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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민(安置民) - 고려 무신정권 때 경주 안강현 사람
안치민(安置民, 생몰년 미상) 본관은 안강(安康). 자는 순지(淳之), 호는 기암(棄菴), 수거사(睡居士), 취수선생(醉睡先生). 경주(慶州)에 은거하여 살았고 벼슬하지 않았다. 이규보(李奎報), 이인로(李仁老), 유승단(兪升旦) 등과 함께 문명(文名)이 높았고 그림에 능하여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 최자(崔滋)가 《속파한집(續破閑集)》 서문에서 고려 광종조부터 당대까지 문명(文名)이 높은 이들을 ‘모두 종경(鐘磬)에 비길 인물들로 뒤따라 일어나 별과 해같이 서로 광휘를 드러내었다.’라고 기술하였는데, 당대의 인물로 이인로, 이규보, 진화(陳澕) 등과 나란히 안치민(安置民)을 꼽았다. 이규보가 안치민의 시권(詩券)을 돌려보내며 지은 시에, 시의 격조와 문장의 풍부함이 송 나라 시인 황정견(黃庭堅)과 당 나라 문장가 유종원(柳宗元)에 견줄 만한데도, 나라를 위해 쓰이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또 후한(後漢) 말기의 처사(處士) 방덕공(龐德公)을 떠올리게 한다며 ‘눈썹은 실처럼 드리워졌고, 눈동자는 물같이 맑구나[眉毛垂似絲 眸子炯如水].’라고 묘사하였는데, 안치민의 고결한 면모와 은일지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이 복야가 작은 병풍을 내어 놓고 그림을 그리라 하나 자본이 좁아 뜻을 다 펼 수 없으므로, 다만 대나무 꼭대기 몇 가지를 그리고 그 뒤에 쓰다[李僕射岀小屛命作墨君地窄未能展意只寫竹頭數梢仍題其後云]’라는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수만이 《동문선》에 전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경상도(慶尙道) / 경주부(慶州府)의 기록을 보면 속현(屬縣)이 넷이니, 안강현(安康縣)은 본래 신라 비화현(比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관할[所領]을 정하매 경주부(慶州府)의 임내(任內)로 붙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 경오에【바로 명나라 태조 황제 홍무(洪武) 23년.】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본조 태조 3년 갑술에【바로 홍무 27년.】 다시 본부(本府)의 임내(任內)로 하였다.【신라 파사왕(婆娑王)이 음집벌국(音汁伐國)을 취(取)하여 음집화현(音汁火縣)을 두었는데, 뒤에 그 땅을 안강현(安康縣)에 합속(合屬)시켰다.】 본부(本府)의 호수는 1천 5백 52호, 인구가 5천 8백 94명이며, 안강(安康)의 호수는 2백 70단(單) 1호, 인구가 1천 4백 50명이요, 기계(杞溪)의 호수는 1백 77호, 인구가 4백 90단(單) 1명이며, 신광(神光)의 호수는 95호, 인구가 4백 48명이요, 자인(慈仁)의 호수는 2백 37호, 인구가 1천 6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66명, 진군(鎭軍)이 2백 9명, 선군(船軍)이 9백 40단(單) 1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이다. 하늘에서 내린 성이 3이니, 박(朴)·석(昔)·김(金)이다. 내성(來姓)이 1이니, 강(康)이요,【동주(洞州)에서 왔다.】 사성(賜姓)이 1이니, 설(偰)이며,【원(元)나라 숭문감 승(崇文監丞) 설손(偰遜)은 고창국(高昌國) 사람인데, 원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동방으로 와서, 그 맏아들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가 관향(貫鄕)을 주기를 청하니, 태조가 계림(鷄林)으로 본관을 삼기를 명하였다.】 속성(續姓)이 1이니, 양(楊)이다.【기계(杞溪)에서 왔는데, 이때에 향리(鄕吏)가 되었다.】 안강현(安康縣)의 성이 5이니, 안(安)·노(盧)·김(金)·황(黃)·염(廉)이요, 중국에서 온 성[唐來姓]이 2이니, 소(邵)·변(邊)이며, 속성(續姓)이 3이니, 윤(尹)【송생(松生)에서 왔다. 】·최(崔)·이(李)【본부(本府)에서 왔다. 모두 향리(鄕吏)가 되었다.】 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21권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기록을 보면 【속현】안강현(安康縣) 부(付)의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비화현(比火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가 고려 현종(顯宗) 때에 예속되었다.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본조에서는 태조조에 다시 경주의 속현(屬縣)으로 하였다. 【성씨】본부(本府) 박(朴)ㆍ석(昔)ㆍ김(金) 모두 신라의 종성(宗姓)이다. 이(李) 급량(及梁). 최(崔) 사량(沙梁). 정(鄭) 본피(本彼). 손(孫) 모량(牟梁). 배(裵) 한지(漢祗). 설(薛) 습비(習比). ○ 이상 6부(部)의 성(姓)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때에 내려준 것이다. 강(康) 동주(洞州). 설(偰) 회골(回鶻). 자세한 것은 인물(人物) 조에 나온다. 양(楊) 속성(續姓)이다. 안강(安康) 안(安)ㆍ노(盧)ㆍ김(金)ㆍ황(黃)ㆍ염(廉), 소(邵)ㆍ변(邊) 모두 당성(唐姓)이다. 윤(尹) 송생(松生). 기계(杞溪) 유(兪)ㆍ양(楊), 익(益) 맹(孟)이라 하기도 한다. 윤(尹), 김(金) 김해(金海). 자인(慈仁) 박(朴)ㆍ한(韓)ㆍ정(鄭)ㆍ주(周), 임(任) 진도(珍島). 변(邊) 가은(加恩). 신광(神光) 서(徐)ㆍ진(陳)ㆍ윤(尹)ㆍ신(申) 구사(仇史) 정(鄭)ㆍ석(石)ㆍ조(曹), 전(全) 장산(章山). 죽장(竹長) 갈(葛) 속성(續姓)이다. 이(李)ㆍ김(金)ㆍ송(宋) 모두 내성(來姓)이다. 성법이(省法伊) 김(金)ㆍ최(崔) 모두 속성(續姓)이다. 비안곡(比安谷) 이(李)ㆍ송(宋)ㆍ갈(葛) 【명환】고려 안유(安裕) 유수로 있었다. 안석(安碩) 공민왕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니, 스스로 자기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났다 하여 아는 것을 다 말하니, 임금은 그가 사정(事情)에 어둡다고 하였다. 안석이 드디어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수령되기를 청하여 계림윤(鷄林尹)으로 나왔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안보(安輔)ㆍ조운흘(趙云仡) 모두 부윤으로 있었다. 【우거】고려 오세재(吳世才) 고창군(高敞郡)의 인물조에 자세히 나온다. 안치민(安置民) 자는 순지(淳之)이고, 호는 기암(棄菴)이다.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정동성(征東省) 막료(幕僚)로 있을 때에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에, “시의 격조가 높음은 황정견(黃庭堅)의 체(體)보다 낫고, 문장이 풍부하기는 오히려 유자후(柳子厚)의 풍(風)이 있도다. 다만 나라를 빛내는 솜씨가 되지 못하고, 풀 사이 가을 벌레 우는 것을 배움이 한스럽다.” 하였고, 또, “눈썹은 실처럼 드리워졌고, 눈동자는 물같이 맑구나. 내가 방덕공(龐德公)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대를 보니 그인가 하네.” 하였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제12권에 안치민(安置民)과 관련된 고율시(古律詩) 2개가 남아있다.
迴安處士置民詩卷 在軍幕作。[처사(處士) 안치민(安置民)의 시집(詩集)을 되돌려 보내며 군막(軍幕)에 있을 때 지었다.] 고아한 정취 황정견(黃庭堅)의 시보다 낫고 / 詩高全勝庭堅體 풍부한 문장 유자후(柳子厚)의 풍도 남아 있네 / 文贍猶存子厚風 다만 세상에 알려진 대가(大家) 못 되고 / 但恨未成華國手 초야에 묻혀 읊조리기만 하는 게 한일세 / 草間呼叫學秋蟲
又贈安處士[또 안 처사에게 주다] 눈썹은 실같이 길고 / 眉毛垂似絲 눈동자는 물같이 맑네 / 眸子炯如水 방덕공(龐德公)을 보지는 못했으나 / 我不見龐公 그대가 바로 그 아닌가 하오 / 見君疑卽是
방덕공(龐德公) : 후한 시대 고사(高士). 처자(妻子)를 데리고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은거(隱居)하였다.
『동문선(東文選)』제19권에 안순지(安淳之)가 지었다는 칠언절구(七言絶句) 시(詩)가 전해온다.
이복야가 작은 병풍을 내어 놓고 그림을 그리라 하나 자본이 좁아 뜻을 다 펼 수 없으므로, 다만 대나무 꼭대기 몇 가지를 그리고 그 뒤에 쓰다[李僕射岀小屛命作墨君地窄未能展意只寫竹頭數梢仍題其後云] 다락 아래 대 수풀 백 척이나 솟았는데 / 樓下篁林百尺脩 다락이 높아 다만 두어 가지만 보이네 / 樓高只得數梢頭 땅을 뽑는 능릉한 옥을 보고자 하면 / 要看拔地凌凌玉 층계를 밟아 다락을 내려야 하리 / 且踏層梯暫下樓
『동문선(東文選)』제20권에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 시(詩)에 안순지(安淳之)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회 안순지 시권(回安淳之詩券)
높은 시는 흡사 정견의 체와 같고 / 詩高全似庭堅體 넉넉한 문은 아직도 자후의 풍이 있다/ / 文瞻猶存子厚風 다만 한하건대 나라를 빛내는 솜씨가 되지 못하고서 / 但恨未成華國手 마치 풀 속에서 읊조리는 가을벌레 같아라 / 草閒吟叫似秋蟲
『동문선(東文選)』제84권 최자(崔滋)가 쓴「속파한집(續破閑集)의 서문(序文)」에 안순지(安淳之)의 기록이 남아있다. 文者。蹈道之門。不涉不經之語。然欲鼓氣肆言。竦動時聽。或涉於險怪。况詩之作。本乎比興諷喩。故必寓託奇詭。然後其氣壯。其意深。其辭顯。足以感悟人心。發揚微旨。終歸於正。若剽竊刻畫。誇耀靑紅。儒者固不爲也。雖詩家有琢鍊四格。所取者。琢句鍊意而已。今之後進。尙聲律章句。琢字必欲新。故語生。鍊對必以類。故其意拙。雄傑老成之風。由是喪矣。我本朝以人文化成。賢雋間出。贊揚風化。光宗顯德五年。始闢春闈。擧賢良文學之士。玄鶴來儀。時則王融,趙翼,徐煕,金策。才之雄者也。越景,顯數代間。李夢游,柳邦憲以文顯。鄭倍傑,高凝以詞賦進。崔文憲公冲。命世興儒。吾道大興。至於文廟時。聲明文物。粲然大備。當時冢宰崔惟善。以王佐之才。著述精妙。平章事李靖恭,崔奭。參政文正李靈幹,鄭惟産。學士金行瓊,盧坦。濟濟比肩。文王以寧。厥後朴寅亮,崔思齊,思諒,李䫨,金良鑑,魏繼廷,林元通,黃瑩,鄭文,金緣,金商祐,金富軾,權迪,高唐愈,金富佾,富轍,洪瓘,印份,崔允儀,劉羲,鄭知常,蔡寶文,朴皓,朴椿齡,林宗庇,芮樂全,崔諴,金精,文淑公父子,吳先生兄弟。今時李學士仁老,兪文安公升旦,金貞肅公仁鏡,李文順公奎報,李承制公老,金內翰克己,金諫議君綏,李史館允甫,陳補闕澕,劉,李兩司成,咸淳,林椿,尹于一,孫得之,安淳之。皆金石間。作星月交輝。漢文唐詩。於斯爲盛。然而古今諸名賢編成文集者。唯止七八家。自餘名章秀句。皆堙沒無聞。李學士仁老。略集成編。名曰破閑。今晉陽公以其書未廣。命予續補。強拾廢忘之餘。得近體詩若干聯。或至於浮屠兒女輩。有一二事可以資於談笑者。雖詩不佳幷錄之。共成一部。分爲三卷。名之曰續破閑。又得李中書藏用家藏。鄭中丞敍所撰雜書三卷。幷附于後編。以俟通儒刪補。 글월이란 도를 밟아 들어가는 문(門)이므로 불경(不經)한 말은 쓰지 아니한다. 그러나 기운을 고동시키고 웅변을 토해서 시인(時人)의 시청(視聽)을 놀라게 하려면 간혹 험하고 괴이한 말을 쓰게 된다. 더구나 시의 제작은 비흥(比興)과 풍유(諷喩)에 근본하므로 반드시 기괴한 데에 의탁한 연후라야 기운이 웅장해지고, 그 뜻이 깊어지고 그 말이 드러나서 인심을 감동시키고 은미한 뜻을 발양시켜 마침내 정(正)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만약 표절(剽竊)하고 꾸며서 화려함만 드러내 자랑하는 것이라면 유자(儒者)가 진실로 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시가(詩家)가 4격(四格 기〈起〉ㆍ승〈承〉ㆍ전〈轉〉ㆍ합〈合〉)을 다듬기는 하였으나 구한 바는 글귀를 탁마(琢磨)하여 뜻을 가다듬은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지금 후진들은 성률(聲律)과 장구(章句)를 숭상하여 글자를 탁마하기를 반드시 새롭게 하려 하므로 말이 설고, 대우(對偶)를 맞추기를 반드시 그 유(類)로써 하므로 그 뜻이 졸렬해지니, 웅걸하고 노성한 기풍은 이로 말미암아 상실되었다. 우리 조정에서 인문(人文)으로 교화를 이루어 어질고 준건한 사람이 간간이 나타나 풍화(風化)를 도와서 발양하게 하였다. 광종(光宗) 현덕(顯德) 5년에 비로소 과거의 제도를 실시하여 현량문학(賢良文學)의 선비를 거용하니, 현학(玄鶴)이 와서 춤을 추었으며, 당시 왕융(王融)ㆍ조익(趙翼)ㆍ서희(徐熙)ㆍ김책(金策)같은 이가 다 웅재(雄才)였었다. 경종(景宗)ㆍ현종을 지나는 두어 대 사이에 이몽유(李夢遊)ㆍ유방헌(柳邦憲)은 문(文)으로 현달하고, 정배걸(鄭倍傑)ㆍ고응(高凝)은 사부(詞賦)로 진출하고,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은 명세(命世)의 인물로 유학을 일으켜 우리 도가 크게 흥기하였다. 문종(文宗) 시대에 이르러 성명(聲明)과 문물(文物)이 찬란하게 갖추어졌으니, 당시의 총재(冢宰) 최유선(崔惟善)은 왕좌(王佐)의 재주로서 저술도 정묘하였으며, 평장사(平章事) 이정공(李靖恭)ㆍ최석(崔奭)과 참정(參政) 문정(文正) 이영간(李靈幹)ㆍ정유산(鄭惟產)과 학사(學士) 김행경(金行瓊)ㆍ노탄(盧坦)이 나란히 어깨를 견주어 마치 옛날 주 문왕(周文王)이 많은 어진 선비를 만나서 그 나라가 편안한 것같았다. 그후로 박인량(朴寅亮)ㆍ최사제(崔思齊)ㆍ최사량(崔思諒)ㆍ이오(李䫨)ㆍ김양감(金良鑑)ㆍ위계정(魏繼廷)ㆍ임원통(林元通)ㆍ황형(黃瑩)ㆍ정문(鄭文)ㆍ김연(金緣)ㆍ김상우(金商祐)ㆍ김부식(金富軾)ㆍ권적(權迪)ㆍ고당유(高唐愈)ㆍ김부일(金富佾)ㆍ김부철(金富轍)ㆍ홍관(洪瓘)ㆍ인분(印份)ㆍ최윤의(崔允儀)ㆍ유희(劉羲)ㆍ정지상(鄭知常)ㆍ채보문(蔡寶文)ㆍ박호(朴皓)ㆍ박춘령(朴椿齡)ㆍ임종비(林宗庇)ㆍ예낙전(芮樂全)ㆍ최함(崔諴)ㆍ김정(金精)ㆍ문숙공(文淑公) 부자(父子)ㆍ오(吳)선생 형제(兄弟)ㆍ지금 이 학사(李學士) 인로(仁老)ㆍ유 문안공(兪文安公) 승단(升旦)ㆍ김 정숙공(金貞肅公) 인경(仁鏡)ㆍ이 문순공(李文順公) 규보(奎報)ㆍ이 승제(李承制) 공로(公老)ㆍ김 내한(金內翰) 극기(克己)ㆍ김 간의(金諫議) 군유(君綏)ㆍ이 사관(李史館) 윤보(允甫)ㆍ진 보궐(陳補闕) 화(澕), 유(劉)ㆍ이(李) 두 사성(司成), 함순(咸淳)ㆍ임춘(林椿)ㆍ윤우일(尹于一)ㆍ손득지(孫得之)ㆍ안순지(安淳之)는 다 금석(金石)에 그 글이 기록되어 있어 달과 별이 서로 찬란하게 빛나듯 하니 한(漢)의 문과 당(唐)의 시가 이즈음에 전성이었다. 그러나 고금의 여러 명현 가운데 문집을 편성한 이는 오직 7, 8에 그치고, 나머지 명장(名章) 수구(秀句)는 대개가 묻혀서 전해지지 않았는데, 이 학사(李學士) 인로(仁老)가 대강 모아 편집하여 이름을 파한(破閒)이라 하였다. 지금 진양공(眞陽公)이 그 글이 널리 수집되지 못한 것을 병되게 여겨 나에게 명하여 속보(續補)하게 하므로 애써 황폐하고 유실한 나머지를 수집하여 근체시(近體詩) 약간의 연구(聯句)를 얻었다. 혹은 부도(浮屠)나 아녀(兒女)들이 지은 것 가운데에서도 한두 가지 사적이 담소(談笑)거리가 될 만하면 비록 시는 아름답지 못해도 아울러 수록하여 모두 일부(一部)를 만들어 3권으로 나누고 이름을 속파한(續破閒)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이 중서(李中書) 장용(藏用)의 가장(家藏)인 정 중승(鄭中丞) 서(敍)가 찬술한 잡서(雜書) 3권을 얻어 아울러 후편에 붙이어 통유(通儒)의 산보(刪補)를 기다리는 바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제11상 경신년 원종 충경순효왕(元宗忠敬順孝王) 원년(1260) 추7월 ○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仕)한 최자(崔滋)가 졸하였다. 자는 문장과 이재(吏才)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지위가 대관(大官)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그의 집에서 김인준의 여러 아들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푸니, 그때 사람들이 기롱하였다. 글을 올려 사퇴하고, 스스로 호(號)를 동산수(東山叟)라 하였다. 문집 10권이 있다. 그가 지은 《속파한집(續破閑集)》 서문에는 고려의 문학하는 선비들을 모두 서술하여 말하기를, “본조에는 인문(人文)으로써 교화를 이룬 어질고 뛰어난 이가 간간이 나왔다. 광종(光宗)이 비로소 춘위(春闈 회시(會試))를 여니, 그때에 왕융(王融)ㆍ조익(趙翼)ㆍ서희(徐熙)ㆍ김책(金策)은 재질이 뛰어난 사람들이었고, 경종(景宗)과 현종(顯宗)의 몇 대(代) 사이에는 이몽유(李夢遊)ㆍ유방헌(柳邦憲)이 문장으로 유명하며, 정배걸(鄭倍傑)ㆍ고응(高凝)은 사부(詞賦)로써 진출하였고,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은 유학(儒學)을 일으킨 것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쳐 문묘(文廟)의 문물(文物)이 크게 갖추어졌다. 당시 총재(冢宰) 최유선(崔惟善)은 왕을 도울 만한 인재로서 저술이 정묘(精妙)하였고, 평장사(平章事) 이정공(李靖恭)과 최석(崔奭), 참정(參政) 문정공(文正公) 이영간(李靈幹)과 정유언(鄭惟彦), 학사(學士) 김행경(金行瓊)ㆍ노탄(盧坦)과 그 뒤의 박인량(朴寅亮)ㆍ최사제(崔思齊)ㆍ최사량(崔思諒)ㆍ이오(李䫨)ㆍ김양감(金良鑑)ㆍ위계정(魏繼廷)ㆍ임원통(林元通)ㆍ황영(黃瑩)ㆍ정문(鄭文)ㆍ김연(金緣)ㆍ김상우(金商祐)ㆍ김부식(金富軾)ㆍ김부일(金富佾)ㆍ김부의(金富儀)ㆍ권적(權迪)ㆍ고당유(高唐愈)ㆍ홍관(洪瓘)ㆍ인빈(印份)ㆍ최윤의(崔允儀)ㆍ유희(劉羲)ㆍ정지상(鄭知常)ㆍ채보문(蔡寶文)ㆍ박호(朴皓)ㆍ박춘령(朴椿齡)ㆍ임종비(林宗庇)ㆍ예낙전(芮樂全)ㆍ최함(崔諴)ㆍ김정(金精)ㆍ문숙공(文淑公 문숙은 최유청(崔惟淸)의 시호) 부자(父子)ㆍ오세제(吳世才) 선생의 형제, 지금의 학사(學士) 이인로(李仁老)ㆍ문안(文安) 유승단(兪升旦)ㆍ정숙공(貞肅公) 김인경(金仁鏡)ㆍ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ㆍ승제(承制) 이공로(李公老)ㆍ내한(內翰) 김극기(金克己)ㆍ간의(諫議) 김군수(金君綏)ㆍ사관(史館) 이윤보(李允甫)ㆍ보궐(補闕) 진화(陳澕), 유충기(劉冲基)ㆍ이백순(李百順) 두 사성(司成)과 함순(咸淳)ㆍ임춘(林椿)ㆍ윤우일(尹于一)ㆍ손득지(孫得之)ㆍ안순지(安淳之)는 모두 종경(鐘磬)에 비길 인물들로 뒤따라 일어나 별과 해같이 서로 광휘를 드러내어 한나라 문장과 당나라 시(詩)가 이때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명현(名賢) 중에 문집(文集)을 엮어 놓은 사람은 오직 7~8가(家)에 그치었다. 그 나머지는 이름난 문장과 빼어난 시구가 모두 인멸(湮沒)되어 전하지 않는다.” 하였다.
출처 : http://www.myloveart.com/technote/read.cgi?board=don&y_number=17
고려시대(高麗時代) 화가 안치민(安置民)의 현실인식(現實認識) 김호동 - 영남대학교 교수
1170년 무신쿠데타로 말미암아 문벌귀족사회가 무너지고 무신정권이 탄생함에 따라 중앙정치무대에서의 권력투쟁이 격화되면서 사회경제적 모순이 더욱 심화되어 농촌사회의 분화가 가속화되는 속에서 농민, 천민들의 삶을 위한 투쟁이 역사의 전면에 표출화되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처하여 고뇌하고 방황하며 사유함으로써 한계상황에 처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여 내적 성찰과 도덕적 용기를 지니고 당시의 시대가 갖는 모순을 비판하고, 그에 저항한 지성은 현존하는 자료에서 더이상 찾을 수 없는 것인가?
본 절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안치민(安置民)이라는 한 인물을 주목하게 되었다.
안치민은 오직 힘의 논리만이 관철되던 무신정권이라는 시대적 상황, 즉 독재와 억압 속에서 맹목적 추종과 굴종만이 강요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時流에 편승하지 않으면서 시문과 그림을 통해 마음껏 현실비판적 견해를 토로하였다. 이는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거나 은둔자적 태도를 갖고 애써 현실에 초연한 자세를 보여주는 문인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는 비판하기 위해 말하고 행동하였지만, 전근대 신분제 사회에서 그가 속한 지배자적 신분의 속성상 그의 비판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체제전복을 위해 투쟁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민의 입장에 서서 사회의 변혁을 지지하는 처지에도 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지배층의 처지에서 당시 무너져가는 고려사회를 어떻게 다시 안정화시켜 나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체제에 대한 최소한의 비판과 저항마저도 자기와 무관한 일에 참견하려는 귀찮은 존재로 간주되어 권력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高麗史} 등의 사서에서 안치민의 이름 석자마저 언급되지 않음으로써 역사 속에 매몰되어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바로 이러한 안치민의 존재를 한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것이 본 節의 작성동기이다.
1) 안치민(安置民)과 경주(慶州)
안치민의 자는 순지(淳之)이며, 기암거사(棄菴居士), 수거사(睡居士), 혹은 안처사(安處士)라고 불리기도 하고, 자칭 수선생(睡先生)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뛰어난 문장가인 동시에 글씨와 그림에도 남다른 조예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그의 문집이 크게 성행하였지만 알아 모아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유고가 모두 흩어져 버렸다.
더욱이 그는 관직에 전혀 나아가지 않은 처사로 일관하면서 무신정권에 대해 거리낌없는 비판적 자세를 취하였기 때문에 역사의 표면에 전혀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현재 그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규보의『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최자의『보한집(補閑集)』등에 나타난 단편적 자료의 편린을 통해 그의 생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그(=최치원)가 살았던 곳을 이름하여 상서장(上書莊)이라고 불렀다. 후에 고사(高士) 이능봉(李能逢), 오세재(吳世才), 안순지(安淳之)가 계속하여 그 곳에 살았다.
② 의왕이 남쪽 먼 지방으로 달아났다. 이기(李琪)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림을 잘 그렸다. 그가 의왕의 초상을 그려서 동도 초당(東都草堂)에 봉안하고 아침저녁으로 예로서 모신다고 하였다. 기암거사가 우연히 그 초상을 보고 찬을 지었다.
③ (오)세재는 늙도록 때를 만나지 못하여 동도에서 방랑생활을 하는데 기암거사 순지가 시를 지어 주기를, 나는 원래 동남쪽 한 백성인데 / 늙고 게을러 농사짓지 못하겠기에 / 이 절에 와 한가로이 사는데 / 매양 사람들이 거사라고 불러주네 (하략)
④ 지난 해(신종5, 1202년) 11월에 정동(征東)의 명을 받았는데, 종군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은 아니나, 처사를 만나 뵙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만나 뵙게 될 날이 있을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이 도회에 난리가 치열한데 잘 계시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어 이 점이 염려가 되다가, 이 도회에 들어오자 시급히 만나 뵙고 싶었는데, 군문의 자물쇠를 굳게 잠그고 수비가 매우 엄중했으며, 또한 처사께서 이 도회에 사시는 분이므로 만일 만나보게 되면, 군중에서 의심 갖는 사람이 있게 될까 싶기 때문에 감히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지난번에 군막 안의 첨판 박랑중(朴郞中) 처소에서 처사께서 바야흐로 박공과 이야기 하실 때 마주쳤는데, 제가 평소에 안면이 없었으나, 그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고 치의 치관(緇衣緇冠) 차림을 하여 마치 세상에 나도는 도객이나 거사의 화상 같음을 보고서, 즉각 알아차려 이름을 물을 것도 없이 무릎을 마주대고 담화하기를 전에 마음껏 같이 서로 놀던 처지처럼 하였습니다.
우선 자료 ㉮①~④를 통해 안치민은 무신정권 성립직후부터 이규보가 정동군의 일원으로 경주에 내려가 활동을 할 당시까지 경주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료만으로는 그가 무신쿠데타를 계기로 화를 피해 경주로 온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경주에 살고 있었는지, 나아가 그의 출생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보한집(補閑集)』에서 안치민이 한림(翰林) 김극기(金克己)와 동읍동시인(同邑同時人)이라고 하였지만, 김극기 또한 그 출신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21권 「경주부(慶州府)」에 김극기의 시문이 다수 실려있고, 특히 모량역(牟梁驛)에서 읊은 시에,
고향 생각하는 마음 만리 밖에서 오랫동안 바람 앞 깃발 처럼 흔들리더니 / 홀연히 고향 향하여 채찍을 휘두르며 달려가네 / 먼 재는 점점 타향의 물색이 잠겨가고 / 어지러운 물소리는 처음으로 고향소리 들려주네.
라고 한데서 그의 고향이 모량역과 가까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경주부」속읍 안강현(安康縣)의 성씨조를 살펴보면, 토성으로서 김씨와 안씨가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김극기와 안치민은 안강현의 토성이족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속읍의 토성이족(土姓吏族)은 읍사(邑司)를 구성하여 외관이 파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호장(戶長) 부호장(副戶長) 등의 향리직 상층부를 배타적으로 독점하여 그들의 직역을 철저히 세습시켜 나감으로써 일읍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계급내혼제와 지역내혼제를 통해 그들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그러면서도 각 읍마다 읍사를 중심으로 반근착절되어 있었던 토성이족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상경종사(上京從仕), 유리(遊離), 소멸 등의 과정을 밟아 지역적 이동과 신분적 분화를 끊임없이 계속하였다.
이를 고려할 때 안치민이 농사짓지 않고서도 생활을 유지하면서 유학을 깊이 연구하고, 평생 관직에 나서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을 끝끝내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까운 선대가 안강의 읍사(邑司)조직 운영에 관여하는 등 재지유력층으로 존재하면서 일정한 항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가문적 배경을 갖고 있었던 그가 경주에 우거한 것은 아마도 선대로부터, 혹은 혼인을 통해 안강의 주읍인 경주에 일정한 재지적 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수의 대읍에 다수의 속읍이 예속된 대읍중심의 군현조직의 구조적 모순, 즉 주읍에 의한 속읍의 수탈이 12세기 이래 가속화되면서 속읍민의 유망이 역사의 표면에 두드러지게 나타게 되고, 일면 이의 개선을 위한 국가적 노력의 일환으로 속읍에 현령 감무의 파견이 이루어짐에 따라 속읍 향리의 재량권이 크게 위축되는 상황 속에서도 안치민이 주읍인 경주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우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안강은 계림부의 속현으로 역시 동경이라고도 부르는데 큰데에 통합되어 불리워진 것이다'라고 한데서 보다시피 안강은 흔히 경주로 불리워졌다. 따라서 경상도 지역의 거점도시로서 신라 이래 학문적 문화적 선진지역이었던 경주로의 우거는 그의 학문적 성숙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경주로의 우거가 자연스럽게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런 지역적, 가문적 기반위에서 유학을 익힌 안치민은 문신귀족정치의 말기에 상경유학하였을 가능성을 갖고 있으나 1170년 무신쿠데타 직후부터 1203년(신종6) 이규보가 신라부흥운동 진압군의 일원으로 경주에 내려와 활동을 할 당시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주로 경주를 무대로 하여 활동하였다. 지배자적 속성을 갖고 있었던 안치민이 경주에 살면서 이곳 경주, 나아가 경상도가 겪게 되는 역사적 경험을 체험하여 한계상황에 처한 자신을 자각함으로써 동시대의 대다수의 문인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의 이해를 위해 고려시대 경주가 겪게 되는 역사적 상황을 개관하기로 한다. 신라의 멸망, 나아가 고려의 후삼국 통일로 말미암아 한국사의 주도권이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에서 개경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으로 옮겨감에 따라 경주는 오직 지방의 한 거점도시로서의 기능만을 지닌 채 수도 개경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주 김씨, 최씨, 이씨를 중심으로 한 이곳 출신들이 신라시대이래 체질화되어온 중앙지향적, 권력지향적 속성을 지닌 채 그들의 신라적 전통, 학문적 소양, 관료적 자질을 배경으로 하여 상경종사함으로써 문벌귀족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사심관(事審官)을 통해 본향(本鄕)과 관련을 갖고 일정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여 부재지주화하고 있었다. 또한 그 일족 및 그들과 선을 닿고 있었던 자들이 그 후광을 바탕으로 하여 경주의 부사(府司)를 장악하면서 경주는 물론 그 영 속읍에까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1170년 무신쿠데타 이후 기존 문벌귀족의 와해와 궤를 같이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경상도일대에서 기왕에 상경종사하였던 인물들 역시 큰 화를 입게 되었고, 이를 피해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그리고 그의 재지적 기반이 아직 존재하였던 이곳 경상도 일대에 이들의 낙향이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또 이들과의 학문적 수수, 혹은 혼인관계를 통해 이곳을 처(妻), 외향(外鄕)으로 하였던 인물들의 이곳으로의 우거도 적지 않았다. 자연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반무신, 나아가 의종 복위운동의 흐름이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경주출신의 미천한 신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무력을 바탕으로 하여 출세한 이의민(李義旼)이 무신쿠데타를 계기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집권무신들의 배려 속에 그의 일족(一族) 및 당부자(黨附者)로 하여금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일대에 그 영향력을 미치고자 하였다. 양 세력의 대립 갈등 속에서 김보당과 연결된 전자에 의해 의종 복위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문신귀족정치의 질곡에 신음하고 있었던 대부분의 이 지역민들이 이의민의 편에 섬으로써 의종 복위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의종 복위추진세력은 완전 실세하여 망명(亡命)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
반면에, 이의민은 의종 시해문제로 인해 한때 정치적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경주민을 비롯한 경상도민의 전폭적 지지와 협조, 무신쿠데타에 가담하였던 하급무신과 일반군인들의 지지에 힘입어 마침내 대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이 지역의 재지세력의 역학관계의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정권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반발 속에 정권의 정당성 도덕성을 확보하지 못한 이의민정권은 상대적으로 강압정치에 의존하기에 이르렀다. 정권유지를 위한 막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조달하기 위해 이의민정권은 특히 그의 복심이었던 경주, 나아가 경상도지역에 대한 대규모 토지침탈과 가혹한 탐학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의민정권의 수탈자적 성격이 드러나면 날수록 이 지역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심하여 다른 어느 지역 보다도 유망민의 수가 격증하였다. 그 결과 명종 20년 경주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동왕 23년 경상도일대에서 유망한 농민들을 대거 결집한 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의 봉기로 발전하였다.
명종 14년부터 동왕 26년까지 지속되었던 이의민정권은 멀리는 의종 시해문제, 가까이는 그 정권의 복심이었던 동경관내의 농민봉기로 말미암아 무너지게 되었다. 특히 최충헌이 의종 시해문제를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우며 이 지역의 이의민 일족을 제거해나가자 재지세력들의 분열과 갈등이 더욱 첨예해짐과 아울러, 특히 이의민의 의종시해에 협조하였던 경주민들에게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다. 이들은 마침내 신종 5년 운문적(雲門賊), 초전(草田) 울진(蔚珍)의 초적(草賊)세력과 힘을 결집하여 공동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정국병마사(正國兵馬使)'를 자처하며 '신라부흥(新羅復興)'을 표방하였다. 고려왕조 자체를 부정하는 신라부흥운동이 결국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최충헌정권에 의해 경상도 군현조직의 구조적 개편이 단행되었다. 어떤 점에서 고려왕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신라부흥운동의 시말은 중앙에서의 최충헌의 입지를 강화시켜주고, 상대적으로 농민들의 생존을 위한 정당한 투쟁마저도 무력으로 강경진압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을 것이다.
안치민은 속읍의 토성이족출신으로서 주읍인 경주에 줄곧 거주하면서 경주, 나아가 경상도가 겪게 되는 역사적 상황을 자신의 생애 속에 내재화시켜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이 시대를 살고 있었던 대부분의 문인들과는 다른 학문적 태도, 현실인식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2) 안치민(安置民)의 학문(學問) 사상적(思想的) 편린
고려전기이래 대민지배방식인 군현조직의 개편 보완과, 이를 통한 국가의 권농정책 및 농지의 양적 확대 정책, 직접 생산의 담당자인 농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기위한 노력의 결과로 인해 농업의 지속적 발전이 이루어져 생산력이 발전하고 수취량이 증대되어 고려 문벌귀족사회가 성립 안정화될 수 있는 제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2세기 초 예 인종조를 전후해 왕실 및 문벌귀족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조부공역의 강화를 통한 물적 기반의 확충기도로 말미암아 사회경제적 모순이 잉태되어 농업생산력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촌유망화 현상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미 풍부한 경제적 여력의 바탕 위에서 난숙한 문화에 심취한 문벌귀족들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고사를 인용하여 짝지우기 여념없는 형식위주의 사륙병문류, 음풍농월의 문장과 과시(科試)를 위한 문장에만 빠져들어 결과적으로 현실과 유리된 학문의 틀 속에서 현실의 사회경제적 모순구조를 인식할 수 있는 사고를 상실한 채 겉으로 들어난 문화의 융성만을 바라다볼 뿐이었다. 더욱이 무신쿠데타이후의 수살문사의 분위기 속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문인들은 현실과 거리를 둔 가운데 음주와 담론, 시가를 읊조리며 은일 도락적 모임의 죽림고회의 풍을 이루는가 하면, 무신정권의 성립 후 그들과 타협하여 권력으로의 길에 들어선 문인들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지배계급의 통치수단으로서만 존재함에 따라 문학 역시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여 현실비판적 기능은 사라지고 이념적이나 사실적 수법 같은 것은 배제되어 오직 시의 기교적 측면에 중점을 두는 기교적 문예취향이 유행하였다.
결국 이들은 의기가 저상되어 협소한 체험에 주의를 집중하며 형식적 매력에 이끌리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송대 고문운동의 참 뜻을 구현함으로써 현실과 유리되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고려문단에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의 움직임이 일각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의 하나가 바로 안치민이 아닌가 한다.
이를 다음의 자료들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 ①고아한 정취 황정견(黃庭堅)의 시보다 낫고 / 풍부한 문장 류자후(柳子厚)의 풍도 남아있네.
②벽라노인(碧蘿老人)이 일찍이 수거사(睡居士)가 그린 묵죽이 든 작은 병풍을 내게 보내왔 는데, 뒤에다 "뭇 바람과 안개를 거느리고, 평범한 초목을 하찮게 업신여기도다"고 한 백부(白傅)의 시 한 귀를 썼으니 그 필적이 더욱 기묘했다.
③내가 요즈음 낙천집을 구해다가 보니 자유자재하고 부드럽고 여유로와 단련한 흔적이 없으며, 가까운 듯 하면서도 멀고, 화려하면서도 충실하여 시의 여섯가지 체가 모두 갖춰졌다.
④지금의 시인이 평하기를 (중략) 오세재 선생과 처사 안순지는 부섬혼후(富贍渾厚)하다.
⑤안(치민)은 호방하고, 이(유지)는 맑다는 것이 사람들의 입에 퍼져있다.
㉯①에 의하면 그의 시(詩) 문(文)은 황정견 유자후에 비유되고, ②와 ③에 의하면 백낙천의 영향을 받고있음을 알 수 있다. 또 ④, ⑤에 의하면 그의 시문은'부섬혼후(富贍渾厚)', 혹은'호(豪)'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소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식의 문풍은 고려중기이후 들어오기 시작하여 무신정권기에 오면서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최자가 "근래 동파를 숭상하는 것은 대개 그 기(氣)와 운(韻)이 호매(豪邁)하고 뜻이 깊고 말이 넉넉하며 고사에 회박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나, 이규보의 호매(豪邁)한 기운과 부섬(富贍)한 문체는 곧 동파의 시와 잘 맞는다고 한 것에서 안치민의 '부섬혼후(富贍渾厚)', '호(豪)'한 문체는 소식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그가 소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직접적 자료는 없지만 진화의 시를 보고 "조금만 더 진취하면 동파에 이를 수 있다"고 한데서도 소식에 대한 그의 이해가 각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치민과 관련된 이들은 고문운동가이다. 특히 소식에 의해 대표되는 송대 고문운동은 사륙병려의 미문을 반대하고 평범하고 쉬우며 실용적인 산문을 주장함과 동시에 문장은 인륜대도를 표현하며 풍자(諷刺) 권선(勸善) 교화(敎化)의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문학정신으로 시를 쓴 사람들은 가냘픈 풍화설월(風花雪月), 요염하고 색정적인 문학을 공격하고 시대와 사회의 교화에 도움이 되는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안치민은 바로 이들의 영향 하에 고문정신을 익혔던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자료에 잘 나타난다.
또 독아시서(讀雅詩敍)에서 "시경 삼백편이 반드시 성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만 공자가 모두 기록하여 만세의 경서로 삼은 것은 어찌 그 찬미하고 풍자하는 말이 그 성정의 진실에서 발하여 감동의 절실함이 사람들의 골수에 깊이 들어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비록 꼴 베는 농부나 천한 종일지라도 진실로 그 말이 도에 맞으면 성인이 버리지 않는 바인데, 하물며 대현군자가 지은 것이 문장과 뜻이 모두 좋고 형식과 실질이 서로 맞는 것을 홀로 아송(雅頌)의 열에 넣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요즈음『낙천집(樂天集)』을 구해다가 보니 자유자재하고 부드럽고 여유로와 단련한 흔적이 없으며, 가까운 듯하면서도 멀고, 화려하면서도 절실하여 시의 여섯가지 체가 모두 갖추어졌다"고 하였으니 기암의 말이 그럴 듯하다. 백낙천의 시가 시경의 풍(風) 아(雅) 송(頌)의 뜻과는 깊고 얕음의 다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교화에 관계됨은 매한가지다. (중략)
만약 진신, 선각으로서 한가롭게 열람하여 천명을 즐기고 근심을 잊으려고 한다면 백낙천의 시가 아니면 안된다. 옛날 사람들이 백공을 인재라고 한 것은 '독아시서(讀雅詩敍)'에서 안치민은 시경 삼백편이 만세의 경서로 됨은 풍자하는 말이 그 성정의 진실에서 발하여 감동의 절실함이 사람들의 골수에 깊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그가 낙천집을 읽고 평한 글에 대해 최자가 공감을 표하면서 백낙천의 시가 시경의 뜻과는 깊고 얕음의 다름이 있으나 교화에 관계됨은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백공을 인재라고 한 것은 아마 그 말씨가 부드럽고 평이하여 풍속을 말하고 사물의 이치를 서술함이 사람의 정에 매우 적실하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안치민의 백낙천에 대한 평가가 최자에게 공감을 주어 표현된 것으로서 곧 안치민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독아시서(讀雅詩敍)'와 낙천집에 대한 평가를 통해 안치민이 앞에서 말한 고문정신을 구현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문주의는 전한말(前漢末)에 국가의 공인을 얻어 유력하게 된 공자의 경전들과 예기 맹자 노자 등에 입각하여 문학을 道의 표현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안치민이 '독아시서(讀雅詩敍)'에서 비록 꼴베는 농부나 천한 종일지라도 진실로 그 말이 도에 맞으면 성인이 버리지 않는다고 한 것이나, '취수선생진영(醉睡先生眞影)'의 찬에서 "도(道)가 있어도 행하지 못하면 취하니만 못하다"고 한데서 그가 문학을 통해서 도를 구현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안치민은 사륙병려의 미문을 반대하고 평범하고 쉬우며 실용적인 문장을 강조하면서, 문학이 시대와 사회의 교화에 도움이 되고 인륜을 밝히고, 나아가 도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문학의 현실비판적 기능이 강조되고, 문학의 효용으로서 풍교를 중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의거해 안치민은 앞에서 언급한 바의 현실과 거리를 둔, 나아가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그리고 고문의 형식적 모방에 급급한 문풍에 대해서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였던 것이다. 고문의 형식적 모방에 급급한 이인로가 일찍이 편지와 시를 가지고 급고당 기문을 지어주기를 청하여도 응하지 않다가 굳이 독촉하자 마지못해 기문을 지어 주었다.
이때 이미수가 지은 급고당 시가 뜻이 나쁘다고 공박하였다. 또 동읍동시인(同邑同時人)이었던 김극기(金克己)와도 전혀 교류가 없었다. 이들이 참여한 무신정권, 특히 최씨정권은 문학의 보호육성책을 펼쳤지만 그 표면적 융성과는 달리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현실에의 영합과 적응이 생리화된 속에서 문학의 정치적 도구화, 종속화만이 존재하였다. 무신정권에 참여하여 권력에로의 길에 들어선 문인들이 권력의 정당화 은닉화 작업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분식에 협력 동조하는 한 참된 고문정신의 구현은 불가능한 것이며, 오직 형식적 모방만이 있을 뿐이다. 안치민은 바로 이러한 문단의 주류적 경향에 반발하면서 이들 참여문신들의 문학적 태도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였던 것이며, 그것은 곧 그들의 현실인식, 나아가 정치적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안치민이 오세재에게 지어준 시에서,
때로는 비구들을 쫓아 경론을 묻고 / 감히 진신에게 문자를 논란했네 / 이 나라는 노(魯)나라처럼 옛부터 유사(儒士)가 많은데 / 어쩌다 혹 만나면 꺼리는 듯 하네 / 알겠노라, 취향이 진실로 서로 같지 아니하여 / 비록 이웃이면서도 천리같이 머네.
라고 한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안치민이 현실과 거리를 둔, 나아가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그리고 고문의 형식적 모방에 급급한 문풍을 일삼는 문인들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지향적, 권력지향적 속성의 고려 문벌귀족사회에서 중앙과, 권력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직 과시(科試)위주의 형식적, 유미주의(唯美主義)의 문풍에 물들지않은 학문적 순수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무신쿠데타를 전후해 지역적으로는 경주, 나아가 경상도가 겪게되는, 신분적으로는 속읍의 토성이족이 겪게되는 역사적 상황을 자각하여 밖으로부터 고문운동을 받아들여 이를 자신의 내부에 내재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치민은 경주의 속읍 안강의 토성이족출신으로서, 현존하는 자료상 무신들의 쿠데타직후부터 신라부흥운동이 창궐 할 때 까지, 그리고 그 전후에도 줄곧 경주를 무대로 하여 처사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안치민의 학문적 명성과 그림 솜씨가 멀리 중앙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그 어떤 이유 때문일까? 물론 여기에는 그의 학문적 능력과 그림솜씨가 뛰어난 것이 그 일차적 요인이겠지만, 그 직접적 계기는 신라부흥운동 진압군의 일원으로 경주에 온 박인석 이규보 등에 의해 그의 명성이 중앙으로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료 ㉮④에 의하면 이미 이규보는 정동(征東)의 명을 받기 이전 개경에 있을 때부터 안치민의 학문적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한 이규보가 정동군의 일원으로 경주에 왔을 때 군중의 어떤 사람이 이규보와 안치민이 교유한다는 말을 듣고 안치민의 묵죽(墨竹)을 구하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훨씬 이전부터 안치민의 존재가 개경에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학문적 명성이 개경에 알려지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오세재(吳世才)와 진화(陳澕)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뛰어난 문인이었던 오세재가 이곳 경주에 내려와 여생을 지냄에 따라 안치민과 오세재의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결국 오세재와 왕래, 혹은 서신 교환을 하던 인사들에게 안치민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세재가 결국 여생을 경주에서 보낸 것을 감안할 때 안치민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데 보다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진화(陳澕)일 것이다. 진화가 신종 1~3년 사이에 아버지 광현(光賢)을 따라 임소인 동경에 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때 안치민과 깊은 학문적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안치민이 진화에게 "그대의 재주는 균계(筠溪)보다 앞서니 조금만 더 진취하면 동파(東坡)에 이를 수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때의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훗날 진화가 이윤보(李允甫)와 함께 광녕부(廣寧府)의 13山을 읊은 시를 최자가 평하면서 "진(陳)의 시는 뜻으로서 짓고, 이(李)의 시는 말로서 지었다"고 한데서 보다시피 진화의 뜻을 중요시하는 학문적 입장은 바로 안치민의 학문을 섭취한데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진화가 개경에 돌아와 안치민의 존재를 널리 알리게 되었고, 그 후 박인석, 이규보 등이 경주에 옴에 미쳐 이들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를 기화로 안치민은 간혹 개경에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 것이다.
안치민과 학문적 교감을 주고받은 박인석, 이규보, 진화, 그리고 그에 관한 가장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최자 등은 한결 같이 뜻을 중요시하는 내용위주의 문학론자들이다. 그러나 처사로서 일관한 안치민과 권력으로의 길로 매진한 이규보, 최자 등은 내용위주의 문장론자라는 학문적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현실인식은 커다란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이규보가 안치민을 참선하여 묘리를 얻은 것은 방거사(龐居士), 즉 방온(龐蘊)과 같고, 치의 치관 차림을 하여 마치 세상에 나도는 도객이나 거사의 화상 같았다고 한 것이나(㉮④), 안치민이 스스로 "절에 와 한가로이 사는데 매양 사람들이 거사라고 불러주네"(㉮③)라고 한데서 안치민은 개경의 문벌귀족과 밀착되어 수도 위주의 귀족적 취향을 가진 교종보다는 선종에 깊이 심취한 거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허흥식씨가 이자현(李資玄) 혜소(慧炤) 학일(學一) 탄연(坦然) 등과 세속의 윤언이(尹彦伊) 등이 고려중기 위축된 선종계를 능엄선(楞嚴禪)으로 부흥하였고, 이들은 선종에 타격을 준 의천(義天) 및 그의 계승자와 대결하면서 고려후기 선종계가 중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하면서, 특히 소식(蘇軾)은 의천과 대립된 송승(宋僧)과 유대를 맺고 있었다고 지적한 것과 관련시켜볼 때 소식으로 대표되는 고문의 흐름을 익힌 안치민이 선종에 심취하게 되는 계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최병헌씨는 고려중기 유행한 거사불교(居士佛敎)는 개아적(個我的) 수업(修業)의 선(禪)에 관심을 크게 가지며, 대 사회적 의식이 약한 고답적이며 은둔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무인란 이전의 안정기에나 가능한 것으로서 무신란 이후, 대몽항쟁기간의 무렵에 오면 이러한 거사불교가 후퇴하고 새로 지방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사회의식을 내세우면서 현실에 대처하려는 결사불교(結社佛敎)가 대두하게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기암거사인 안치민은 상기와 같은 거사불교의 모습과는 다른 강한 현실비판적 견해 를 토로하는 거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최씨가 언급한 전자에서 후자로의 전환의 한 접맥점으로서 안치민이 존재하는 셈이다. 문학 뿐 만이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갖고 있었던 안치민은 그림이란 사대부의 희롱, 즉 취미와 여기의 수단으로 간주하여 감상과 흥취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에 대해 비판하면서 참된 작가의 정신세계를 화폭에 담아 표출하고자 하였다.
안치민은 대나무를 그리면서 매양 시서(詩書)를 지었고, 자신의 초상화에 대한 찬을 짓고, 또 이세장에게 그려준 대나무 그림에 시를 남긴 것으로 보아 시화일치론에 입각한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제가 요전에 처사를 문양주(文洋州)와 방거사(龐居士)에게 비유한 것은 대개 묵죽은 여가(與可)와 똑같고 참선하여 묘리를 얻은 것은 방온(龐蘊)과 같기 때문에 확실한 것을 지적해서 말한 것이요
라고 한데서, 그의 그림솜씨가 문여가(文與可), 즉 문동(文同)에 비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소식은 바로 문동에게서 묵죽을 배워 일가를 이루었던 것이다. 또 이인로가 안치민이 그린 묵죽병풍을 보고 그린 묵죽에 대해 동산(東山), 즉 소식의 묵희(墨戱)의 풍골이 있다고 한 평에서도 안치민의 화풍이 소식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안치민의 묵죽에 관한 이규보의 찬을 통해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기암거사는 대를 그리는데 기술이 절정에 달하였네. 한번 그 실물을 그리면 은연중 자연과 합치되네. 손은 마음의 심부름군되어 언제나 마음 전해주니, 마음이 지시하고 손이 따르면 물건이 어떻게 도망하겠는가? 대를 일부로 주시하고 있으니, 그 천연스러운 본색을 숨기지 않아 마디 하나 잎 하나 그 모습 완전히 다 나타났네.
이규보가 그림에서 작가의 뜻을 찾고자함을 고려할 때 상기 자료는 안치민의 화법이 이규보에게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소기진(一掃其眞) 암계자연(暗契自然) 수위심사(手爲心使) 상이심전(嘗以心傳) 심지수응(心指手應)'은 곧 소식의 '내외합일(內外合一)', '심수상응(心手相應)'과 일치하는 것이다.
안치민의 문학론이 뜻을 중요시하면서 시대와 사회의 교화에 도움이 되고, 도의 실현을 위한 것이었음을 고려할때 '심지수응(心指手應)', '수위심사(手爲心使)'에 의거해 그려진 그의 그림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강한 현실비판적 내용을 담을 수 밖에 없었다.
안치민은 더 이상 협소한 체험에 주의를 집중하거나 논쟁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성격이 매우 약화되어있는 美를 찾는 작업, 즉 형식주의적 매력에 이끌리는 회화에 머물수 없었다.
취미와 감상위주의 회화론의 주조적 흐름 속에서나마 안치민의 이러한 회화관은 내용위주의 문학론자에게 계승 발현되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규보가 [쌍마도(雙馬圖)]에서 "화공이 이 그림 뜻 없이 그렸을까? 그 속의 묘한 뜻 뉘라서 알리요"라고 한 것이나 정홍진이 "사대부의 휘소는 시를 근본으로 하는 것이 상례이다. 만약 그림에만 탐닉하면 그것은 화공이다"고 한 것에서 이들이 비록 감상위주의 회화관을 바탕으로 하고있지만 작품 속에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또 그림에서 그 뜻을 찾아내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내용위주의 문학론자들은 시화일치론에 입각하여 문학에서처럼 인륜대도를 표현하며 풍자, 권선, 교화의 기능을 가진 그림, 즉 시대와 사회의 교화에 도움이 되고, 도를 실현할 수 있는 의식있는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다.
3) 안치민(安置民)의 현실인식(現實認識)
안치민은 문학에 있어서 뜻을 중요시하면서 인륜대도를 표현하며 풍자, 권선, 교화의 기능을 가진 문장, 즉 시대와 사회의 교화에 도움이 되고, 도를 실현할 수 있는 시문을 써야 한다는 고문정신을 구현하면서, 시화일치론에 입각하여 '심지수응(心指手應)', '수위심사(手爲心使)'의 바탕위에서 시대와 사회의 교화에 도움이 되고 도를 실현할 수 있는 의식있는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다. 이제 안치민의 생애를 통해 이룩된 이러한 문학 회화관이 그가 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그의 생애중 가장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준 사건은 1170년 무신쿠데타일 것이다. 쿠데타로 인해 그가 어떠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가는 알 수 없지만, 다음의 자료는 무신정권 성립직후의 그의 의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의왕(毅王)이 남쪽 먼 지방으로 달아났다. 이기(李琪)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림을 잘 그렸다. 그가 의왕의 초상을 그려서 제목을 쓰지 않은채 동도(東都) 초당(草堂)에 봉안하고 아침저녁으로 예로서 모신다고 하였다. 기암거사가 우연히 보고 찬을 지었다.
【제왕의 상이라고 하려 하니 복건(幅巾)을 쓰고 학의(鶴衣)를 입은 차림은 여옹(呂翁)과 같다. 은일(隱逸)의 모습이라고 하려 하니 큰 콧대에 용의 낯을 한 것이 한 패공(漢沛公)과 같다. 문득 붉은 계단 옥좌 위에 모시려고 하니 천명(天命)이 다시 통하지 않고 늙은 소나무와 이상한 돌들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려고 하니 임금다운 기(氣)가 오히려 다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공쇠봉(孔衰鳳)인가 의심하고 혹은 이유룡(李猶龍)인가 두려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신령이 제왕으로 화신해 내려와서 자주 하청(河淸)을 만나 백성들의 춘대(春臺)에 오른 것처럼 나의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다가 치닫기만 하는 용처럼 너무 높이 오르기만 하는 기세에 후회함이 일어나 한바탕의 꿈은 바야흐로 놀라 깨고 드디어 다시 어둠과 아득한 세상으로 돌아간 것일 것이다】하였다.
무신쿠데타로 말미암아 의종(毅宗)이 폐위되고 명종(明宗)이 뒤를 이어 즉위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이기(李琪)가 의종(毅宗)의 초상화를 그려 동도(東都) 초당(草堂)에 봉안하고 아침저녁으로 예로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이곳 경주를 중심으로 반무신란의 분위기가 만만치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기와 같이 아직 명종을 인정하지 않고 의종에 대한 여전한 충성심을 보이고 있었던 자들은 무신쿠데타이후 이곳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에 낙향 우거한 문신 및 이들과 연결되어 이곳의 향직(鄕職)을 장악하고 있었던 재지세력들이었다. 중앙지향적 권력지향적 속성을 갖고 있었던 이들은 무신쿠데타이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일거에 박탈당한 채 세력만회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보당이 반무신란을 일으키면서 의종복위를 내걸고 장순석(張純錫) 유인준(柳寅俊)으로 하여금 거제에 유폐되어 있었던 의종을 경주로 모시고 나오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의종 복위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음을 이기의 의종 초상화에 대한 안치민의 찬에서 엿볼 수 있다. 안치민의 눈에 비친 의종초상은 '제왕(帝王)의 상도 아니고 은일(隱逸)의 상도 아닌 모습으로 다시 옥좌에 모시려고 하니 천명이 통하지 않고 그만두자 하니 임금다운 기(氣)가 사라지지 않는' 그런 모습이었다.
경주출신의 재경문신들에 의해 경주 및 경상도 일원에 가해지는 대토지겸병과 수탈에 대해 평소 비판적 입장을 갖고 있었던 안치민은 이기와 같은 낙향문신들에 의해 추진되는 의종복위운동에 대해 극도의 자기 갈등을 겪다가 결국 천명이 통하지 않음을 자각하고 "한바탕의 꿈은 바야흐로 놀라 깨고 드디어 다시 어둠과 아득한 세상으로 돌아간 것일 것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무신쿠데타에 따른 문신귀족정치의 붕괴를 안치민은 곧 천명으로 파악함으로써 무신정권의 성립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만다. 이러한 인식은 경주의 속읍출신으로 줄곧 경주를 무대로 하여 살면서 중앙으로부터, 또 권력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시대와 사회의 교화, 도의 실현을 위해 꼴베는 농부나 천한 종에게까지 귀기울이고자하는 적극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경주의 민심 동향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김보당의 난, 혹은 의종 복위운동을 민심의 향배를 읽지 못하는, 즉 천명을 거역하는 반역사적 행위로 인식했을지 모른다.
경주의 민심이 돌아선 상황 속에서, 또 이 지역 지식층의 일부에서 의종 복위운동에 대해 동조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이기의 의종초상화는 어쩔 수없이 제왕의 상도 아닌, 그렇다고 은일의 상도 아닌 모습으로, 경주에서마저도 드러내어 모실 수 없는 처지였다. 결국 이런 분위기 속에서 행해진 의종 복위운동은 실패로 귀결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안치민은 무신정권이 시대와 사회를 교화하여 도를 실현함으로써 천명이 다시 통하도록 해주기를 갈망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안치민의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다음의 자료는 그 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내가 일찍이 꿈에 보니 신인(神人)이 내려왔었다.(중략) 서로들 전갈하기를 신인(神人)이 시(詩) 한 구(句)를 "만 백성이 희희낙락하여 태평을 즐긴다"라고 지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신인(神人)이 만일 나를 보고 이 시구(詩句)를 채우라고 하면 바로 응하지 못할까 하여 "삼관(三光)이 찬란하여 임금을 시위하였도다."라고 하여 미리 지어 두었다. 그 앞에 직접 드리려고 하다가 그러하지 못하고 꿈을 깨었는데 이제 보니 公(=吳世才)의 용모가 꿈에 본 신인(神人)과 다름이 없었다.
이 자료는 이의민정권 때 오세재가 경주에서 방랑생활을 할무렵 안치민이 오세재에게 준 시의 세주(細註)의 내용이다.
여기에서 안치민은 삼광(해 달 별)이 임금을 시위한 상태 속에서 만백성의 태평성대를 희구하고 있다.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한 사회질서의 구축을 염원하고 있었던 안치민으로서는 당시의 무신정권이 왕을 무력화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이의민이 비록 폐위된 임금이지만 의종을 살해한 행위를 직접 경주에서 겪은 안치민으로서는 이의민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졌을 것이고, 이의민이 경대승 정권 때 경주에 내려와 반정부적 활동을 하면서 민심을 부추기는 행위를 하고, 마침내 대권을 장악한 후 왕권을 크게 위축시킨 행위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꿈에 가탁하여 이 시를 굳이 읊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의민이 그 일족과 당부자를 통해 경주일원에 대한 토지점탈과 탐학을 행함으로써 유망민이 격증하여 마침내 대규모 농민봉기로 확대되어가는 과정을 직접 목도한 안치민으로서는 이의민정권에 의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권력의 정당화 은닉작업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깊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무신정권의 성립을 천명으로 간주하였던 그가 무신정권에 대한 철저한 비판자로 돌아서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의민정권기는 안치민에게 있어서 역사적 상황 속에 처해진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게되는 사유의 시대로서, 그의 현실비판적 입장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최씨정권기에 오면 문신에 대한 보호육성책이 취해져 참여문신의 수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특히 최충헌은 쿠데타의 명분으로서 의종을 살해한 역신을 몰아냈다는 것을 내세움으로써 이의민의 의종시해에 대해 끊임없는 정당성 도덕성의 문제를 제기했던 문인들로부터 상당한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이 최충헌 정권 때 문인들이 대거 참여의 길로 나서게 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안치민은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최씨정권에 참여하지 않고 여전히 경주에서 처사로서 일관하면서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을 그치지 않았다. 강력한 왕권의 구축을 통하여 시대와 사회의 교화가 이루어지고, 도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의 건설을 염원하고 있었던 안치민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두 임금을 교체하고 네 임금을 새로 옹립한 최충헌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신정권에 대한 비판자로서의 안치민의 모습을 다음의 자료를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자기 스스로 '취수선생진영(醉睡先生眞影)'을 그리고, 그 뒷 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도(道)가 있어도 행하지 않으면 취하니만 못하고 /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으면 잠자는 것만 못하다 / 선생이 취하여 살구나무 꽃 그늘에 잠자니 / 세상에 이 뜻을 아는 사람 없더라
안치민의 '취수선생진영(醉睡先生眞影)'이 언제 그려졌는가는 알 수 없지만 정황상 무신정권시대의 작품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안치민은 도가 있어도 행하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당시의 세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취하거나 잠자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무신 정권에 참여한 문신들이 무신정권에 예속되어 그 정책의 잘못됨을 알아도 한마디 간언조차 못하는 행동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문신들을 그러한 상태로 몰고가는 무신정권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이다. 명종조 간관(諫官) 임명의 한 예를 통해 무신정권시대에 어떠한 인간형의 인물이 요구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거정(李居正)이란 자는 어려서 민비(民庇)와 더불어 동학(同學)하였는데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임금이 정언(正言)을 주고자 하여 민비(民庇)에게 묻기를 "거정은 어떤 사람이냐? 능히 침묵하여 인물을 시비하지 않을 자냐?"하니, 대답하기를 "거정은 성품이 화평하고 또 눌묵(訥默)하나 절개가 있는 자는 아닙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정언이 되겠다"하고 이에 제수하였다.
언로(言路)를 맡고 있는 간관(諫官)인 정언(正言)에 침묵하여 인물을 시비하지 않고, 절개없는 이거정(李居正)이 임명되었다는 사실에서 안치민의 취수선생진영(醉睡先生眞影)이 뜻하는 바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거정과 같은 인간형을 요구하는 무신정권시대에 살고 있었던 참여문신들의 처세술이 어떤 것인가는 이규보의 '외부(畏賦)'[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1권]에 잘 나타난다.
【외부(畏賦)】에서는 독관처사(獨觀處士)와 충묵선생(沖默先生)이라는 두가지 유형의 인간형이 대비되고 있다. 독관 처사는 늘 무슨 두려움이 있는 듯이 일거수 일투족을 조심하며 자기 모습을 두려워하면서 혼자 우뚝 높이 서서 세속의 무리를 벗어나 저 넓은 곳에 가서 자기대로 놀고 싶어하는 존재인데 반해 충묵선생은 "정도를 지키고 남을 속이지 않으면 하늘도 나에게 위엄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도, 밑에 있으면서 위를 섬길 때는 법도에 꼭 맡게 행동하여, 만나면 꿇어앉고 절할 때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무슨 명령을 들으면 몸을 더욱 구부려 맡은 일을 잘 지켜 나간다.”라고 하여, 현실정치에 참여한 문신들의 행동가짐을 제시하면서 독관처사에게 일러 말하기를, 낮에 뱉은 침을 그대로 말리우고, 가랑이 밑으로 숙이고 나가 허심하게 세상을 살아가면, 내가 저를 안 건드리매 저들이 어이 성낼 것인가. 이 또한 두려울 것이 없으리. (중략) 성인들이 사람을 두려워 않고 오직 입을 두려워했으니, 입을 곧 삼가면 처세에 무슨 탈이 있으리.
라고 하여, 처세의 지름길은 곧 입조심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무신정권의 무단정치하에서는 언로(言路)는 굳게 막히어 현실비판의 이야기는 전혀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무신정권의 성립 후 왕도 마음대로 교체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가 하면, 사회경제적 모순의 노정과 계급간의 갈등 속에 하층민의 봉기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여문신들은 한마디 정책의 개진없이 입조심하면서 맹목적 추종만 하여 어용적 문신의 길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현존하는 상황의 좁은 한계 속에 들어맞도록 자신의 희망을 조절하면서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현실에의 영합과 적응만이 생리화된 아유 타협 왜곡형의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제 그들은 왕권과의 상호보험하에서 권력을 창출하는 집단으로서의 역할을 방기한채 오직 이미 위로부터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처리 할 뿐 그를 토론하거나 바꿀 수도 없었다. 단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수단이나 시행방식에 대해 조언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이 배운 道가 입으로 개진되거나 행동으로 표출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안치민의 취수선생진영은 참여문신 중에서도 시대와 사회의 교화, 도의 실현을 위한 문장을 입으로 주장하면서도 처세의 길을 위해 입조심하며 행동하지 못하는 이규보(李奎報) 최자(崔滋)와 같은 인물에 대한 따가운 비판이 더 담겨져 있는 것인지 모른다.
짐짓 취한 듯 잠자는 듯한 안치민의 모습은 단순히 술에 취하고 잠만 자는 모습이 아니라 도(道)의 실현, 즉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현실개조의 이상을 구현하고자하는 행동하는 모습이었다. 결코 그의 모습은 처세를 위해 입조심하라는 충묵선생의 충고에 귀 기울이는 독관처사와 같은 모습도 아니요, 그렇다고 머리깍고 중이 되어 둔세무민(遁世無悶)으로 일생을 마친 신준(神駿)이나 오생(悟生)과 같은 모습도 아니다. 또한 임춘(林椿)이나 오세재(吳世才)처럼 무신정권에 참여하기를 갈망하지도 않았고, 의기가 저상하여 자신을 불우하다고도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취수선생진영에서 보다시피 '도행일치(道行一致)' 즉 행동으로 도(道)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 때로는 비구들을 쫓아 경론(經論)을 묻고, 진신(搢紳)과 문자를 논란하고, 꼴베는 농부나 천한 종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그 말이 도(道)에 맞으면 버리지 않는다는 적극적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기존 권력체계에 대한 철저한 비판적 태도로 나타났으며, 여기에는 그의 지적 성숙성과 도덕적 용기가 전제되었을때 가능한 것이었다. 안치민의 위정자에 대한 비판은 이세장에게 그려준 대나무 그림에 잘 드러난다.
일찍이 복야(僕射) 이세장(李世長)의 집을 지나가는데 긴 대 두어 떨기가 있어서 새 가지가 헌 함 위에 나왔다. 공이 병풍 하나를 내어주며 그림을 그리라고 하였다. 거사는 즉석에서 두어 개 대나무 가지의 끝만을 그려 놓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누(樓)아래 대나무 수풀 백척이나 길건만 / 누(樓)가 높아 다만 두어가지의 끝만이 보이네 / 땅에서 솟아나는 옥같은 죽순(竹筍) 보려거든 / 모름지기 층층다리를 밟고 이 누(樓)를 내려가소서
이세장(李世長)은 과거출신자로서, 명종 21년 사업(司業)을 거쳐 수 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를 지낸 후 치사하여 최(崔) 등과 함께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는데, 희종 2년 당시 71세였다. 해동기로회가 최씨정권과 결탁한 전형적인 문인집단이라고 할 수있으므로 이세장은 친최씨계의 참여문신의 일원이었다.
앞의 제화시문이 지어진 시기는 이세장이 희종 2년 당시 71세로서 치사한 상태인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설혹 그 이후라도 그가 해동기로회의 일원으로서 개경에 몸을 담고 있던 당시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당시 안치민은 경주를 떠나 일시적으로 개경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경주에서 세상을 등진 채 현실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처사로서가 아니라 개경과 경주 등을 넘나들면서 도(道)의 실현과 시대와 사회의 교화를 위한 적극적 행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짐짓 취한 듯 잠든 듯 하던 안치민이 이세장에게 누에서 내려가 죽순을 볼 것을 권한 것은 당시의 관리들이 민과 유리되어 최씨정권에 맹목적 추종과 굴종을 하기보다는 누 아래 내려가 백성들의 질곡을 살펴 백성들의 편에 선 정사를 펼칠 것을 뜻하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치민이 집권층에게 이러한 따가운 비판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속읍의 토성이족으로서 대대로 대민업무를 관장하는 가문적 배경을 가졌다는 점, 또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치자층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경주에 거주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직접 목도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가 머물렀던 경주는 무신정권시대에 농민봉기의 거점으로서, 특히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난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의 현실인식은 당로자(當路者)의 그것과 같을 수 없었다. 그는 때로는 승려에게 경론을 묻기도 하고 사대부와 문자를 다투기도 하면서, 비록 꼴베는 농부나 천한 종마저도 진실로 그 말이 도에 맞으면 취한다는 적극적 입장을 가졌기 때문에 당시 무신정권이 처한 문제점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실모순의 자각에 따른 위정자에 대한 따가운 비판의식은 그의 정치적 역량이 전무한 상태에서 별반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였다.
무신정권은 물론 무신정권에 참여한 대부분의 어용적 문신들은 안치민의 이러한 따가운 비판에 동조하여 현실의 모순을 자각하고, 그의 해결을 위한 그 어떠한 독자적이고도 구체적인 사고나 행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안치민으로부터 비판의 뜻이 담긴 대나무 그림을 받은 바 있는 이세장은 여전히 해동기로회의 일원으로서 시(詩) 주(酒) 금(琴) 기(碁)나 즐기며 할 일 없이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무신정권에 대해 대립하거나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 동조하여 봉사함으로써 만년에 해동기로회니 하는 것을 조직하고 거기서 할 일 없이 노닐며 여유자적 할 수 있었다. 현실에의 영합과 적응만이 생리화된 그들이 안치민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그의 훌륭한 그림과 글씨에 그칠 뿐이었다. 안치민의 현실비판적 행동은 도리어 그들에게 부담이 되고 결국 그를 기피하게끔 하는 결과만을 가져다 주었을 뿐이다.
안치민이 오세재에게 지어준 시에서,
때로는 비구들을 쫓아 경론을 묻고 / 감히 진신에게 문자를 논란했네 / 이 나라는 노(魯)나라처럼 옛부터 유사(儒士)가 많은데 / 어쩌다 혹 만나면 꺼리는 듯하네 / 알겠노라, 취향이 진실로 서로 같지 아니하여 / 비록 이웃이면서도 천리같이 머네
라고 한 것은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물론 참여문신의 일각에서는 학문적으로 안치민처럼 시대와 사회의 교화에 도움이 되고, 도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내용위주의 문장을 주장하는 이규보 최자 진화와 같은 자들도 존재한다. 기실 안치민의 참여문신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와 학문적 입장을 같이 하는 이규보 등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따가운 비판에 나름대로 귀를 기울이며 시대와 사회의 교화, 도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제한적이나마 간간히 보여줄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규보의 [외부(畏賦)]의 일절에서 충목선생과 독관처사가 주고받는 말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 처사는 혀를 놀려 하는 말이 칼날처럼 날카롭고 가루처럼 쏟아져 세상길이 험난하다느니 평탄하다느니, 남의 말이 옳으니 그르니 잘도 비평하니 참으로 말을 잘한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재주도 특이하다 하겠다. 그러나 대개 입이란 몸을 망치므로 말을 잘못하면 화가 따른다. 자네가 이러고도 한 세상에 화를 면하려고 함은 마치 도망쳐 숨은 자를 북을 치면서 찾는 것과 똑같은 셈이다. 아무리 빨리 달려가 찾고자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처사는 겉으로는 두렵다고 말하나 실은 두려움이 없으며 화를 싫어하면서도 화를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으니 나는 적이 가소롭게 여긴다."하니, 처사는 이 말을 듣고 앉은 자리를 조금 물러나 한참 머뭇거리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낯빛을 고치고 말하기를 "내가 불초하긴 해도 지금 선생의 가르침을 들으니 환히 깨닫는 마음이 마치 멀었던 눈을 뜨고 밝은 햇빛을 본 것과 같다."하였다.
이 [외부(畏賦)]는 어쩌면 현실비판적 견해를 거리낌없이 토로하는 안치민과 같은 저항지식층을 염려하면서 깊은 우려와 충고를 뜻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세를 위해 입조심하라는 충고를 하는 충목선생의 뜻에 결국 승복해 버리고 마는 독관처사를 그려냄으로써 권력으로의 길로 나선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해버리고 만다. 안치민과 같은 저항지식인과 이규보 최자와 같은 참여문신이 비록 시대와 사회의 교화, 도의 실현을 추구하는 내용위주의 학문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배워 익힌 도와 행동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당시의 모순구조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적 견해를 토하는 행동하는 지성의 모습을 보여준데 반해, 후자는 현실과 쉽게 타협하여 처세의 길로 나섬으로써 일관된 학문적 경향을 견지하지 못한 채 깊은 고뇌와 자기 갈등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변명을 늘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위정자에게 거리낌없이 비판을 가하면서 비록 꼴베는 농부나 천한 종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그 말이 도에 맞으면 버리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이곳의 재지지식인(在地知識人)인 안치민이 신라부흥운동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갖고 있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에 관한 직접적 자료는 현존하지 않고, 다만 신라부흥운동이 신종 5~6년 경주를 무대로 하여 경상도 일대를 휩쓸고 있었을 당시에 진압군의 일원으로 온 이규보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측해볼 뿐이다.
다만 이 도회에 들어오자 시급히 만나 뵙고 싶었는데, 군문(軍門)의 자물쇠를 굳게 잠그고 수비가 매우 엄중했으며, 또한 처사께서 이 도회에 사시는 분이므로 만일 서로 만나보게 되면 군중에서 의심 갖는 사람이 있게 될까 싶기 때문에 감히 어떻게 하지 못했었습니다. (중략) 깨우쳐주신 도둑 잡는 일은 그때 이미 마음 속에 간직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경솔하게 누설하겠습니까. 처사께서 부인과 아이가 있으시니 나날을 지탱하기가 근심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행히 제게 가진 것이 있기에 장요(長腰) 약간 말을 보냅니다.
안치민이 정동군의 일원인 박인석, 이규보 등과 교류하고, 이규보로부터 장요(長腰)까지 도움을 받는가 하면, 도둑 잡는 일까지 이규보에게까지 일러주었다는 것은 그가 신라부흥운동에 전 동조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가 이규보에게 일러준 '도둑잡는 일'이 어떤 내용인는 알 수 없다. 의종 복위운동에 대해서는 경주민과 함께 비판적 입장을 갖고 있었던 안치민이 신라부흥운동의 경우 이들과 입장을 달리 한 이유가 무엇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 '비록 꼴베는 농부나 천한 종이라 할지라도 그 말이 도에 맞으면 버리지 않는다'는 말에서 역설적으로 그 해답을 발견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한다.
강력한 왕권의 강화를 통한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희구하였던 안치민으로서는 왕권, 나아가 고려왕조 자체를 부정하는 신라부흥운동이 결코 도에 합치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배워 익힌 치자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유학의 틀 위에서 말해지는 시대와 사회의 교화 및 道의 실현, 혹은 天命은 위로부터 아래로 퍼져 내려가는 것으로서 결코 아래로부터 무력에 의해 쟁취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안치민은 어디까지나 치자의 입장에서 전국적 농민항쟁의 사태에 직면하여 유리도산하고 저항하는 '민(民)'을 다시 토지로 안집시켜 사회를 안정화함으로써 만 백성의 희희낙락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는 곧 자신의 사회적 존재의 존립과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를 위해 강력한 왕을 정점으로 하여 치자층이 신료(臣僚)로서 일방적 수탈자로서의 탈을 벗고 누아래 내려가 민고(民苦)를 보살피기를 바라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당시 농민항쟁을 주도하고 있던 제세력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안치민의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또한 안치민의 지배자적 계급성의 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는 경주의 속읍인 안강의 토성이족 출신으로서, 의 가까운 선대가 읍사조직에 참여하면서 안강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재지유력층에 속하는 가문적 배경을 가지고 군현조직체계상 民에 대한 일정한 지배자적 위치에 있었다.
당시 농민봉기의 중요한 투쟁대상은 바로 이들 재지유력층이었기 때문에 안치민으로서는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지역민들의 오랜 저항으로 인한 토성이족들 재지적 기반의 급속한 와해 속에서 안치민은 이규보로부터 장요(長腰)까지 도움받지 않을 수 없었. 이러한 처지의 안치민으로서는 농민항쟁세력을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간주하여 이규보에게 '도적 잡는' 계책까지 일러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사태를 야기하여 자신의 사회적 존립을 위태하게 만든 무신정권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하면서, 이의 해결을 위해 비구에게 경론을 묻고 진신과 문자를 논란하고 꼴베는 농부나 천한 종에게까지 귀기울이면서 사회와 시대의 교화, 도의 실현을 위한 방책 끊임없이 모색하였을 것이다. 고려중기이래의 중앙집권화의 과정과 맞물려 나타나는 외관지위의 강화와 속읍에 대한 현령 감무의 파견, 그리고 중앙권귀들의 토지침탈과 탐학으로 인한 농촌사회의 황폐화는 토성이족들의 재지적 기반을 크게 위협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적극적 현실대응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뒷날, 지방의 토성이족출신으로서 재지중소지주적 기반을 갖고있었던 신흥사대부들이 민(民)의 안정화를 통한 상호보험적인 지주(地主)-전호(佃戶) 관계에 바탕한 주자학(朱子學)의 논리에 깊은 관심을 보이 되는 것은 무신정권 이래 확산일로에 있었던 민(民)의 저항에 따른 재지중소지주층인 토성이족들 대응논리의 모색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안치민은 어쩌면 고려중기의 문인 상에서 뒷날의 신흥사대부로의 모습으로 의식 변해가는 길목에 선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안치민에 관한 현존하는 자료는 참여문신인 이규보 최자 등의 문집에 남아 전할 뿐이다. 이들은 결국 어용적 문신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위정자에게 거리낌 없는 비판을 가하는 안치민의 모습이 그대로 그들의 문집 속에 나타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존 자료를 통해 재구성한 안치민의 모습은 구체적이지 못하고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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