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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
성경 ; 사58:1-9, 마5:13-20, 고전2:1-12
제목 ; 주님은 왜 우리를 알아주시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지난주에 있었던 설 명절은 즐겁게 잘 보내셨는지요? 아
무쪼록 올 일 년 동안, 주님의 은혜 안에서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 언제나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올 설 명절은 ‘즐거운 설날’이 아니라, ‘고생스러운
하루’였습니다. 왜냐하면, 설날 새벽 4시에 이곳에서 출발해서 대전을
갔다가 그날 밤 9시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고 어
려웠기 때문입니다.
새벽 4시에 출발해서 가다 보니, 모든 노선의 노면상태가 약간은 미
끄럽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날씨가 비교적 푸근하긴 했지만, 그래도
겨울철이라선지 노면상태가 정상은 아닌 듯싶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
기 전 이른 새벽이기 때문인지, 천지사방은 아주 캄캄했습니다.
그래도 고속도로를 탈 때가지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속도로로 접어들면서, 저의 운전 상태는 최악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오랜만에 고속도로를 타다 보니, 여간 낯설고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더
군다나, 아직 운전이 미숙하고 서투르기 때문에, 아주 최저 저속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양쪽의 다른 차들은 싱싱 아주 신나게 잘 달리고 있었습니
다. 우리 뒤를 따라오던 어떤 차들은 빨리 가라고 빵빵 클랙션을 울려
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옆에 앉아가던 아내가 심히 불안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불안해하는 아내를 보게 되자, 제 자존심이 와장창 깨
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
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7시 30분쯤 대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국도를 이용했습니다. 설날 점심 이후에는 올라오는
차가 많기 때문에, 고속도로가 심히 붐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아는 사
실이기 때문입니다. 차를 많이 이용하는 형님께서 ‘어느 길로 가면 막
히지 않고 잘 갈 수 있는지’ 교통정보를 알려주셨습니다.
국도를 이용해서 오게 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속도로
를 탈 때에 심히 맘고생을 하던 아내가 하는 말이 ‘우리에게는 이런 길
이 딱 안성맞춤이다.’라고 하면서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오면서 도로변
에 있는 중국집에 들려서 자장면도 시켜먹고, 졸릴 때에는 한적한 곳에
다가 주차해놓고 단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대전에서 1시
에 출발한 우리는 9시가 되어서야 김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고 오면서 느끼게 된 것은, 우리 차의 전조등 불빛이 그리
밝지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새벽에 대전으로 갈 때에도 좀 이상하다
는 느낌이 들었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전조등에 문제가 있다는 사
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전조등을 살펴봤습니다. 양쪽의 전조등 불은 다 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빛은 짐작했던 대로 밝지가 않았습니다. 가
만히 살펴보니, 전조등에 먼지가 쌓여 있었습니다. 휴지로 먼지를 닦아
내자, 휴지가 새카맣게 변했습니다. 전조등의 불빛은 이전 상태로 다시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그러니까, 겨울이 오기 전에는 주유소에서 수시로 세차를 해서 문제
가 없었는데, 세차를 할 수 없는 겨울 동안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주
유소에서 세차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제가 걸레를 가지고 차량 외부를
청소했는데, 그만 전조등은 닦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는, 주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를 믿어서 그의 제자
가 된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
하시기를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그것을 등잔대 위에 올려놓아서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치게 해
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너희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환하게 비추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
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말
씀은, 우리가 바르고 선하게 살아감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
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서 그들의 모범이 되는 인생을 살려고 한
다면,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말할 것이 없
이, 우리의 빛을 세상 사람들에게 잘 비추기 위해서는 믿음생활을 좀
더 온전하게 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빛의 원천이신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래야만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의 모
습을 많이 닮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온전히 비추는 밝은 빛
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너희는 세상을 맛내게 하는 소금
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다시피, 소금은 모든 음식을 맛나게 해주
는 아주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소금이 없었다면, 모든 음
식을 맛없이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소금은 아주 소중한 물질입니다. 그런데, 그 소금처럼 소중
하고 값진 존재가 바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맛나게 해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맛있다’는 말은 ‘멋있다’는 말과 그 어원이 같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맛나고 멋있는 세상’ 곧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소금이 그 짠 맛을 잃을 경우에는 그 존재가치를 잃어버리
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쓸모가 없는 무가치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
는 능력과 지혜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기독교인으로서의 그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쓸모가 없어서 밖에
버려지게 된다.”고 하시면서, “버려진 소금은 사람들에 의해서 짓밟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들어서 아시겠지만, 중동지방의 소
금은, 물에 넣으면 그 자체가 다 녹아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짠맛만 우
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짠맛이 사라진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의
가치를 상실하고 돌처럼 되어서, 길가에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기독교인으로서 그 존재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길가에
버려지는 쓸모없는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 의하여 짓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교회가 그런 형편에 놓
여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고개를 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의 기
독교와 성도들을 바라보실 때, 얼마나 그 마음이 괴롭고 아프시겠습니
까?
오래전에, 한 서커스단이 미국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
기가 나가는 정전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딱 1분간이었지만, 그곳에 있던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도 무대에
서는 조련사가 호랑이 네 마리를 데리고 재주를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많은 관중들도 위험했지만, 특히 조련사가 호랑이들
의 공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이 많았습니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이 아주 고요하고 캄캄한데, 무대에서는 변함없이 조련사의
채찍 소리와 호랑이들에게 동작을 지시하는 명령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
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전기가 다시 들어오자, 관중은 모두 일어나서 조련사에게 박
수를 보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기자 회견이 열리자, 조련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들은 나를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렇
기 때문에, 내가 호랑이를 못 보고 있다는 것을, 호랑이들이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둠 속에 있더라도, 마치 밝은 빛 속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조련사가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들을 제압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빛의 사람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그 빛을 잃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빛의 사람이
기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훌륭해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만 빛의 원천이신
주님의 빛을 받아서 다시 세상을 향하여 되비추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는 우리가 세상 욕심으로 더러워져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의 빛을 제대로 비추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세상 욕심으로 더러워져 있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피로 항상 깨끗하
게 씻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소금의 짠맛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
독교인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입니다.
1.기독교인으로서의 그 맛과 그 빛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고상한 말이나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고전2:1)’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의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
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왜 죽
으셔야 했는지, 그 사실만을 전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
도 바울은 ‘그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알게 하려고 복음을 전한 것’
도 아니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세상의 어떤 다른 목적을 이루고자 함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예수님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
고, 세상적인 어떤 목적을 교회 안에서 달성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
를 들자면, 세상에서 얻지 못한 명예를 교회에서 이루어보려고 하는 것
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명분이야 주님과 교회를 위한다고 하
지만, 실상은 그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 보여주려고 하는 경우
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을 자
주 하고 있는데, 그 말도 결국은 같은 종류에 속하는 말일 것입니다. 사
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더 이상 비교할
수 없는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잘 믿으면 하나님께
서 축복해주신다는 말은, 예수를 믿어서 생명을 얻게 되는 것 말고, 그
밖에 다른 것들, 곧 세상적인 그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일 것입
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입니
다. 쉽게 말해서, ‘순수한 믿음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말입니다.
진정 우리의 믿음이 세상에서 온전히 그 빛을 발할 수 있기를 원한다
면, 우리 속에 있는 세상적인 욕심을 다 버리고 ‘믿음의 순수성’을 회복
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빌려서 ‘온전한
금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
적하시기를, ‘백성들이 금식을 하면서도 여전히 부당한 일을 행하고 있
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금식을 한다
면서 계속 다투며 싸우고 있으니, 그런 금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오늘 날로 말할 것 같으면, 교회의 지도자들이 열심히 하나님께 예
배하면서 부지런히 감투싸움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들이
내세우는 바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교만과 독선, 그리고 자신의 명예와 자존감을 높이
고자 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금식’이 어떤 것인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굶주린 사람에게는 음식을 나누어 주고, 집 없
이 떠돌아다니는 불쌍한 사람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고, 입을 옷이 없
는 사람에게는 옷을 입혀 주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식구들을 보고서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다(58:7)”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행하게 될 때, 우리가
입은 모든 상처가 빨리 낫게 되고, 우리가 행한 그 의로움이 우리를 복
된 길로 인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뒤에 계셔서 그를 항상 보호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빛과 소금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
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올바른 금식을 하면, 그 앞날이
아침햇살처럼 밝게 열릴 것이다(사58:8)”라고 하셨습니다.
2.우리는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에 따라 올바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율법
을 가르치고 그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것
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하고 가르
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따라 살 경우, 그런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위
대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7절
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깨닫게 하
는 것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아주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갖게 될 때, 우리와 함
께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해주시고, 또한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갖게 해주는 것
입니다.
한 청년이 우연히 만난 예쁜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그날부터 아가씨에게 매일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고 아끼는지, 편지지에다가 가득 써서 보냈습니다.
요즘 같으면 이메일로 보냈겠지요. 한 통 두 통, 편지는 매일 그 아가씨
에게 배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편지에는 그토록 절절한 사랑의
내용을 담아 보내면서도, 그 청년은 아가씨 앞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혹, 아가씨한테 거절을 당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편지 왔습니다.” 집배원의 목소리가 들리면, 아가씨는 반가움에 어
쩔 줄 모르며 뛰어 나갔습니다. 집배원은 편지를 내밀며 정중히 인사를
했습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진지하고 성실했습니다. 아가씨는 얼굴을
붉히며 편지를 받아들곤 했습니다. 그렇게, 집배원은 날마다 아가씨에게
편지를 배달했습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 어느덧 2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청년이 보낸
편지가 600통이나 되었습니다. 600통이나 되는 사랑의 편지를 받은 아
가씨가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신부로 맞아들
인 사람은, 그 600통의 편지를 보낸 총각이 아니라, 날마다 그 편지를
배달한 집배원이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날
마다 편지를 보낸다고 하던 그 청년이 아니군요.” 신부가 수줍게 웃으
며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백 마디 피 끓는 사연보다 한 번의 따스한
눈빛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양초가 아무리 많아도 불을 밝히지 않으면 그 많은 양초가 무슨 소
용이 있겠습니까? 그 양초에다가 불을 밝혀야 빛을 발할 수 있지 않겠
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금식을 많이 한들, 그리고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린다 한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예배와 금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양초가 많을수록 더욱 밝게 불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을 값지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이나 지혜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
다고, 과거에 이룬 빛나는 업적도 오늘 우리의 인생을 값지게 할 수 있
는 것이 아니거니와, 지금 갖고 있는 지위나 권력도 우리 인생을 빛나
게 해주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우리 인생을 값지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인생을 지으
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금과 빛으로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
고, 그 본분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는 존재로서, 그 소중하고 값진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는, 참으로 값진 빛과 소금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
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