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3월 12일), TV 토크 쇼에 출연한다는 것 때문에 다들 난리가 난 것 같던데.
차라리 방송 다보고 내일쯤으로 인터뷰 스케줄 잡을 걸 그랬나요?”
“그런다고 달라질 것이 뭐 있나요? 저야 원래 평소 수다쟁이였으니까 거기서는 그냥
맘놓고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것에 불과하죠. 그리고 이제와 생각 드는 것인데, 제가
만일 TV에 출연한다면 차라리 음악 프로그램보다 토크 쇼 같은 게 더 잘 맞을 것 같아요. 어차피 음악 프로그램이라고 나가봐도 노래 한 곡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니까요. 노래는 공연장에서 할래요.”
지난 ’99년 3장짜리 라이브 앨범 [무적전설]의 출시를 즈음해 만나고는, 근 4년만의
해후인지라 어색함도 좀 깨볼 겸 던진 말에 그는 가시돋친 말로 응수했다. 인터뷰 내내 애인 자랑 욕심에 몸달아 했던 반면, 아티스트 겸 [드림 팩토리(이하: DF)] 공장장
직분에 맞게 유부남 남자 가수의 음반 판매고 저조 현상에 대해사도 적잖은 우려와 조바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공연이 늘 만원 사례를 기록해 왔던 것을 잘 알고 있다. 비록 그가 자신의 음악적 고집을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한 ’95년 앨범
[Circle] 이후 팬의 수가 반으로 줄었고. ''가족'' 그리고 ''붉은 낙타'' 같은 곡도 전과
같이 폭 넓은 대중적 지지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01년에
불거진 열애설로 인해 다시 그 중 반 이상이 이탈해 나간 일도 그의 공연 흥행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런 것에 초연한 사람일
거라 생각한다면 그 역시 아직 그를 잘못 알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그는 한국 대중 음악계의 판도가 음악인 위주라기보다 인기인 중심으로 그리고 이미지 제일주의로 변해버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모험과 실험을 즐기는 도전적인 음악 팬들을 찾기 힘들어진 일에도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TV 출연을 통한 홍보 활동이 부재한 가수가 설 곳이 좁아지고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은 그를 끊임없이 불안해하게 만들고 또 분노하게 했다. 사실 큰 충격이었다. 자신의 앨범은 그렇다 치고, 친한
친구 정석원이 몸담고 있어 그만큼 내부 사정에도 밝았던, 공일오비(O15B)의 역작 앨범 [The Sixth Sense]가 그들에게 기념비적인 앨범이자 묘비명이 된 것이 더욱 큰
좌절을 안겨 주었다. 대중을 잃은 대신 자유를 얻지 않았냐고 쉽사리 위로의 말을 던지기에는 너무나 절박한 상황이지 않은가.
“정규 음반을 통해서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음악들을 하려고요. 그리고 이번에 출시한 [His Ballad II]와 같은 비정규 앨범을 통해서는 보편적인 대중들이 원하는 음악 쪽에 포커스를 맞추려 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발라드 음악 같은 것 말입니다. 구태여 경구(aphorism) 같은 것으로 표현하자면 ''팔자! 살자!'' 정도가 되겠네요.”
그는 이제 자신이 크는 일보다, 회사가 커지기를 바라는 주의였다. 왜? 그다지 한국
연예 판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 살지 않았을 것 같은 그이지만, 오버그라운드 경력이
15년에 접어드는 고참이다 보니 보이는 것이 많았단다. 그는 [DF] 만큼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투명한 기획사''로 자리 잡히길 소망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고, 결국 먼저 시작한 자신이 그 영향력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생각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돈 버는게 그리도
중요하냐는 질책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의 별명
''작은 왕자'' 만큼이나 그의 심기를 불편케 하는 말이다. 그가 지금의 [DF]를 이루기까지 분명 아버지는 든든한 벽이자 기댈 곳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이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스스로 책임질 나이가 되었다. 그가 부도의 위험을 세 번이나 겪었던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음악에서만큼은 자신이 있었기에, 팬들의 성원에대한 보답이자 성의라 여겨 앨범 패키지에 남다른 공을 들이기 시작한게, 벌써 몇 년 째던가. 장 당 추가 비용이 CD 제작
단가의 1/3을 넘어서는 지경에 이르러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광고 카피 문구처럼 이제껏 자신의 손을 거쳐간 작품들이 뿌듯함 내지는
희열을 선사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번 [His Ballad II] 앨범이 최근 몇 년 다소
부실한 감이 있던 [DF] 식 ''선물 세트''의 기사회생을 알리는 결정체가 될 것이라는
그의 호언장담은 진실이었다(정말 선물 세트였다. 쌈짓돈 1만원만 투자하면 바로 알
수 있다).
공연 문화 부재에 대한 분개와 한탄이 뒤를 이었고, 분위기 전환삼아 그에게 있어 공연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물었다. 조금은 쉬어도 좋을 시간에조차 투어를 감행한다는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또 다른 ''노동''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평소 품고 있던, 공연에 대한 지론 대신 전혀 뜻밖의 폭탄성 발언을 통해 답변에 대신했다.
“공연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나이 마흔이 되면-1965년 생이니 정말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공연을 그만 두겠다고
했다. 이제껏 같은 폭발적인 에너지와 열정이 넘실대는 공연이 차츰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다가 무대에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상황을 실제로 겪게
되면서 비로소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되짚어 보면, 그게 바로 라이브의 매력이기도 한가 보다. 절체절명의 극한을 오가며 체득하는 희열 말이다. ''사랑''으로 인해 사는 그이지만, 공연장에서 얻는 그 감동 또한 그를 살아나가게 하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읽은 팝 전문지 [월간 팝송] 기사를 인용해 이야기를 풀어주었다.
언젠가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에 대한 후배 뮤지션들의 인터뷰를 담은 기사가
게재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단다. “이제 그만 좀 하시지!” 그는 그것을 “이제 우리가 설 곳을 만들어 달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건방진 소리로
들릴 지 모르지만, 그는 혹시 자신 역시 라이브 관객들을 ''독식''해 온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다. 그럴 만 해서 그랬다지만, 자신의 공연은 입장료도 분명 다른 것에 비해 월등히 높지 않았던가. 앞으로는 공연 연출에 관여할 생각이다. 자신이 정치권을
움직일 정도의 위력을 가졌던 H.O.T.만한 힘을 갖추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영향력 있는 라이브 가수가 많아졌으면 싶다는 한 마디가 이 모두를 대변해 준다. 분명 [DF] 경영인으로의 그와 뮤지션으로서의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 때 음악인의 길만을 걸으려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공동 대표인 아버지 혼자서 사업을 꾸리기에는 여러 모로 무리수가 많아,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시 경영
일선에 뛰어든 지 반년이 지났다. 기획 파트에 주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처음에 발라드 가수인양 인식되다가 언제인가부터는 모던 록 아티스트라는 수식어를
달게 되었던 그, 본인이야 차리리 ''라이브의 황제''라는 말에 더 애착과 자부심을 가지는 눈치긴 했다. 사실 자신의 음악이 어느 한 장르나 경향에 기울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란다.
“잡탕구리, 백화점식 만물상 음악이죠!”
정작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지 않느냐는 충고에 가슴 속 한 구석이 시려올 때가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자신이 복받은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하고픈 것은 다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 유수 뮤지션들과의 세션 작업이 잦다 보니 그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도 늘었고, 하나 같이 하는 말이 “네가 부럽다”였단다. 자신들은 비록 어떤 특정 분야에서 1인자로 꼽힐지언정, 정작 대중들에 의해 고착된 그런 이미지에 얽매여 곁눈질할 엄두조차 못 내는데, 이승환은 그런 것에 구여 않고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제시해 보이지 않던가. 판 한 장 더 팔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한
가지 스타일에만 집착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어차피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존재들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그는 좀 더 열심히 공부해 언젠가 클래식
소품 음반을 출시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사랑을 해서 그런지 사람이 좀 유해진 것 같다는 말을 꺼냈더니, 그가 정색을 한다. 오히려 ’94년 이전까지의 그가 더 그런 편이어서 욕도 할 줄 모르고 화도 1년에 한 두
번이나 낼까 하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인간미가 없었던 걸까. 그러다 보니 속은 속대로 썩어 들어갔다. ’97년 이후로는 제법 속내를 드러내 보일 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누구 앞에서건 말을 가리지 않고 다 내뱉는 편이 되었다. 오히려 강경해진 편이다. 유들유들해졌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고도 했다. 붙임성도 더 좋아졌다. 스스로의 표현을
빌면 ''자기 보호를 위한 연막''이라지만, 분명 전보다 많이 ''열려''보인다는 점만은
인정했다. 낯도 덜 가리게 되었고, 한 때 방송가에 나돌던 “이승환은 댄스 가수들을
싫어한다”는 오해 역시 이제는 불식되었다. 자주 찾는 대기실도 아니지만, 떼지어 모여 있는 후배들에 선뜻 다가가지 못했을 뿐이다.
마침 김건모와 조성모의 음반이 하루 먼저 발매되는 일이 벌어져, ''3대 발라드 스타의 컴백''이니 ''빅 뱅'' 어쩌고 하는 천박한 수식어들이 동원되는 일이 잦은데, 본인의
느낌은 어떠한가 물었을 때, 그는 미소조차 가진 얼굴로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다 기사를 위한 기사요, 홍보를 위한 홍보라 생각합니다. 홍보는 정정당당한 것이
최고 아니겠어요? 물론 그런 일들까지 가수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 보긴 힘들지만요.”
그런데, 만일 이번 음반이 잘 되고 신곡으로 끼어 들어가 있는 ''꽃''이 공중파 가요 인기 차트 1위 후보에 오르는 일이 생기면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졌다. 그간 줄곧 음반 판매와 TV 홍보의 상관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쉽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의
답은 또 색달랐다. 공원(직원)들이랑 회식 자리에서 자신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 1위
곡이 몇이나 될까 퀴즈를 낸 적이 있는데 아무도 답을 못 맞추더라 하는 이야기가 힌트가 되었다. 정답은 ‘한 곡도 없습니다’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이 3위에 오른 정도가 최고 기록이란다. 다운타운 DJ 연합회에서 주관해 발표하는
차트에서는 한 때 인기 가요 100곡 가운데 7곡 이상이 그의 곡으로 채워진 적이 있었고, 음반 판매고도 늘 1, 2위를 다투었는데 말이다.
조금 이른 이야기일까? 이제 갓 두 번째 발라드 베스트 음반을 출시한 그에게 신보 계획은 없는가를 물었다.
“현재 한 두 명 정도에게 작곡을 의뢰해 놓긴 했어요. [DF]의 상황이 좀 좋으면 앨범이 늦게 나올 것 같은데요. 그만큼 공을 더 들일 것이 분명하니 말이죠. 경제 상황도
좋지 않고 음반 시장 상황도 최악을 달리고 있지만, 이번에도 해외에서 작업하게 될
것 같아요. 소리 잘 뽑는 곳을 물색 중입니다. 업계 관련 인사들 사이에서는 어설프게
만든 음반이 잘 팔린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완성도가 높은 음반은 흥행에 실패한다는
소리죠. 하지만 8집 앨범만큼은 예전의 편집증 환자 상태로 돌아가 완벽에 완벽을 기하려 합니다. 판매고가 저조하더라도 말이죠. ''초심으로 돌아가기.'' 정신이죠. 아니다. 제게 있어서는 6집 앨범 제작 당시 먹은 마음가짐을 되살리자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군요.”
앞으로도 선배 뮤지션으로 할 도리는 다 하겠지만, 자신을 투사로만 보고 지레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는 일은 없었으면 싶다는 당부를 끝으로 그는 아래층에서 수업하는 학생들 보러 가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실력 있는 대중 음악인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에서 세운 작은 배움터가 곧 정기 연주회를 가진다며 취재를 권하는 모습에서, 흡사 자랑거리 많은 자식을 여럿 둔 부모의 심정을 느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