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문
-이번 시험 범위에 세월호 관련 기사가 출제되는데, 기존 실록의 연장선상에 있는 실록으로, 우리나라서 있었던 선박 침몰 사고들을 살펴봄으로써 '안전 불감증'에 대한 반성과 경계, 지식의 확장을 위해 실록을 집필하는 바 이다.
2. 본론
2-1. 평해호 침몰 사건
-1949년 10월 5일, 2백여 명의 귀향객을 실고 가던 개인 소속의 발동기선 평해호가 항해 도중 작약도에서 100m 떨어진 지점에서 전복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평해호는 17톤급으로 총 정원이 원래 50명이었지만, 명절을 앞두고 이를 과도하게 초과한 200여명이 승선하였다. 12시 12분 인천항을 출발한 평해호가 운행 40분 후 작약도에서 전복되어 승객 다수가 바다에 떨어졌고, 승객들의 혼란으로 인해서 다시 뒤집혔다. 11월 13일 인천지검은 생존자 86명, 사망자 71명으로 발표했다. 사고 원인으로는 해사국에서는 정원 초과, 인천수상서에선 정원 초과와 승객들의 혼란, 사고 당시 선장이 만취 상태였다는 보고가 나왔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론 선장의 무책임한 태도, 경찰관과 헌병의 불찰, 권한 관계의 불명확성 등이 지정되기도 한다.
2-2. 제5편리호 침몰 사건
- 1951년 7월 11일 부산에서 출발하여 다대포를 항하던 17톤 규모의 제5편리호가 부산 암남동 혈정소 해안을 항해하던 중 침몰하였다. 수상 경찰서에서 구조대와 구호선이 현장에 급파하여 55명을 구조하고 시신을 인양하였다. 7월 14일까지 총 15명의 시신을 인양했고, 선내에서 발견된 7명을 포함하여 도합 23명을 발견하였다고 보도했다. 7월 18일까지 74구의 시신을 인양하고 36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보도했다. 8월 8일 국회조사결과보고에 의하면, 총 중량 17톤에 선령 24년의 노후 선박으로, 정원이 54명이었는데 출항 당시 170명의 승객을 태운 걸로 확인되어 정원 초과가 원인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2-3. 남영호 침몰 사건

- 1970년 12월 15일 제주도 서귀포항에서 부산항으로 가던 남영호가 침몰하였다. 남영호 사건은 전형적인 인재로, 선박회사에선 내부 화물 창고가 다 차자 선적이 금지된 화물창고 앞 덮개 위에 감귤을 400상자를 더 쌓았고 중간 갑판 위에도 500여 상자를 더 실어 서귀포항을 출발할 때부터 이미 중심이 15도 이상 기운 상태였다. 15일 새벽 1시 15분, 심한 바람이 몰아치면서 갑판 위에 실어 둔 감귤 상자가 넘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순간 중심을 잃은 선체가 좌측으로 기울면서, 10분 만에 전복되었다. 1시 20분부터 25분까지 남영호에선 비상주파수로 구조 신호를 전달했으나, 전달되지 않았다. 생존자 중 한명이 5시 20분 한국 어선인 희영호에 구출되었으나, 희영호는 구조 활동을 참여하지 않았다. 8시 45분, 일본 순시선에선 고겡마루와 고아마루라는 두 어선으로부터 남영호가 침몰하고 4명을 구조했다는 무전을 받은 뒤, 9시에 한국 해병대에 무선 연락하였으나 응답이 없었다. 일본 해상보안본부에선 12시 30분까지 부산과 제주의 한국 해병대에 무선 연락하였으나 응답이 없었다. 2시 순시선은 8명의 승객을 구조하였다는 것을 연락하였고, 2시 15분 한국 해경의 연락을 받았다. 한국 해경은 오후 1시에나 겨우 출동하였고, 4시에 도착하여 3명을 구조하였다. 사고의 원인으로는 원래 인원을 초과한 정원 302명을 초과한 336명이 타고 있었고, 적재적량의 4배에 달하는 540t의 화물이 실려 있었다. 또한, 한국 해경이 신호를 받고도 빠른 대처를 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대표적인 인재이다. 해경의 부실 대응의 원인으로 해경 근무를 일종의 좌천으로 여기고 사명감 없이 일하는 고질적 풍조도 지적되었다.
2-4.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

- 1993년 10월 10일 362명의 승객과 16톤의 화물을 적재하고 위도항을 출발한 서해훼리호가 임수도 부군 해상에서 돌풍을 만나서 회항하려고 뱃머리를 돌리던 중 파도를 맞아 심하게 흔들리면서 전복되었다. 9개의 구명정이 있었으나 2척만 작동하였고, 부유물에 매달렸다. 사고 직후 인근에서 조업하던 어선들이 조난 사실을 알리고 약 40명을 구조하였다. 사고 1시간 후 강풍과 풍랑에도 수색작업을 시작하여 22시까지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고 51명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10월 15일에는 선장, 기관장, 갑판장의 시신이 침몰한 배 내부 통신실에서 발견되었고, 11월 2일에는 마지막 실종자를 끝으로 모두 292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사고의 원인으로는 기상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무리하게 출항한 것과, 고질적인 승객과 화물의 과적, 열악한 운영 환경이 지적되었다. 또한 선박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배의 구조가 불안정했지만 1990년에 선박기술업체의 복원력 시험에 통과하였다. 12월 13일, 전주지검의 총 결과에 의하면, 사고의 원인으로 초과 승선과 화물 과적, 운항의 부주의와 방수구(구명조끼) 부족으로 발표하였다.
2-5. 이 말고도 수 많은 침몰 사건이 있었습니다...
후기: 왜 이 모든 게 인재라고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제발 반복되지 말자....
첫댓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