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민박집에서 매일 정성스레 제공하는 조식(한식인데 우리집 반찬보다 맛있다)을 먹고
주인집 아들이 이태리에서 처음 기차를 타는 나에게 여러가지 일러줄께 있다고 따라 나와서 방금 배웅해 주고 갔다( 사전 공부로 혼자 할 수 있는데)
" 어르신 잘 하실수 있을겁니다. 건강하게 잘 마치고 가십시요"
" 커피 한 잔 하고 가겠소?"
" 아닙니다. 집에 일이 많아서 그냥 가보겠습니다"
먼 로마에서 민밥집을 운영하는 한국인 아들인데 부모님 일 도우며 함께 사는 30살 미만으로 보이는 미혼 청년인데 건실하고 든든하다
트렁크는 카페에서 얻은 정보데로 기차 이동시 그냥 들고가버리는 서생들 가끔 있다고 자전거 체인으로, 기차 이동시만 사용하는 백펙은 이렇게 옷삔으로 채우고 다니는데,
이런 무장이 눈에 보이는지 여행 마칠때 까지 달려드는 꾼들은 못만났다.
"아틸라가 쳐들어 온다!"
"훈족( 흉노라면 감이 빨리)이 밀려 온다"
"이웃 아퀼레이아도 화공을 당했다. 아녀자들까지 몰살했다더라."
야만족은 무섭다. 저항한 자도 저항하지 않은자도 모두 죽여버린다.
금은 보화를 내밀어도 용서해주지 않는다.
야만족이 지나간 자리는 풀도 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당한다는 소문이 바람보다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제를 둘러싸고 저마다 불안을 호소한다.
때는 로마제국 말기, 야만족의 침입이 팍스 로마노(로마에 의한 평화 유지)에 친숙해져 있던 유럽 사람들을 공포의 밑바닥으로 쳐넣고 있을 때다.
그 중에서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은 그 광폭함 때문에 어느 야만족 보다 공포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동쪽으로 도망치니 가봤자 뻔한 바다, 북동쪽으로 가자니 이미 이 무서운 아틸라에게 습격당한 아퀼레이아가 있다.
그래서 교회의 탑으로 올라가서 ( 신의 계시로 내려온다 ) 바다 쪽을 보니 썰물 때라 군데군데 들어나는 소택지대가 보였다.
갈대가 전면에 우거져 있을 뿐 개펄에 나무라고는 그림자도 없다.
위 기술의 일부는 베네치아 초기의 연대기에 씌어져 있는 일부다. 이를테면 전설이다.
이 연대기에 의하면 452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술했는데 그 후 23년 후 서로마제국은
멸망했다.
오늘의 아름다운 도시 베네치아는 1천500년 전 상당히 높은 문명을 가진 그들이 일구었다
그로 부터 약 1세기 동안 이태리아말로 '라구나'라고 부르는 개펄지대 또는 석호라 해야 할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에게 비교적 평온한 세월이었다.
제국의 멸망 후에도 야만족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지만 사람이 생존하기에는 너무나도 불리안 지역이었으므로 습격하기도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보다 그들이 노리는 금은 보화의 부를 당시의 베네치아 사람들은 갖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 한줌의 주민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단단한 재질의 목재로 20센티의 사각형이나 원통형으로 길이가 2~5미터 짜리 말뚝을 끝을 뾰족하게 만들고 개펄지대 속에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박아 나간다.
베네치아 거리 밑에는 마치 거목이 지하 전면에 뿌리를 둘러치고 있는 것처럼 무수한 말뚝이 박혀 있다.특히 건물의 벽, 기둥 및, 운하를 끼고 있는 부분에는 집중적으로 깊숙히 박았다. 이 작업이 끝나면 바닷물에 강하다고 하는 이스트리아 반도에서 나는 석재를 전면에 겹겹히 쌓아 나간다.
돌과 돌 사이에는 시멘트로 다져졌다, 그 위에 석재만으로 된(화재예방) 주택이 들어섯다.
(최근에는 바닷물 범람으로 도시 전체가 물이 들어와 관광객들도 동동 걷고 다니는 상황이 되기도 하는데 여기에 바다속에서 물이 범람하면 올렸다 내렸다 하는 방벽을 만들어서 피해를 예방한다는데 효과는 어떨는지 아직 미지수.
부자들은 하나씩 바닷물 범람으로 뭍으로 떠다기도 한단다)
그 유명한 리알토 다리, 위에는 상가가 주욱 있다
오늘 날 베네치아는 순수 관광도시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 때는 향신료 중개무역 하는데 지중해 무역선을 덮치는 주변 해적들을 소탕하는 것을 계기로 지중해 해상패권을 거머쥐고 그들의 함대로 터키군 함선과 당당히 맞섯든 해군력,
18세기말 19세기초 무렵까지의 베네치아는 음악 연극 미술 출판등 문화의 중심지로 뒷날의 파리 이상으로 유럽의 문화적 중심도시 구실을 하였으며 우리는 세익스피어, 괴테, 바이런과 스탕달의 작품이나
기행문을 통해 오늘의 베네치아보다 18세기 베네치아에 더 깊은 영감들을 갖고 있다.
베니스의 상인, 오셀로는 말할 거 없이 베네치아가 무대이고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실로 구름과 같이 묵인묵객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베네치아 여행을 " 그들이 진짜 젠틀맨임을 자타가 확인하는 데에 빠뜨릴 수 없는 체험"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 시대를 상상하는 것도 빠뜨리지 말자.
역사는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생각했든지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 엄청나고 대단한 작은 도시는 그 후 1797년 5월 16일,
(도시의 파괴와 시민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의회 투표끝에 이미 항복을 하였고 )
프랑스 군 4천명이 진주함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은 종을 고한다.
4시간 기차를 타고 베니스 역에서 내리고 숙고 가서 체크 인 하고 곧장 바포레토라고 하는 수상버스를 타고 또 걸어서 찾아간 곳이 페기구겐하임 미술관,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니스는 버스라는 것이 없고 모든 이동수단이 수상버스, 수상택시 뿐인데,
수상버스 이것은 참 복잡하다. 그래서 사전에 연구를 착실히 해야 제대로 목적지 선착장을 찾아간다. 한 마디로 정신 바짝 차려야.......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미국 미술수집가이자 보헤미안이다. 그리고 그 시대 사교계의 명사였다.
뉴욕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1912년 타이타닉과 함께 침몰한 벤자민 구겐하임의 딸로 1898년 태어나서 1979년 죽었다.
미술중독, 섹스중독의 영화같은 삶을 살고 갔다고 한다.
미술만큼 화가들을 사랑했고 엄청난 그녀의 남성 편력과 심미안으로 이룩한 소장품도 326점에 이르렀다. 그 중에 특히 잭슨 폴락에 관한 이야기가 길다.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근현대 작가들을 발굴, 지원, 소개, 구입하면서 미술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고, 1976년 그녀의 소장품으로 베니스에 뮤지엄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이 창설됐다
자서전에 의하면 페기는 23세에 여러가지 체위를 묘사한 폼페이 벽화 사진을 본 후 호기심을 갖게되어 자신이 모두 성체위를 체험해보고 싶었다고 술회했는데,
유럽에서 섹스 중독자로 살던 페기는 무려 1,000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런던에서 1938년 모던 아트 갤러리 "구갠하임 쥰"을 오픈해 프랑스 시인, 화가인 장 콕토
의 드로잉을 개관전에 소개했다.
용모에 열등감을 느낀 나머지 감자처럼 생긴 코를 여러번 수술했지만 실패.
81세에 뇌졸증으로 사망한 그녀는 한 때 라사 압소견들을 57마리나 키우기도 했는데
먼저 죽은 14마리의 애견들 옆에 묻혔다.
딸도 화가였는데 자살로 마감.
1937년 개관한 미국 솔로몬 R 구갠하임 미술관의 건축물도 유명한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스페인, 빌바오 구갠하임 미술관,
2025년 개관예정인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구갠하임 아부다비
아카데미 미술관에서
카라바조 , 체스 두는 사람들
작가 요한 카를
성인 로무알드 : 11세기 금욕주의 르네상스시대의 주요 인물.
30년 동안 이탈리아를 횡단하여 수도원과 암자를 설립하고 개혁했다고 한다
피에트로 리치,
역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 앞서 설명을 했습니다)
렘브란트 (1633년 그림)
성 바르톨로메오의 초상
전설에 의하면( 기독교 입장에서는 사실의 하나)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든 바르톨로메오를 그린 것.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산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로 죽음을 맞이.
얼굴과 몸통의 선명한 명암 차이, 이마의 주름과 머리카락, 수염 묘사를 보고 램브란트 그림이라는 것 확신한다고 함.
닥칠 죽음을 알기에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모습이 그의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이런 인간적 고뇌를 이렇게 묘사할 수 있는 화가는 렘브란트를 제외하면 많지 않다고 한다
도미니코 페티 그림 1618년
작가 : 티지아노 베셀리오(티지아넬로)
베니스, 1570년, 두개골을 들고 있는 수염 기른 노인과 대조적으로 갑옷을 입은 젊은 사람은 시간 또는 그 이상, 나이와 운명에 대한 우화일 수 있으나 뭇인간들에게 시사하는 바,
예고와 경고를 갖게 한다
'젊어서 힘쓴다고 까불지마라. 결국은 이런 해골바가지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