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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0 - 요나라가 송나라를 공격중 고려를 침공한후 훗날 금나라에 망하다!
나무는 가을이 되어 잎이 떨어진 뒤라야
꽃피던 가지와 무성하던 잎이다 헛된 영화였음을 알고
사람은 죽어서 관뚜껑을 닫기에 이르러서야
자손과 재화가 쓸 데 없음을 안다
"채근담" 에 나오는 말인데.... 우리 인생이란게 그러하기도 하지만 나라라는 것도 사람 처럼
“생노병사” 를 겪으니... 처음 일어설 때는 그 기세가 사나워 확장과 성장을 계속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차츰 부정부패와 빈부격차가 벌어지면서 나라는 쇠퇴하고 결국에는 멸망을
되풀이 하니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그리고 몽골족의 원나라가 그러한가 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술을 들라면 아마도 “소주(燒酒)” 이지 싶은데... 지금은 희석식으로
만들지만 옛 방식대로 하면 증류주이니.... 소주는 몽골에서 들어온 것으로 고려는
“아랄길(이슬)” 로 불렀는데, 2006년에 지린성 디안에서 거란 시대에 술을 빚는
솥과 쟁반인 술고리를 발견했으니... “거란족과 몽골족의 유사성” 을 생각하게 합니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 태종은 만리장성 이남 연운 16주를 바치며 순종하던 석경당이 죽고 뒤를
이은 석중귀가 세폐를 거부하자, 친정을 감행해 후진을 멸망시키고 개봉에 입성해서는.... 중국
전체를 통치하려 했는데 요나라 군사들의 약탈, 강감, 살인을 용인하는 잘못된 점령지 정책 때문에
한인들이 저항하고 후진의 절도사들이 반격을 시작하니 태종은 어쩔수 없이 연운 16주로 퇴각합니다.
자치통감에는 요 태종이 연운 16주로 퇴각할 때 "중국인을 다스리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탄식했으며 요사에서 태종이 여양도(黎陽道)를 지나며 말했으니..."짐이 이번 원정에서 세가지
잘못을 했다. 군사를 풀어 말 먹이와 곡식을 빼앗은 것이 첫 번째이고, 백성들의 사적인 재산
을 빼앗은 것이 두번째이고, 여러 절도사를 서둘러 진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그 세번째이다."
그후 체제를 정비하기도 전에 태종이 급사하니 요의 정계는 긴장 상태에 빠지는데 순흠황후가 권력을
휘두려려고 하자 요의 귀족과 관료들은 19년 전에 태조가 붕어하고 수백명의 귀족과 관료, 장군들이
생매장당한 사건을 떠올리고는 내쳐졌던 세종의 자손인 영강왕(永康王) 야율완(耶律阮)을 옹립하자
순흠황후는 막내 야율이호(耶律李胡) 와 함께 거병해 맞섰지만 내전에서 패하고 능묘에 유폐당합니다.
할머니를 몰아내고 옥좌에 앉은 세종(世宗)은 정력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여러가지 개혁과 체제
정비를 단행했으나 오대 왕조들과 전쟁에서 별 소득을 못 본데다가 한화(漢化)와 중앙집권화,
황권 강화정책을 밀어붙여 보수파의 반발을 일으켰으니 결국 세종은 상고산(祥古山)에서
제의를 진행하던중, 태조의 조카인 야율찰할(耶律察割)과 야율분도(耶律盆都) 에게 암살당합니다.
이들의 반란은 양자의 불온함을 감지하고 있던 척은(惕隱) 야율옥질(耶律屋質)이 급히 군사를 몰아오고
태종의 장남인 수안왕(壽安王) 야율경(耶律璟)이 합세해 진압했으며 수안왕은 각 부와 왕공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위에 올랐으나, 그는 지나치게 잔혹하여 원한만 쌓고 성급하게 황권 강화를 밀어붙여
반대 세력만 불렸으니 목종(穆宗) 은 반대파들의 결집을 눈치채지 못하고 사냥하던 중에 암살 당합니다.
세종, 목종의 연이은 피살로 요(遼)는 내부적으로 반란과 사회혼란에 시달리고 외부적으로는 후주(後周)
와 전쟁에서 대패하는등 내우외환에 빠졌으니, 요 왕조는 954년에 북한(北漢)을 침공한 후주(後周)를
격퇴하고 호기롭게 역공을 걸었다가 고평(高平)에서 장령 조광윤(趙匡胤)의 분전으로 대패했고 959년
후주 세종 시영(柴榮) 이 공세를 가해와 연운 16주 중에 두 곳인 막주(莫州) 와 영주(瀛州) 를 빼앗깁니다.
오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송(宋) 은 국초에는 요(遼) 에 우호적이었지만, 태종대
부터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2차에 걸친 북벌을 단행했으니.... 979년에 송(宋)의
침공을 받은 북한(北漢)을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한 요는 백마령(白馬嶺.
산서성 양천시) 전투에서 대부분의 병력과 지휘관을 잃는 건국 이래 최악의 참패를 당합니다.
송의 1차 북벌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연운 16주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남경까지 포위하니 요는
침착하게 보급로 차단과 유인전술을 사용해 송군을 지치게 만드는 한편... 주력군으로 각개격파해
북벌을 성공적으로 막았으며 고량하전투(高梁河 戰鬪) 때 수만의 송군을 익사시키며 목을 베었고,
총수인 태종(太宗) 이 당나귀가 끄는 마차에 타고 도망치게 만들 정도로.... 굴욕적인 참패를 안겼습니다.
7년 뒤, 986년에 송 태종은 2차 북벌을 개시했으니 1차 북벌보다 여건이 더 좋았는 데, 요는
한덕양(韓德讓)이 권세를 휘둘러 민심이 동요하고 황제(성종)의 나이가 어려 예지황후
(睿智皇后)가 수렴청정하는 상황이었으니 첩보를 통해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송 태종은 요
성종이 봄 순행을 위해 북쪽으로 떠난 틈을 노려 3월에 대군을 동원하고 3로로 진격해 옵니다.
986년에 송이 기습해오자, 요는 송이 자국의 내부사정까지 훤히 파악하고 있다는데 당황했으며 북벌군
규모에 기겁했는데, 예지황후가 나서 공황상태에 빠진 조정을 진정시키고 병력을 모아 반격할 태세
를 갖추니 1차 북벌 처럼 초반에 승승장구하던 송군은 연운 16주의 핵심인 남경을 함락하지 못하고
요군의 지연전과 보급로 차단, 각개격파 전술에 참패했으며, 뼈아픈게 2차에 걸친 북벌로 통일전쟁을
수행한 고참병들과 양계업(楊繼業)을 비롯 유능한 지휘관들이 전사해 군사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습니다.
송나라가 거란에 넘어간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2차에 걸쳐 북진해서 요나라
를 침공하니 요나라는 사력을 다해 두차례 송군을 격퇴하기는 햇지만 이제 송나라의 제3차
침공에 대비해야 함에도.... 엉뚱하게도 불과 6년이 지난 993년에 동쪽 고려를 침공해
1019년에 이르기 까지 26년 동안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니.... “여요전쟁” 이라고 부릅니다!
유사 이래 이렇게 동서 2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인 사례는 인류역사상 일찍이 없었으니 요나라 지도부
가 미쳤던 것일까요? 요나라로서는 송나라와 전쟁을 하는 중에 고려가 송과 연합해 요의 후방을 공격
하는게 염려되니..... 사전에 고려를 침공해 굴복시킨 후에야 본격적으로 송과 전면전을 벌일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데 그후 고려가 요 배후를 공격한적이 한번도 없으니 3차례 전쟁은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요나라가 남쪽 송나라 및 동쪽 고려 양 전선에서 동시에 큰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전력이 분산된 결과....
고려는 2차때 개경이 함락되어 약탈당하고 국왕 현종이 나주까지 달아나는등 무참한 수모를 당했지만
3차때 강감찬에게 귀주대첩에서 참패를 당하고 물러났는데, 하지만 요나라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는지
서하와 송나라에 우위를 지키며 이후 번영을 누렸으며 그 100년 후에 중국과 몽골에 흡수되어 사라집니다.
거란족이 처음으로 공격한 993년 부터 귀주대첩으로 전쟁이 끝나는 1019년 당시까지 사용한 정식
국호는 '거란' 이었으니 거란인들은 국가의 명칭을 '거란' 과 요태종 때 만들어진 '요' 를
혼용하다가 성종 2년(983년)에 '국호를 다시 거란으로 바꾸었다' 는 기록이 있으며 다시
'요'로 되돌린 건 1066년 도종 때이지만 거란어로는 '모스 키탄(대거란)' 이라고 계속 칭했습니다.
하나의 국체를 끊임없이 유지한 나라가 이름이 여러번 바뀌었을 때 그중 가장 유명한 이름으로
전 시기를 다 지칭하는 경우는 흔하니 고구려만 해도 장수왕 때부터 국호가 고려로
바꾸었으나 후의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변경 이후도 고구려라고 총칭하며,
백제는 성왕 때에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했다는 기사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백제 라고 불립니다.
일본 전국시대부터 영주들이 다스리던 영지를 일컫는 번(藩)도 당대에는 쓰이지 않았지만 후대의 역사학자
들이 편의를 위해 통용하던 명칭이 정식 용어로 자리잡게 된 경우이며, 중국사에서도 당대에는 전혀
쓰이지 않았지만 후대인들의 편의를 위해 북연, 후연, 전진, 서진으로 표기하며 한국사에서도 고조선,
북부여, 동부여, 후백제등 정식명칭으로 자리잡은 통용명칭이 많으니 거란 대신에 “요” 라 부르기로 합니다.
986년 송나라의 2차 북벌을 격퇴하고 993년 고려를 침공해 굴복시킨 요나라는 동쪽 배후에 후환을 없이한
뒤라 다시 창끝을 송나라에 돌리니.... 999년부터 요군은 3차례 침공을 가해 송의 방어거점들을 무너
뜨리고 포로와 물자를 일방적으로 약탈했고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성종은 1004년에 친정을 결심
하고 예지황후와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해 성들을 함락하고 개봉이 보이는 전주까지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원수 소달람(蕭達覽)이 전사하고 송 진종 또한 친정을 나와 송군의 사기가 오르는 바람에
도리어 위기에 빠지니 전세가 반전된 것을 느낀 성종은 안전한 퇴각과 원정의 성과를 확보
하기 위해 진종과 “전연의 맹”을 맺고 물러났는데.... 정복 왕조 개념을 제시한 독일계
미국인 역사학자 카를 아우구스트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은 이 시기 거란과 송의
군사력을 '그 어느쪽도 상대를 정복할 만큼 강하지 못하였던 세력 균형의 적대관계' 로 묘사합니다.
1. 송은 요에게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을 매년 세폐로 보낼 것.
2. 국경선은 현재 상태로 유지할 것.
3. 송, 요의 황제는 형제 관계를 맺는다. 송 진종이 요 성종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요 성종이 동생이나, 후대에는 나이로 따져서 형과 동생을 정한다.
“전연의 맹”을 맺음으로써 중국 정복의 꿈은 완전히 버렸지만, 요는 송이 보내주는 막대한 세폐를
국가발전에 투자하고 영토를 확장해서 동으로는 요동, 북으로는 바이칼 호, 서로는 천산
위구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으니.... 요는 의외로 중앙아시아에서도 아주 유명하며,
요가 멸망한 뒤에 서쪽으로 달아나서 세운 서요도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이름을 크게 떨쳤습니다.
또한 성종은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선정을 베풀어 인민들로 부터 지지를 받았고, 이 시기
의 요는 경제와 무역이 크게 성장해서 번영을 누렸으며 또한 전연의 맹은 외교적,
명분론적인 성과도 컸으니 기존까지 요는 중국 왕조로 부터 ‘이민족’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부터는‘북조(北朝)’로서‘남조(南朝)’인 송과 대등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요 왕조는 거란족과 한(漢)족을 대상으로 인속이치(因俗而治)라 부르는 이중 통치체제를 구축했으니
유목민족의 땅은 유목민의 방식으로 다스리고, 연운 16주와 발해의 고토는 주현제를 적용합니다.
그러니까 2중 행정으로 거란인들은 한자 대신 "거란 문자" 를 만드는 등 제국으로 변화하는 과정
에서 정주민인 중국의 문물을 너무 받아들여 자신들이 한화(漢化) 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인
데.... 이는 고려와 조선이 자기 문자를 만들지 못하고 "중국 한자" 를 사용한 결과가 뒷받침 합니다.
이중 통치정책은 의상에서도 찾아볼수 있는데, 송사전 요 열전에 황제와 한인 관료들은 중국식 복장
을 착용하지만, 황후와 거란인 관료들은 거란식 복장을 고수했으니, 요대 벽화에 고려나
북송 관복과 비슷한 단령과 사모를 입은 관리들과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같은 그림에 그려져 있는데 이런 점에선 변발 호복을 강요했던 원나라나 청나라 보다 관대했습니다.
물론 청(淸)과 달리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채로 멸망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며 지도를
비교해 봐도 요의 영토에서 정주민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많지않고, 중국
전역을 정복한 청과는 비교가 안 되니 만약 청이 요처럼 1국 2체제로 유목민과 정주민을
나누어 통치하려 들었다면 정주민(漢人) 영역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질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遼)가 한인과 거란인(유목민)을 분리하여 거란인의 한화(漢化)를 막는 것만으로 균형
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데 비해, 청은 단순히 만주인의 한화를 막는 것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인(漢人)을 만주화 시키기까지 해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니.....
강남에서 변발을 거부하는 한인 수백만명을 몰살시켜 강제한 결과 중국인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최종적으로 요(遼)는 최초의 중국 정복 왕조로서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유목민과 정주민
이라는 이질적인 집단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이중 통치체제를 창조해 후대의 정복
왕조들에게 비전을 제시했으니 이것만 해도 요 왕조가 이룬 커다란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는 귀주대첩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7대 흥종대 부터 경제적으로는 번영하지만... 사회적 모순과 행정
제도의 문제점이 연달아 발생하고 또 소수 민족들의 반란이 일어나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으니
도종대에는 권신 야율을신(耶律乙辛) 이 전횡을 일삼고 각지에서 반란이 터져 통치력을 급격히
잃기 시작해, 결국 9대 천조제 때 그간 쌓인게 많던 송과 여진족이 세운 금의 협공을 받고 멸망합니다.
금(金)의 흥기와 송, 요의 쇠퇴에는 11세기 후반부터 발생한 기온 하강이 영향을 미쳤다는
학설이 있으니.... 기온 하강으로 농경과 목축이 힘들어지고 지속적인 자연재해가 발생
해 정주민은 물론, 유목민들도 큰 타격을 입어 요의 국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는
것인데, 흥종대까지는 기온 상승현상이 유지되고 있어서 경제적 번영이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종대부터 기온이 떨어져 기근과 가축 몰살, 자연재해로 유목민들이 고통받고
속부의 민심이 이반해 대규모 반란이 연이어 터졌으니 이러한 기온 하강 현상은
성종대에도 벌어졌지만, 통치 세력이 변화에 잘 대처하고 지속적으로 구휼과 감세
조치를 실시해 인민의 부담을 줄여준 덕분에 큰 국력손실 없이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요를 무너뜨린 금은 요의 고토를 지배하고 인력과 물자를 충원하기 위해 도망치는 요의 유민들을
사로잡고 관료와 군인들을 기용해 통치력을 확보했으며, 송 · 금 사이에 연운 16주를 둘러싼
분쟁이 전쟁으로 이어지자, 금은 요에 이어 송까지 무너뜨리고 회수 이북의 화북 지방을 차지합니다.
금은 요의 부족인 요련 9장과 황족 4장, 국구 5장을 맹안 · 모극으로, 거란인들의 다수는 규군으로 편성해
서북면 지역의 방어를 맡겼으니 항복한 관료와 군인들은 기존의 지위를 보존해주고 그대로 기용했으며
요의 정치, 행정, 군사 제도를 흡수해 국가 발전에 활용했는데.... 요의 영향을 받은 제도로는 금의 5경제,
각종 관직의 명칭, 지방 행정, 군목제도 등이 있으며 서북면 지방에는 요의 북면관제가 일부 잔존했습니다.
요나라가 망할 때 금(金)군을 피해 탈출한 잔존세력과 유민들은 야율대석(耶律大石)의
지도 아래 중앙아시아 로 옮겨가 서요를 세웠으니.... 야율대석은 그후 천산
위구르와 현지 투르크계 민족들의 도움을 받아 카라한 왕조를 복속시키기도 했습니다.
또 서요(西遼) 는 사마르칸트에서 벌어진 카트완 전투에서 중동의 초강대국 셀주크
투르크 까지 패퇴시킴으로써 거대한 영토를 정복하고는 여러차례 원정군을
파견해 선조들의 고토를 수복하려 했으니.... 서요 원정군은 종한(宗翰) 같은 거물
을 상대로 승리했을 정도로 기세가 높았으나, 결국 고토를 수복하는데는 실패합니다.
거란인들은 금의 지배에 순응하는 듯 했으나, 금 왕조와 거란인들과의 관계는 복잡했으니 금은 자신들
을 잔혹하게 다룬 거란인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고 거란인들도 자신들의 지배를 받던 여진인들이
이제 자기 머리 위에 앉아 명령을 내리는 것을 불편해 했으며.... 초원 저 너머에 동포들이 세운
서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거란인들이 금의 지배에 완전히 순응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었습니다.
해릉왕이 황권에 저항하는 여진 보수파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거란인들을 중용하여 일시적으로 거란인
들의 신분 상승이 이뤄지는 듯 했으나, 통치에 방해가 된다고 야율씨들을 학살한 해릉왕의 폭정과 남송
정벌을 위해 거란 규군에 병력 동원령을 내린 것이 문제가 되어 거란인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킵니다.
거란 규군은 금의 서북면에서 서하와 초원 유목민들의 침공을 막아주고 있었는데, 만약 병력이 남송
국경으로 이동하게 되면 무방비해진 부족을 서하와 유목민들이 침공해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규군들은 고향을 떠날 수가 없었고.... 이 문제로 금 조정과 갈등을 빚다 반란을 일으킨 것
이니, 야율살팔을 중심으로 봉기한 거란 반군은 친척인 해인들까지 끌어들여 금의 북방을
휩쓸었고 해릉왕의 남정에 동원된 거란인 지휘관들은 남송에 투항해 길잡이 노릇을 했습니다.
독립을 꿈꾸던 거란 반군은 금 세종이 정국을 수습하고 남송과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기세가 꺾이고 결국
복산충의(僕散忠義)에게 진압당했는데 반란에 대한 징벌적 조치로서 금 조정은 거란 규군을 해산하고
거란인들을 분산시켜 맹안, 모극에 편입했으며... 금은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란인들과의
통혼을 장려하고 민족융합을 꾀하는 유화책을 쓰기도 했으나, 양자간의 불편한 감정과 서요의 존재,
거란인 관료와 군인의 임용제한 강화, 거란문자 사용금지 문제 때문에 유화책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한편, 요의 지배를 받던 초원의 몽골 부족들은 요가 멸망한 뒤부터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투쟁을
벌였으니 100여년이 지난후.... 몽골은 칭기즈 칸이 부족을 통합해 몽골 제국을 세우고 서요를
멸망시켰는데 서요가 망한후에도 일부 유민들은 이란까지 도주해 다시 나라를 이어갔으니
이란, 즉 페르시아 남동부 케르만 주에 세웠던 거란인의 국가는 케르만 왕국 혹은 치얼만
왕조라고 부르며.... 후서요(後西遼) 라고도 표기하니 이들은 나중에 몽골 제국에 흡수 됩니다.
금이 몽골제국의 공세로 망조가 들자 야율유가(耶律留哥)가 요동에 동요(東遼)를 그후 아예 멸망한
후에는 거란인들이 만주에 후요(後遼, 대요수국)을 세우고 독립하려 했으나, 양측 모두 몽골
제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복속했으며 이 과정에서 거란의 일부 잔여세력이 고려를 침공합니다.
거란 잔당들은 고려와 몽골의 협공으로 진압당하고 생존자들은 양국에 흡수 당했는데.... 고려의
양수척 중 일부가 이 시기에 고려에 유입된 거란인들의 후예들인데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와
몽골은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며 그후 외교관계가 틀어져 장장 28년간의 대몽항쟁을 이어집니다.
몽골 제국에 흡수된 거란 유민들은 몽골 제국의 관료나 전위 부대로 종사했으니 유목 문화에 익숙하면서도
행정과 한학에 능숙한 거란인들은 칭기즈칸의 치세부터 행정 관료나 군인으로 신뢰받았지만 그러나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란인들은 민족 정체성을 잃고 점차 몽골인이나 한인에 동화되어 사라집니다.
현재는 중국의 다우르족이 몽골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한 거란의 후예라 전해지며...
요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요서, 막북, 화북에 남은 거란인들은 한인, 몽골인 등의 다른 민족들에게
동화한 반면,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서요(西遼)를 세웠으며, 요 8대 부족 중 하나였던 대하씨
(大賀氏) 세력은 흑룡강 유역까지 이동하여 정착했는데 이들이 다우르족의 직계 선조로 여겨집니다.
또한 학자들이 거란인의 유골과 다우르족의 유전자를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해 본 결과, 실제로 유전자
의 상당 부분이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러나, 다우르족의 유전자는 거란인과 일부 일치할
뿐, 그 직계 후손이라 보기에는 매우 부족하고 몽골어족의 직계 후손에 가깝기에 서로 혼혈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 몽골과 중국은 이 민족의 역사적 귀속 여부를 놓고 다투는 중입니다.
원래 요는 부족 연맹에서 출발해서 행정제도라 할 것이 없었지만, 영토를 넓히고 다른 문명과 접촉해
국가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조금씩 제도를 갖춰 나갔으니, 거란 연맹은 자신들을 지배한 돌궐과
위구르 제국으로부터 칙령과 인장, 기초적인 통치 제도를 흡수하고 관직 제도도 받아들였으니 돌궐
과 위구르의 관직 제도는 요의 북면관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고 연맹 후기에 조성한 유목도성과
아보기가 경영에 주력한 한성(漢城)도 돌궐과 위구르제국 시기에 존재한 유목도성을 모방한 것입니다.
야율아보기의 백부로서 모략을 써서 수장의 자리를 탈취한 야율석로(耶律釋魯)는 연맹에서 국가로 넘어
가는 시기에 거란을 통치한 자이니 석로는 법을 정비하고 초보적인 관제를 실시해 법질서를 세웠으며
상비군을 창설해서 연맹 수장의 권력을 강화했으며 야율석로의 뒤를 이은 야율아보기는 권력을 강화
하고 연맹의 전통을 유지하려 하는 반대파를 숙청한 다음 요를 건국해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각 유목민 부족들을 재편성해 유력 부족들을 견제하고 유목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키우는
한편, 한인 유민과 연운 지역을 공격해 강제로 끌고 온 한인 포로, 투항자들을 곳곳에
이주시켜 주현제를 실시하고 이들로부터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웠고 또한 관직과 관제를
정비하고 자신의 부족이면서 황권에 가장 강하게 저항하는 질랄부를 약화시켜 질랄부
의 수장인 질랄이리근 (迭剌夷離菫) 을 북대왕(北大王) 과 남대왕(南大王) 으로 나누었습니다.
야율아보기의 뒤를 이은 요 태종 야율덕광은 석경당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후당군을 섬멸하고 그 대가로
연운 16주와 30만 필의 세공을 받았으니 이 덕에 영토를 확장하고 경제력을 더 키울수 있었지만, 연운
16주에 사는 많은 한인들을 다스릴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요는 한인을 통치할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습니다.
요가 석경당으로 부터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곧바로 국력이 급성장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원래 연운
16주는 거란 기병들의 약탈에 자주 시달려 요에 대한 원한이 깊고 석경당이 요 태종에게 갑작
스럽게 땅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요군이 연운 16주를 인수하러 오자, 그대로 민심이 폭발해 버렸습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요의 통치를 거부하고 호족이나 군 사령관이 지역민들의 지지를 받아 독립, 군벌화
해서 요에 저항했으니 요는 연운 16주를 인도받고도 상당 기간동안 지역민들의 저항에 시달리고
통치력 확보에 힘을 기울여야 했으니.... 요는 연운 16주를 안정화하고 민심을 우호적으로
변화시켜 16주의 풍부한 물자와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한인의 통치법을 배울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이후, 요는 한인과 발해인을 비롯한 정주민 지식인들을 관료로 등용하고 당과 오대의 제도를
도입했으며 그리고 요 태종은 통치 기구와 관제를 정비하고 북면관제와 남면관제를 시행
했고 거란어로 된 관직을 한어로 개칭한 다음,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관직의 격을 높였습니다.
요 왕조는 정주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발해와 연운 16주, 삼림 수렵민과 유목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초원과 북만주 일대를 다스려야 해서 하나의 통치 방식만으로는 인민과 영토를 통제할 수가
없었으니... 남면관(南面官)과 북면관(北面官)이라는 이중 통치기관을 세워 효율적으로 국가를 운영
했는데, 북면과 남면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 관부가 각각 궁정의 남쪽과 북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는 전민개병제를 실시해 15세부터 50세까지의 인민에게 군역을 부과하고 군대는 어장친군
(御帳親軍) · 궁위기군(宮衛騎軍) · 부족군(部族軍) · 오경향정(五京鄕丁) · 속국군
(屬國軍)으로 편성했으며 군정권은 북추밀원이 행사하고 전쟁 준비, 작전 수립을 담당했습니다.
최고 군통수권자는 황제였으며 당제를 모방해 최고 군 통수 기관으로 천하병마원수부(天下兵馬元帥府) 를
설치하고 황태자나 황자를 천하병마원수(天下兵馬元帥)로 임명했는데 병마원수부의 하위 기관으로는
도원수부(都元帥府)와 대원수부(大元帥府)가 있으며 두 기관은 천하병마원수부를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각 지방에는 군을 지휘하는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대장군 · 상장군 · 장군 · 소장군, 도위
와 같은 직책을 설치해 군권을 부여했는데. 거란의 주요 유목민 부를 관장하는 대왕부들
과 각 유목민 부들을 통제하는 절도사, 상온도 휘하 유목민들에 대한 군정권을 행사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요의 병제를 정리하자면, 병역은 15세 ~ 50세에 부과하고 평시엔 20만 ~ 30만,
전성기의 전체 병력은 164만이었으며 어장친군은 황제를 호위하는 병력은 요의 최정예
군대며 궁위기군은 12궁 1부의 병력으로 5경의 병력과 함께 요의 주력군이고 5경은 기본
적으로 한인과 발해인, 거란인으로 구성한 군대이며 금군은 남경·중경·서경에 주둔했습니다.
병력을 동원하거나 조정에서 각 군에 군령을 내릴 때에는 금어부를 사용했는데 금어부는 부절(符節)
일종으로 말 그대로 글자를 새긴 금제 물고기이니, 부절은 원래 중국에서 적군의 기만 전술에 걸려
드는 것을 막고 역적들이 각 군 지휘관들을 속여 군대를 동원하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요에서는 금어부를 쪼개서 하나는 조정에, 나머지 하나는 각 군에 비치했는데 만약, 동원령이
내려지면 조정의 사자가 지참해 온 금어부와 부대에서 보관해 둔 금어부를 맞춰서 그 모양과
글자가 일치하는지를 확인했의니 여기서 맞으면 병력을 동원하고 틀리면 사자를 붙잡았습니다.
제할사들이 격문을 띄우고 군사를 모집하면 주현과 부족에서 징병을 하지 않아도 10만
의 기병을 모을수 있어서 요는 병력 동원이 용이한 편이었는데 반대로 보병 중심인
송은 병력 동원과 이동 과정이 번잡하다 보니 요의 기동력을 따라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금군은 세종대에 조직한 근위대로 당과 송의 제도를 모방해 공학(控鶴) · 우림(羽林) · 용호(龍虎) ·
신무(神武) · 신책(神策) · 신위(神威)의 6군과 11위로 편성했으니 그 장관은 전전도
점검 (殿前都點檢) 이며 금군의 주요 업무는 황궁에서 숙위와 시위를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목민으로 구성한 부족군은 대수령 부족군(大首領 部族軍)과 중부족군(中部族軍)으로 나뉘는데,
대수령 부족군은 왕공 대신들이 지원하는 사병들로서 그 수는 수백에서 수천을 헤아립니다.
군사적인 면에서 한인과 발해인들은 중요했으니 한인과 발해인들은 대부분 보병으로 편성되어 있고
거란인 보다 정주화의 경향이 더 짙었던 해인들도 기병보다는 보병이 많아서 기동성이 떨어
지는 편이었지만, 기병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하기가 힘든데다 발해인들은 전투력이 우수한
것으로 유명하고 한인들은 위력적인 쇠뇌와 공성전에 필수적인 포차를 다루는데 능숙했습니다.
전투를 벌일 때에는 유목민 특유의 스웜 전술을 구사했으니 전투 초기에는 탐색전을 벌여 적의
특징을 파악하고 강점과 약점을 살펴 그에 맞게 대응했는데 2차 여요 전쟁 때, 통주
전투에서 강조는 계속 승리를 거두지만, 요 성종은 계속 패전해주면서 고려군의 특성을
파악하고 강조가 오만해진 틈을 타서 고려의 주력군을 박살내고 강조의 목을 베었습니다.
또 공성전을 벌일 때에 사로잡은 포로들을 앞장세워 화살받이로 쓰고 후열에 군인들을 배치하는 것이
있는데 잔혹하지만 도움이 되었고 후대의 몽골 제국도 이 전술을 사용했으며, 또 포로를 활용한
사례로는 2차 여요 전쟁중에 흥화진 성 앞에서 고려인 포로들을 참살한 일이 있으니 주둔군의
사기를 꺾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흥화진을 지휘한 양규는 동요하지 않고 요군의 공세를 막아냅니다.
거란은 고려 침공해 1차때는 서희와 담판을 통해 여진족들이 300년간 대를 이어 살고 있던 평안북도 서부
강동6주를 고려가 차지하는걸 양해했으며... 2차때는 40만 대군을 통해 개성을 함락했지만, 3차때는
소배압의 10만대군이 개성에 육박하자 강감찬이 2배인 21만명으로 받아쳐 귀주대첩에서 참패를 당합니다.
그러나 거란은 여요전쟁 이후에도 100년간 더 명맥이 이어졌으니...... 수나라가 양제의
고구려 원정 이후 5년후 망했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거란이 수나라 보다 20배는
더 오래간 셈인데, 거란과 수나라는 둘다 귀주와 살수에서 엄청난 패배를 당해서
국가가 휘청이기는 했지만 요성종은 무리하게 고려를 다시 침공하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수양제는 살수에서 패배 이후에도 원통했던지 분을 참지 못하고 두 차례나 더
고구려를 무리하게 침공하다가 그것마저 참담하게 실패해서 내부를 추스릴 기회마저
스스로 날려버리고 말았으니 그후 국내에서 여러곳에서 반란이 크게 일어나 망했던 것입니다.
또한 요나라 성종은 말년의 타락을 제외하면 내치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니 중국사 3대 폭군
으로 악명을 떨친 수양제와 비교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 자체가 요성종에게 억울할 수도 있으며
게다가 거란(요) 은 귀주 대첩 이후 흥종 대까지 오히려 경제적으로 번영하면서 평화를 누렸습니다.
서하와 북송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으니 귀주 대첩 이후에 서하와 북송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일부
의 평가와는 달리.... 거란은 북송과 서하에 대해 과거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으니 그럼 귀주에서
대 패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치명적이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너무 자화자찬 했나요?
북송과 서하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거란은 북송이 서하와의 전쟁으로 지쳐 있는 것을 이용해 관남 10현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며 북송을 압박했으니 서하와의 장기전으로 국력을 소모한 북송은 거란이 침공해
오면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세폐를 각각 10만냥씩 증액해주는 식으로 사태를 무마해야 했습니다.
송은 거란이 군사적 압박을 가해올 때마다 영토를 할양해 주었으며 그리고 거란은 서하와 싸워 2번의 대패를
당했으나... 서하는 국력이 고갈되어 거란을 더 이상 압박할수 없어 대승을 거두고도 거란에 허리를 굽혀야
했으며, 거란과 서하는 전쟁 이후 혼인동맹을 맺는등, 이전보다 더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했으니 귀주
대첩 패배 때문에 영향력이 줄어들기는커녕 주도권을 쥐고 북송과 서하로 부터 많은 이익을 취한 것 입니다?
물론 흥종대 부터 몽골과 여진족의 반란이 증가하고, 이전만큼 그들을 쉽게 제압하진 못했지만, 국가의
체제를 무너뜨릴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으니 진짜 요가 휘청거리던 시기는 이후 도종과 천조제
시기로 이 때부터 요는 귀주 대첩의 후유증이 아닌, 지배층과 불교계의 사치와 부패, 황제들의
무능, 사회적 모순과 민족간의 갈등의 심화로 국력이 쇠퇴하고 끝내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내부적으로는 간신 야율을신이 황후와 황태자를 시해하는 등 전횡을 벌이고, 과중한 부역과 세금에 분노한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외부적으로는 몽골족과 여진족의 반란이 빈발했으며 요는 도종 말년에
일어난 마고사의 난을 진압하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몽골과 여진족에 대한 통제력을 상당히 상실합니다.
천조제는 내·외부의 문제를 등한시하고 사치를 일삼은 끝에 요의 멸망을 불러일으켰으니.... 귀주 대첩은
요에 타격을 주긴 했지만 그후에도 번영하며 100년을 더 이어갔으니 멸망 직접 원인으로 보기에는
어려우며 몽골과 여진족에 대한 통제력 상실도 귀주 대첩이 일어나고 수십년이 지나서야 일어났습니다.
거란도 전쟁으로 인한 출혈이 적지 않았으니 이후 100년간 안정세를 유지했으나 예전처럼 폭발적
으로 성장하던 시기는 멈췄고, 2차 전쟁때의 유목민족 특유의 폭발적인 성장 동력을 가지고
있던 시기는 지났기 때문인데... 반면 여진은 막심한 피해가 누적되었음에도 거란 보다 더 크게
성장해 100여년 뒤에 금나라를 건국하고 거란을 집어삼키게 되는데, 다만 금나라를 세운
부족은 요~고려 전쟁터에 살던 여진이 아니라... 멀리 북쪽 하얼빈에 살던 건주여진이기는 합니다?
이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북송은 여전히 거란의 위세에 눌려 있었으며 후일 이런 치욕을 설욕하고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하여 고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금나라와 손을 잡아 거란을 멸망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 이후 금나라에게 화북을 빼앗기고 말았으니 늑대를 내쫓으려고 호랑이를
부른 셈이며 이후에는 호랑이를 내쫓으려고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공룡(몽골)을 부르게 됩니다.
요에 복속한 유목민과 속국은 총 53개 부족과 60개 속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면관이 관장했는데 속부는
호적에 등재하지 않고 세금과 부역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대신,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 지원을 해줄 의무를
부과받았으며 몽골 부족에 절도사사를 설치하고 통제를 강화했지만 반란이 빈번했으므로 부족의 수장들
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자치권을 주었으니 숙여진, 여진 오국부, 달노고, 올야, 철려, 실위, 당항 부족들입니다.
요 조정은 속국과 속부들과 조공무역을 진행해 조공품을 받고 대가로 하사품 주었으니 상업적인 이익과
교류 확대는 상호간의 우호관계로 이어졌고 송이 요에게 세폐를 주고 전쟁을 억제하듯 요 왕조도 조공
무역을 이용해 속부의 반란을 억제할수 있었는데 반란이 일어나 조공 무역으로 들어오는 하사품과 선물,
이익이 끊기면 그 동안 무역의 혜택을 보며 경제 규모가 커진 부족이 수입 감소로 고사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치권을 주고 공물만 받으며 간접지배하는 것이 느슨할수도 있으나, 요 왕조는 통제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생기면 속부에 절도사를 파견하고 부족민의 원성을 사거나 반란을 일으킨 부족장은 해임하고 조정에서
절도사를 파견했고 만약 반란을 일으키면 속부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부족을 해체하는 식으로
통제력을 유지했으며..... 속부의 영토에 초토사등 행정 기관과 군사 기지를 지어 감시하고 통제 했습니다.
요는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유목민 부족장들의 친족을 인질로 받았으니 요 조정은 인질로부터 부족의 사정
을 청취하고 민원을 해결해주었으며 수도로 온 인질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관료나 무관으로 기용했으며
돌아갈 때는 높은 관직을 주어서 부족 내부에서의 권위를 높이고 통치의 정당성을 세워주었기 때문에
여러 부족들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소속된 유목민 부가 반란을 일으키면 인질은 무조건 죽였습니다.
전쟁이 나서 요가 군대를 요구하면, 속국과 속부는 군대를 제공해야 하며 불응하면 요의 토벌을 각오해야
했는데 다만, 서하의 원병 제의를 요가 거절한 사례가 있고 전시에 속국과 속부의 병력을 동원하는 일은
적었으며 요는 속국에 대한 내정 간섭과 원병 파견도 할수 있지만, 실제로 요가 내정에 개입하는 일은
거의 없고 반란과 내전 때문에 서하의 원병 요청을 여러차례 거절해 관계가 소원해진 일도 있었습니다.
위구르 제국이 붕괴한 뒤 키르기즈가 몽골 초원지역을 장악하지 않고 예니세이로 돌아가 버리자, 힘의
공백으로 아르군강과 북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실위계 민족들이 몽골 초원으로 이주하기 시작하고
투르크계 부족들이 초원으로 들어오니 수렵 민족으로 살던 실위인들은 상대적으로 자원이 풍부한
초원에 정착한 뒤 부터 유목민으로 변화해 타타르를 비롯 일부 부족들은 연맹을 구성해 세력화 합니다.
몽골 초원의 주인이던 위구르인들은 대다수가 서부와 남부로 이주했으나, 본토에 남은 위구르인
들도 일부 존재했으니.... 이들은 요대 초기의 몽골 원정 중에 포로로 잡혀 부에 편성되거나,
요 왕조에 의탁해 속부가 되었으니 성종대에 새로이 설립한 34부 중, 설특부(薛特部) 가
위구르인 으로 편성한 부족이며 위구르인 속부는 요사 영위지에 기록된 회골부 (回鶻部) 입니다.
982년, 성종은 초원에 원정군을 보내 초원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했는데 1003년에는 위구르
제국의 중심지였던 카툰성을 수축하고 진주로 개칭한 뒤, 인근에 유주 · 방주를 설치하고
건안군 절도사사를 세워 톨라 강과 오르콘 강 유역을 관할하도록 했다. 3개 주 중에서
톨라강 하반 진주가 가장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며 많은 수의 병사와 주민들이 거주했습니다.
요는 몽골계 유목민 통제와 방비를 위해 흥안령 산맥(興安嶺) 서쪽에서 몽골 칠렝긴 톨고이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700 ~ 1,000km)의 장성을 건설하고 곳곳에 군사 기지를 세웠으니 소위 칭기즈칸
장성이라 알려진 성벽은 동쪽으로는 에르구네 강에서 시작해 오논 강 남쪽에 이르며 성벽
높이는 1 ~ 2m, 해자는 3 ~ 4m 로 다만, 칭기즈칸 장성은 금계호라 부르는 금국의 영북로
방어선과 구간이 겹치기 때문에 요대의 장성과 군사 기지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
요와 몽골 부족들간의 관계는 우호와 적대가 섞인 매우 복잡한 애증 관계였으니 몽골의 각 부족들은
속부로서 공물을 바치고 요는 국경 곳곳에 각장을 세워 조공 무역을 진행하고 하사품을 내렸은데
몽골 부족들은 요와 교류하면서 획득한 선진기술과 문화를 흡수해 내부 발전에 활용하고 일부는
요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충성심을 유지해 야율대석을 따라 사마르칸트까지 가는 원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몽골 부족들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켜 통제에 저항하고 요 조정을 근심케 했는데 요 왕조와
몽골 부족간의 불편한 감정 외에도 양자 간의 입장 차이가 작용했으니 요 왕조에서는 유목민들의
통제를 위해 각 부족의 영유지를 정해놓고 이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좋지만, 유목민들 입장
에서는 자연 재해나 지역의 자원 고갈, 부족 간의 갈등 문제 때문에 이주의 자유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