일 아침에 다니던 성당의 미사는, 결국 피곤에 못이겨서 밤미사로 대체하였다.
누구에게나 배움에 목말라하는 시절은 돌아오는데, 나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지인 중에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독서 이외에도, 다시 바둑에 혼신의 힘을 쏱아 붇는 분이 계신다. 가끔 도전장을 보내지만, 혈압을 핑계로 거절하고 있다. 각자의 취미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본다. 인생은 여러 개의 취미를 소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나 자신은, 날이 갈수록 책과 강의에 깊이 묻혀사는 재미는, 한술 더 떠서 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외손자(초등5학년)에게도, 사는 방향에서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특히 올 봄에 5번째 책(세계의 몰락. 360쪽)을 출판하자, 다른 아파트에서 가끔 놀러오는 유치원에 다니는 외손자도, 뭉친 종이와 스카치 테이프로 책 출판 흉내만 내면서, 스스로 5권을 출판하였다고 큰소리쳤다. 아무도 관심이 없을 것 같지만, 어린이들에게도 많은 울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과 강의실에서 소개받은 책을 모두 구입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10여 년 전 부터 계속하는 신이 내린 지상명령으로 알고 실천하고 있다. 모든 일에 힘들지 않은 것이 없듯이, 작은 취미생활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온 정성을 다 바쳐 구입하고 독파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의 취미생활로서 독서와 관련된 도서구입과 저술활동(내년출판이 6권째가 목표로서 <진리와 르네상스>임)의 마지막은, 바로 인생의 끝이라는 각오로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