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의 서울 역/김민숙
왈칵 쏟아져 들어오는 서녁 햇살에 눈이 부시다. 어둡고 긴 터널 저쪽으로 밝은 점 하나가 서서히 동공을 키우며 다가오더니 마침내 기차가 밝음 쪽으로 몸을 내놓았다. 햇살아래 창밖의 풍광이 일제히 반짝이며 움직이고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도망치듯 빠져나온 서울 역은 터널이었으리라. 역사( d�로 올라왔을 때 전광판은 세시반을 알리고 있었다. 주머니속의 기차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 시간 반의 여유가 오롯이 내 것이다. 부자가 된듯해서 쇼핑몰의 도서코너를 기웃거렸다. 금방이라도 겨울을 깨고 개구리 한마리가 튀어나올 듯한 표지의 신간 에세이가 눈을 잡는다. 책을 한권 사고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식사시간으로는 어중간해서인지 3층 식당 안은 몇몇 사람이 있을 뿐 휑하니 비어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청국장 뚝배기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거대한 빌딩 군에 둘러싸여 서울 역은 마치 땅에서 솟아오른 석순들의 무리 한가운데 포위된 것 같은데 메마른 석순에 포위된 기분이 오히려 짜릿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포도에는 연방 차들이 줄을 섰다가 떠나고 다음 차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버스에서 내려 역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나 역에서 나와 버스에 올라탄 사람, 모두가 잠시 머물렀다 떠나가는 곳, 서울 역은 사람을 오래 보듬지 않는 곳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으로 6열 종대로 행진하는 30명쯤의 경찰들이 보인다. 지하철역 쪽에서 역사로 들어오는 모양인데 긴장한 듯한 표정의 얼굴이 더욱 앳되어 그들의 제복만큼이나 푸르게 보인다. 앞줄에 선 사람들이 든 방패가 새삼 낯설다. 방패까지 들고 어디로 여행하는지 의아하다. 주말이 아닌데도 대기실의 의자는 거의 차 있었다. 3층 난간 쪽 의자에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다. 책을 읽을 요량으로 가운데 자리를 파고 들었다. 숨은 개구리가 있을 것 같아 표지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책갈피를 두장쯤 넘겼을 때 섬뜩한 소리에 귀가 열렸다. “몰래 사진 찍는 놈들이 있다. 카메라에 잡힌 놈 한두 놈씩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다.” 매일 술 마시고 네발로 기는 서씨와 시도 때도 없이 소리 지르던 정씨가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동료들에게 주의를 주는 것 같았고 영생원엔가 어딘가로 보내는 것이 틀림없다고 한 남자가 목소리를 높여 열을 올리고 있었다. “권가 놈 그 새끼는 중국 같다 와서도 십원 한장 못 받았다. 개새끼들 허구헌날 우리 같은 놈만 이용한다. 그런 놈들은 모두 때려 죽여야 해”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모두 때려 죽여야 한다는 말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책 속에 있던 활자들이 모두 기어 어디론가 도망을 하는지 눈앞이 어지럽다. 승객 대기용 의자를 차지하고, 무리지어 앉아있거나 비스듬히 누워있는 사람들, 빈자리가 있어서 앉았던 자리는 공교롭게도 노숙자들이 포진하고 있던 자리의 가운데였다. 일어서려는데 누군가가 뒷덜미를 낚아채는 것 같아 식은땀이 흘렀다. 화장실을 돌아 먼발치에서 3층 역사를 둘러보았다. 양쪽 난간 쪽의 자리를 그들이 포진하고 대부분의 승객들은 상가 근처의 자리에 앉거나 서있었다. 두 명씩 조를 맞춘 듯 앳되어 보이는 경찰이 규칙적으로 지나갔으나 누구를 지도하거나 제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방패를 들고 사열을 받듯 들어온 경찰들의 행선지가 바로 여기였음을 그제서야 알았다. 집을 나설 때 조심해서 다녀오라던 남편의 말도 새삼 떠올랐다. 한두 번 다닌 곳도 아닌데 별 걱정을 한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남편은 이런 사정을 알고 한 말이었나 보다. 앉을자리도 마땅치 않거니와 앉고 싶지도 않아 하릴없이 역사를 맴돌았다. 벽면 뒤편에 40대로 보이는 한 여자가 벽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 다리를 길게 뻗고 있다. 남루하고 초췌하긴 해도 그녀의 머리나 얼굴은 비교적 깨끗해보였다. 그녀도 한때는 부드럽고 여린 엄마였으리라. 무엇이 그녀를 이 겨울의 서울 역으로 몰아내었을까. 서늘한 기운이 내게까지 전이되는지 가슴이 새삼 시리다. 한쪽 구석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신문을 들여다보며 수군거린다. 그 중의 한사람에게 자꾸 눈이 간다. 구부정한 어깨의 뒷 모습이 많이 본 듯하다. 혹시 내 아재가 아닐까? 아재, 대학을 졸업하고 청춘을 바치다시피 열성으로 일하던 회사가 문을 닫았을 때 그의 인생도 함께 문을 닫은 사람이다. 주위에서는 아직 젊으니 무엇이라도 다시 시작하지 못하랴 했지만 가뜩이나 경기가 어려운 시기에다 마흔줄에 접어든 그가 새 직장을 구하기가 쉬울 리가 없었다. 자라면서부터 지금껏 들어온 착함과 성실함은 무능과 무기력이 되어 처분된 회사의 기계와 함께 폐기 처분된 고철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두해를 이리저리 뛰어 다니다가 어느 날부터 방안 깊숙이 침잠하고 말았다. 남자가 맨날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청소도 안된다고 비아냥대는 아지매의 푸념을 뒤로하고 어느 날 저녁때 슬거머니 대문을 나선 아재는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족들도 갑갑해서 바람이라도 쐬고 돌아오려니 했었다. 가방하나 챙겨가지 않은 사람이 며칠이나 가겠냐던 집안어른들도 열흘이 지나자 사색이 되었다. 한해가 지난 어느 날 서울 공원 어디선가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는 그를 만났다는 고향사람의 말에 사흘간을 주변을 샅샅이 찾았으나 허사였다. 그때 고향사람에게 아내가 집을 나갈까봐 자기가 먼저 집을 나왔다면서 돈 벌어 돌아오겠다고 하더라는 말이 온 집안사람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말았다. 2층 역사의 뉴스를 내 보내고 있는 텔레비전 앞은 수십 명이나 됨직한 그들이 차지하고 있어 승객들은 가까이 갈 엄두도 못내는 듯하다. 뉴스를 빠뜨리지 않고 보고 신문을 샅샅이 훑는 그들은 60년대의 넝마주의 처럼 무식쟁이가 아니다. 약자도 아니다. 마치 서울 역을 제 집, 제 물건처럼 차지하고 주인행세를 한다. 전광판은 출발 15분전부터 개찰을 시작한다고 알리는데 아직 30분도 더 남은 개찰구 앞을 승객들이 늘어서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역사를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정면에 걸려있는 밝고 환한 초대형 광고판은 ‘한국철도와 함께 세계로 미래로.’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한 세상’ 이라는 문구를 띄워 승객들을 향해 서둘러 떠나라, 떠나라고 독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개찰구로 들어서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언젠가 어디선가 만났음직한 그들에게서 어두운 터널을 보는 것 같았다. 역은 사람을 오래 보듬지 않으니 잠시 머물다가 당신들도 이 플랫폼을 빠져 나가 라고, 터널은 아무리 어둡고 길어도 마침내 밝은 햇살 앞에 제 몸을 들어내는 법이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2005. 5. 20 3차 수정 |
첫댓글 노숙자가 들끓는 서울역은 어두운 터널. 그들도 기차처럼 어서 터널 밖 환한 세상으로 나와야 하리라. 글을 읽으며 오늘의 세태 한 부분에 가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