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회 지난날을 글로 쓰는 지금 손가락이 떨린다
오늘은 ‘수난에 찼던 내 운명의 역사를 올립니다’라는 소향씨의 수기를 들려드리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고난의 행군시기 우리는 장군님 한 사람만을 믿었다
배급소 문 닫을 때 언젠가는 다시 열릴 것이라고 믿었고, 농장에서 계획미달이라고 분배 몫이 잘릴 때에도 다음해에는 풍년이 들겠지 기다렸다.
하지만 굳게 닫힌 배급소 문이 가끔가다 열리면 그 앞은 아수라장,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마당이었고, 농장의 탈곡장마다 분배 타는 날이면 서로 밀치고 닥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배급소 문이 닫히던 1990년대 초에 우리 아버지는 장천공(장벽의 모든 층을 관통하는 구멍이 생기는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병명은 위천공이라고 해서 위부터 잘랐지만, 결국은 위는 멀쩡한 상태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뒤늦게 소장에서 터진 자국을 발견하고 수술을 했으나 이미 갈라진 배는 실로 꿰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 아버지는 큰 병도 아닌 것으로 수술대의 실험용이 되고 말았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북한에서도 환자가 나오면 그 가족은 내릿길을 걸어야 했다.
더욱이 부실한 병원설비와 치료로 우리 집 경제는 살아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혼 혼수품으로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싸구려로 시장통에 내다 팔렸고, 가정은 결국 서발 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 하나 없이 되었다.
3차에 걸치는 대수술에 아버지도 지쳤고 나도 지쳤다. 7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뒤로 변을 못 보기에 배꼽으로 볼일을 보아야 했던 아버지, 그나마 하루 한 끼 차례지는 밥도 밥이라고 먹다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아버지의 변으로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고통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병으로 인한 가정의 파산으로 인해 언니, 오빠가 한시에 머리가 돌아버렸다. 비록 돌아버린 이유가 정신병이라고 간단하게 말하면 되겠지만, 유전으로 볼 때 정신병자 하나 없는 집안에 두 사람의 정신병자가 나온 것을 무엇으로 해석하면 될까?
잊고 살던 지난날을 글로 쓰는 지금 나는 손가락이 떨린다. 정말 중국생활 10여년에 한국 생활 비록 1년이지만 아직 한 번도 가족에게도 내비치지 못한 가슴 아픈 사연 때문에 또 다시 내 눈에 눈물이 흐른다.
떨리는 이 분노 어디에 토해야 하는가. 기아와 굶주림은 이제는 우리의 머리 위에, 아니 정확히는 내 머리 위에 떨어졌다. 병마로 고통하시는 아버지는 의식이 없으니 집안실정 감감 모른다. 정신 나간 오빠와 언니도 세상이 이제는 녹두알만하다.
농장에 나가서 이렇게 저렇게 구실을 만들어서 아버지의 영양섭취를 위하여 찹쌀이며 낙태한 염소새끼며 갔다가 고아드리고, 지어는 농촌 지원하는 학생들 식당과 병원을 다니며 국 끓이고 남은 소 뼈다귀를 얻어다가 망치로 때려서 골수를 부수어 그 물을 우려내서 거기에 밥 지어 아버지를 대접했다.
아버지는 그런대로 몸은 호전했지만 정신이 돌아간 언니, 오빠는 돌아올 수가 없었다. 걸핏하면 도끼, 톱, 가위를 쥐고 나하고 아버지한테 달려들기가 일쑤다. 돌아가신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이런 꼴로 살라고 나를 낳아서 제대로 키워도 안주고 먼저 갔어요?” 나의 엄마는 내가 10살도 되기 전에 가족을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나갔다.
너무나 원망스럽다. 몸이 아픈 아버지와 정신이 돌아버린 형제들을 내 어깨 위에 얹어놓으면 난 어떻게 살라고... 죽고 싶다. 살아서 뭐하냐.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기 싫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남은 가족들은 또 어쩌고...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이제는 일이고 뭐고 다 싫다.
죽이라도 연명하려면 이제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가정의 세대주가 되었던 오빠가 이 꼴이 되고 보니 내 앞으로 다 옮겨왔지만, 아버지의 병간호로 일을 못하니 온 가족 분배가 다 잘렸다.
결국은 죽으라는 말 밖에 더 있는가. 하지만 살아야 하겠다. 언제 덤벼들지 모르는 정신없는 오빠를 데리고 산에 가서 봄이면 부채마, 삽주, 더덕, 산나물, 도토리 등 닥치는 대로 캐고 주어온다. 그래도 하루 한 끼 밖에 차례질 수 없는 우리 살림이다.
정신이 나가기 전에는 착하고 부지런하기로 소문 놓던 오빠가 정신을 놓으니 일하기를 딱 싫어한다. 몸 쓰기를 싫어한다. 온 하루 도토리 한 줌을 줍고는 졸졸 내 뒤만 따라다닌다. 미칠 지경이다. 지금은 죄스럽지만 차라리 빨리 안 죽는지 싶었다. 마대 같은 배낭 하나 가득 채우면 산골짜기에서 해가 넘어간다. 허겁지겁 산을 내려오다가 나뭇가지를 보면 또 주워 와야 한다.
이제는 내가 소녀가장이 된 것이 실감이 났다. 오면서 눈물을 씹어 삼킨다. “저녁은 뭘 해먹나?”
낑낑 거리면서 집에 들어서자 썰렁한 집안, 살아있는 온기라고는 느껴도 안 진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 도토리 줍다가 곰발 자취를 따라다닌 적도 있다. 하지만 죄 많은 인간은 살아서 고생하라고 하는지, 불 만난 곰이 돌아치면서 사람을 무지도 죽이건만 나한테는 눈도 안 돌리는 것 같다.
그만치도 값없는 목숨이었던가.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간다. 이 겨울은 어찌 살까. 하지만 겨울이라고 앉아있을 수도 없다. 눈 속을 헤집고서라도 다람쥐가 먹다버린 도토리라도 주어야 식구들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살찐 부채마는 없어도 야윈 놈이라도 캐 와야 한다.
돌 사이를 곡괭이로 파면 언 손잔등이 짝짝 아려난다. 피가 샘솟는다. 북방의 날씨도 나를 애먹이려고 작정을 했나 부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삶이 점점 고달프다. 엄마가 또 원망스럽다. 차라리 묘 이장이라도 해볼까.
생각을 하니 별로 어려운건 아니었다. 아버지하고 의논해서 엄마의 묘소를 찾아가서 제를 지내고 이장을 서둘렀다. 한마을에 사는 분이 해주려다가 아파서 드러눕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미루면 안 된단다. 귀신이 노한다나... 그래서 그냥 하기로 했는데 형부라는 사람이 묘를 좀 파내려가다가 못하겠다고 나앉는다.
그럼 어쩌란 말인고? 할 수 없이 내가 삽을 들고 나섰다. 무덤을 겁도 없이 제쳐댔다. 뼈를 꺼내야 하는데 사람이 없다. 몸이 성치 않은 아버지를 묘안에 들여앉혔다. 그리고 위에서 나는 아버지가 오른 쪽 하면 내가 오른 쪽을 받아 외친다. 왼쪽하면 또 왼쪽 뼈가 잘 발아 안 진다. 나무칼로 살을 뜯으니 잘 안 된다.
장갑 벗어 메치고 칼을 집어 던졌다. 손이 시원히 말을 잘 듣는다. 이렇게라도 하면 꼬인 집안이 혹여 풀릴지, 돌아간 엄마 귀신의 노여움이 풀릴지 간절한 소망 안고 끝내고 이장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니 긴 한숨과 추긴 냄새가 코를 찌른다. 긴장해서 느끼지 못한 것이 인제야 느껴지는가 부다. 술, 술밖에 날 달래줄 것이 없다.
네, 정말 가슴 아픈 소향씨의 수기였습니다. 그럼 오늘 이 시간은 여기에서 마치구요. 저는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여러분들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