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踏査)는 밟아가며 조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러 번 답사를 해보았지만 한번도 제대로 된 답사는 하지 못했다. 이 유적지가 어떤 점에서 중요하며 어떤 것을 유심히 살펴야 하며 어떻게 봐야하는지 아는 만큼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던지 출발전에는 답사지(踏査地)를 공부해야겠다고 다짐은 하지만 한번도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타인에 의해 끌려 다녔던 수동적인 답사만이 내 머릿속을 채운다. 실망적인 답사의 기억으로 가득차서 그런지 답사에 대한 회의감이 있어 이번 춘계(春季)답사는 불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업 과제는 제출해야 하기에 어딘 가를 답사해야 했다. 답사 장소는 정하지 못한 채 춘계답사 기간 끝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 된 역사스페셜에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한 주제로 방송을 하고 있었다. 방송을 보면서 고등학생 시절 밀양이라는 작은 시골 동네가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알며 명성황후 시해를 절대 용서할 수 없으며 언젠가는 되돌려 주리라고 다짐하던 나의 고등학생 시절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현재 나는 그때의 열정과 복수심 모두 사라진 평범한 대학생에 불구하지만 과거의 나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110여 년 전의 이 사건의 배경이었던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답사하면서 과거 민족적·역사적 비극의 현장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과 꿈이 있던 고등학생 시절의 나를 되살리고 싶어 이 곳으로 답사를 가게 되었다.
수업이 없던 금요일 친구와 함께 경복궁으로 향했다. 서울 지리도 모르는 지방촌놈 2명에게는 버스답사는 무리였는지 한참을 잘못 내렸다. 주변을 살펴보니 서울역 주변이었다. 숭례문과 가까이 있어 착각을 한 것이다. 내리고 나서 다시 버스를 타자니 이번에도 제대로 내리지는 못하겠고 지하철을 타자니 너무 번거로워 보여 우리는 육군으로 배운 행군능력을 발휘하기로 했다. 덕수궁을 거쳐 육조(六曹)거리 세종로를 지나 경복궁의 남쪽 정문인 광화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비록 육조거리도 다 사라진 뒤여서 상전벽해 꼴이 되긴 하였지만 그래도 광화문과 백악산이 다 보였기에 과거 경복궁을 드나들던 높으신 분들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랜 도보 끝에 도착한 광화문은 제 모습 찾기 공사를 하고 있어 볼 수 없었다. 제3공화국 시대 시멘트로 복원한 광화문은 복원된 모습뿐만 아니라 위치 또한 잘못 배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렇게 제자리 제 모습을 찾는 공사를 보며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첫걸음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며 서쪽으로 둘러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이름 불교 유물이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병탄 이후 본격화된 경복궁 해체 작업의 일환으로 많은 건축물을 헐었는데 이 때 헐어낸 건물터에 전국 각지의 명산대찰 터에 남아 있던 불교 유물을 파손하면서까지 옮겨 놓아 여기에 있다고 한다. 이를 보며 떠오른 ‘새 나라 조선의 만 년을 이어 갈 임금님들이 하나같이 큰 복을 받으소서’ 라는 의미에서 궁의 이름을 경복이라 하였다는 창건 설화는 600년이 지난 오늘날 경복궁이 역사의 변동성을 대변하는 산 증인으로 보여 왠지 모르게 슬퍼졌다. 광화문 뒤쪽 편으로 나와 경복궁 안쪽에 위치한 제1문인 흥례문 앞에 들어섰다. 입장권을 사고 흥례문으로 들어가려는데 왼쪽 편에 위치한 고궁박물관과 경복궁 오른쪽 편에 위치한 민속박물관이 눈에 거슬렸다. 90년대 초반부터 경복궁 복원사업이라 하여 일제에 의해 훼손된 옛 궁궐을 복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일환으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제자리 찾기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궁궐 안에 현대식 박물관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고궁박물관은 경복궁의 주인이었던 조선 왕조의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는 연관성 때문이라고 이해하겠지만 한민족의 문화상을 전시하는 민속박물관은 왜 굳이 이곳에 위치해야 하는지? 또 민속박물관을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이 나게 만들려는 목적은 알겠지만 왜 청기와를 얻은 중국식 건축물로 세워야 했는가? 하는 점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제자리 찾기 공사를 진행에서 말하듯 옛날 그대로의 복원을 외치면서 그 속에 박물관은 짓는다는 모습은 일제가 조선 왕실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키 위해 창경궁에 동물원을 설치한 것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렇게 많은 재정을 들여 만든 박물관도 광화문과 같이 제자리 찾기 운동에 일환으로 없어지겠지 하는 푸념을 해보았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러한 복원 사업을 진행하는 부서인 문화관광부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다. 어설픈 복원이 더욱 경복궁과 우리역사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해보며 흥례문을 지나갔다. 과거 물이 흘렀을 어구를 지나며 역사의 허무함을 느끼며 근정문으로 지나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으로 갔다.
정전인 근정전은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자리에 있으며 전면에는 중요행사를 치룰 수 있는 넓은 마당,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었다. 마당에는 과거 의례거행 시 신료들이 품계에 따라 도열하던 표석인 품계석, 햇볕을 가지는 천막을 바람에 나부끼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매기 위해 만들었다는 고리가 있다. “고리가 왜 이런 데 있담!”하면서 발길로 툭 치고 가는 사람들은 고리가 각종 행사의 장이었던 근정전 앞마당을 그리지 못할 것이고 또 고리에 묶여 설치된 장막 아래서 있었던 연회를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1학년 춘계답사 때 갔던 어느 사찰 터에 가서 과거 사찰 모습을 상상하는 수준에 올라야 진정한 역사학도라고 말씀하셨던 진성규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서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생각없이 따라 다닌 답사가 무의미하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근정전 전각을 살펴보았다. 아름다운 무늬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옥좌, 2층으로 이루어져 장엄한 천장, 화려한 천장 장식을 더 빛나게 만드는 두 마리의 용 장식까지 조선왕조 500년을 대표하는 근정전의 내부는 사람들을 압도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홀로 남아 있는 유물을 보며 고등학생 때 배운 조지훈의 봉황수라는 시가 떠올랐다.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
(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
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퇴락한 고궁을 바라보면서 지난날 역사의 그릇됨에 대한 비판과 반성, 민족혼의 부활과 국권회복에 대한 소망을 은연중에 나타낸 이 시 속에 고궁은 분명 여기가 아니었을까? 내가 오늘날 국권회복은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봉황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느끼는 것은 봉황새는 옛 주인인 조선왕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화려함 속에 민족의 아픔을 간직한 근정전을 뒤로 하고 북쪽으로 향했다.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면서 정사를 보던 건물 사정전을 지나 경복궁 안에 있던 왕의 침전이었던 강령전으로 갔다. 강령전은 왕비 침전인 교태전과 함께 지붕에 용마루를 양성하지 않아 침전임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강령전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 방이 있었는데 이는 日官이 그날의 운세를 보고 오늘은 어느 방향이 吉 하다고 아뢰면 그에 따라 그쪽 방을 이용했다고 한다. 잠자리를 운세에 따라 이동하는 왕의 모습을 상상하니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왕실도 후세를 위해서는 결국 미신을 믿는 한 인간에 불구하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으로 갔다. 교태전 뒤편에는 아미산(峨嵋山)이라는 인공산이 있었다. 궁궐을 나가지 못하는 왕비를 위해 만들었다는 아미산은 많은 꽃과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굴뚝과 벽에는 갖가지 그림으로 아름다음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궁궐 밖을 나가지 못해 이 곳을 벗 삼아 외로움을 달랬을 수많은 왕비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날 정도로 불쌍해 보였다. 외로움에 눈물흘렀을 왕비들의 모습을 그리며 나는 아미산의 서쪽 문으로 나갔다.
발걸음을 옮겨 향원정으로 향했다. 향원정은 경복궁 안에 있는 2층 정자로 작은 연못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드라마, 영화에서 많이 나왔던 곳이라 마치 예부터 알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향원정에서 찍었던 드라마 속에서 오열하던 명성황후, 명성황후와 고종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사극 전성기인 오늘날 사극은 대중성을 지녀야 하는 특성상 사실을 왜곡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은 사극은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기에 역사에 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H. 카의 말처럼 현재를 배제한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명성황후라는 드라마를 통해 명성황후와 향원정을 알게 되었다. 드라마가 아니였다면 나에게 이것들은 단순히 교과서에서 나오는 기록상의 역사에 불구하였을 것이다. 내가 향원정과 명성황후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비록 정확하지 않지만 역사를 말해주는 드라마의 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역사의 콘텐츠화는 죽은 역사가 아닌 현실과 소통하는 역사의 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드라마 속 명성황후와 100년 전의 명성황후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나는 명성황후의 마지막 장소였던 건청궁이 있는 북쪽으로 향했다. 건청궁은 경복궁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는 일본으로부터 위협을 느낀 고종과 명성황후가 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에 건청궁을 지어 만일의 사태를 피하고자 했던 당시의 슬픈 역사가 담겨있다. 즉 한 나라의 왕과 왕비가 외세의 위협 속에 경복궁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뒤로 한 채 이렇게 후미진 곳에 생활했다는 사실은 100년전 우리 민족의 상황을 대변하는 기록물일 것이다. 아직 복원이 덜 됐는지 아니면 실제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건청궁 건물은 단청이 되지 않은 채로 복원되어 있었다. 비극의 현장이라는 생각과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되지 않은 모습은 건천궁으로 들어가는 나를 더욱 경건하게 만들었다. 건천궁은 사정전, 교태전 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협소했다. 건청궁의 서편엔 왕의 침전인 장안당이 있었다. 1895년 사건 당일 이 곳에서 고종은 옷이 찢겨지고 세자는 칼등에 맞아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황후의 침전인 옥호루는 그 동쪽에 있었다. 명성황후가 시해 된 장소였던 옥호루는 당시의 끔찍했던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처럼 슬퍼보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이야기 하며 일본의 야만적인 행동과 무능력한 조선왕실을 비판하였던 나였지만 여기에서 만큼은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슬펐다. 건청궁을 나온 나를 맞이한 건물은 청나라 사람들에 의해 지어졌다는 집옥재였다. 개항기 시대 청나라, 일본의 침략 속에서 신음하던 명성황후와 고종의 처지, 아니 우리 민족 역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에는 사건은 반복되지 않지만 상황은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분명 100년 전의 사건이지만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세계 1차 대전이 끝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인류는 2차 대전이라는 더 큰 전쟁을 경험했고 이후에도 많은 전쟁을 경험했으며 경험하고 있다. 또 경험할 것이다. 사람들은 역사를 지나가는 강물에 비유하곤 한다. 이는 역사의 연속성을 말한다. 또 역사의 불변성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약육강식이라는 역사의 불편한 진리 속에 어떻게 해야 다시는 이런 비극을 맞지 않을까하는 의문과 그것을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내 자신에게 남기며 경복궁 답사를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