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은 감옥에서 죽었고, 동생은 학문의 금자탑을 세웠다.
경남 함안의 김해 김씨 집안, '설도 김서종'과 '일산 김두종' 형제의 이야기다.
동생부터 말하자.
'한국의학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일산 김두종(金斗鍾, 1896~1988) 대형이다.
열네 살이던 1910년 서울 휘문의숙, 지금의 휘문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의학과 역사에 눈을 떴다. 휘문을 마치고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퇴학당했다.
식민지의 의학도가 걸을 길이 막히자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부립의학전문학교(京都府立醫學專門學校)를 마쳤고, 다시 중국으로 가 내과의사로 병원을 열었다.
의사로 자리 잡을 만한 나이인 마흔에, 그는 진료실을 벗어나 만주의과대학 동양의학연구소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서양의학으로 기운 시대에 동양의학의 역사를 파고들겠다는 선택이었다. 그 연구 끝에 1945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광복이 되자 곧장 귀국했다.
귀국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사학(醫史學)을 강의하며 부속병원장을 맡았다. 이 땅에서 의학의 역사를 학문으로 세운 출발점이었다.
1957년에는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의학사연구소 연구원으로 건너가 한국의학사를 연구했다. 대한적십자사의 전신인 조선적십자사에서 초대 보건부장을 지냈고 뒷날 부총재에 올랐다.
1960년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한국과학사학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이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냈으며 1980년 학술원 원로회원이 되었다.
그의 학문은 두 개의 봉우리를 남겼다. 하나는 <한국의학사>다. 의학을 기술의 발전사로만 보지 않고 문화적 의의와 사상적 배경까지 아울러 서술한, 이 분야의 초석이 된 저작이다.
또 하나는 <한국고인쇄기술사(韓國古印刷技術史)>다. 고서의 간행연대와 판본, 자체(字體), 서문과 발문까지 파고든 이 책으로 그는 서지학의 개척자로도 불린다. 평생 모은 고서와 자료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돼 개인문고 1호인 '일산문고'가 되었다.
이제 형을 말할 차례다.
일산의 형 설도(雪島) 김서종(金書鍾) 대형은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나와 교육과 사업으로 동포를 도운 사람이다. 1915년 대종교에 입교했고, 이듬해 홍암 나철 대종사가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명할 때 곁에서 수행했다.
북만주에서 농장을 일구고 하얼빈에서 회사를 세워 재만 동포의 살림을 떠받치는 한편, 하얼빈에 선도회를 조직해 포교에 앞장섰다. 그리고 1942년 임오교변. 일제가 대종교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한 그 교난에 형도 붙잡혔고, 모진 고문 끝에 이듬해 액하감옥에서 옥중 순국했다.
대종교가 받드는 '순교십현', '임오십현'의 한 분이다.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형은 목숨으로 겨레의 얼을 지켰고, 동생 의학사로 겨레의 학문을 세웠다. 한 형제의 두 길이 그렇게 갈라졌으되, 뿌리는 하나였다.
아래 사진은 사진가 신상우 선생의 인물 사진 가운데 일산 김두종 대형. 그리고 대종교 환국 기념사진 속의 일산 김두종 대형의 젊은 시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