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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적극적 사고가 내 생애의 산을 옮긴다
그의 자동차가 페인트 칠도 하지 않은 외양간을 지나서 구름 같은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 집 문앞에 와서 멈추었습니다. 내가 맨발로 삐걱거리는 현관 마루로 뛰어 나갔을 때, 헨리 아저씨가 차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키가 크고 활력이 넘쳐 흐르는 미남자였습니다. 그는 선교사로 중국에 가서 여러 해 동안 일하다가 이번에 아이오와주에 있는 우리 농장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낡은 문에까지 달려와서는 네 살짜리 내 어깨 위에 그의 큰손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는 얼굴에 밝은 미소를 띠고 나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가 로버트지? 커서 목사님이 될 것 같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잠자리에서 혼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크면 꼭 목사가 되게 해 주세요" 나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나를 적극적 사고주의자가 되게 해주셨다고 믿습니다.
그 후 16 년이 지나서 나는 미시간 주 홀랜드 시에 있는 호우프 대학을 졸업하고 웨스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나는 야심에 불타는 학생들의 태도에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큰 교회에 부임해 가는 것을 몹시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발을 내디디는 첫 걸음에 얼마나 위태로운 생각인가?
나도 큰 교회를 탐내다가 다른 사람이 내 대신 가게 되면 그를 미워하게 될 것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러한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목회 생활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나는 젊었을 적에 텍사스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조그마한 교회의 목사직을 수락했던 침례교 목사인 조오지 트루엘 씨에 관한 논문을 썼습니다. "나는 이 교회를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내 전 생애라도 바치겠다" 라고 이 젊은 텍사스의 사나이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가 40 년 후 은퇴할 적에 그는 미국에서 제일 큰 아마도 제일 훌륭한 침례교회를 이룩해 놓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큰 영감입니까? 나는 "하나님, 제게도 밑바닥에서부터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저는 다른 사람의 자리는 탐내지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제 힘으로 위대한 일을 해서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에게 축복이 될 만한 것을 남겨 놓을 수 있는 기회만을 원합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나는 목사 안수를 받고 일리노이 주 시카고시 교외에 있는 아이반호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4 년 반 후에 나는 캘리포니아주 오린지카운티에 와서 새 교회를 시작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서해안 지방은 내게는 낯선 고장이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그 곳을 방문해 보려고 결심했습니다. 그 곳에 가서 나는 오렌지 나무가 우거졌던 숲에서 집들이 우뚝우뚝 솟아나오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으나 새 교회를 시작하는 데 이용할 만한 시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마음에 결정을 짓지 못한 채 시카고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기차 안에서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캘리포니아로 가야 하겠습니까?" 그 때가 내게는 중요한 결정의 시간이었습니다. 거의 자정 가까이 되었습니다. 산타 페 기찻간의 윗침대에 누워 잠을 못 이룬 채 나는 차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기차는 그 때 아리조나 산맥 높이 있는 정거장에 멈춰
서 있었습니다. 환한 보름달 빛이 눈으로 덮인 소나무 위에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사슴 한 마리가 나무 뒤에서 뛰어나오더니, 마른 눈가루를 흩날리면서 달빛이 환한 밤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로 그 때 조오지 트루엘의 이야기가 영감처럼 떠오르면서 다음과 같은 적극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일 큰 교회는 앞으로 세워져야 한다"
이 생각으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나는 5 년 동안의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응답을 받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음의 결심이 섰습니다. 우리는 이 도전장을 받아들이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서 새 교회를 시작하려고, 시카고에 닿아 기차에서 내려서는 순간, 아내는 내 얼굴에 쓰여 있는 답을 읽고, "여보, 캘리포니아로 가게 됐군요!" 라고 말했습니다.
2 월에 일리노이 주에서 캘리포니아 주까지의 길은 위험할 수도 있었으나, 모든 일이 순조로왔고 길도 아주 좋았습니다. 아이오와 주 수 시티에 닿자, 나는 어떤 악기점 앞에다 차를 세웠습니다. 내 주머니 속에서 시카고 교회 교인들이 송별금으로 준 400 달러가 들어 있었습니다. 내 친구인 상점주인 하워드 듀우븐은 내가 제시한 조건으로 나에게 조그마한 전자 오르간을 팔았습니다. 내 조건이란, 먼저 400 달러를 내고 나머지는 매달 45 달러씩 36 개월 동안에 갚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캘리포니아로 부쳐달라고 했습니다.
나를 파송한 교파인 개혁파 교회에서 "당신네 집을 지을 돈이 생길때까지" 사택으로 준비해 준 조그마한 집 앞에 우리의 낡은 시보레 차를 세운 것은 2 월 27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보낸 500 달러 수표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보다 영리한 사람들은 내가 이 교파와 손잡고 일하는 것을 굉장히 불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전체에서 이 개혁파에 속하는 신자 수는 20 만명에 불과했었습니다. 가든 그로브에서 이삿짐을 푼 후 맨 처음 시작한 일은 이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개혁파에 속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겨우 두 가족밖에는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시작하는 교회로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히 감리교인들, 장로교인들, 성공회 교인들, 침례교인들, 루터파 교인들, 그리고 카톨릭 교인들은 다 각기 자기네 교회로 갈 것입니다. 누가 우리 교회에 오려고 할 것인가? 개혁파 교인? 그러나 이 교파에 속하는 가정은 단 둘뿐이 아닌가! 지금 같은 비율로 보면, 앞으로 10 년 동안에 기껏해야 75 가족이 이 지역으로 이사 올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통계를 보니 미국인의 반수 가량은 어떠한 종교적 종파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자 이 때까지의 의문이 일시에 확 풀렸습니다. 아무 교파에도 속해 있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들이 바로 우리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한 번도 조직적인 종교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감화시켜 그들을 교회로 인도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지 사흘 후에 오르간이 도착했습니다. 나는 내게 있는 재산을 한 번 조사해 보기로 했습니다. 아내와 월부로 산 오르간과 현금 500 달러와 그것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은 빈 건물을 찾아내서 예배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곳도 없어요. 우리가 당신을 부르기 전에 다 둘러 보았지만 쓸 만한 데라곤 하나도 없었어요" 라고 나에게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충고를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 이 얼마나 무서운 부정적인 말인가! 나는 이러한 부정적인 충고는 거절하기로 했습니다. 캘리포니아주에 와서 나흘째 되던 날부터 나는 예배를 볼 만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틀림없이 어딘가에 장소가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적극적인 사고를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나는 예배를 볼 만한 장소의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학교 이사회와 접촉을 해 본 결과 캘리포니아 법은 학교 건물이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능성 제 1 호가 사라졌습니다. 안식교회는 토요일에 예배를 보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교회건물을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알아보았으나, 이미 늦었습니다. 장로교회에서 일요일에 예배를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능성 제 2 호도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은 무즈 홀. 여기도 다른 교파가 먼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가능성 제 3 호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가능성 제 4 호가 남아 있었습니다. 5 년전에 신혼 여행 중이던 아내와 나는 아이오와 주 스피리트 레이크에 있는 야외극장에서 예배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야외극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동쪽으로 약 3 마일 떨어진 곳에 오린지 야외극장이 있었습니다. 극장 지배인은 이상스러운 듯이 그러나 정중하게 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 주일 후에 그는 전화를 걸어 일요일에는 그의 야외극장을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쓰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나는 반가이 대답했습니다.
즉시 나에겐 이것이 무언가 새롭고 흥미 있는 일의 시작이 되리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서둘러 약간 주제넘다고 생각되는 첫 광고를 냈습니다.
"3 주후에 오린지 카운티에서 가장 새롭고, 가장 영적인 교회가 시작됩니다. 집에서 입는 옷 그대로의 차림으로 오십시오. 1955 년 3 월 27 일 일요일 아침 11 시에 첫 예배가 오린지 야외극장에서 있겠습니다" 곧 그 지방과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반응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뭐라고요? 야외교회? 세상에, 원,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듣자니 야외극장에서 예배 보기로 했다지요? 참 안 됐습니다. 다른 건물을 찾지 못하셔서 그렇게 된 모양인데, 참 불행스러운 일입니다" 라고 한 동료 목사는 말했습니다.
내가 야외극장의 끈적끈적한 콜탈 칠을 한 종이로 덮은 지붕 아래 있는 매점에 서서 설교를 하려고 한다는 말이 오랫동안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 오던 우리 교파에 퍼져 들어가자 나는 동정과 비난을 동시에 받게 되었습니다. 좀 동정적인 교인들은 대체로 "교회를 시작하기에는 얼마나 탐탁치 않은 장소인가!" 라는 뜻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첫 예배를 보기 8 일 전에 한 친구 목사가 찾아와서 들려 준 말들은 내 용기를 거의 송두리째 빼앗아 갈 뻔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만나본 중에서 가장 철저한 부정적 사고주의자였습니다. "자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정말로 야외극장에서 교회를 시작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더러운 욕정을 발산시키는 장소란 말일세" 나는 그에게 사도 바울도 마르스 힐에서 설교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 곳도 별로 거룩한 곳은 못 되지 않았나?" 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는 나의 단순한 변호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내 생각의 어떤 점이 잘못됐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정적 사고주의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는 "아마 잘 안될 걸" 하는 경고까지 잊지 않았습니다.
이 경건한 목사 친구가 실패를 예언하고 돌아가고 난 후 나는 나 자신도 이런 생각에 감염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부정적 사고주의는 굉장히 감염률이 높은 병입니다.
그날 밤 나는 자리에서 뒤척거리기만 하고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낮에 찾아 온 친구 때문에 내 마음 속에 있던 신념은 다 사라지고 두려움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제와서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광고도 이미 나갔고 가지고 있던 500 달러도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극장에까지 오르간을 운반하기 위해서 트레일러를 만드는 데 25 달러, 설교소리가 잘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 마이크를 사는 데 75 달러, 강단과 극장 위에 세울 25 피트짜리 십자가를 만드는 데 몇 백달러 들어갔습니다. 나는 의심의 엄습으로 몸이 떨렸습니다. 새벽 3 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나는 아내에게 "레이 린드퀴스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러 할리우드 장로 교회에 갑시다" 고 제안을 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우리는 다음 주일 우리 야외극장 교회에 몇 사람이나 올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에 들어가 앉아 주보를 펼쳐보니 아침 설교 제목은 "당신의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처방" 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좋다! 나는 자신을 좀 얻어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겠군. 목사님은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것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빌립보 1장 6절) 라는 성경 귀절을 읽고 설교를 시작했는데 이 한 귀절 말씀에 나는 한 주간 내내, 아니 평생을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린트퀴스트 박사는 청중에게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시작케 하셨고, 여러분을 도와 오늘날과 같은 위치에 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버려두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들은 내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고, 전날 찾아온 친구의 말을 듣고 생기기 시작한 공포를 싹 씻어 주었습니다. 나는 다시 적극적 사고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나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면, 오린지카운티에 기적을 일으키는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 다음 주간 동안 나는 주일 예배를 준비하느라고 몹시 바빴습니다. 토요일 밤 나는 차고로 가서 반짝반짝 윤이 나는 마호가니 오르간을 만져 보았습니다. 나는 차의 뒷좌석도 조사해 보았습니다. 거기엔 헌금 접시와 강단용 성경과 마이크와 비옷과 우산이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트레일러의 바퀴도 탄탄한가 조사했습니다. 내가 집안으로 들어오자 아내는 "내일 아침 예배에 몇 명쯤 올 것 같아요?" 하고 물었습니다. "글쎄, 로스앤젤리스에서 성가대가 올 것이고... 하룻동안 성가대를 보내 주다니 참 고마운 교회요. 성가대가 한 30 명 된다기에 장소가 너무 텅빈 것처럼 보이지 않게 되도록 여러 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타고 오라고 부탁했소" 우리는 둘다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열 대 내지 스무 대는 더 오겠지" 하고 나는 추측을 했습니다.
"내일 아침 무슨 설교를 하실 참이예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 나는 성경 본문을 외웠습니다. 그날 밤 어쩌다 잠을 깨니,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것을 완성하시리라" 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는 아침까지 깊이 잤습니다. 그 다음날 오후 아내와 나는 저녁 식탁에 마주앉아 제일 처음으로 들어온 헌금을 세고 있었습니다. "자동차가 한 50 대 왔었소. 그 중 20 대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타고 온 차일 것이요. 그 중 몇은 다음 주일에도 오겠지. 감사하게도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었소. 두 주일 후면 부활절이오. 여보, 이제 출발은 한 셈이오. 그리고 헌금을 세어 보고 나자 더욱 더 힘이 났습니다. 헌금은 모두 합해서 83 달러 75 센트였습니다. 대단히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 사고주의자인 내 친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다음날 아침에 전화를 걸어 전날 예배가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백명이 좀 넘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중에 성가대도 포함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다 였소?" 하고 그는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참 동정한다는 듯이, "물론, 야외극장에서 무슨 일이 잘되길 기대하겠소?" 라고 덧붙였습니다. 나는 "그러나 한 주일 전에 비해 100 퍼센트 증가한 셈 아니요?" 하고 항의를 하면서 그에게 반문했습니다. "당신네 교회는 지난 주일에 비해 몇 퍼센트나 교인수가 늘었소?" 그는 교인수가 "아직도 알 수 없는 무슨 이상한 이유 때문인지 약간 줄었다" 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타자기로 돌아가서 신문에 실릴 기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남부 캘리포니아에 최초의 야외 교회가 어제 시작되었는데 첫날 출석한 차량이 50 대가 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교회는 출발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사업의 시작이었으며, 우리도 그걸 느끼고 거기에 온 사람들도 느꼈습니다. 그 후 몇 달 동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교파의 본부에서 돈을 빌어 교회를 지을 2 에이커의 땅을 샀습니다. 나는 롱 비치에 있다는 유명한 건축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나는 28 세이고 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모험 삼아 우리 교회의 설계도를 그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리처드쉐리 씨는 내 월급이 300 달러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험을 했습니다. 나는 총액이 4 천달러 넘는 계약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가 첫번째의 청구서를 보내 왔을 때, 나는 단순히 그 사실을 광고만 했는데도 1 천달러 청구서를 충분히 지불할
만한 헌금이 들어왔습니다. 최종 설계도가 도착했을 때 또 헌금을 했습니다---3 천 달러가 나왔습니다. 설계도가 준비되자, 우리는 건물을 짓기 위한 돈을 빌었습니다. 여섯 달후에---야외극장에서 예배 보기 시작한 지 18 개월 후에---교회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제는 200 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야외극장에서 새로 지은 아름다운 교회로 이사갈 준비를 하게 되자 흥분은 고조되었습니다. 내가 로지 그레이 씨를 만나게 된 것은 바로 이즈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목사님은 아마 저희들을 잘 모르실 겁니다. 제 이름은 와렌
그레이입니다. 제 아내와 저는 야외극장에서 예배 보기 시작한 첫날부터 목사님네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야외극장에서 21 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습니다. 먼 길이지만 저희 집에 좀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 차가 이 목장 주인의 집 앞에 멈춰 섰을 때 그는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공손하게 모자를 벗고 악수를 청하여 말했습니다. "제 아내를 만나시기 전에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발병한 후로 아내는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합니다. 입 속에서 약간 우물거리고, 울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정신은 똑똑합니다. 교회에도 한 번도 빠지지 않습니다. 저는 늙기는 했지만 아직 건강합니다. 매주일 그녀를 안아서 차에 태워 가지고 교회에 가서 목사님께서 믿음에 관해 하시는 설교를 듣습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목사님, 교회에 등록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레이 씨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아내 로지가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턱은 가슴에 닿아 있었고, 머리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눈만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입은 벌어진 채로 다물지도 못하고 약에 취해 멍청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안녕하세요, 로지 부인? 나는 슐러 목사입니다"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 보였습니다. "로지 부인, 우리 교회의 교인이 되고 싶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습니다. 그녀의 벌려진 입이 조금 움직이면서 나를 향해 눈을 치켜뜨자 눈물이 천천히 그녀의 두 뺨을 흘러내렸습니다. 그녀는 말을 하려고 마비된 입술을 움직이려 했으나 허사였고 좀 오래 동안 무어라고 웅얼거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것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두 주일 후에 로지와 그녀의 남편은 차 안에 앉은 채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교인수가 202 명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아름다운 새 교회로 이사 갈 준비를 하려고 재직회를 모였을 때 누군가가 "로저 그레이 부인은 어떻게 하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여러가지 제안이 나왔습니다. 그녀는 텔레비젼에 나오는 예배 시간에 예배를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새 교회에서 9 시 30 분부터 10 시 30 분까지 예배를 보고 곧장 야외극장으로 가서 거기서 11 시부터 12 시까지 예배인도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로지부인과 비슷한 사람들도 차 안에 탄 채로 예배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누가 이런 해결책을 제안했는지 지금 기억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그 제안이 가결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캘리포니아에 도착한지 18 개월후에 나는 서로 3 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 날로 성장해 가는 두 교회의 예배 인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1 년이 지나갔습니다. 매주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9 시 30 분부터 10 시 30 분까지 교회에 모인 200 여명의 교인에게 설교를 하고 오르간을 실은 트레일러를 뒤에 단 채 미친 듯이 차를 몰고 11 시에 시작하는 예배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200 명이 있는 야외극장으로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3 년이 지난 후 내 마음 속에 꿈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와 야외극장에 모이는 교인들을 하나의 큰 영감이 일어날 만한 장소에 합하는 것이 어떨까? 플로리다 주 성페델스버그 컴퓨니티 교회의 J 월리스 해밀턴 목사도 늘어나는 교인을 다 교회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주차장에 확성기를 달아 사람들이 차에 앉은 채로 예배를 보게 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예배를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훌륭한 설계사를 찾아서 사람들이 차를 탄 채로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를 설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어떨까? 걸음을 걸을 수 없는 사람들, 너무 어려서 집에 두고 올 수 없는 어린아이들을 가진 부모들, 정신적 문제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대면하기가 어려운 사람들, 노동을 하고 교회에 오기 전에 채 옷을 갈아 입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차 안에서 예배 드릴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될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절대로 교회에 오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보다 전통적인 가족석과 시설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꿈이 내 마음 속에서 싹터 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나무 숲이 우거진 넓은 대지 위에 세워진 유리로 된 벽과 햇빛속으로 솟아오르는 분수와, 높은 탑에 달린
종들을 그려 보았습니다. 나는 누군가와 내 꿈을 나누고 싶었으나,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적극적인 글귀가 쓰여 있는 달력을 보았습니다. 그 글귀란 나는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위대한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싶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내가 설계사를 비롯해서 양식 있는 적극적 사고주의자들과 이야기해 본 결과 그것은 실질적이고도 귀중한 아이디어라는 나의 신념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 인생 전부를 , 내 힘 전부를, 그리고 내게 있는 마지막 한 푼까지 바쳐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 아이디어를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 첫 걸음으로 나는 "당신의 꿈을 실현시키는 방법" 이란 제목의 설교로써 내 꿈을 교인들에게 펼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워크인 드라이브인 (걸어서도 들어가고
차를 타고서도 들어간다는 뜻, 역자주) 교회에 대한 내 꿈을 한 가지 예로 들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를 보시면 퍽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주 새로우면서도 사람들의 요구에 합당한 어떤 실질적인 일을 하기를 원하실 겁니다. 그런 교회는 어디보다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교회 안에 있는 적극적 사고주의자들이 이 꿈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도록 내 버려두질 않았습니다. "공동 의회를 열어서 이 아이디어에 대해 한번 의논해 봅시다" 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이것은 신중한 태도였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회의를 열어 적극적 제안을 토론해 보자는 데 반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해결해야 될 문제에다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우선 사태를 직시하기로 했습니다. 첫째 사실은 우리 교회는 매주일 서로 떨어진 두 장소에서 예배를 보고 있다. 둘째 사실은 우리 교인 중에는 차에 탄 채로 볼 수 있는 예배는 절대로 필요하다. 세째 사실은 우리 교인 중에는 차에 탄 채로 예배를 보아야 할 사람이 많이 있다. 네째 사실은 우리는 야외극장을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차용계약서가 없기 때문에 아무 때라도 그 곳에서
더 이상 모일 수 없다는 통고를 받을 가능성이 많다. 다섯째 사실은 목사로서 내가 언제까지나 두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실질적이 못 된다. 우리는 교인들에게 이상의 문제에 대한 세 가지 해결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1. 이 두 그룹을 두 개의 분리된 교회로 독립시킨다.
2. 옥외 예배를 그만둔다. 3. "우리에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가르쳐 주실 기회를 하나님께 드려서" 새로이 워크인 드라이브인 교회를 지어 이 두 그룹을 한 교회로 합동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리를 비켜 드려서 그러한 모험을 하면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지,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훌륭하게 실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도록 한다. 교인들이 이 세 가지 제안을 놓고 토론을 하고 있을 때 적극적 사고주의자인 월프레드 랜드러스 박사가 종이에다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습니다. 문제를 파 헤치고, 긴장을 자아내고, 머리를 짜내는 회의에서 종종 그렇듯이, 여러가지 안에 대해서 흉금을 털어놓고 장시간 토론을 하고나니까 얼마동안 모두들 조용해졌습니다. 이 때 랜드러스 박사가 일어나서 종이에 쓴 것을 보며 말했습니다. "의장,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두 교회를 합동하기로 하고 이 목적을 위해 새로 땅을 사는 일에 대해서 더욱
연구해 볼 것을 당회에 위임하기로 동의합니다" 조금 더 토론을 한 후에 투표에 들어갔습니다. 55 명이 찬성표를, 46 명이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약간의 표차로 가결이 된 것입니다.
반대표를 던진 교인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어두운 교회에 혼자 남아서 기도를 했습니다. 집에 가려고 일어서다가 랜드러스 박사의 동의안이 적힌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나는 이 종이가 나와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귀중한 서류가 될것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하여 위대한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엔 아이디어, 그 다음엔 회의가, 그리고 나선 가결된 동의안의 순서로 됩니다. 반대 의견이 곧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지하는 편이 더 많이 생겨났습니다. 어느 날 토지
소개인이 내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목사님이 계획을 정말로 실천할 생각이시라면, 10 에이커의 땅을 6 만 6 천달러에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먼저 1 만 9 천 달러를 내고 매달 4 백달러씩 15 년 동안 갚아가면 됩니다. 우선 4 개월 기한하고 보증금으로 1 천 달러를 내면 그 땅을 잡아 놓을 수 있습니다. 만약 4 개월 기한 안에 나머지 1 만 8 천 달러를 마련 하지 못하면 1 천 달러의 보증금은 잃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교인들에게 광고했습니다. 안전하게 일을 처리하자는 사람들은, "1 만 9 천 달러 전액이 생길 때까지 그 땅을 사겠다고 하지 맙시다. 1 천 달러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모험은 하지 맙시다"
그러나, 정반대의 의견도 나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그 제안을 수락합시다. 은행에 1 천 1 백 달러가 있지 않습니까? 그중 1 천 달러를 지불하고, 내일부터 4 개월 동안에 나머지 1 만 8 천 달러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봅시다. 이런 좋은 기회를 잃어버릴 모험을 하지 맙시다. 만약 1 만 8 천 달러 전액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그 땅이 다른 데로 팔려 버릴지도 모릅니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투표를 한 결과 두번째 의견이 통과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나는 은행에서 1 천 달러를 찾아다가 기한부 계약을 했습니다. 이제 4 개월 동안에 나머지 1 만 8 천 달러를 구해야 했습니다. 석달 반이 지나갔습니다. 1 만 2 천 달러가 모였습니다. 당회에서는 1 만 8 천 달러가 마련되기만 하면 언제든 지불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한까지 5 일이 남았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의 보험증권을 모두 현금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제는 가볼 만한 데는 다 가서 알아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가볼 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중에 들어온 돈이라곤 1 만 5 천 달러밖에 안 되었습니다. 약속한 마지막 날 정오가 되었습니다. 네 시간만 지나면 사무실이 닫히고 주말 휴가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직도 3 천 달러가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날 정오에 나는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나는 공중전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 어떻게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구려" "그레이 씨에게 전화해 보세요" 하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나는 반대했습니다. 두 주일 전에 워렌 그레이 씨는 의사에게서 불치의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보, 나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레이 씨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고 아내는 고집했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그때 내 눈은 눈물에 젖어 있었고, 입술은 떨고 있었습니다. 나는 울고 싶었습니다. 목장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를 받고 간호원에게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잠깐 기다려 보세요. 워렌 씨, 당신에게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고 나는 딴 청을 부렸습니다. "당신이 땅을 사라고 헌금한 2 천 달러를 되돌려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이 기한 날짜인데 돈이 다 준비되질 않았습니다" 하고 나는 용감해지려고 애쓰면서 말했습니다. "아니, 안 됩니다. 목사님!"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반대했습니다. "이미 헌금한 것보다 좀더 할 수 있습니다. 한 시간 후 산타 아나 북메인가에 있는 아메리카 은행에서 만납시다. 제게 3 천 달러가 있습니다" 나는 정신이 멍한 채로 은행까지 네 구역을 걸어갔습니다. 워렌 씨가 도착해서 현금 출납계로 갔습니다. 그리고 내 손에 3 천 달러를 쥐어 주면서, "목사님,
하나님께서 그 10 에이커의 땅을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로지에게는 드라이브인 교회가 꼭 필요합니다. 로지가 죽고 난 후에라도 로지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돌아서서 20 마일 밖에 있는 그의 목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동안 나는 걸어서 오린지 카운티 토지 매매 소개소에 4 개월의 기한이 끝나기 바로 1 시간 전에 도착해서 책상 위에다 1 만 8 천 달러를 꺼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10 에이커의 땅을 사게 해준 것입니다. 그 후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두 번의 요란스러웠던 공동의회는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채색유리창이 있고 지은지 3 년이 된 우리 교회를
파는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부동산을 팔 경우에는 교단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교단 간부들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교회 안에서 반대하는 교인들은 "슐러의 계획"에 대해서 반대 했습니다. 드라이브인 교회에 있음직한 위험밖에는 볼 줄 모르는 전통에 얽매인 교계 인사들은 그들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교회를 팔 수 있는 권리를 주자는 동의가 있었고, 열띤 토의 끝에 투표가 있었습니다. "동의안이 가결되었습니다" 라고 의장이 선언했습니다. 폐회기도도 하기 전에 나는 다섯 명의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퇴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교회 사무실에 나와 보니 우리 교회 이사회 회의록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사회 서기가 발표를 낸 것이었습니다. 재정 보고서도 있었습니다. 회계도 사표를 내고 있었습니다. 부의장에게서 온 편지도 있었습니다. 그도 사표를 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이 세 명의 임원들이 나 때문에 그만두려고 한단 말인가! 전화가 울렸습니다. 바로 비서에게서 온 전화였습니다. "미안해요 목사님, 당신이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러한 긴장 상태에선 더 이상 일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내 일생에 그때보다 더 외롭게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이 암담한 순간에 나는 갑자기 어린 시절에 배운 성경 귀절을 회상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나는 이 말씀을 종이에 써서 책상 위에 있는 유리 밑에다 넣어놓고 하루에도 여러 번씩 읽었습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끝까지 참아내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이 말씀 옆에다 나는 또 베일러 대학의 버틀러 박사의 말씀도 오려서 넣었습니다. "일이 어렵게 되더라도 움직이지 말라. 사람과 압력은 변하여도 대지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네가 어딜
가더라도" 이것도 충분치 않아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체육관에 붙어 있던 글도 써 넣었습니다. "이기는 자는 그만두는 법이 없고, 그만두는 자가 이기는 법이 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교회가 갈라지고 우리의 꿈이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나는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내가 나의 교회를 짓겠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갑자기 그리고 똑똑히 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까지 나는 내가 교회의 머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 교회를 시작하지 않았던가? 내가 나가서 맨 처음의 다섯, 열, 열 다섯, 스무 사람의 교인들을 모아들이지 않았던가? 내 돈으로 그 조그만 오르간을 월부로 사지 않았던가? 내가 교회법인의 회장이고, 이사회의 의장이 아니던가?
그때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의 머리로서 이 산더미 같이 큰 의무를 맡아주시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나치게 극적이었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실제로 의자에서 일어나서 내가 앉았던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주님, 여기 앉으십시오. 만일 당신께서 이 워크인 드라이브인 교회를 원하신다면, 참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이 꿈이 실현되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저는 그것도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돌아서서 그의 사무실을 걸어 나와서, 그 꿈이 이제는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휴가를 떠났습니다. 이 때까지 불가능해 보이던 산이 열흘 후에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들이 놀라운 방법으로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회 건물이 정당한 값에 팔렸습니다. 워크인 드라이브인 교회의 아름다운 설계도가 완성되어 건축 허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뭇 영혼에게 영감을 줄 백만 달러짜리 건물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서 기공식 예배를 광고했습니다. 약 100 대의 자동차가 기공식 예배에 참석하러 아직은 거친 교회터로 몰려들었습니다. 막대기에 매단 긴 리본들이 건물이 설 자리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엄숙하게 첫 삽을 떴습니다. 사진사들이 이 귀중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우리는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여자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슬픈 일이 있습니다. 로지 그레이 부인이 이틀 전에 죽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일을 시작하신 그 다음날 우리는 그녀를 장사했습니다. 나는 워렌 그레이 씨와 함께 짙푸른 태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람이 몰아치는 공동묘지에 서 있으면서 감명깊게 다음과 같은 옛 말을 마음속으로 풀이해 보았습니다.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도 쓸모가 있다" 는 말을. 2 년후에 우리의 모든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경제 전문가들은 우리같이 적은 수의 교인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수십만 달러의 돈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대지는 정리해서 포장을 하고 나무와 꽃과 잔디를 심었습니다. 전깃줄,
상수도, 하수도, 전기 도관이 10 에이커의 땅 밑에서 10 마일에 걸쳐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습니다. 차도, 인도, 도랑, 개스관 등이 4 분의 1 마일이나 뻗혀 있었습니다. 천명이 앉을 수 있는 본 교회당은 유리벽으로 둘러 싸이고 경치좋은 주차장에는 100 개의 고성능 확성기가 가설되어 사람들은 차에 탄채로 설교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 개의 종이 달린 네 개의 1 백피트짜리 종각은 하늘을 배경 삼아 극적인 실루엣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위대한 기독교의 지도자가 되었던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12 개의 분수가 250 피트의 성전 동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연못에서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자, 이제 일이 끝났다고 해서 과연 이것이 성공을 거둘것인가? 1961 년 11 월 5 일 주일날 아침 일부러 뉴우요크에서 오신 노오만 빈센트 1 일
목사님이 새로 지은 우리 교회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피일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섰을 때 밖의 주차장은 2 천명 이상이 타고 있는 5 백대의 자동차로 꽉 메워져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천명이 넘는 교인들이 호화롭게 꾸며진 가족석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성가대는 "거룩, 거룩, 거룩" 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단추를 누르자 25 피트 높이의 유리벽이 마치 천사의 날개처럼 강단 양편으로 천천히 갈라지면서 강단에 서 있는 목사님은 교회 안팎에서 예배 드리는 모든 사람들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이었습니다. 아주 아름답게 그 곳에 모였던 4 천명이 넘는 교인들은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성공이라고, 몇 사람의 적극적 사고주의자들이 적극적 사고를 시험에서 그것의 실재를 증명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는 5 명의 목사들이 일하고 있으며, 매주 6 천명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자산은 1 억 5
천만 달러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증축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무엇을 증명합니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적극적 사고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로지 그레이 부인처럼 아무 쓸모없이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 쓰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것들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꼭 지키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것을 완성하시리라" 는 약속을.
당신은 제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낍니까? 나는 당신이 내 경험을 듣고 당신도 당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면 합니다. 만약 당신에게 겨자 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다면, 이 산을 보고 움직이라고 말해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입니까? 아마 아니겠지요. 사업체? 가정? 결혼? 명예? 참으로 보람 있는 인생? 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첫 단계가 그 부정적 강박관념을 버리는 것입니다.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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