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장이야기
▲ '남좌여우' 영릉 쌍릉. 원으로 조성된 뒤 후에 추존된 능이라 장명등과 석물이 왕릉에 비해 작다.
어느 쪽에 왕의 릉일까? 왕과 왕비, 남자와 여자의 위치는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왕과 왕비가 한 자리에 있는 경우, 마주 보아 왼편이 왕이 잠든 곳이고 오른편이 왕비의 자리다. 왼쪽이 오른쪽보다 서열상 높다는 규칙은 엄격히 지켜져 왔다. 이는 비록 왕실뿐 아니라, 사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남좌여우(男左女右)라고 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살아 생전에 지키던 것이고 죽으면 반대로 오른편이 높아진다. 즉, 살아서는 왼편이 왕의 자리로 좌의정이 섰고, 오른편에는 왕비와 우의정, 또 문인은 왼편, 무인은 오른편에 서는 규칙을 지켰다. 그러나 죽으면 오른쪽이 왕, 왼쪽이 왕비 자리가 된다.
계급사회였던 조선왕조에서 서열과 남녀에 따른 자리는 생전과 사후가 정반대로 달라지고, 보는 사람의 위치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 왕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에 따라 다르므로 혼란스럽다. 쉽게 왕이 가진 권력을 생각하면 된다. 모든 것은 왕을 기준으로 한다. 왕이 앉은 자리에서 왕의 왼쪽(동편)이 좌가 되고, 신하들에겐 우가 된다. 신하의 위치에서 오른쪽(동편)이 왕의 자리고, 왼쪽(서편)이 왕비 자리가 된다.
왕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내려다보며 앉기에, 왕의 왼편이 동쪽이 되며 우편은 서쪽이 되므로 왕에게 절을 할 때는 무조건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하여 북향사배를 하는 것이다. 문무백관의 조회를 받을 때 동쪽이 문관의 자리고 서쪽이 무관의 자리가 되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죽으면 반대로 오른쪽을 높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겐 왼편이 왕의 무덤, 오른편이 왕비의 무덤이 되는 것이다. 합장릉일 때도 이 규칙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북향에 머리를 두고 발은 정자각 쪽에 두는 것도 정해진 원칙이다. 두 언덕에 왕과 왕비가 묻혀 있고 정자각 하나를 쓰는 동원이강릉 형식의 왕릉도 마찬가지다.
이 원칙은 지금도 내려온다. 예절 교육을 받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절을 하거나 두 손을 모아 서 있을 때, 남자는 왼손을 위로 올려 포개고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올린다. 그러나 상가에 갈 때는 정반대로 바뀐다. 남자는 오른손을 위로 포개 절을 하고 여자는 왼손을 위로 올려 포개는 것은 이 원칙에 따른 것이다.
서열에 따른 남녀차별이라고 분개할 일은 아니다. 원래의 의미는, 좌인 동편은 양이고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것이며 이는 남자의 위치이며, 우인 서편은 음이고 달이 서쪽에서 떠오른다는 여성의 위치를 본 뜬 것이라고 한다.
임금님의 장례
왕의 장례식은 사대부나 사가와 달라도 엄청 다르다. 보통 사람이 죽으면 염을 할 때 삼베로 만든 수의를 입히지만, 왕과 왕비의 습(襲)에는 흰 비단 옷을 9겹으로 입힌다. 그리고 죽은 지 2∼3일 내에 하는 소렴에 대행(大行. 왕과 왕비가 죽은 후 시호가 붙기 전에 일컫는 말)에 겹옷, 겹이불로 19겹을 입히고, 4∼5일 후의 대렴에는 무려 90겹의 수의를 입힌다.
왕의 장례인 국장은 국가사업에 비견할 정도로 많은 돈과 인력을 퍼부은 대단한 중대사였고, 새로 등극한 왕이 첫 번째 국사를 맡는 일이기도 했다.
왕의 병환이 위급해지면 대신을 불러 왕위를 전하는 유교를 작성하게 한다. 임종 무렵부터 솜을 얹어 흔들리는지 살피며 소렴과 대렴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내시가 맡는다. 왕비일 때는 나인(女官)이 한다. 승하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왕세자와 대군 이하의 친자, 왕비와 내명부, 외명부의 공주 등은 모두 관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며 금, 옥, 비취, 노리개 등을 제거한다.
지금도 각국 대통령이나 수장이 죽으면 전국에 계엄령이 내리고 삼엄한 경계태세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상이 선포되면 계령(戒令)이 내리고 병조에서는 군사들을 동원해 도성의 성문과 대궐을 겹겹이 에워싼다.
이어 예조에서 의정부에 보고하고 중앙과 지방에 공문을 보내 도성과 지방의 관청으로 하여금 계령을 지키게 한다. 5일간 장이 열지 못하며 작은 골목에서 필수품만 매매하게 한다.
왕이 승하 후 3개월이 지난 뒤 졸곡(卒哭)을 하는데 졸곡 전까지 혼인이나 돼지나 소 등 동물의 도살이 금지된다. 이 때문에 국상 한 번 나면 백성들은 고기 구경도 못하고 혼인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의 장례위원회와 같은 임시 관청이 3개 설치된다. 이조판서는 의정부에 보고하여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을 설치하고 국장을 분담하게 한다. 자세히 알리자면 복잡하므로 간단하게 설명하려 한다.
빈전도감은 제조(감독·지휘하는 겸임관직)가 세 명이고 그 중 한 명은 예조판서가 맡는다. 빈전도감의 일은 세 관청 중 비교적 간단하여 소렴과 대렴에 입을 옷, 빈전(일반인은 빈소라 한다), 찬궁(관을 설치하는 일), 성복(상복을 입는 일) 등을 맡는다.
국장도감은 호조판서, 예조판서가 제조를 맡고 명기, 집기류, 악기류, 대여(관을 싣는 큰 가마), 지석, 제기, 책보 등을 만드는 일을 한다. 산릉도감은 가장 고된 일을 맡는 곳이다. 즉, 능을 조성하는 일을 총지휘하며 공조판서와 선공감정이 제조로 임명되고 당하관은 10명이다. 광중(무덤)을 파고 정자각과 현궁, 비각, 수복방, 재실 등을 짓는 일을 한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 판윤을 교도돈체사로 임명하여 장지까지 가는 다리나 길을 수리, 설치하는 일을 하게 한다.
3도감의 도제조는 의정부 좌의정으로 임명하여 3도감 총호사라 하고 장례의 모든 일을 총괄 처리한다.
국장을 위해 임시로 설치된 세 곳의 관청 조직을 지금까지 대충 봐도 의정부 좌의정, 이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공조판서, 한성 판윤이 참여한 중대한 국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영의정 이하 모든 고위관료가 능 택지에 서로의 목소리를 내려고 풍수의 지식을 동원했고, 지방의 관료들까지 국장에 참여하려고 잘 본다는 풍수를 뽑아 올리는 일이 허다했다.
명당에 국장을 잘 치른 뒤 풍수를 천거한 관료들이나 자기 의견이 채택된 대신들은 새 왕이 등극한 후 첫 인사 업무인 논공행상에서 벼슬이 올라가, 이후에 새로운 권력자의 눈에 들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
▲ 인조의 장릉 뒤에 불쑥 솟은 잉은 명당을 증명하며 영조가 아들을 얻기 위해 정성들여 천장한 왕릉이다. 천장한 지 3년 후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얻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능의 택지 선택 과정에서 새 왕의 성향에 따라 관료들이 물갈이가 된다는 점이다. 왕심을 잘 읽어 왕의 내심에 맞는 능지를 선택하면 그대로 남아 승진하고, 잘 읽지 못하면 즉시 삭탈관직을 당하고 귀양을 가야 했다. 이 때문에 조선왕릉이라 해서 다 명당이 아닌 이유가 밝혀진다.
1776년 3월 5일 영조가 죽자, 10일 등극한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계승이지, 효장세자(영릉. 사도세자의 이복형)의 계승이 아니다'는 첫 교지를 내리고, 영조 생전에 신후 지지로 잡아놓았던 왕비 정성왕후가 묻힌 서오릉의 홍릉을 쓰자는 황해도사 이현모를 삭탈관직한다.
또 3월 28일에 국장을 총지휘하는 3도감 총호사를 갈아치우는가 하면,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조했던 숙의 문씨를 삭탈관직하고 가족을 멸문했다. 권력의 판도가 달라지는 긴박한 순간이다.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 영조에 대한 정조의 복수는, 100여 년 전 효종이 묻혔다가 천장 하느라 비워진 파묘 자리에 할아버지 영조를 묻어버리기에 이른다.
제 아무리 천하의 권력을 가진 왕일지라도, 죽으면 새로운 왕 앞에선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왕권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기록이다. 그리고 정조의 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복수장면이다.
국장은 비록 왕의 장례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긴 풍수를 빌미 삼아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는다'는 원칙에 따라 자신에게 필요한 측근을 곁에 두고 선왕의 골 아픈 실세들을 정리하는 기간이 국장 기간이기도 했다.
지금도 대통령이 바뀌면 새로 각료를 인선하는 것과 같이 왕이 국장을 맞아 자신의 권력에 필요한 관료로 바꾸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장례를 치르기까지 5개월 동안 계령이 내려져 겉으로는 전 백성이 애도하는 기간으로 못박았으나, 실제로는 장례기간 동안은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해 왕권을 다진 시기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영욕의 시간을 보낸 왕과 왕비가 떠난 자리 위로 지나가는 자연은 무심하지만, 왕과 왕비였다는 이유로 후세에 무덤 앞에 선 인간들에게 회자되고 관심의 대상이 된다.
냉동 영안실 - 왕의 시신이 썩으면 어찌하오리까?
▲ 창녕 석빙고 조선시대 냉동 영안고, 설빙(設氷)
국장을 관장하는 3관청 중 국장도감에서 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무덤에 넣는 부장품을 만드는 일이다. 국장도감에서 하는 일은 정해 있고 장례 맨 나중에 행하는 일이니 다음에 밝히기로 하고 왕과 왕비의 장례절차로 되돌아 가보자.
"5개월이나 되는 장례기간 동안 시신이 썩으면요?" "흙에 닿을 때까지 시신이 썩으면 안 됩니다."
▲ 창녕 석빙고 내부 그러면 냉동시설도 없는 조선시대에 어떻게 처리했는가? 왕과 왕비라고 해서 죽는 시간을 마음대로 정하는 것도 아니고 더위에 헉헉대는 한 여름에 죽을 수도 있다. 풍수 때문에 왕과 왕비는 흙에 닿을 때까지 시신이 썩으면 안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해결하는가?
"겨울이라면 문제가 없겠지요. 대나무로 평상을 만들어 대행(유해)을 놓고 얼음을 주위에 놓습니다. 동빙고에 저장한 얼음을 쓰지요."
왕의 시신이 썩지 않게 하기 위해 공조에서 빙반(氷盤)을 만든다. 길이는 10자(3m), 넓이는 5자4촌(1.6m), 깊이는 3자(90cm)의 조선시대 냉동 영안실이다. 이 빙반을 바닥에 놓은 다음 그 위에 대로 만든 평상(잔상)을 빙반 위에 설치한다. 물론 빙반이 잔상보다 더 크다. 이것을 설빙이라 한다.
생각보다 유해를 위한 냉동고는 아주 완벽하다. 밑에 있는 빙반에만 얼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면에 대나무로 만든 잔방(棧防)을 둘러싸서 얼음을 쌓아 올린다. ▲ 2003년 1월 안동에서 열린 장빙제(藏氷祭) 행사 장면. 장빙제는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해 석빙고에 얼음을 채워 은어를 보관하던 절차를 재현한 행사다 시신이 누워 있는 평상인 잔상(棧牀)에는 사방에 대 그물까지 붙여 습기를 방지한다. 그리고 습기를 흡수하기 위해 마른 미역을 사방에 쌓아놓고 계속 갈아댄다. 이것을 '국장미역'이라 한다.
조선시대의 얼음 저장고는 석빙고인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다. 동빙고는 왕실 제사 전용 얼음 저장고이고 서빙고는 대장금이 활약했던 어주(왕실의 부엌)와 문무백관에게 여름에 내리던 얼음을 저장했던 곳이다.한강에서 채빙한 얼음은 두께가 12cm 이상이라야 했고 오염되지 않는 곳을 택해서 떴다. 한 정(丁)이 최대 사방 6자(1.8m)인 얼음을 뜨기도 했다 하니 얼음을 담당했던 백성들의 고초를 알 만하다.
조선시대 냉동고인 동빙고의 얼음 저장량은 서빙고보다 1/10 이하로 적었다. 국상이 한 번 나면 동빙고와 서빙고의 약 15만 정에 이르는 얼음이 고갈될 정도였다. 그래서 왕이나 왕비가 병이 나서 위태하거나, 연로할 때는 국상을 대비해서 평년 두 배 정도 얼음을 미리 비축하기까지 했다.
하여간 왕과 왕비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씨가 다르긴 다른가 보다. 능에도 사가와 마찬가지로 산신제를 지내는데 쓰는 산신석이 있다. 보통 산소에 가면 산신제를 먼저 지내고 제사를 지내지만, 능에서는 왕과 왕비의 제사를 먼저 지내고 산신제를 지낸다. 왕은 하늘의 아들이고 조선 팔도에 거주하는 산신도 왕의 지배 밑에 있다는 의식인 셈이다.
현대에 태어난 것을 새삼 감사하게 여기고 살아야한다. 혹시 전생에 내시나 궁녀여서 5개월 동안이나 죽은 왕 옆에서 미역과 얼음이나 갈아대고 지냈다는 끔찍한 상상을 한다면? 현대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 장릉의 산신석 왕의 무덤 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 순릉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에 부장품으로 무엇이 들었는가, 질문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사실 호기심을 자아낼 듯싶은 거대한 능상을 보면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저 커다란 무덤을 파면 도대체 속에 뭐가 들었을까?
카터가 발굴한 이집트 투탕카멘 피라미드에서 황금 관을 비롯해 금으로 만든 보물이 쏟아져 나왔고, 백제와 신라의 고분에서 찬란한 금관이 나온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왕의 무덤에 도대체 무엇이 들었을지 기대와 궁금증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이런 기대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 간과하는 것이 있다. 금빛 찬란한 왕관이나 보물이 든 부장품이 쏟아져 나온 무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고대 고분들이다.
조선시대는 중세도 아닌 근대사회다. 근대사회라는 건 고대와는 달리 살아 생전의 물건을 고스란히 집어넣고 심지어는 인간까지 순장하는 고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 장릉 참도와 정자각 근대사회는 현대에 못 미칠지언정 현대에 가까울 정도로 명분상 비슷한 사회제도를 만드는 시늉을 한 시대다. 중세사회인 고려가 귀족시대였다는 건 중학교 국사만 공부해도 누구다 다 아는 사실이다.
고려의 귀족사회는 제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신분상승의 기회조차 없었고, 조상을 잘 두면 재산과 신분을 그대로 이어받아 은수저 입에 물고 태어나서 죽는 것을 나라가 제도로 보장했다.
물론 조선도 신분 사회니까 문반과 무반을 일컬은 양반과 중인, 양인, 천민 제도가 있었다. 조선과 고려의 시대 구분의 확실한 차이는 과거제도에서 볼 수 있다. 귀족사회인 고려와 근대사회인 조선의 과거제도의 분명한 차이점은, 조상이 귀족이었느냐가 아니고 시험 성적으로 관직에 오를 수 있느냐 없느냐다.
귀족에게 온갖 특권을 주는 음서제도 때문에 인재일지라도 제도의 한계에 길이 막혔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목상으로 양인에게까지 과거를 볼 기회를 열어놓는다. 조선으로 오면 과거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기회는 천민을 제외하고 누구에게나 준다는 얘기다. 실제로 양인이 과거에 급제하는 일은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으나 원천봉쇄한 고려와는 다른 점이다.
제도는 근대사회답게 완벽했지만, 돈 없으면 고액과외나 사교육 받을 기회가 없고 고교등급제라는 최신 입시제도까지 등장하는 바람에 일류대학 입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새천년 시대와 흡사한 면이 있긴 하다.
조선의 국장제도를 언급하다가 조선과 고려의 과거제도까지 가면 곁가지로 흐를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그친다.
무덤 속에서 보물이 나온다면 누구나 흥분한다. 도굴 당하지 않은 투탕카멘의 피라미드가 발굴되자 전 세계가 흥분했고, 1500년 전 무령왕릉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과 찬란한 불꽃 모양 왕관을 보고 우리나라가 열광했다.
그렇지만 조선의 왕릉에서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대에 가득 찬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부장품까지 기록에 남아있고 왕과 왕비의 무덤에 무엇을 넣는다는 것도 정한 조선은 근대사회기 때문이다. 명당의 제1조건은 잘 썩는 것, 도굴꾼들이 열심히 파봤자...
▲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 순릉의 능상과 석물 능을 찾는 관람객이나 답사반들이 유의해야 할 일은 금지된 구역에 갈 때는 관리소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멋대로 올라가는 일은 절대 삼가야 하고, 멋대로 올라가다가 관람을 금지 당할 수도 있다.
▲ 순릉의 장명등과 석물 "조선왕릉은 명당이라고 하죠? 명당의 조건은 잘 썩어야 하는 거구요. 조선의 왕릉에 넣는 부장품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는지 다 알죠. 부장품들도 명당이라 수백 년 지났으니 거의 썩어서 없을 거구요."
이 질문을 했던 사람만 아니라 연재를 읽는 독자들이 가장 궁금했던 것도 부장품일 것이고, 언제 밝히는지 기다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것을 밝히려고 한다.
국상이 나면 국장도감에서 명기를 만든다. 명기(明器)는 신명(神明)의 그릇이라 명기라고 하며 생전에 쓰던 물건들의 상징이라 일부러 거칠고 조잡하며 작게 만든다. 그러니 왕실에서 쓰던 훌륭한 명품 도자기라도 무덤 속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 존호를 올릴 때 쓰는 옥보와 존호를 새긴 금보(금도장)를 싣는 책보요여. 그밖에 의류, 집기류, 무기류(왕비일 때는 넣지 않는다), 악기류, 지석 등 종류와 가짓수는 많지만 기대하는 금은보화 보물은 넣지 않는다. 값이 나간다면 금으로 만든 도장 정도랄까? 이것도 왕이 생전에 쓰던 커다랗고 호화스러운 옥새가 아니고 무덤에 넣기 위해 일부러 만든 작은 것이다. 국가의 상징이기도 했던 옥새는 왕이 죽으면 다음 왕에게 넘겨진다.
왕의 무덤에는 면류관을 넣지만 주재료는 비단인 증(繒)이고 오색 구슬을 매달아 늘어뜨린다. 그나마도 왕일 경우고 왕비일 때는 면류관을 넣지 않는다. 임진왜란 당시에 도굴 당한 왕릉은 더러 있었지만 애쓰고 파헤친 수고에 비하면 건진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 반우거 국장도감에서 하는 일은 발인해서 장지까지 가는 동안 명기를 싣고 가는 가마인 명기요와 의복과 완구를 싣는 복완요여, 형을 싣는 향정, 책보의 요여, 소여, 대여, 반우거 등 가마들과 재궁(관)을 싣는 대여를 만든다.
또 국장행렬에는 소개, 소선, 홍개, 청선, 용선, 작선, 봉선 등 부채를 들고, 한, 필, 가서봉, 은립과, 은횡과, 금등, 표골타자, 용골타자, 등등 들고 가는 것이 많다. 은관자나 은우(은으로 만든 물 긷는 주전자) 등은 은으로 만들지만 말등자에 꽂는 금등(金燈)도 구리쇠로 만들어 도금한다.
▲ 위로부터 용마기, 백학기, 백택기 대여를 비롯해 명기와 부장품을 실은 가마도 여럿이지만 깃발을 들고 가는 이도 엄청 많다. 홍문대기, 군왕청세기, 천하태평기, 주작기, 청룡기, 백호기, 황룡기, 정축기 등등 헤아릴 수 없다.
국장행렬에는 5천명에서 1만명까지 장지로 따라간다. 조선의 인구가 많아야 6백만명에서 5백만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고, 수많은 깃발(깃발과 은작자 은월부 등을 든 사람은 옷과 모자가 각각 다르다)과 대여를 비롯한 가마들과 장식한 말들, 방울을 쩔렁대며, 왕과 문무백관, 궁녀와 내시 등의 행렬을 상상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다.
어두운 명계의 궁전이라 하여 광(무덤)을 현궁(玄宮)이라 한다. 산릉 부역에 동원된 백성은 군사라 하고 보름이나 한 달 치의 식량을 짊어지고 가서 일을 했다.
예종의 창릉 산릉부역에 동원된 군사가 7000명이었고, 세종의 천장에 부역꾼 5000명과 공장(工匠) 150명, 쌀 1323석 5되, 소금 41석 3두(斗)가 소요됐다고 기록은 전한다.
1674년 5월 28일 발인한 17대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의 장례에는 광나루에서 한강 수로를 이용해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까지 가는 도중 2박을 한다. 이때 쓰인 배가 150척이고 배를 모는 선군(船軍)이 3690명이었다.
6월4일 장사지냈는데 산역은 조선 팔도의 승을 징발해 3200명이 보름분 식량을 지참하고 일했다. 이때 산역 인원이 적은 것은 효종의 능이 이미 조성된 뒤라 정자각이나 비각, 재실 등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승을 산릉 부역에 동원하는 것은 농사짓는 철에 백성 동원을 하기 어려울 때이다.
▲ 장릉 병풍석과 밑의 박석(상석). 치마주름을 닮았다해서 상석이라 하며 화강암을 쓴다. 중종이 장경왕후와 함께 묻힌 것을 질투한 문정왕후 때문에 강남 삼성동으로 중종을 천장할 때, 백성들이 병풍석 등 석물 부역에 다치고 죽어 늦어지자 보우가 승을 5000명 동원해서 일을 마쳐 문정왕후의 환심을 샀다. 그렇게 천장한 중종의 정릉은 해마다 물난리로 쓸려 내려간 흙을 복토 하느라고 국고를 탕진해야 했고 질투 때문에 죽은 지아비를 옮긴 문정왕후는 그나마 중종의 곁에 묻히지도 못하고 태릉에 잠들어 있다.
거창한 국장이 끝나고 나면 재궁을 실었던 대여 등 가마들은 불사른다. 다만, 신하들이 다시 쓸 수 있는 것은 불태우지 않는다. 그래서 국장이 날 때마다 국장도감에서 상여를 다시 만드는 일을 해야 했다.
조선의 국장제도는 태조 이성계가 죽자 처음 국장을 맞은 태종이 송나라의 제도를 도입해 확립한 것이다. 고려의 국장은 조선과는 달리 1개월 이내였고 2달을 넘긴 예가 드물었다. 정착하지 못한 신생왕국의 위엄과 기세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후 왕과 왕비는 5개월로 국장기간이 정해졌고 정4품 이상 사대부는 3개월, 그 밖의 사람은 1개월로 장례기간을 국법으로 정한 것이다. 대통령 중에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9일간 마지막으로 국장을 치렀다. 보통 3일이 현재 보편화 됐고 유명 인사들의 사회장도 5일을 넘기지 않으니 장례기간과 후손발복은 관계없는 일로 판명된 것이다. 무덤을 깊이 파면 왕위찬탈 ? - 왕릉 10자 깊이의 비밀
▲ 성종 원비 공혜왕후 순릉 조선의 국장은 밤중에 발인해서 대궐을 출발한 예가 많다. 또 관을 하관하는 시각도 한밤중이거나 새벽일 경우가 많다.
자시(23시-01시)에 하현궁(下玄宮·하관)한 왕은 태조고, 축시(01시-03시)는 세조, 문종, 숙종계비 인현왕후,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가 있고 인시(03-05시)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 현종 비 명성왕후, 철종비 철인왕후가 있다. 또 새벽 5시에 예종이 하관했고 새벽 3시에 중종이 하관했다.
▲ 중국 풍수지리지에도 소개됐다는 명당인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소령원. 묘에 이르는 200여m 구불구불한 언덕이 흡사 황룡이 꿈틀대는 것처럼 보인다 밤중이나 저녁에 발인해서 국장행렬이 장지로 갈 때는 싸리 횃불 500개가 동원됐다. 백의와 백건을 두르고 흰 버선을 신은 상여꾼 800명이 대여를 드는데 4번 교대한다. 이 싸리 횃불은 조선시대의 국장행렬이나 하관을 할 때 쓸 뿐 아니라 결혼식에도 썼다.
싸리나무를 다발로 굵게 묶어서 쓴 것으로 추측하는(싸리 횃불 모양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싸리 횃불은 기름기가 많아서 불이 잘 붙고 나무가 단단하며 연기가 잘 나지 않는다.
조선의 결혼식은 저녁에 했다. 결혼의 혼(婚)자를 파자하면 女子가 어두운 저녁(昏)에 맺어진다는 의미다. 세종 11년(1429) 2월 5일, 결혼식장 초례청에 밝히는 싸리 횃불을 정2품 이상은 양쪽에 5자루씩 10자루를 쓰고, 3품 이하는 6자루를 쓰도록 정했다.
사대부 집안의 장례에 쓰는 싸리 횃불도, 세종 15년 8월 24일 정2품 이상은 20자루, 2품 이하는 12자루를 쓰게 정해서 국장과 꽤 차이가 났다. 싸리나무가 귀한 것도 아닌데 숫자를 정하기까지 했으니 왕과 일반인의 신분차이를 확실히 못박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왕의 무덤 깊이와 천기누설
왕릉 자리를 정할 때 풍수로 명당을 선택하는데, 왕릉 길지를 살피고 점혈 하는 관리를 상지관(相地官)이라 한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북현무, 남주작, 좌청룡, 우백호로 둘러싸인 곳 끝머리 황룡(黃龍)이 있는 곳이 왕릉터가 된다. 양쪽에서 명당수가 흘러내리는 배산임류(背山臨流)의 이런 명당 자리를 길상지라 한다.
상지관이 왕릉 자리를 점혈(點穴)하면 다시 의정부 당상관이 주위 나무를 베어내고 산세를 살핀 뒤에 왕에게 보고한다. 왕은 직접 현지를 답사하거나 도면을 본 뒤 최종 확정한다.
요즘 수맥에 관심이 많은데다 과학으로도 수맥 현상이 증명돼 질병을 유발하는 수맥을 피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이 나온다. 풍수에서도 묘 자리를 잡을 때 수맥을 금기시한다. 그 수맥이란 것이 지하 70-80m에 있으니 육안으로 봐선 알 방법이 없다.
수맥 위에 잡은 묘는 시신의 뼈가 까맣게 변한다. 수맥에 쓴 묘는 후손에게 감응해 우환을 끼치는데 수맥이 머리를 지나가면 머리에 이상이 있는 후손이 나오고, 다리를 지나가면 다리를 다치거나 못쓰는 가족이 나온다고 <고려·조선릉지>의 저자 목을수씨는 말한다.
▲ 목을수씨에게서 받은 24방위표. 풍수를 공부하려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 목을수씨에 따르면 묘의 후손감응은 3대를 넘어서지 않기에 제사도 3대를 지내는 것이라 한다. 화장을 하면 후손에게 아무 해가 끼치지 않으니 겨우 3자(90cm)나 4자(120cm)를 파고 묻는 요즘 공원묘지 장의 풍습보다 차라리 화장이 더 낫다고 밝힌다.
▲ 소령원 숙빈 최씨 무덤 뒤에 불쑥 솟은 잉. 무덤 뒤에 작은 잔디 언덕이 명당에서 보인다는 잉(孕)이다. 흉당의 대표적인 사례는 벌레가 나오는 충렴, 수맥이 흐르는 수렴,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도시혈을 들 수 있다. 왕릉을 잡을 때 파서 오색토가 나와야 하는 조건도 포함돼 있다. 오색토란 명당의 조건으로 꼽히는 흙이다. 돌이 나와도 안되고 습기가 있는 진땅도 후손에게 우환이 생기므로 안된다.
그렇다면 왕의 무덤 깊이와 넓이는 얼마일까?
왕실풍수에서 왕기를 받는 깊이가 10자(3m)라고 이미 밝혔다. 당시 조선왕실은 일반 백성들이 무덤을 10자 깊이로 파서 왕기를 가로챌까봐 이 사실을 극비에 부쳤다. 나아가 국법으로 일반 백성들의 묘를 얕게 파도록 정했다.
풍수에서 무덤은 최소한 6자 이상이 되야 후손 발복으로 인재가 나온다고 한다. 신하나 대신에게도 적용된 일반인 5자(1.5m) 깊이를 어기면 왕위찬탈 음모를 꾀한 중죄인으로 몰린다. 인재가 많이 나오면 왕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이유일 것이다.
조선왕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왕기가 있을 만한 전국의 명당을 골라 절을 짓고, 탑과 당간지주를 세워 지기(地氣)를 눌러버렸다.
풍수에 대한 조선왕조의 신봉은 신경질적일 만큼 강했다.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함흥은 원래 함주(咸州)였던 것을 왕이 일어났다 해서 함흥(咸興)으로 격상시켰고 고을 주(州)가 들어간 지명은 천(川)으로 낮춰버렸다. 과주가 과천이 되고, 묵주가 묵천, 진주가 진천으로 바뀐 것은 태종 15년(1415)인데 이것도 병적으로 과민한 왕실 풍수 때문이었다.
동구릉이나 서오릉에 왕릉이 몰려 있는 것도 조상 묘를 한 능선에 집단으로 쓰면 땅의 지기를 집중적으로 얻는다는 풍수에서 연유한 것이다.
▲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어머니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수길원. 풍수에서 대가 끊기는 흉당이라 한다. 고려도 왕릉과 귀족을 제외하고 일반인은 2자(60cm)에서 3자(90cm)를 팠다고 기록에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무덤 깊이에 관한 풍수의 비밀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에는 모든 왕릉을 10자로 팠으나 중기부터 혈의 깊이가 신축적으로 변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손꼽히는 명당인 융릉으로 천장한 정조는 정말 풍수에 박식한 왕이다.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잡저(雜著)편 천원사실(遷園事實)에서 "혈(穴)의 싶이가 8-9자면 깊은 데 속하고 5-6자 이내는 낮은 데 속한다. 대체로 마땅히 얕게 파야 할 곳을 깊게 파면 지기가 광중 위로 스쳐지나가고 반대로 깊어야 하는 데 얕게 파면 지기가 광중 아래로 지나가니 깊고 얕음을 적절히 해야한다"고 썼다.
사도세자를 명당에 묻으려고 현재 경기 화성에 있던 수원부를 현재 수원 자리로 200여 호 마을을 모조리 옮기고, 수원부 객사(客舍) 뒤의 화산(花山)으로 천장을 단행한 정조는 이장에 길한 해를 택하려고 13년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사도세자의 융릉은 물론 정조가 직접 가서 보고 선택한 것이다.
정조의 풍수 실력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정조는 광중을 팔 때 10자를 파지 말고 7자를 파서 흙의 색깔이 좋은 진토가 나오면 중단하라고 명했다. 광중을 파내려 가자 정조의 예언은 맞아서 생기를 가진 흙이 나왔고 그 지점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것이다. 아마도 이 흙이 오색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정조가 왕이라 하나 당시에는 왕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능으로 추존할 수 없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융원(顯隆園)이라고 명명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를 백성도 꺼리는 파묘(다른 시신을 쓰고 파낸 묘) 자리에 파묻어 버려 복수를 하고, 최고 명당자리에 아버지를 옮겨 한을 풀었다.
고종은 대원군의 왕실 권위 되찾기에 동조했는지 유난히 많은 조상무덤에 존호와 능호를 내려 추존한다. 현융원도 광무 3년(1899년) 11월 12일(양력) 장종(莊宗)으로, 12월에는 장조(莊祖)로 추존하는 절차를 밟아 고종이 황제에 오른 뒤에는 융릉이라는 능호를 쓰게 된다.
고종이 사도세자까지 황제로 추존했으니 능도 만들지 못해 원으로 그쳤던 정조의 한은 풀리고도 풀렸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 이후 조선이 급속히 몰락하는 과정을 보면, 정조가 원했던 아버지의 발복은 받지 못하고 할아버지 영조의 파묘자리 흉당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12월에도 낙엽 속에 보라색 가지버섯이 솟아오를 정도로 흙에는 왕성한 생명력이 있다. 그렇게 조선조 왕들이 집착했던 왕릉풍수라는 것도, 자연 속에서 태어나 살다가 흙으로 되돌아가서 자연과 일체로 변하는 과정이라고나 할 무상함이 보인다.
따스한 인간미 서린 능호 - 조선왕릉 부장품은 생명존중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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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귀면와의 해답은 원성왕의 괘릉에 있다
신라 귀면와는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이고 문양이다. 주변국의 같은 문양과 비교해 볼 때 균형미나 세련됨이 훨씬 우수하고 독특하다. 우리 군수뇌부가 한.중군사회담을 위해 중국에 타고 들어간 군용기에도 귀면문양이 크게 새겨져 있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는 관중석에서 대형 응원기로도 사용했다. 벽사로 사용하는 깃발이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다. 대한민국의 승리를 방해하는 액운을 물리쳐 달라는 기원이 담겼으니까. 그러나 해설자는 치우천황이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다음날 중요신문 유명인사의 칼럼에는 우리 젊은이들이 치우천황을 안다며 대단하다는 글이 올라왔다.
일제시대 어느 일인학자는 신라의 모서리 기와문양을 귀면(鬼面)이라 했는데 어떻게 그 얼굴에서 사람의 형상을 찾을 수 있었을까 답답했다. 그것도 우리 민족의 조상얼굴이라니....신라 귀면문양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짐승의 얼굴이고 짐승 중에도 사자개 티베탄마스티프의 얼굴이라는 것이 오래 전부터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기와의 정식이름이 국립박물관에서 정해질 때까지는 지금까지 사용해 온 귀면와라는 이름으로 글을 쓴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은 785년부터 798년까지 14년간 재위에 있었다. 798년 12월에 죽었고 유명에 따라 시신은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을 했다. 괘릉은 그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괘릉에 있는 돌짐승은 모두 4구이다. 흔히 이런 모습의 돌짐승들을 사자라 부르는 이유는 중국에서 사자라고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같은 불교국가였던 일본에서는 코마이누, 즉 고구려개라고 하여 사자가 아니라 개인 것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귀 숙인 사자는 없으며 불교에서 사자는 부처를 상징하고 불교용어에서 사자와 관련된 여러 단어들은 모두 부처와 관계가 있다. 부처를 상징하는 사자가 원성왕의 괘릉을 지키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불교국가 신라인들이 그 정도도 몰랐을까? 지금 우리가 부르는 사자라는 이름이 틀린 것이다.
괘릉 돌짐승 4구는 좌우 2구씩 배치되어 있는데, 능을 바라보며 좌측에 귀를 세운 돌짐승이 2구 있고 우측에 귀를 숙인 돌짐승 2구가 있다. 중국의 귀 숙인 사자들처럼 준좌의 자세로 조각되어 있다. 표현도 다양해서 서로 마주앉은 짐승은 눈을 마주치지 않는 배려를 하면서 얼굴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4방을 나타낸다.
체형을 보면 몸통과 다리가 굵고 강해 보이며 표정은 사납고 위엄이 있어 보인다. 괘릉의 4방을 지키는 돌짐승 4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과 궁궐의 지붕 네 모서리를 장식하던 기와문양과 같은 점을 찾아서 올린다. 신라 귀면와는 이 동물의 얼굴인 것이다.
귀면와는 신라의 대표적 유물이지만 이름부터 잘못 붙였다. 사찰과 궁궐에서 벽사를 위해 만들어 놓은 기와인데 "鬼面"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귀신이나 도깨비가 나오는 집은 흉가가 아닌가. 그러나 귀면와라는 이름이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기와의 실체에 대해 공식적인 규명이 되지 않은 것 같다.
신라인들이 사찰과 궁궐지붕 네 모서리를 장식하던 기와에 그 정도로 비밀스런 얼굴을 조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상들이 흔히 사용했던 유물인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모른다는 게 말이 안된다는 생각이다. 사찰 지붕에 주로 쓰였으니까 우선 불교와 관련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부르던 이름은 불교와 관련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괘릉 돌짐승들을 살펴보면, 머리의 여러 부위 중에서도 귀로 4구의 특징을 표현하려 했다는 점이다. 귀의 모양이 다르면 품종이 다를 수 있는데 돌짐승 4구는 귀 모양이 각기 다르다. 4구 모두 귀 모양을 달리 해서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수호하고 동서남북 천하를 수호하는 사천왕은 같은 자리에 안치되지만 생긴 모습에서 특징이 다르게 만들어진다. 괘릉을 지키는 돌짐승들도 바라보는 눈빛의 방향에서 4방위를 나타내고 사천왕이 지물 등으로 구분되듯이 귀의 모습으로 역할의 위치를 다르게 표현했다.
괘릉 앞에 돌짐승이 실제 사자가 아닌 점은 첫째는 생김새의 특징이 사자가 아니며 둘째는 사천왕상을 세우지 않고 무인상을 세운 이유와 같다.
인간이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최초로 길들인 동물은 바로 개이다. 동아시아가 원산지인 세계 최고의 맹견 티베탄마스티프를 중국에서는 짱아오(藏獒)라고 부른다. 짱아오는 중국 사자상의 모델이 되었고 동방신견(東方神犬)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중국황제들의 궁궐과 능, 사찰과 관청을 비롯해 거의 모든 문화유적지를 지키는 중국문화의 상징이 되어있다. 중국은 짱아오로 인해 사자왕국이 된 것이다. 신라 귀면와의 실체는 괘릉을 지키는 사자개라는 점을 돌짐승의 사진을 각각 4종류로 분류해서 같은 귀를 가진 귀면와와 대비해 본다.
먼저 괘릉 돌짐승의 특징들은 이 블로그에서 귀면와의 특징을 말할 때 거론하던 내용과 동일하다. 괘릉 돌짐승과 신라 귀면와가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정면에서 들여다 보이는 코, 양 미간 액단 부위에서 급하게 꺽인 콧등, 인중이 없이 코 밑에 바로 붙은 입술, 아래 턱이 없고, 튀어나온 크고 동그란 눈, 양 뺨으로 길게 찢어진 입, 네모진 앞니, 앞니 양 옆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아래위 송곳니, 턱 아래 목 주위로 길게 늘어진 갈기털, 두툼한 눈썹 등이다. 귀면와와 똑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귀면와의 각기 다른 4가지 귀 형태를 괘릉 돌짐승 4구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라 귀면와의 실체를 밝혀 줄 해답이 원성왕의 괘릉에 있는 것이다.
신라 귀면와에서 위로 세워진 귀
감은사지. 통일신라. 현재너비 23.3 cm 현재높이 21.8cm 두께 2.5~6.3cm 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지. 통일신라. 현재너비 16.0cm 현재높이 17.0cm 두께 3.2cm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 통일신라. 너비 24.5 cm 높이 28~29 cm 두께 3.6~5.6cm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귀면와에서 옆으로 열린 귀
통일신라. 너비 24.2cm 높이 18.5cm 두께 3.7~7.0cm 국립경주박물관
월성. 통일신라. 너비 22.0 cm 높이 21.9cm 두께 ?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 통일신라. 너비2 0.6cm 높이 18.9cm 두께?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귀면와에서 옆으로 숙인 귀
통일신라. 너비 25.4cm 높이 19.9~24cm 두께 4.8~7.9cm 국립경주박물관
사천왕사지. 통일신라. 너비 23cm 높이 19.9cm 두께 4.5~8.9cm 국립경주박물관
사천왕사는 경주시 낭산의 남동쪽 기슭에 있던 절이다. 명랑법사가 선덕여왕 원년(632)에 입당하여 밀법을 배우고 635년에 귀국하여 신라에 신인(神印)의 비법을 전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71년 남산 남쪽 신유림에서 5방에 신상을 봉안하고 유가승 12명을 거느리고 문두루비법을 행하여 신라를 공격해 오던 당의 배들을 침몰시켰다. 이 문두루도량터에 사찰을 세우고 사천왕사라 했다.
문두루는 진언을 말하는 것이며 진언을 외우고 인계(印契:神印)를 행하면서 봉행하는 도량을 말한다. 신라뿐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경주 사천왕사에서 국가 주재로 문두루도량이 자주 개설되었다. 신라 귀면와는 밀교와 관련이 있고 밀교사상 중에서도 천하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 사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문두루비법으로 당군을 물리친 최초의 절 이름이 사천왕사이고, 신라시대 탑에는 탑모서리를 지키는 4사자상이 많다. 분황사탑 감실 입구에 2구씩 있는 인왕상도 사면에 배치되어 있다. 괘릉에도 4방을 지키는 동물상 4구가 있다.
신라 귀면와의 역할도 지붕의 네 모서리, 즉 사방을 지키는 장식기와라는 것이다. 사천왕의 본래 위치가 불단의 네 모서리에 위치했었다는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런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는 불법의 수호뿐 아니라 국가와 왕실의 안위를 위해서도 사천왕신앙과 매우 친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압지. 통일신라. 너비 20.9cm 높이16.8cm 두께4.7~7.1cm 국립경주박물관
통일신라. 너비 20.8cm 높이15.7cm 두께 4.4~5.9cm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귀면와에서 앞으로 숙인 귀
영묘사지. 통일신라. 너비 28.1cm 높이 24.6cm 두께 3.2~7.8cm 朱晉弘
영묘사는 경주시 서부동 북서쪽에 있었던 절이다. 선덕여왕 4년(635) 임금의 발원에 의해 창건되었다. 일설에는 선덕 원년에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양지법사가 창건했다고도 한다. 폐사된 연대는 알 수 없고 이곳에 있었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은 양지법사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 승려 중에 불가사의는 신라에 정순밀교를 처음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는 통일신라시대 사람으로당나라 개원연중에 선무외삼장에게 사사하고 귀국하여 영묘사에 머물렀다. 불국사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이나 석굴암의 십일면관음상도 밀교의 불상이다.
통일신라. 너비 24.2cm 높이 18.5cm 두께 3.7~7.0cm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귀면와에는 위 사진처럼 눈썹이 두툼한 얼굴이 여러 점 있다. 그리고 괘릉 돌짐승들의 눈썹도 두툼하게 강조되어 있다. 위 사진의 귀면와는 괘릉 돌짐승과 같은 동물을 부조(浮彫)하며 눈썹을 강조한 것이다.
아래 사진은 앞발이 강조된 귀면와이다. 저런 모습의 사람은 없다. 괘릉 돌짐승은 준좌한 모습이기 때문에 얼굴과 앞발의 거리가 떨어져 있으나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사납게 짖는 티베탄마스티프는 머리를 숙일 때 아래 사진과 같은 동작이 나타난다. 이 블로그 포스트에도 아래 사진과 같은 모습의 짱아오 사진을 여러 점 올렸었다.
안압지. 통일신라. 너비 26.1cm 높이 22.7cm 두께 3.2~5.8cm 국립경주박물관
인도사자의 꼬리는 소의 꼬리처럼 털이 없다가 끝부분에만 긴 털이 나있다. 소 꼬리와 비슷하다. 그러나 괘릉의 돌짐승들은 털이 많은 꼬리가 등에 말려 붙어있다. 인도사자의 꼬리가 아니라 털이 많은 사자개 티베탄마스티프의 꼬리이다. 신라인들이 사자와 개의 꼬리를 구분 못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가야왕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허황후 이야기도 있고 괘릉의 무인상도 서역인의 얼굴이 아닌가. 인도에 대한 정보는 넘쳐났을 것이다. 신라 귀면와의 다양한 4가지 귀 형태를 괘릉 돌짐승 4구에서 모두 찾을 수 있는 것은 같은 동물들을 조각한 같은 문화이기 때문이다.
귀면와(鬼面瓦)라는 어색한 이름이 하루 속히 바뀌기를 바란다. 더구나 귀면이란 이름은 일본인이 만들어 붙인 이름이라 하지 않는가.
귀면와 사진출처 : 新羅瓦塼 (국립경주박물관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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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군(高句麗 古墳群) [유네스코세계유산]
1. 1300년전 고구려인의 생활과 희망이 예술로 승화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구려의 거의 유일한 문화유산 - 시기별 벽화주제로 문화적 흐름을 엿볼수 있어
강서대묘 (江西大墓)에 그려진 청룡도 (靑龍圖)
고구려 청룡도 중 백미라고 할수 있다. 이사진은 1915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것이다
글은 역사를 기록하지만 전체적인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기엔 한계가 있다. 글로 인물이나 사물이 어떤 형태를 띄고 있다고 상세히 말해도 실제로 보는 것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이 가진 한계다. 그래서 역사를 전체적으로,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이나 벽화, 암각화 등이 꼭 필요하다.
어떨 때는 그림 한 장이 책 한 권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녹음을 하고 동영상을 찍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등의 행위를 통해 기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점 때문에 우리가 반구대 암각화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살아 있는 역사서로서의 의미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이나 대나무에 쓴 그림은 보존 상의 이유 등으로 해서 천 년 이상 된 것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 종이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이유도 워낙 크다.
그런 점에서 바위에 그린 그림이나 벽에다 그린 그림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불상이나 도자기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당시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이라면 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에 열광하고 우리가 아끼는 이유도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기 때문 아닌가.
고구려 문화의 거의 유일한 유적인 고구려고분군에 그려진 벽화는 당시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보물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구려 사람들이 어떻게 밥을 지었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 당시 인물들의 모습은 어땠는지, 당시 어떤 가축들이 있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신라나 백제 유물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가 쑤저우(蘇州) 회의에서 북한 평양직할시와 평안남도 남포에 걸쳐 있는 강서대묘(江西大墓), 동명왕릉(東明王陵), 쌍영총(雙楹塚), 약수리무덤, 수산리무덤 등 5개 지역 고분 63기(벽화고분 16기 포함)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일은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북한의 고구려 유적은 인류의 탁월한 창조성, 동아시아 역사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가치, 벽화의 미적(美的) 우수성, 능묘 천장 등 독특한 건축구조 등 4개 항목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1500년 전 생활상을 보여주는 그림은 세계적으로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2004년에는 북한 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과 지린 성에 걸쳐 소재하는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 역시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고구려의 역사적 기반이 지금의 중국에 걸쳐 있었음을 재삼 확인하게 된다.
북한은 현재 고구려고분군과 올해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 2곳의 세계유산을 등재하고 있다. 분단으로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또다른 우리의 역사 고구려와 고려 유물들이다.
남과 북이 손잡고 이뤄냈던 고구려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고구려고분군 세계유산 등재과정에서 남북 관계자들은 등재를 위해 손잡고 외교 작업을 펴는 등 남북 문화재 교류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는 개성역사유적지구 등재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4년 당시 문화재청은 북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힘을 보탰다. 우리나라 대표단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중국에서 북한 측 대표단과 자리를 함께 하며 각국 대표자들을 상대로 북한 문화유산 등재 지지를 요청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코모스 한국위원회는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에 대한 수준 높은 자료를 각국 대표에게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했다.
정치외교적 양국간 갈등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를 구성하는 문화유산을 지키고 보존하려는 마음은 다를 수 없음을 이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추진한 중국 영토 내 고구려 유물·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록 움직임이 북한을 제외하고 유네스코에서 받아 들여졌다면 고구려 역사에 대한 국제적인 입지가 매우 좁아졌을 것이다.
세계유산 등재에 이어 지난 2006년 4월 19일부터 5월 2일까지 남북한 전문가들은 고구려 고분군의 과학적 연구와 보존 조치를 위해 공동 실태조사를 실시해, 고구려 고분군의 보존상태가 심각하진 않지만 대체로 우려스럽다는 결론을 낸 바 있다.
이 때문에 문화재 전문가들은 경제난에 시달리며 적극적인 문화유산 보존정책을 펼 수 없는 북한에 대해 교류를 통한 보존지원활동이 하루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고구려고분군은 북한만의 문화유산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동명왕릉은 북한의 국보 제 36호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시조 동명왕의 무덤으로,427년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함께 옮겨 왔다고 추정된다 1993년 북한이 대대적으로 개건했으며, 2004년에는 고구려 고분군 가운데 하나로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등재했다
중국과 북한에 걸쳐 있는 고구려 고분
고구려고분군은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7세기까지 중국 북동부와 한반도 절반을 다스리던 고구려 후기의 고분들과 개별 고분(약 30기)을 포함하고 있는 유산이다.
고구려는 전성기 때에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와 중부 전역,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린 성 전역, 랴오닝 성 대부분, 헤이룽장 성 일부, 내몽고 일부, 러시아의 연해주 일부까지 지배했다.
한반도의 삼국 중 하나였던 고구려는 700년 동안 26명의 왕이 통치하며 존속했다. 그들은 모두 고구려인의 행복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군사력을 증강하려고 노력했다.
고구려는 북방의 침략자들에 대항해 싸워야 했기 때문에 고구려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단결되어 있고, 전술 또한 잘 습득하고 있었다. 고구려에는 독특한 문화와 더불어 높은 수준의 교육, 사회, 정치, 군사 체계가 발달했다.
지금의 중국 지안 일대에 수도인 국내성을 중심으로 발전하다 장수왕 재임 15년인 427년 평양으로 천도했다. 이 때문에 고구려 건국 초기의 중심지인 압록강 유역과 후기의 중심지인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견된 1만여기 이상의 고분들 중에서 거의 절반이 고구려 고분이며, 이러한 고분들은 왕을 비롯한 왕족, 귀족들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분의 벽화는 당시의 생활상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 주는데, 많은 고분 중에서 90기에서 이러한 벽화를 찾아볼 수 있다. 북한의 5개 지역에 있는 63개의 고분이 고구려 고분에 포함되는데, 이들은 5세기~6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강서삼묘(江西三墓)와 동명왕릉, 그리고 16개의 다른 고분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들은 풍부한 색채와 색조를 갖추고 있다. 벽화에 그려진 춤추는 여인, 훈련 중인 전사, 하늘의 새와 용, 강의 물고기, 숲의 짐승, 바람, 구름 등은 매우 현실적이고 생생하여 마치 그림 속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안악 3호분에 그려진 무덤 주인공
무덤 주인공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안악 3호분에 그려진 다양한 당시 생활상은 고구려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다
당시 생활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고구려고분벽화
고구려 고분은 분묘의 형태상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돌로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적석총)이고, 다른 하나는 흙을 덮은 봉토무덤(석실봉토분)이다. 이 두 가지 양식 중 돌무지무덤이 먼저 나타난 형태로서 대략 기원전 3세기경부터 만들어졌다고 추정되고, 후자는 기원후 4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 고분에서 가장 큰 특징은 벽화를 그린 무덤이 아주 많다는 점이다.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도 1300년을 넘긴 생생한 무덤 내부 벽화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건축 기술 및 잘 복원된 고구려 문화 때문이다.
16기의 벽화 고분을 포함해 북한의 5개 지역 고분군 총 63기가 이에 해당한다. 평양시 역포구역의 동명왕릉과 진파리 1호분 등 15기, 평양시 삼석구역의 호남리 사신무덤 등 34기, 평안남도 대동군의 덕화리 고분 3기,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의 강서세무덤 3기, 25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행렬도가 그려진 안악3호분, 독립고분 8기 등이다.
고구려고분벽화는 그 숫자 외에도 시대별로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 문화적 흐름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귀중한 유물이다. 고구려 벽화 고분의 발전 단계는 보통 3가지로 나누고 있다. 제1기는 3세기말부터 5세기초에 걸치는 시기로 고구려의 영토가 크게 확장되는 시기다.
풍요로웠던 이 생의 삶이 내세에도 이어지길 기원한 듯 벽화에는 영화로운 삶의 재현이 이뤄지고 있다. 이를 생활풍속도라고 하는데, 생활풍속도는 주인공의 집안 생활. 해. 달. 별. 장식 무늬 등을 위주로 되어 있으며 벽화 내의 건물 구조로서는 기둥. 두공. 도리 등을 그려 목조 건물의 형식을 재현시키고 있다.
집안 생활에서는 가족. 측근. 시중 드는 사람과 호위 등 남녀 인물이 묘사되어 있고, 내용은 행렬. 사냥. 씨름. 전쟁. 무악 등이다. 또한 성곽. 부엌. 마구간. 외양간 및 우물 등 각종 건물도 묘사하고 있으며 천장에 해. 달. 별 그리고 입구에는 문지기도 나타난다. 평양의 안악3호분(357년), 덕흥리벽화고분(408년), 중국의 각저총, 무용총이 이에 해당한다.
제2기는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로, 고구려가 남북조와 후연과 더불어 동아시아 패권을 다투는 4대 강국으로 군림하던 시대다.
이 때는 생활풍속과 사신(四神) 혹은 생활풍속과 장식무늬가 공존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사신이 그려질 때는 좌 청룡, 우 백호, 전 주작, 후 현무의 순서로 그려졌다. 사신은 비불교적(非佛敎的)인 요소로 동아시아에서 각 방위를 상징하는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테마이다.
무덤의 사방을 수호하는 영물(靈物)로서 사신도를 분묘에 장식하게 된 것은 도교(道敎)의 유입과 그 보급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장식무늬로 연꽃문이 주로 사용돼 5세기에 이르러 불교가 크게 유행했던 점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제2기를 대표하는 벽화고분은 장천1호분과 삼실총, 쌍영총, 수산리벽화분, 덕화리1호분을 들 수 있다.
제3기는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전반에 걸치는 기간으로, 고구려의 위상이 흔들리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 때는 주로 사신도만 그렸다. 사신도의 완성도가 거의 최고조로 달해 예술적 가치가 아주 높다. 강서대묘, 중묘, 호남리 사신총, 진파리1호 ,4호 ,통구 사신총, 오회 4,5호분 등이 해당된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남쪽의 백제·신라·가야에도 영향을 미쳐서 공주의 송산리 6호분이나 부여의 능산리 1호분, 고령 고아동 벽화 고분 등에서도 연화문(연꽃을 본뜬 무늬)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됐다. 또한 고구려 사회의 사상적 변화상이 잘 표현되어 있어, 고구려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다음 글부터 북한 소재 고구려 고분 별로 그 특징과 그려진 벽화를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이를 통해 고구려고분벽화의 뛰어난 예술성과 기록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참조
-고구려고분벽화, 이코모스 한국위원회, 예맥출판사, 2005년 -민족대백과사전 -위키피디아 [글 남원근 기자]
2. 대행렬도와 무덤 주인공 논쟁으로 유명한 '안악 3호분'
- 수백 명 등장인물과 다채로운 내용으로 우리나라 고분벽화 중 첫째, -세계미술사에 중요한 위치 차지
안악3호분(安岳3號墳)은 북한의 국보유적 제67호로,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이다. 제작연도가 확실히 알려진 고구려 고분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규모가 으뜸으로 지하궁전을 방불케 하며, 벽화의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해 고구려의 국력과 문화수준, 생활양식을 짐작케 한다.
1949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는데, 가치가 높은 보물들은 도굴 당한 상태였다. 발굴 전에는 하총(河塚)으로 불렸다. 1호분이 발견된 이후 2, 3호분이 추가로 발견됐다.
안악 3호분 전경, 겉과 속 모두 규모가 상당하다-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고분의 벽면에는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있는데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甘六日 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相昌黎玄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라고 적혀 있다.
첫 구절의 '영화 13년'은 동진의 연호로 357년을 말하는 것이며, 동수는 336년(고구려 고국원왕 6년) 요동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를 말한다.
한동안 이 무덤의 피장자가 동수라는 설이 있어 동수묘라 부르기도 했으나 이후에 고구려의 소수림왕 또는 고국원왕이라는 설이 등장했으며, 북한에서는 미천왕의 무덤으로 부르다 현재는 고국원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회랑에 그려진 대행렬도와 무덤 주인공을 둘러싼 오랜 논쟁으로 유명하다.
안악 3호분 내부 구조 -사진 동북아연구재단
무덤의 구조
무덤무지(봉분)는 방대형으로 그 크기는 남북이 33m, 동서가 30m, 높이가 6m이다. 무덤무지의 규모 자체도 크지만 산 위에 위치해 산악처럼 웅장해 보인다. 무덤은 언덕을 파고 반지하에 돌로 쌓았는데 묘실(현실)은 현무암과 석회암 판석으로 짜여있다. 무덤 입구는 문칸 남쪽에 있는데 판돌을 세워 막았다. 내부는 널길[羨道 고분 입구에서 시체를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널방[羨室 관이 있는 네모형의 방]·앞방[前室]·좌우옆방[側室]·널방[玄室]·회랑으로 이루어진 다실분(多室墳)구조로 돼있다. 널길에서 회랑에 이르는 묘실 내부공간의 석면 위에 직접 그림을 그렸는데, 벽화의 총면적이 139㎡(벽면 81㎡, 천장부 58㎡)에 달한다.
회랑은 안칸의 동쪽과 북쪽을 ㄱ자로 싸고 돌았다. 천장형식은 평행삼각고임인데 회랑만은 평행고임이다. 좌우옆방과 널방, 그리고 회랑에는 문이 없고 돌기둥들을 세워 입구를 표시했다.
좌우옆방과 회랑 입구에는 2개의 4각 기둥을 세웠고 안칸 남쪽에는 3개의 8각기둥을 세웠다. 안악3호분의 구조는 여러모로 중국 한·위·진대에 요동지역에 축조된 벽화고분과 맥이 닿는다.
각방의 천장은 네 귀에 각각 삼각형 돌을 얹어 천장공간을 좁히기를 두 번 반복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는 모줄임천장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모줄임천장이다.
안악 3호분의 내부구조도 -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쪽 옆방 모습.
벽에는 묘주의 초상화가 있고, 천정은 모줄임천정으로돼있다 -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당시 생활상이 살아 숨쉬는 벽화
안악3호분 벽화의 중심주제는 인물풍속이다. 벽화는 널길벽에 위병, 앞방의 동쪽 옆방에 부엌·도살실·우사·차고 등, 서쪽 옆방에 주인공 내외의 좌상, 앞방 남벽에 무악의장도와 묵서묘지, 뒷방 동벽·서벽에 각각 무악도, 회랑벽에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결국 벽화내용은 무악대와 장송대에 둘러싸인 주실 앞에 주인 내외의 초상도를 모신 혼전과 하인들이 있는 부엌·우사·마구고 등을 두고 맨 앞은 위병이 지키는 설계로, 이것은 왕·귀족·대관들의 생전주택을 재현시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벽화들은 높은 수준의 당시 회화기법을 보여줄 뿐 아니라 수백명에 달하는 등장인물의 수와 화면의 크기, 다채로운 내용면에서 우리나라 고분벽화 중에서 첫째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 세계미술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덤은 돌 다루는 기술에서도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러 칸의 매 벽면이 거의 한 장의 판돌로 세워졌으며, 반 톤이 넘는 두짝 돌문을 가볍게 여닫게 한 것은 높은 돌 다루기 기술을 보여 준다.
대행렬도 -사진동북아연구재단 앞방 동쪽 회랑 동벽에 있는 벽화다. 높이 2m, 길이 10.5m에 달하는 웅대한 주인공의 행렬도는 무려 250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왕만이 쓸 수 있다는 '백라관'을 쓰고 손수레를 탄 주인공과 이를 호위하는 기병과 보병 그리고 군악대로 이뤄져 있다. 기수들이 든 깃발 가운데 왕을 상징하는 '성상번'이란 글자가 적혀 있다. 우차에 탄 무덤주인의 옷차림은 앞방 서쪽 옆방에 그려진 무덤 주인공의 초상화에 나오는 옷차림과 같다. 수레 역시 차고를 그린 벽화에 나오는 것과 같다. 수레를 끄는 황소의 뿔이 빨간 것도 외양간에 등장하는 소의 형태와 같다. 행렬의 구성으로 보아 생략된 후열까지 합하면 500명 규모의 대행렬이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부엌·고깃간·차고
부엌과 고깃간,차고를 그린 벽화-사진 동북아연구재단
동쪽 옆방 동쪽 벽면에 그려진 고구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벽화로 부엌에는 세 사람의 여인들이 일을 하고 있는데 왼 편의 굴뚝을 갖춘 아궁이에는 시루가 얹어져 있다. 부엌의 부뚜막은 고구려의 집터나 무덤에서 출토되는 도제 및 철제 부뚜막과 형태가 같다.
여인의 윗쪽에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노비를 뜻하는 ' 阿婢 아비'란 단어가 적혀 있다. 왼쪽 기둥 안쪽에는 '경옥 京屋'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경은 창고를 뜻한다.
가운데 고깃간에는 사냥에서 잡은 노루, 맷돼지로 보이는 고기가 쇠갈구리에 매달려 있고, 차고에는 화려한 장식의 마차 두 대가 있다. 우물
우물- 동북아연구재단
앞방 동쪽 옆방 북벽에 그려진 벽화다. 목책이 세워진 우물가에 여러 개의 큰 토기 물항아리와 물 긷는 아낙이 있고 물을 퍼 올리는 지렛대 장치도 보인다. 한 세대 전까지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전형적인 용두레 우물이다. 우물 위에 '井 정'자와 '阿光 아광'이란 글자가 붉은 색으로 쓰여져 있다.
무덤 주인공의 초상화
무덤 주인공의 초사화- 사진 동묵아연구재단
무덤의 주인공이 장막을 두른 평상 위에 정면으로 앉아서 시종들로부터 정사를 보고받고 있는 모습이다. 머리에 검은색 내관과 외관인 백라관을 쓰고 오른손에는 주미선(깃털부채)을 들고 있다. 주인공을 크게, 시종들을 작게 그려 신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고대 회화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수박(手搏)
수박(手搏)
무용총 벽화에도 수박 장면이 나온다. 역사 중의 한 사람이 무용총 벽화에서처럼 매부리코에 눈이 큰 서역계 인물로 표현됨 점이 눈길을 끈다. 참조
-'세계문화유산 고구려고분벽화', 이코모스 한국위원회 -'사진으로 보는 북한 국보유적', 국립문화재연구소 -'인류문화유산 고구려고분벽화', 연합뉴스 -위키백과 -다음대백과사전 [글 남원근 기자 ]
3. 고구려인의 정신세계, 예술성을 엿 볼 수있는 '강서대묘(江西大墓)'
- 고구려 고분벽화 3기에 해당하는 후기 고분. -청룡.백호.현무.주작이 등장하는 사신도로 유명
강서대묘 사진도의 대표적인 작품인 청룡도. 뛰어난 조형미로 고구려인의 미적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7~8 년 전 모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태양사신기'는 주몽이 청룡·백호·현무·주작 등 사신(四神)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는데, 이 때문에 사신은 고구려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대중에게 무척 친숙해졌다.
동방의 청룡, 서방의 백호, 남방의 주작, 북방의 현무로 대표되는 사신 개념은 중국 고대의 오행사상 및 천문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행사상은 우주 만물을 구성요소를 5가지로 압축해서 설명하는 이론으로, 5행이라는 것은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를 말한다.
목은 청룡, 금은 백호, 수는 현무, 화는 주작과 연결된다. 토는 황룡과 연결되는데, 대표적인 고구려벽화고분인 강서대묘는 벽면에 묘사된 사신 이외에도 천정 중앙에 황룡이 묘사되어 완벽한 오행사상을 구현시키고 있다. 드라마 태왕사신기는 바로 강서대묘에 그려진 사신도를 모티브로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신도는 강서대묘 외에도 다른 고구려고분벽화에서 다수 존재하지만, 오행사상의 완벽한 구현 이외에도 예술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강서대묘는 고구려의 완숙한 정신세계와 문화예술 수준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역사성 못지 않게 예술성이란 큰 가치를 선사하고 있다.
치밀한 설계와 능숙한 시공, 세련된 돌 다루는 기술에 의해 이뤄진 석조 예술품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는 마을에 고구려 고분 3기가 모여있어 '삼묘리'라고 불린다. 고분군의 제일 남쪽이 강서대묘, 그 뒤 나란히 놓인 두 고분 가운데 서쪽이 강서중묘, 동쪽이 강서소묘이다. 때문에 이들 세 고분을 강서삼묘, 강서세무덤이라고도 부른다.
이중 7세기에 속하는 강서대묘는 사신도를 그린 단실묘로 강서중묘와 함께 고구려 후기 벽화고분을 대표하는 유적 중 하나로 꼽힌다. 고구려 벽화 시기를 나눌 때 보통 3기에 속하는 고분 벽화다.
3기는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가 불안정해 동북아시아 패권국가와 문화중심으로서의 위상은 흔들리지만 예술적 완숙미는 최고조에 달한 시기다.
강서대묘의 봉토는 진흙과 석회를 번갈아 다져 방대형으로 쌓아 올렸고, 무덤칸은 잘 다듬은 화강석 판돌로 만들었는데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졌으며 방향은 남향이다.
3기 벽화고분들은 모두 구릉기슭에 남향으로 축조됐으며, 뒤로는 산을 지고 앞으로는 들을 내다보는 이른바 '명당'의 기본조건을 갖춘 곳에 위치했다. 무덤의 널길은 널방 남벽 중앙에 냈다. 널방 입구에는 두 짝 문을 달았던 문확 자리가 남아 있다.
널방의 평면은 정방형이고, 천정은 평행삼각고임식이다. 널길은 길이 약 3m, 폭 1.8m, 높이 1.7m이고, 널방은 남북 길이 3.18m, 동서 폭 3.15m, 높이 3.5m이다. 바닥에는 두 장의 잘 다듬은 판돌을 깔고 굽도리돌을 댔다.
그리고 정교하게 만든 화강암 판돌 관대 2개를 동서 양쪽에 나란히 놓았다. 널방의 벽면은 길죽한 판돌 두세 장을 수직으로 포개서 쌓되 윗부분은 안으로 기울어지게 다듬고, 여기에 맞추어 네 구석에는 5각형의 구석돌을 끼워 넣어 모를 죽였다.
또한 천정 각 단의 고임돌들 역시 휘임과 기울임을 주어 무덤칸 내 직선과 평면적 느낌을 덜고자 배려하였다. 이처럼 강서대묘는 당시로서는 치밀한 설계와 능숙한 시공, 세련된 돌 다루는 기술에 의해 이루어져 석조 예술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강서대묘 입구.
강서대묘 주변에는 강서중묘, 강서소묘가 모여 있어 이를 강서삼묘, 강서세무덤이라 부른다.
제3기 고구려고분벽화의 백미 '사신도'
강서대묘의 벽화는 회칠을 하지 않은 잘 다듬어진 널방 돌벽 면에 직접 그렸는데, 앞선 시기의 벽화와 달리 안료제작상의 기술적 진보를 보여준다. 벽면에는 사신, 천정에는 연꽃무늬, 인동덩쿨무늬, 구름무늬, 산수, 기린, 봉황, 비어, 비천, 신선, 천인, 황룡 등을 배치했고, 붉은색, 검은색, 흰색, 초록색, 보라색, 노란색, 밤색 등 다양한 안료를 사용했다. 그림은 먼저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채색한 후 먹선으로 테두리를 치고 세부를 다듬어서 완성했다. 이를 철선묘법이라 한다. 화강석 위에 직접 그렸기 때문에 큰 손상이 없이 13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오히려 그 빛깔이 청명하게 살아남아 있다. 다만, 천장의 황룡은 침수에 의하여 손상돼 그림이 분명치 않다.
벽화의 배치를 자세히 알아보면, 널방에 들어서면 정벽인 북벽 중앙에는 북방을 상징하는 현무가 역동적인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북벽 좌우의 동벽과 서벽에는 관람자를 향해 질주해 오는 듯한 자세의 청룡과 백호가 매우 힘차고 생동감 있는 모습이다.
청룡은 푸른색, 녹색, 적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신비감을 더해준다. 이름처럼 온 몸이 하얀 백호는 붉은 색의 날개와 혀로 인해 화면에 선명한 대비감을 일으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벽에는 중앙의 입구를 중심으로 양 벽에 그려진 한 쌍의 붉은 주작이 당장 날개를 퍼덕이고 날아오를 듯한 역동적인 모습으로 묘사됐다.
이 사신도들은 배경 문양 없이 단독으로 그려져, 벽화의 주인공인 사신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매우 탁월하다. 하늘 세계를 상징하는 천정에는 선인, 천인, 서수, 꽃, 넝쿨무늬, 구름무늬, 별자리 등 다양한 소재들이 빽빽하게 장식되었다.
이들은 모두 화려한 색채와 아름다운 곡선을 보여준다. 이처럼 환상적인 천상 세계는 고구려인들의 풍부한 상상력이 발휘된 결과물 이라고 할 수 있다. 선계의 중앙 즉 천정 중심부에는 황룡이 꿈틀거리며 무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중 현무도와 청룡도는 화려한 색채와 유려하면서도 힘찬 필선, 생동감 있는 화면으로 고구려는 물론 당시 동방 사신미술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꼽힌다. 한때 광활한 만주벌판과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였던 고구려인들의 진취적 기상과 그들의 찬란했던 문화적 수준을 짐작케 해준다.
1)청룡도
세련된 구성과 색채, 조형성이 가장 뛰어난 사신도로 사납고 용맹하며 속도감 있는 화면이 보는 사람을 압도케 한다. 용은 선사시대부터 고대인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숭앙되던 신화적 동물로 동방을 상징한다. 포효하는 듯 크게 벌린 입에서는 붉은 기운이 강렬하게 뻗쳐 나오고, S자형으로 흘러내린 목선과 몸통부분에는 푸른색, 녹색, 붉은색을 번갈아 채색했다. 그 위에 검은 망사무늬의 비늘을 묘사해 신비롭고 화려한 용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슴 양옆으로 꿈틀거리듯 붉은 색으로 묘사된 화염무늬 형태의 날개와 도약하려는 듯 크게 벌린 앞 다리의 자세에서 진취적이며 활달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고구려 청룡도 중 백미라 할 수 있는 강서대묘의 대표적 작품이다.
2)백호도
백호도
호랑이는 청룡과 달리 실재하는 동물로, 그 용맹스러움으로 인해 원시시대부터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오행사상에서 서방을 상장하는 동물이다.
악귀를 쫓아내려는 듯 부리부리하게 치켜 뜬 눈과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크게 벌린 입에서 백호의 용맹성을 엿볼 수 있다.
S자형의 목선, 계단형으로 마무리된 꼬리, 앞 다리를 위 아래로 힘껏 벌린 자세는 청룡도와 매우 유사하다. 가슴부분에 묘사된 선명한 색채의 붉은 날개가 신수로서의 백호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청룡도와 마찬가지로 유려하면서도 힘찬 필선을 보여준다.
3)주작도
주작도 남쪽 입구의 좌우벽에 대칭으로 그려져 있다. 주작도 청룡과 같은 상상의 동물이며 남방을 상징한다. 그 모습은 봉황과 흡사하다.
힘차게 퍼덕이는 날개와 회오리치듯 말아 올린 꼬리의 강렬한 곡선, 온몸에서 불길처럼 뿜어 나오는 깃털, 붉은 색과 녹색의 기운이 감도는 화려한 모습은 불의 기운을 지닌 남방의 신수로서의 주작의 모습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주작의 발아래 묘사된 불그스레한 산악도는 화면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준다.
4)현무도
현무도
현무는 북방의 흑색을 뜻하는 현(玄)과 거북의 견고한 등껍데기를 상징하는 무(武)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북방을 상징하는 수호신이다. 고대의 신화전설에 의하면 거북은 수컷이 없어 잉태하려면 그들과 머리가 비슷하게 생긴 뱀과 짝을 지어야 하였기 때문에 화면에 보이는 이들의 교묘한 엉킴은 투쟁이 아닌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거북을 휘감은 뱀의 긴 타원형 곡선과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거북과 뱀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화면에 역동성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필선(筆善) 자체의 속도감보다 물상이 지닌 운동감과 생명력이 더 현저하게 부각되고 있는데, 그 윤곽선이 치밀한 톱니바퀴 모양(鋸齒形)의 파동을 이루는 점이 주목된다.
흑색의 선에 적(赤)·녹(綠)·황(黃)·청(靑)·백의 여러 가지 빛깔을 단색으로 사용했으나, 안료를 무엇으로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현무도는 거북의 안정감 있는 자세와 뱀의 탄력적인 곡선이 절묘하게 조화된, 고구려 최고의 현무도상으로 간주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