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 / 이기철
- 박달재에서
주막은 주막이 아니라 酒幕이라 써야 제격이다 그래야 장돌뱅이 선무당 미투리장수가 다 모인다 그래야 등짐장수 소금쟁이 도부장수가 그냥은 못 지나 가고
방갓 패랭이 짚신감발로 노듯돌에 앉아 탁주 사발을 비 우고 간다
그래야 요술쟁이 곡마단 전기수들이 주모와 수작 한번 걸고 간다
酒幕은 으슬으슬 해가 기울어야 제격이다
번지수가 없어 읍에서 오던 하가키가
대추나무 돌담에 소지처럼 끼어 있어야 제격이다
잘 익은 옥수수가 수염을 바람에 휘날려야 제격이다 돌무지 너머 참나무골에는 여우가 캥캥 짖고
누구 비손하고 남은 시루떡 조각이
당산나무 아래 널부러져 있어야 제격이다
시인 천상병이 해가 지는데도 집으로 안 가고 나뭇등걸에 걸터앉아 손바닥에 시를 쓰고
그 발치쯤엔 키다리 시인 송상욱이 사흘 굶은 낯으로 통기타를 쳐야 제격이다
주막은 때로 주먹패 산도적이 공짜 술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아야 제격이다
주막, 주먹 왈패 풍각쟁이 벙거지들이 다 모인 酒幕 지까다비 면소사 고지기 벌목장들이 그냥은 못 가고 탁주 한잔에 음풍농월 한가닥 하고야 가는 酒幕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인생에 진 사람들이
인생의 얼굴을 몰라 아예 인생이 뭐냐고 물어보지도 못 한 사람들이
무명 베옷 기운 등지게 자락을 보이며 떠나가는 酒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