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대승(慶大升)은 청주(淸州) 사람이며, 아버지 경진(慶珍)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다. 경대승은 완력이 남보다 뛰어났고,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서 집안의 살림살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이 15세에 음보(蔭補)로 교위(校尉)가 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장군(將軍)이 되었다. 경진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야비하여 남들의 땅을 많이 빼앗았는데, 그가 죽자 경대승은 모든 전안(田案)을 선군(選軍)에 바치고 하나도 갖지 않아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감복하였다. 명종(明宗) 8년(1178) 청주 사람들과, 청주 사람이면서 개경(開京)에 적(籍)을 두고 살다가 〈청주로〉 물러나 살던 사람들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물러나 살던 사람들을〉 거의 다 잡아 죽이자, 개경에 남아있던 나머지 무리들이 소문을 듣고 원수를 갚고자, 왕의 교서(敎書)를 위조하여 결사대[死士]를 모아서 청주로 향하였다. 왕이 장군 한경뢰(韓慶賴) 등을 보내 쫓아가 멈추도록 했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그들은〉 청주 사람들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사망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다. 당시 경대승은 대장군(大將軍) 박순필(朴純弼)과 함께 청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있었는데 제지하지 못했다 하여 파직되었으며, 청주목(淸州牧)의 부사(副使) 조온서(趙溫舒) 역시 파면되었다.
경대승이 일찍이 정중부(鄭仲夫)가 발호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그를 토벌하고자 꾀하였으나 워낙 일이 어렵고 중대하여 마음속에 감추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마침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몰래 공주에게 장가들려는 계략을 꾸미자 왕이 근심하였다. 경대승이 정중부를 치려는 결심을 굳혔으나, 정중부의 사위인 송유인(宋有仁)을 두려워하여 기회를 얻지 못하던 중, 송유인이 문극겸(文克謙)과 한문준(韓文俊)을 몰아낸 일로 크게 인심을 잃고, 조정의 관료들도 모두 그를 바로 보지 않게 되었다. 견룡(牽龍) 허승(許升)은 용력(勇力)이 있어 사람들이 복종하였고, 정균이 그를 좋아했는데, 허승과 대정(隊正) 김광립(金光立)·준익(俊翼) 등은 모두 경대승과도 친한 사이였다.
〈명종(明宗)〉 9년(1179) 경대승(慶大升)이 허승(許升)에게 말하기를, “내가 흉악한 무리들을 제거하고자 하는데, 네가 따라만 준다면 일이 성공할 것이다.”라고 하니 허승이 허락하였다. 경대승이 말하기를, “장경회(藏經會)가 끝나는 밤에는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반드시 모두 곤히 잠들 것이다. 내가 결사대[死士] 30여 명을 화의문(和義門) 밖에 매복시킬 테니, 너는 먼저 안에서 정균(鄭筠)을 죽인 다음 휘파람소리로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하면 내가 숨겼던 결사대를 출동시켜 호응하겠다.”라고 하였다. 밤 4경(更)에 허승이 정균의 숙직소로 들어가 바로 죽이고 휘파람을 불자, 경대승이 결사대를 이끌고 왕궁의 담장을 넘어 들어와 대장군(大將軍) 이경백(李景伯), 지유(指諭) 문공려(文公呂)를 죽이고 눈에 띄는 사람은 모조리 다 죽였다. 궁궐 안이 떠들썩하고 칼날이 마구 부딪혀 왕이 몹시 놀라자, 경대승이 침전(寢殿) 밖에 와서 큰 소리로 아뢰기를, “신(臣)들이 사직(社稷)을 보호하려는 것이니, 청컨대 임금께서는 두려워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궁궐 문을 나와서 경대승 등을 부르고는 손수 술잔을 내려주고 위로하였다. 이에 경대승은 왕에게 금군(禁軍)을 출동시켜 정중부와 송유인(宋有仁) 부자를 체포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중부 등이 변고를 듣고 도망쳐 민가에 숨어 있었지만 모두 체포하여 목을 베고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다. 왕이 경대승을 불러 묻기를, “정균의 승선(承宣) 자리를 경(卿)에게 주고자 하는데?”라고 하니, 경대승이 말하기를, “신은 글자를 몰라 감히 바랄 바가 아니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경이 아니면 누가 하면 좋겠는가? 이부시랑(吏部侍郞) 오광척(吳光陟)은 어떠한가?”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승선은 왕명을 출납하는 직이니, 유학(儒學)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불가합니다. 오광척이 비록 글은 조금 알기는 하지만, 역시 무신(武臣)이니 정균과 같아질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왕은 아무 말이 없었다. 경대승은 오광척이 기필코 승선에 임명될 것을 알고 그를 미워하였다.
경대승의 족형(族兄)인 장군(將軍) 손석(孫碩)은 평소 오광척과 원한이 있어서 경대승을 꾀어 함께 그를 죽이고, 드디어 네 집안과 같은 일당인 장군 김광영(金光英)과 지유(指諭) 석화(石和)·습련(襲連) 및 중랑장(中郞將) 송득수(宋得秀)·기세정(奇世貞) 등을 잡아 죽였다.
조정의 신료들이 궁궐로 나아가 하례하니 경대승이 말하기를, “임금을 시해(弑害)한 자가 아직도 살아있는데 축하가 무슨 소용인가?”라고 하니, 이의민(李義旼)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였다. 무관(武官)들 일부가 공공연히 말하기를, “정시중(鄭侍中)이 앞장서 대의(大義)를 부르짖고 문사(文士)들을 억눌러 여러 해 쌓였던 우리들의 울분을 씻어 줌으로써, 무관의 위세를 펼쳤으니 그 공이 막대하다. 지금 경대승이 하루아침에 4명의 공(公)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토벌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경대승이 두려워 결사대 1백 수십 명을 불러 모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길러 〈변란에〉 대비시키고는 도방(都房)이라 불렀다.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두고 날을 바꾸어가며 숙직하게 하였으며, 더러는 그들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자면서 정성스럽게 돌보아주는 마음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얼마 후 사직하고 집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조정에 나아가 결정에 관여하였다. 경대승이 정중부와 송유인을 제거한 이후부터 마음이 불안하여 항상 몇 사람을 거리로 보내 몰래 〈집 주변의〉 길거리를 살피게 하였다. 우연히 유언비어를 들으면 즉시 잡아 가두고 국문(鞫問)하여 여러 차례 큰 옥사를 만들고, 혹독한 형벌을 적용하였다.
당시 개경(開京)에 도적들이 많이 일어나 스스로 경대승의 도방이라 일컬었는데, 유사(有司)에서 체포하여 옥에 가두면 경대승이 그때마다 석방하니, 이로 말미암아 〈강도들이〉 약탈을 공공연하게 자행하면서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경대승의 문객(門客)이 길에서 어떤 양가(良家)의 자제를 죽이자 유사에서 체포하여 죄를 다스리려고 하였지만, 경대승이 힘써 구해 피할 수 있었다. 허승과 김광립 등은 〈경대승과〉 같이 공을 세웠다고 믿고, 거드름을 피우며 방자하게 행동하면서 몰래 불량배[惡少]를 길렀다. 또 세자[東宮]를 가까이에서 모신다며 세자궁의 뒤 벽 쪽에서 침식(寢食)하면서 밤새도록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등 곁에 아무도 없는 듯 굴었다. 경대승이 이를 미워하여 허승을 자기 집에 불러서 죽였으며, 도중에 만난 김광립도 죽여 버렸다. 그리고 군사를 동원해 자신을 호위하게 하고 아뢰기를, “허승 등이 제멋대로 굴면서 신을 죽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반역[不軌]까지 도모하였습니다. 일이 급박해 아뢸 겨를이 없어 먼저 그들을 죽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근신(近臣)을 시켜 그를 위로하였으며, 재상(宰相) 이하 관리도 모두 그 집으로 찾아가거나 혹은 글을 올려 축하하였다. 경대승은 점차 편안해져 군사로 호위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명종(明宗)〉 11년(1181) 전 대정(隊正) 한신충(韓信忠)·채인정(蔡仁靖)·박돈순(朴敦純) 등이 반란을 모의하였는데, 영사동정(令史同正) 대공기(大公器)가 알아차리고는 경대승(慶大升)에게 보고하였다. 경대승이 왕에게 아뢰고 그들을 체포하여 국문(鞫問)하였는데, 석화(石和)와 별장(別將) 박화(朴華)·주부(注簿) 이돈실(李敦實)이 연루된 것을 알았다. 이에 한신충·채인정·박돈순 등을 섬으로 유배하고, 석화를 남해현령(南海縣令), 박화를 하산도구당사(河山島勾當使)로 좌천시켰으며, 이돈실은 광주(廣州)로 유배를 보냈다. 왕이 속으로는 경대승을 꺼리면서도 겉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과시하려고 날마다 진귀한 음식과 의복 및 보화(寶貨)를 하사하였으며, 아뢰며 요청하는 것은 모두 다 들어 주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달려와 아부하였지만, 학식 또는 용맹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경대승이 다 거절하니, 무관(武官)들이 모두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였다.
〈명종〉 13년(1183) 경대승이 갑자기 정중부(鄭仲夫)가 칼을 잡고 큰 소리로 꾸짖는 꿈을 꾸었다. 이로 인해 병을 얻어서 죽으니, 나이가 30세였다. 장례를 지내는데 길에 슬피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 경대승이 정중부를 토벌할 때, 견룡(牽龍) 김자격(金子格)이 힘써 도왔기에 경대승이 그를 아껴 도방(都房)을 통솔하게 하였다. 경대승이 죽자 도방에서 돈을 거두어 장사지낸 후, 해산을 앞두고 다시 모여 술을 마셨는데 김자격이 무고하여 아뢰기를, “경대승의 도방이 이따금 다시 모이는 것은 장차 반란을 일으키기 위함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평소에 경대승을 꺼렸으므로 중방(重房)에 명하여 그들을 잡아들이고 대장군(大將軍) 정존실(鄭存實)·오숙(吳淑) 등으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잠시라도 도방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모조리 잡혔으며, 혹 도망하여 숨으면 부모와 아내, 자식 및 친척까지 붙잡아다 고통스럽게 하니, 숨었던 자들이 스스로 나오거나 자살하였다. 모두 60여 명을 체포하고서도 다시 정존실 등에게 지시해 심하게 매질을 하여 끝까지 일당을 찾아내게 하였다. 또 내관(內官)들에게 형벌이 가혹한지 너그러운지를 감시하게 하니 더욱 혹독한 매질이 가해졌다. 먼 섬으로 유배를 간 사람들도 대부분 중도에 죽어버려, 남은 사람은 4~5명에 지나지 않았다.
오광척(吳光陟)의 아버지 오정(吳挺)은 일찍이 낭장(郞將)이 되었다. 서도(西都)가 반란을 일으키자 인종(仁宗)은 오정에게 조서(詔書)를 지니고 가서 은밀히 여러 성을 타이르도록 명령하였다. 오정이 조서를 옷 속에 숨긴 채 걸어서 지름길을 가다가 나졸(邏卒)에게 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때 어떤 못생긴 여자가 음식을 해주었는데, 오정이 이를 고맙게 여겨 부부되기를 약속하였고 드디어 오광척을 낳았다. 뒤에 오정은 여러 차례 승진하여 상서(尙書)에 이르렀고, 늙어서 치사(致仕)하였는데, 처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서 오광척을 불러다가 뒤를 잇게 하였다. 오광척은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었는데, 유사(儒士)와 놀기를 즐기고, 무반(武班)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의종(毅宗) 말기에 별장(別將)·견룡행수(牽龍行首)로 있다가 평소에 이의방(李義方)과 친해서 천우위장군(千牛衛將軍)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금오위장군 이부시랑(金吾衛將軍 吏部侍郞)이 되었다. 명종이 3품직에 제수하고자 하니 오광척이 아뢰기를, “신(臣)이 적은 나이에 4품에 임명되고, 또 이부(吏部)를 겸하였으니, 〈이것으로〉 신은 족합니다.”라고 하며 사양하고, 양주도(楊州道)·충주도(忠州道)의 찰방사(察訪使)로 나갔다. 그때 손석(孫碩)의 아버지가 수주사(水州使)로 있었는데, 성질이 탐욕스럽고 야비하여 재물을 빼앗는데 끝이 없어 민(民)들이 괴로워하였다. 손석이 두려워하여 오광척을 찾아가 좋게 봐주기를 빌었으나, 오광척이 듣지 않고 결국 그를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이 때문에 손석이 오광척과 사이가 벌어져 결국 경대승을 꾀어 그를 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