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연 바오로 - 집안의 박해를 이겨낸 순교자
순교자들은 선혈이 낭자하고, 살점이 튀는 매질과 뼈가 으스러지는 형벌에도 오히려 의연했다. 그러나 혈육의 정으로 호소하는 회유에는 눈물을 흘렸다. 혈육의 정을 이겨내기가 형벌보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집안의 박해는 이런 이유에 가장 견디기 힘들었는데 그것을 이겨낸 귀중한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 김호연 바오로(1796-1831년)이다.
김호연은 경상북도 안동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말이 적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장난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처음에 그를 바보로 착각하기도 했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여 스무 살이 될 무렵에 이미 대부분의 경서(經書)를 독파해 그 내용에 정통하였고, 윤리, 철학, 수학, 천문, 역학은 물론 불법(佛法)과 노자(老子)의 지극히 어려운 사상 등 온갖 종류의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그는 세속에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않았고 세속의 영광과 명성을 업신여겨 과거에 응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변의 많은 사람은 그를 선비로 알아보았고 그의 학식과 평판은 멀리까지 알려져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와 어려운 문제를 풀어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김호연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몰래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경상도 순흥지방의 태백산 줄기 아래로 들어가 조용히 학문에만 정진하려 했다. 그러나 이 피신은 하느님의 진리를 만나는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태백산에서 은거하고 있던 천주교 신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유식하고 열심한 신자였다. 그들의 만남은 언제나 학문에 대한 화제로 이어졌는데 김호연은 천주교 교리를 들으며 놀라움과 경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온갖 의문을 질문하였고 신자로부터 답을 들으면서 감탄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하느님의 진리를 알게 되면서 김호연은 기쁨과 감격을 이기지 못해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오! 나는 지금까지 줄곧 사람들에게는 그에게 맞는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우리 경서에는 이에 대한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어서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오늘에야 나는 참된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하고 고백했다. 김호연은 곧 천주교 서적을 얻어 읽기 시작했으며 온갖 미신 행위들을 끊어버리고 오직 하느님을 섬기며 은총을 구하는 일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20일정도 어려움을 참고 극기한 뒤 다시 신자를 찾아가 함께 산책하기를 청했다. 그들이 산책하며 작은 시냇가에 이르자 김호연은 미리 계획했던 대로 무릎을 꿇고 세례 예식을 행하여 줄 것을 간청했다.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청했던지 신자는 그의 정을 물리칠 수 없었다. 김호연은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온종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비할 수 없는 크신 은혜에 감사하려면 오직 순교하는 길밖에 없다"고 굳게 말했다. 이제 그의 열정은 놀라울 만큼 깊고 강해졌다. 그는 천주교 신자의 본분을 다하는 신심생활에 전념하여 세속일에는 더욱 마음을 두지 않았다.
얼마 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형과 아버지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하려 하였다. 그러나 처음 얼마 동안 천주교 교리에 호감을 갖던 아버지가 찬찬히 교리를 알아보면서 뜻밖에도 크게 노하여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교리를 따르려면 사당과 신주를 모두 없애고 조상의 위패마저 버리고 제사도 모시지 못하게 될 것이니 상감께서 천주교를 금하시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꾸짓고는 교우들과 교재를 끊고 천주교 서적들을 모두 불사르라고 명령했다. 또 아들의 신앙생활을 막으려고 무섭게 감시하며 학대하기 시작했다. 성질이 격한 그의 형에게 여러 차례 매질을 당하는 등 바오로는 가장 견디기 힘든 가족의 박해 속에 던져졌다.
김호연은 매우 허약한 체질을 타고났다. 그래서 계속되는 가족의 학대를 견디기 어려웠다. 또한 가족들의 학대에 굴복하여 신앙을 버리게 될까 두려워 몰래 집을 빠져나와 도망쳤다. 그는 은밀하고 조용한 장소를 택해 그곳을 떠나지 않고 꿇어앉아 기도를 드리고 성서를 읽으며 묵상하는 생활로 나날을 보냈다. 밤을 새워 묵상과 기도를 하다가 첫 닭이 울 때 비로소 조금 쉬는 시간을 가졌고 금요일과 토요일마다 단식하며 대제를 지켰다. 그는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이러한 생활을 멈추지 않아 마치 육신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럼에도 오히려 건강을 유지하였고 형색도 고왔다. 사람들은 이러한 김호연을 보고 하느님의 섭리가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라고 감탄했다.
김호연의 아버지는 아들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아들을 찾으려고 교우들을 관가에 밀고하려 했다. 김호연의 교우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면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쓰던 성물과 서적들을 교우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참 된 고향에서 다시 만납시다" 하며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김호연이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와 가족의 박해는 더욱 끔찍하게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참아 받으며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몇 주일이 지나자 중병에 걸렸고 허약한 몸에 기운이 다 빠져 무섭게 말라 들어갔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식칼을 들고 아들을 위협했다. "네가 천주교를 배교하고 죽으면 내 아들로 인정하겠다. 그러나 배교를 거절하면 이 칼로 너를 죽이고 나도 같은 칼로 죽고 말 것이다." 그러자 바오로는 간절하게 대답하였다. "아버지 말씀에 복종하려고 왕명을 어길 수 없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온 누리에 가장 높으신 임금이신데 어떻게 하느님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느님을 배반하라 강요하시는데 그것을 아버지의 본분이라 하겠습니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는 화가 치밀어 그대로 아들을 찌르려 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뛰어들어 겨우 위기를 모면하자 김호연은 다시 조용히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아무리 그렇게 극단적으로 하시더라도 저는 아버지의 명을 따르려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계명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모진 매를 맞았다.
다음날 아침 바오로는 늘 하던 대로 기도와 묵상을 하였다. 아침나절에 그는 정오가 되었느냐고 물어보더니 정오가 되자 삼종기도를 정성되이 바치고는 그대로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무릎을 꿇고 그의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그의 죽은 모습이 너무나도 고요하여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조차 알지 못할 정도였다. 때는 1831년 9월 어느 날이었다. 입교한 지 겨우 2년, 그의 나이 서른 여섯이었다. 그가 죽은 뒤 가족들이 관습에 따라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차려놓은 제상이 절로 무너졌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그를 가장 영광스러운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형벌보다 더 어려운 가족의 박해를 이겨낸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1999년 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