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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전리 하촌마을
이 마을은 행정적으로는 용전리 용암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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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면
산내면의 지세와 연혁
밀양시의 동북쪽 변두리에 위치하며 경북 청도군과 경남 울주군 등 세 광역시.도와 세 시.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중의 별구(別區)이다
부경(府境)의 태산(泰山)이라고 일러오는 재악산(載岳山 사자봉 獅子峰, 해발 1189.2m) 줄기가 동남쪽으로 분수령을 이루어 울주군 상북면과 단장면 구천리와 각각 경계를 지었고,
그 북쪽에 영남알프스의 주산(主山)인 가지산(迦智山, 실혜산 實惠山, 천화산 穿火山, 해발 1240m)이 우뚝 솟아 세 광역시.도와 세 시.군의 경계를 이루면서 앞 가슴에 백운산(白雲山, 해발 885m)을 품고 있다
또 정북(正北)에는 운문산(雲門山 해발1188m, 함화산 含花山, 호거산虎踞山 , 화망산 花忘山)이 동서로 길게 뻗은 능선을 사이에 두고 경북 청도군 운문면과 도계(道界)를 이루었고, 그 서쪽에 억산(億山 해발 985m)을 거느리고, 다시 구만산(九萬山, 해발 785m)과 용암봉(龍岩峰, 해발 686m) 산줄기는 상동면, 산외면과 면계(面界)를 이루었고
남쪽에는 정각산(正覺山, 해발 859m)이 단장면과 경계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사방에 1000m를 전후하는 태산 준령으로 둘러싸인 이 곳은 다만 서남쪽에 길게 입구가 트이어 “호리병 속의 별천지 즉, 호리건곤(壺裏乾坤)”이라고 일컬었다.
또한 동북쪽 분수령인 백운산에서 발원한 물이 산내천이되어 젖줄을 이루었고, 그 하천을 중심으로 좌우의 분지에는 옹기종기 아담한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물 좋고 반석 좋고 토지가 비옥하다고 하여 “삼락(三樂)의 가경(佳境)”이라고도 했다
산내면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 17세기 초에 면방(面坊)의 구역을 정비할 때 중동면(中東面, 산내면, 산외면, 단장면)에 편입되었다. 당시에 이웃한 상동면과 하동면(삼랑진읍)의 사이에 있다고 하여 밀양부(밀양도호부)에서 보아서 중동면(中東面)이라 했다.
즉, 중동면은 지금의 산내, 산외, 단장면을 포함하는 넓은 구역이었으나, 산내면에 해당하는 방리(坊里)로는 천화리(穿火里), 벌완(伐宛), 실혜촌(實惠村), 석동(石洞) 뿐이었다.
그 때만해도 언양(彦陽) 고을과 경계를 이룬 천화령(穿火嶺 석남령 石南嶺)의 아래에 취락이 몰려 있었으며, 그 뒤 새로운 방리(坊里)가 생겨 18세기 말에는 오치리(烏峙里), 소고례리(所古禮里), 가라리(加羅里), 용천리(龍泉里), 적암리(赤巖里), 원당리(院堂里), 양지리(陽地里), 음지리(陰地里), 가좌리(加佐里), 양송정리(養松亭里), 미라리(美羅里), 임고정리(林高亭里), 발례동리(發禮洞里) 같은 여러 마을이 면내(面內) 전역(全域)에 자리잡았다
18세기초에는 다시 중동면(中東면)에서 단장면(丹場面)이 분할되어 떨어져 나가고, 지금의 산내와 산외를 합친 구역을 천화면(穿火面)이라 개칭했는데 이는 애초에 이 면의 발상과 중심지가 천화령(穿火嶺, = 석남령 石南嶺)의 아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천화(穿火)라는 지명은 일반적으로 화산 지대의 분화구라는 뜻으로 불이 땅을 뚫고 나온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지로 이 지대는 지질학상으로도 안산암(安山岩) 계통의 화강석(花崗石)이 널리 분포되어 화산 지질임을 알 수 있고, “시례호박소” 등의 산상(山上)의 소택지(沼澤地)가 그 분화구에 해당된다고 한다.
1860년 경에 면방(面坊)을 개편하면서 종래의 중동면(中東面)인 천화면과 단장면을 통틀어 다시 중초동, 중이동, 중삼동 등 세 면(面)으로 분할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천화면(穿火面)은 중초동면(中初同面)과 중이동면(中二同面)으로 나누어 단장면을 중삼동면으로 일시 명칭을 바꾸었으며,
1880년 경에는 다시 중초동면과 중이동면을 폐합하여 천화면으로 환원하였으며 그 경계는 서남쪽 입구의 높은 산(山)인 (乘鶴山)과 백암산(白岩山), 동천의 협곡의 안쪽으로 삼았고, 중삼동면(中三同面)은 다시 단장면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천화면을 또 분할하여 서남쪽 입구의 높은 산을 경계로 하여 그 바깥쪽에 해당하는 중이동면(中二同面)을 천화산외면(穿火山外面)이라고 했고, 안 쪽에 있었던 중초동면(中初同面)을 천화산내면(穿火山內面)이라고 했다.
이 때 천화산내면의 취락으로는 오치(烏峙), 소고(所古), 벌완(伐宛), 노라(蘆羅), 용천(龍泉), 적암(赤巖), 원당(阮堂), 양지(陽地), 음지(陰地), 가좌(加佐), 송포(松圃), 미라(美羅), 임고정(林古亭), 발례동(發禮洞) 등 14개 방리(坊里)로서 종래의 천화리(穿火里). 실혜촌(實惠村) 등 중심 취락의 이름이 없어진 반면, 방리의 표기가 다소 변경되었다
1914년 전국적으로 일제히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종전의 자연마을을 통합하여 지금과 같이 용전(龍田), 임고(臨皐), 송백(松白), 봉의(鳳儀), 원서(阮西), 가인(佳仁), 삼양(三陽), 남명리(南明里) 등 8개리로서 법정리를 삼았다.
1918년에 이르러 천화산내면이 산내면으로 개칭되었고,
1965년에 8개 법정리에 소속된 자연마을을 조정하여 23개 행정리로 재편성하였다
이; 면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비허선사(備虛禪師)가 석굴(石窟, 지금의 석골사)에서 수도하며 운문산의 보양(寶壤)과 서로 왕래 했다는 사실이 있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초적(草賊)의 괴수(魁首) 효심(孝心)의 항거지(抗拒地)로서 밀성(密城)의 저전촌(楮田村, 지금의 용전리)이 있다” 했으며
구밀주지(舊密州誌)에는 임진왜란의 전적지로로서 석동(石洞, 원서리 석골마을)과 대암(臺岩巖 ,삼락정 부근)이 소개되어 있다
또 면내에는 忠.孝.烈의 삼강(三綱)을 높이 숭상하기 위하여 세운 탁삼재(卓三齋)를 비롯한 고가(古家)의 정각(亭閣) 등 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시례호박소, 얼음골, 이목굴, 함화산(= 운문산 = 호거산 = 화망산), 구만폭포 등의 경승지도 있는데, 특히 점필재 김선생의 구연시(臼淵詩)와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의 석골사시(石骨寺詩)가 유명하다
산내면 대부분의 지역은 높은 일교차의 기후 조건으로 주 재배 작물은 사과이며, 얼음골사과 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옛날의 천봉답과 동천변 논의 대부분이 사과밭으로 변하였다. 얼음골사과는 맛이 좋기로 전국적으로 명성이 나 있다
1985년에는 고을의 숙망이었던 밀양- 언양간 산업관광도로가 2차선의 포장국도로서 개통되어 오지의 산간벽지였던 산내면이 이제는 동북경남의 교통요지이며, 관광 명소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으며,
2008년 4월 24일에는
우리나라 국도에서 가장 긴 가지산터널이 울산 - 안양간 24번 국도상인 가지산에 개통되고, “밀양 - 언양”간 국도가 거의 확포장 및 개량됨에 따라, 울산까지 약 30분의 시간이 단축되어 산내면과 밀양시 전체의 발전에 더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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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전리(龍田리)
밀양 시내에서 언양으로 가는 24번 국도를 따라 들어가면 산내면의 입구에 있는 첫 동리이다. 서쪽으로 우뚝 솟은 용암봉(龍岩峰)을 배산(背山)으로 하여 동쪽을 향해 앉았는데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면서 용암(龍岩), 저전(楮田), 오치(烏峙) 마을의 지대가 차례로 점차 높아지는 산중 마을이다.
동쪽에는 임고리와 이웃하고, 서쪽은 용암봉을 분수령으로 상동면 신곡리, 도곡리와 경계를 지었으며, 남쪽에는 산외면의 희곡리와 면계를 이루었고, 북쪽으로 오티고개(오치 烏峙)를 넘어 경북 청도군 매전면과 대치하였다
조선조 말기부터 이 동리는 오치리, 저전리, 용천리로써 가각 독립된 방리(坊里)를 형성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세 마을을 합쳐서 용천(龍泉)과 저전(楮田)의 동명에서 한 자(字)씩 취하여 용전리(龍田里)라는 법정리를 구성하였다.
이 동리의 경작지는 주로 용암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동천(東川) 가에 있으며, 저전과 오치 마을 고지대에도 전답이 산재해 있다. 오치 마을에는 10여년 전에 경지정리를 한 산중(山中) 고지대의 벌판이 있다.
이 마을의 주 재배 작물은 사과이며, 얼음골사과 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또 용암 마을 동구밖에 있는 절벽에 동출한 암대(巖臺)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의 유적지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부인(府人 = 밀양도호부의 사람들)들이 이 곳에 집결하여 왜적을 막았다는 전쟁더인데, 후일에 이 곳 사람들이 삼락정(三樂亭)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소요처(놀이터 등)로 삼았으나 지금은 국도 공사 등으로 그 지형이 변경되었다
1965년 행정리를 조정하면서 용암(龍岩)의 상.하촌을 용전 일동(一洞)으로 하고, 저전을 이동(二洞)으로 했으며, 삼동(三洞)에는 오치 마을을 편입시켰다
지금은 용전리의 용암 하촌 마을 앞 및 저전 본동 마을 앞의 24번 국도가 4차선으로 개량되고, 저전 마을 입구인 용전교 옆과 용암 마을의 하촌 입구에 국도 24호선과 연결되는 국도 IC가 만들어져 교통이 매우 편리해 졌다
(1) 용암(龍岩, 龍泉)
조선 후기에 용천리라는 방리에 소속된 마을이다. 용이 사는 굴샘(窟泉)이 있었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인데, 지금의 용암 상촌, 용암 하촌, 장승백이, 새각단, 한골(大谷) 등이 모두 이 방리(坊里)에 속하였다
용암(龍岩)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에 있는 “용바위”로 인하여 생긴 것이며, 산 이름을 용암봉(龍岩峰), 동구 밖의 지명을 용바위모랭이라고 한다. 행정상으로는 용암 一洞에 속하며 상촌과 하촌으로 나누어져 있다.
조선조 후기 이래 수원(水原) 백씨(白氏)가 터를 잡아 살아 왔으며 백성기(白成基)가 지은 긍?모재(肯?慕齋)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근대에 일직 손씨 일문이 다죽리에서 이거(移居)하여 살고 있는데 1943년에 그 후손들이 취운재(醉雲齋) 손건영(孫建永)과 그 아들 삼형재를 추모하기 위하여 삼우당(三友堂)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이 마을의 주 재배 작물은 사과이며, 얼음골사과 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옛날의 천봉답과 동천변 논의 대부분이 사과밭으로 변하였다
장승뱅이(長?방, 장승배기)
용암 하촌 동내 어구의 지명이다, 옛날 이 곳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가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새긴 두 개의 장승이 서 있었다. 해방 직후에 백모(白某) 라는 동민이 본래의 장승을 철거한 후 재화(災禍)를 당하고 돌로 된 장승을 새로 세웠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새각단(신담 신땀 新埮)
용암 하촌가 저전 사이에 있는 담 이름이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골(大谷)
용암 마을 안에 있는 마을로서 널은 골짜기로 된 땀이다. 한골약수터라는 샘이 있는데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구한말에 도지부대신을 지낸 정병하(鄭秉夏)가 태어난 마을이다. 정병하는 본래 이 곳에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어에 능통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며, 밀양부사(密陽府使)를 거쳐 도지부대신(度支部大臣)에 이르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때 사정을 미리 알고도 고변을 하지 안았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배암등(蛇嶝)
용암 마을 뒤편에 있는 산등성이의 이름이다. 뱀이 꿈틀거리고 있는 형상과 같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개구리봉
용암 마을 새각단의 앞 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개구리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남산
용암 마을 상촌의 남쪽에 잇는 산이다. 마을의 안산(案山)에 해당한다
뒤실재(道谷嶺)
용암 마을 상촌에서 상동면 도곡리로 너머가는 고개 이름이다. 옛날 밀양 큰 장에(유천장) 가는 길목이다
깻들(호마평 胡麻坪)
용암 마을 하촌의 동쪽에 있는 들 이름이다. 들 가운데 칼치배미라는 비옥한 논이 있어 유명하다. 참깨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광대방우(광대암)
용암 마을 용암봉 동쪽에 있는 바위인데 넓고 크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또 이 바위가 있는 골짜기를 광대방우골이라 한다
꽃밭등(花田嶝)
용암 마을 하촌에 있는 등서이로 봄에 진달래가 많이 피어 화려한 꽃밭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감태방우
용암 마을 한골에 있는 바위의 이름인데 근처에 비틀바위와 말바위 등 이름 잇는 바위가 많다. 바위 모양이 감투를 쓴 것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금방우(金岩)
용암 마을 하촌에 햇빛이 나면 반짝거린다고 하여 금방우라고 했다. 이 바위가 있는 골짜기를 금방우골이라 한다
남산양달
용암 마을 상촌 남쪽에 있는 들판이름이다. 남산 아래에 양지 바른 들판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땅개(당거리 堂街)
용암 하촌과 저전 사이에 있는 들판이다. 옛날에 당집과 당나무가 있어서 당거리 또는 땅개라고 했다
대정네소
용암 한골 마을 앞에 있는 소(沼) 이름이다. 근처에 대장간이 있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말바우(마암)
용암 마을 한골에 있는 바위 이름인데 말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말자리들(末坪)
요암 하촌의 동쪽에 잇는 들 이름이다. 마을의 맨 끝에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망태배미(網太野)
용암 하촌의 동북쪽에 있는 큰들 가운데의 논이다. 논배미의 형상이 망태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내동고개(內洞峴)
요암 하촌의 숯굴등에 있는 고개이름이다. 안동네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딘청음달(後崖陰達)
용암 마을 하촌의 물새미뻔치 북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뒤쪽에 있는 층덤이 음달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단청은 뒤쪽 층덤이며 단칭이라고도 한다
똥메등(독뫼등, 獨山嶝)
용암 마을 남산의 서쪽에 잇는 산등성이이다. 독뫼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말방우건너(馬岩越便)
용암 마을 한골에 있는 말방우의 건너편 골짜기다. 살때방우 양달의 북쪽에 있다
막등(莫嶝)
용암 마을 하촌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 이름이다. 마을의 막다른 곳에 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물새미뻔치
용암 마을 하촌의 서남쪽에 잇는 산 이름이다. 물새미가 잇는 산비탈이라는 뜻으로 생긴 지명이다
꿈들(穴坪)
용암 마을 하촌에 잇는 들 이름이다. 깻들의 서쪽에 잇는데 구멍들에서 나온 말이다
두들개
용암 마을 하촌의 꿈들 서쪽에 잇는 들 이름인데 보를 만들어 막은 두이 잇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보둣걸
용암 마을 드들개의 북쪽에 잇는 들 이름이다. 보를 막은 둑이 있었다고 하여 보둑걸 또는 보둣걸이라 한다
부처배기
용암 마을 보둣걸의 서쪽에 잇는 들 이름이다. 근처에 있는 큰 바위에 부처를 새겼다고 하여 부처가 박혀 있는 들판이라 불렀다
비틀방우
용암 마을 한골에 있는 바위 이름인데 베틀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살때(箭竹) 방우 양달
용암 마을 용암봉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큰바위 근처에 화살대가 나는 대밭이 있었다. 햇살이 늘 비치는 곳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이다
새들
용암 마을 하촌의 동남쪽에 있는 새로 생긴 들 이름이다
숯굴등
용암 마을 딘청음달의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옛날 이 곳에 숯을 굽는 굴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시기방우
용암 마을 한골의 베틀바위 맞은편에 잇는 바위 이름인데 석이9石耳)를 채취하던 곳이라 하여 돌옷바위 또는 석이바위라고도 한다
움방앗등
용암 마을 하촌의 동남쪽에 잇는 산등성이이다. 지대가 움푹 패인 곳에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움방앗등이라고 했다
중섬들
용암 마을 하촌의 동남족에 잇는 들 이름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들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큰들
용암 마을 하촌의 동북쪽에 있는 ef 이름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들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풀등
용암 마을 남쪽에 잇는 산등성이다 옛날부터 퇴비용 풀을 많이 채취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합달양달
용암 마을 하촌의 동남쪽에 잇는 산비탈 이름이다. 양지바른 산비탈에 많이 나는 합다리나무가 이 곳에 많다
하촌못
용암 마을 하촌에 있는 못 이름이다. 농업 용수를 모아두는 저수지인데 옛날부터 있어 온 못이다
용전교
용암 마을 하촌의 모시빝골 동남쪽에 있는 다리 이름이다. 용암 마을 에 있다고 하여 용암교라고도 1938년도에 건설했다
(2) 저전동(저전 楮田, 저전 苧田)
■ 저전 본동 (24번 국도 용전교 바로 위 마을)
용암과 오치 마을의 중간 지점에 있는 자연 마을인데, 행정상으로는 용전 2동에 속한다. 지대가 높은 산 위에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올망졸망하게 전답이 산재해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본 땀의 저전을 비롯하여 터실(허곡 墟谷)과 골안(谷內) 등 세 땀(埮)으로 구성되었다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1170 ~ 1197) 대표적인 초적(草賊)의 괴수(魁首)인 효심(孝心)의 마지막 항전지(抗戰地)로서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밀양지 密陽誌 489페이지 저전촌지 楮田村址 참조)
(주) 레나 : "효심의 마지막 항전지 는 오치 마을 입구에서부터 저전 본동 마을 입구에 이르는 전 구간"에서 관군과 치열한 항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효심이 저전에서 전사하기 전에, 이미 오치 마을에서 대규모 항전이 있었으며
이의 증거로 밀양지명고는
오치마을 편에서 오치 마을의 앞산을 감여가(勘輿家)의 말을 인용하여
"오두작시(烏頭嚼屍)"라고 우회적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密陽誌 489페이지 저전촌지 楮田村址" 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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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농민군 효심(孝心) 장군 전적지(戰迹地) 천지(天池)가 기록된
이건형(李建衡) 초전의고(草田疑考) “저전촌지(楮田村址)”
(저전은)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를 구성하는 한 산중 山中 촌락이다
고려 명종대의 대표적인 초적(草賊)의 괴수 효심(孝心)의 마지막 항전지(抗戰地)이며 관군(官軍)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전적지(戰迹地)이다 (이건형 李建衡 초전의고草田疑考에 依함)
고려는 무신(武臣)정권이 성립된 이후 문민체제 대신에 무인(武人)들에 의한 독제체제가 등장하였다
무력적인 권력기반은 토지의 국유원칙을 무너뜨리고 농민들의 생활을 궁핍(窮乏)으로 몰아넣었으며, 정권의 유지 장악을 위하여 취해진 그들의 강권정치는 종전의 무신귀족정치보다 더 포악한 것이 되었다. 무인들은 비록 정권을 잡기는 하였으나 내부의 분열과 반목으로 지방의 구석구석까지는 침투하지는 못하였다.
지배질서의 문란은 곳곳에서 농민봉기를 불러 일어켰고, 천민계급의 반란도 잇따랐다. 그러던 중 1192년(明宗22년)을 전후하여 경상, 전라, 충청도 일대에 흉년이 들자 기민(飢民)의 속출을 계기로 민심은 더욱 동요되고 각지의 망명(亡命) 초적(草賊) 집단들도 유랑(流浪) 농민과 합세하여 치열한 반란 봉기를 유발하였다
초적들 중에서도 가장 맹렬한 것이 운문(雲門, 경북 청도)에 웅거(雄據)한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을 근거로 한 효심(孝心)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유민(流民)을 규합하여 주현(州縣)을 약탈하고 관군과도 정면 충돌할 수 있는 강력한 무력집단이었다
1193년(명종23년) 7월에 조정에서는 대장군(大將軍) 전존걸(全存傑)에 명하여 장군 이지순[李至純, 집권자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등을 인솔하여 남도(南道)의 초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지순이 도리어 적군에 내응하여 관군은 일대 패배를 당하고 책임상 전존걸은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11월에 상장군(上將軍) 최인(崔仁)을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로 삼고 대장군(大將軍) 고용지(高湧之), 장군(將軍) 김존인(金存仁).사양주(史良柱) 등을 인솔하여 남방(南方)의 초적을 정토(征討)케 한 결과, 이듬해인 1194년(명종24년) 2월에 운문의 초적 수령인 김사미(金沙彌)가 투항하여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운문의 초적이 항복한 후에도 관군의 토벌(討伐)은 진행되었으나 또 한 사람의 괴수(魁首)인 초전의 효심은 좀처럼 투항하지 아니하고 장군 사양주는 그들의 도당(徒黨)에게 전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관군은 계속적인 토벌을 진행하여 같은 해 4월 7일에 이 곳 저전촌에서 반적(叛賊)을 완전 포위하고 일대 격전을 벌인 결과 초적 7천여명을 사상시키고 많은 병기와 우마(牛馬)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밀성(密城) 저전촌(楮田村)에서 관군에 토벌된 초적은 대개가 효심 배하(配下)의 민중군사(民衆軍士)로서 7천여명이 살상되었다는 기록은 이 전투가 얼마나 격심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아마도 효심은 이에 앞서 김사미의 항복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자기의 군세를 총동원하는 한편 운문의 잔당들까지 합세하여 관군에 대한 최후의 항전(抗戰)을 기도(企圖)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전을 계기로 효심의 군세는 하루아침에 꺾이어 이해 8월에는 일당인 이순(李純)을 관군에 보내어 항복을 청하였고, 4개월만인 12월 7일에 더디어 효심이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에 체포됨으로서 남방 초적의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으니, 관군이 토벌을 시작한지 전후 2년이 걸린 셈이다
평소에 전투훈련이 없던 유망(流亡) 농민들이 2년간이나 관군을 상대로 싸워서 조정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군사집단이 얼마나 큰 것이고, 그 항전이 얼마나 결사적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또 그로 인하여 당시 위정자들에게 일대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된 것은 역사적으로도 훌륭한 교훈을 남긴 사건이라 하겠다
김사미의 운문산과 효심의 저전촌이 초적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으로 관군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천험적(天險的) 요새(要塞)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 두 곳의 요새는 당시 경주.울산.언양.김해 등지를 연결하는 교통로의 간도(間道)로서 초적들이 많은 도당을 거느리고 활동하기에 여러가지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명종23년 추(秋) 칠월 조(條)에 시남적봉기그극(時南賊蜂起其劇) 김사미운문효심초전(金沙彌雲門 孝心據草田) 질(소?)취망명표략주현(嘯聚亡命標掠州縣)이라고 하여 초전(草田)을 효심의 웅거지(雄據地)로 기록하고 있는 바, 이 초전은 현재 그 소재지가 확인되지 않는다. 경북 성주(星州) 초전설(草田說), 울산설(蔚山說)이 있고, 밀양(密陽) 화봉리설(華封里說)도 있다. 초전(草田)과 저전(楮田)의 발음 중 의사점(疑似點)이 지명 혼동의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이곳 저전촌 서쪽은 상동면 도곡리(道谷里)와 접경(接境)하고 있는데 도덕령(道德嶺)이라는 산이 분계(分界)를 이루고 있다. 최근에 발간된 밀주지(密州誌)에는 도덕령상세칭천지주파랙십삼간구폐위경지동인화(道德嶺上世稱天池周八白十三間久廢爲耕地洞人貨 )오래 전에 동인(洞人)이 돈을 들여 천지를 폐하고 경작지로 했다 지이축제저수진산상영구(之而築堤儲水眞山上靈區)한 기록이 있다. 도덕령 위에 천지(天池)라는 못이 있어 그 둘레가 813간이나 되었으나 오래 전에 폐지하여 경작지로 삼았다는 것과 그 후 동인이 그곳에 저수지를 만들어 산상(山上)의 영구(靈區)로 불리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효심이 수많은 유랑 농민을 통솔 웅거하여 관군에 항전한 곳이라는 것을 상상할 때 매우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저전촌 자체도 비교적 지대가 높은 산중 마을이지만 이웃에 더욱 지세가 험한 산상에 둘레 팔백간(약1400m)이 넘는 천연적天然的인 못이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 지형이 하나의 요새적(要塞的)인 철옹성(鐵甕城)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도덕령道德嶺(도덕고개), 도덕지道德池(天池의 이명異名)와 같은 지명도 그것이 초전골 도적을 뜻하는 도덕령 도적못에서 기인하여 한자음으로 표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거니와 산상의 영구(신령스러운 구역)로 까지 기록된 이러한 이색적인 산령과 저전촌 일대에 대한 역사유적 연구가 긴요한 것 같다
참고 :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전적지조(戰績地條)에는
초전재화봉이고려명종계축효심반거차지(草田在華封里高麗明宗癸丑孝心叛據此地) 여운문적김사미호응(與雲門賊金沙彌呼應) 남로병마사격지참칠천여급(南路兵馬使擊之斬七千餘級)이라는 기록이 있어 지금의 무안면 화봉리에 있는 초전草田 마을을 효심의 반란 본거지로 보고, 1193년(명종23년)과 1194년(명종24년) 두 차례의 토벌사건의 현장으로서 결부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대규모의 초적집단이 둔소屯所로 삼아 막강한 관군과 싸울만한 지형적 조건이 되지못할 뿐 아니라 7천여급의 초적의 목을 베었다는 1194년 4월 전투현장에 대하여는 고려사 명종24년조(條)에 밀성(密城 )저전촌(楮田村)이라는 명백한 기록이 있는만큼 지금의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龍田里)가 정확한 것이다
그러므로 화봉리 초전마을의 효심 반거지설(叛據地設)은 더욱 확실한 출전(出典)과 앞으로의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출처 : 밀양문화원 밀양지(密陽誌) 편찬위원회 편(編) 발행 밀주지(密州誌) 489P ~ 491P
1987년 초판 발행, 2006.4.20 재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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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전(楮田) 이란 옛날부터 이 일대에 닥나무(저 楮)가 많다고 하여 생긴 지명인데, 저전(苧田)으로 표기했다
임진왜란 때 피난지로서 취락이 형성된 후 조선조 말기에 가선(嘉善) 양진원(楊鎭元)과 오위장(五衛將) 양수근(楊守根)이 입촌하여 청주(淸州) 양씨(楊氏)의 터전이 되었다
현재는 마을 바로 앞 용전교 옆에는 국도24호선이 개량되어 마을의 진출입 도로가 생겨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 골안 마을(谷內, 안골)
(저전 본동 위의 오치마을 가는 길목)
저전 마을회관이 있는 저전 본동의 서쪽 위의 골안 마을(지대가 높은 마을)은 옛날 주택은 고풍스럽게 하나둘씩 단장되어 산촌의 깊은 향수를 느끼게 하고, 또 옛날 주택 속에 현대식 주택들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아름다운 산촌 마을로 변해가고 있다
이 안 마을에서 오치 마을로 임도가 확장 및 일부 구간에 포장이 되어, 기존 송백 마을에서 오치로 오가는 오치마을의 진출입로와 유사한 새로운 오치마을의 진출입로가 되었다
■ 골안 마을 (밀양지명고의 기록 내용)
저전의 서쪽 용암봉 아래에 있는 깊숙한 골짜기 이름인데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옛날에는 저전 안골이라 하여 몇 채의 민가가 있었다고 한다
터실(허곡 墟谷)
저전동의 거건ㄴ편에 잇는 지명으로 지금은 무논이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던 땀이다. 터실이란 집터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그 흔적이 산재해 있다
내리소(下流沼)
저전 마을 터실 안쪽에 잇는 웅덩이를 이름이다. 웅덩이의 물이 그 아래쪽에 있는 대정소네로 내려 간다고 하여 내리소 또는 니리소라고도 한다
물청골(물칭이골, 水淸谷)
저전 마을 터실 뒤쪽에 있는 골짜기의 지명이다. 항상 맑은 물이 골짜기 안에 청청하게 흘러간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치 벌판에서 논물 등이 넘쳐 내려와 물이 맑지 못하다. 이 골짜기의 맨 위 쪽은 오치 마을의 맨 끝 부분에 해당하는데 새로운 농가 몇 호가 들어서 사과농사를 짓고 있고, 그 주변 임야에는 밀양시 산림녹지과에서 유실수를 재배하고 있다
성제방우(兄弟岩)
저전 마을에 잇는 큰 바위의 이름인데 지금은 바위가 없어지고 지명만 남았다. 큰 바위 두 개가 형제처럼 다장하게 서 있엇으나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바위가 무너져 버렷다
딱개들(딱밭들, 저전평 楮田坪)
자전 마을 앞에 있는 들 이름인데 옛날에는 이 곳에 민가가 있었다고 한다. 저전이 닥밭이므로 된소리 발음이 되어 딱밭으로 변햇고, 다시 딱개들이 되었다
불선바위(燈岩)
저전 마을에서 서북쪽으로 100m 지점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옛날부터 신령한 바위로 알려져 무녀들이 이 바위 위에 불을 켜고 치성을 드린다고 하여 불선바위라 하였다
절터골(사허곡 寺墟谷)
저전 마을 골안에서 약 100m 북쪽에 있는 옛날의 절터이다. 절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옛날에 빈대가 창궐하여 절이 망했는데 지금도 이 근처의 돌바닥에는 빈대 자국이 있다고 한다
묵칠소(墨漆沼)
저전 마을 앞에 있는 옛날 정자 터이다. 본래 웅덩이가 있엇으나 지금은 혼적조차 없고 지명만 전해 온다. 엣날 이 정자에는 공부한느선비들이 많앗는데 종이를 아끼느라고 근처바위에다 붓글 연습을 햇다. 그러다가 거센 소낙비가 내리면 바위의 먹물이 씻겨 흘러내린 웅덩이의 물이 칠빛과 같이 변했다고 해서 묵칠소(墨漆沼) 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무수등(무소등, 舞유?嶝, 舞雲嶝)
저전 마을 앞에 잇는 산등성이의 이름이다. 지형이 소의 등처럼 생겼다 하여 무소등이라고 한다는 유래가 있고, 가뭄이 들 때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무녀들이 춤을 춘다고 하여 무유등 또는 무운등이라 한다는 일설도 있다.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이유는 비를 내리게 하는 용이 용암봉 아래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천제봉(天祭峰)
저전 마을 무유등의 위 쪽 산봉ㅇ우리를 가리키는 이름인데 가뭄이 들면 동민들이 이 산봉우리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불을 질러 하늘에 고한다고 하여 천제봉이라 한다
모시밭골(苧田谷)
저전 마을의 별칭으로 楮田을 苧田으로 표기하므로서 모시밭골이 된 것이다. 또 하촌의 북쪽에 모시를 심은 밭이 있었다고 하여 모시밭골이 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땅들(地坪)
저전 마을 앞에 있는 들 이름이다. 평평한 땅이 귀하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국도변 버스 정차장 주변이다
싱싱골(싱싱이골)
저전 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물이 항상 싱싱하게 흘러가는 골짜기라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3) 오태 마을(오티, 오치, 烏峙)
용암 마을에서 북쪽으로 저전 마을과 저전 안쪽의 골안 마을을 지나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밀양시 상동면 신곡리 마을과 경북 청도군 매전면의 경계 지점에 있는 오태는 밀양에서는 산상의 제일 높은 분지의 마을이다
오태 마을의 서쪽에는 상동면 신곡리에 소속된 오곡(烏谷) 이라는 마을이 있고, 북쪽에 위치한 배산(背山)을 오두산(烏頭山)이라고 하며, 서북쪽 매전면 경계 안에는 오례산성(烏禮山城)이 자리잡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일대의 지명이 까마귀와 연관된 것이 많은 데, 오태고개의 산봉우리 모양이 까마귀가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생긴 것이라고 한다. 옛날 이 곳을 답사한 감여가(堪輿家)들은 마을 앞에 있는 산을 “주검의 뫼” 곧 시산(屍山)이라 하였고, 까마귀가 그 시체를 쪼아먹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오두작시(烏頭嚼屍)”의 명당자리로 꼽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는 자족한 부자가 끊임없이 나왔고, 천석(千石) 지기의 최씨성(崔氏姓)을 가진 장자(長子)가 살았다고 한다
18세기 말에는 이미 중동면(中東面, 산내면의 옛 명칭) 오치리(烏峙里)로써 방리(坊里)가 구성되었고, 현재는 행정상으로 용전(龍田) 3동에 속한다
조선조 인조(仁祖) 연간에 충순위(忠順衛) 서만백(徐萬伯)이 이 곳에 입향한 후 달성(達城) 서씨(徐氏) 일문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고, 1940년에는 후손들이 입향조의 묘소 아래에다 경모재(景慕齋)를 건립하여 추모(追慕)하고 있다
■ 산상(山上)의 별천지(別天地) 오치(烏峙) 마을
밀양에서 제일 높은 해발 400m가 넘는 산 중 분지 속에 마을이 있고
이 높은 산 속에 제법 큰 농업용 저수지가 있고,
잘 정비된(경지정리가 된) 넓은 들판이 있고
20여 호의 아름답고 정겨운 주택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마을의 북쪽에 높은 산이 있고, 마을이 전부 남향으로 되어 있어
겨울에도 햇빛이 많이 내리쬐어 따뜻하며
겨울에는 온 천지가 설국(雪國)으로 변하고
옛 풍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벼와 밭작물을 재배하던 넓은 들판은 대부분 사과밭으로 변하였고
가을이 되면 온 마을이 붉은 사과 천지로 변한다
특히 밀양에서 제일 맛잇는 얼음골사과를 생산하는 인심 좋은 마을이다
수구목(수구항 水口項)
오치의 남쪽 1km 지점에 잇는 입구로서, 용전리 저전 골안 및 저전 본동 마을로 통하는 길목이며
동서쪽으로 뻗어 있는 산의 능선이 마을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마을 밖으로 흐르는 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당고개(堂峴, 내동고개)
오치 마을에서 경북 청도군 매전면 내동으로 통하는 고개 이름이다. 옛날에는 고개 아래에 당집이 있었다고 하여 “당고개”라 했으며, 내동(內洞)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내동고개”라 했다
현재 이 고개는 임도가 삼거리로 연결되어, 청도 매전면 내동과 오치 마을, 상동면 신곡리로 통한다
등산객들이 이 삼거리를 “오치령(烏峙嶺)”으로 부르고 있으며, 운문지맥 능선상의 주요한 등산로로서,
■ 北으로는 구만계곡과 구만산, 억산, 운문산을 경유하여 가지산까지 등산로가 이어져 있으며
■ 西北으로는 신곡마을 뒷산인 종지봉에 이르고
■ 용암봉에서 서북으로는 소천봉(솔방 마을 뒷산)에 이르고
■ 南으로는 용암봉과 백암산, 디실재, 못재 및 천지, 중산, 낙하산(낙화산), 보두산, 비학산으로 이어져
■ 밀양시 산외면 남기리 기회 마을인
55번 고속도로 및 24번 국도, 25번 국도가 서로 만나는
긴늪 삼거리에 바로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