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7일-28일 조선시대사학회에서 준비한 원주지방 답사에 참여했다. 답사는 하계답사로 '남한강 유역 인물의 발자취를 찾아서'였다.
27일 8시 30분에 서울 종합운동장에서 버스로 가기로 되어 있다. 나는 아침 6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출발지에 한 시간 전에 도착했다. 시간이 되어 출발하는데 31명이 참석했다. 마침 아는 사람은 심승구교수, 송양섭회장, 이희환(전북대)교수, 이왕무교수 등이 있었다. 원주에 도착은 1시간 30분, 충북대의 김의환 교수가 답사를 총괄 안내했다. 김교수는 답사지역의 인맥을 족보자료를 통해 철저하게 조사하여 답사자에게 제공하고 식당에 대하여도 세심한 배려를 했다.
나는 이 답사에 참가한 것은 내의 전공분야인 사학사 연구에 깊은 관련이 있는 원천석 묘소, 그리고 한백겸 생가와 묘소가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11시 경에 원천석 묘소를 찾았다. 묘소를 가는 길에는 여러 안내판이 있었다. 그의 시가 소개된 안내판이 있었다.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동의 피리 소리(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라는 시를 남겼다. 고려왕조를 지키지 못함을 한으로 여기며 일생의 지조를 지킨 고려말 관료 선비이다. 그는 이방원의 사부였는데 태종이 찾아왔으나 만나주지 않았다 한다. 그는 16세기 박상이 지은 "동국사략"에서 절의를 지킨 인물로 최초로 소개된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충렬사를 들려 점심 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원주 역사박물관, 강원감영, 임윤지당 선양관. 조엄묘소와 기념관, 최규하 대통령 기념관, 생가를 답사했다. 특히 조엄은 우리나라에 고구마를 전래한 실학자여서 그의 묘소에 올라가서는 내가 말해 모두 2번의 절을 올렸다.
조엄 동상
저녁의 숙소는 박경리의 문학관인 토지문화관였다. 문학인이 위대함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나는 어제 받은 이영춘박사가 쓴 "임윤지당"이란 책을 통독했다. 임윤지당은 18세기 노론 성리학자의 대가인 임성주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오빠와 남동생 임장주 사이에서 성리학 공부를 해서 그녀의 남형제 수준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이 책의 부제는 -조선 후기 원주의 여성 성리학자-이고 원주시에서 발행하여 역사박물관을 찾는 사람에게 배포하는 135쪽에 달하는 책이다.
다음날 28일은 이하진(성호 이익의 아버지), 이가환 등 여주이씨 씨족 묘를 찾았다. 올라가기에 조금 힘들었다. 올라가 보니 한 등성이에 모두 20여기의 묘소가 있었고, 이는 의학박사로 성공한 이돈희 씨의 노력이 주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돈희 씨는 성호학회(이익)를 만들어 성호학을 열심히 홍보한 인물이고 이 묘역에 모신 분들의 묘역도와 가계도를 비석으로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 우리는 한백겸(1512~1615) 생가로 갔다. 원주시 부론면 노림리에 있었다. 부론초등학교 옆으로 300여미터 가면 나타난다. 생가는 6.25 전쟁에 불에 탔고, 앞쪽에는 이를 지켜주던 행랑채 한 채가 남아 있었다. 한백겸은 한준겸의 형이다. 한준겸은 그 딸이 인조의 비인 인렬왕후여서 이에서 소현세자. 효종 등을 낳았고, 효종의 후손이 숙종, 영조, 정조로 이어지는 왕실의 중심가닥을 형성하게 한 인물이다.
한준겸은 여러 지방의 관찰사로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그의 형 한백겸은 우리나라 역사지리학을 일으켰다. 역사지릭학은 과거의 정치사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지리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보는 새로운 경향의 학문으로 조선 후기에 풍미한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이었다. 그는 삼한론, 기전론을 제기한 학자로 유명한 학자이다. 삼한론은 종래 마한-고구려, 변한-백제설(최치원설) 변한-고구려, 마한-백제로 보는 (권근설) 등 분분하던 학설을 삼한은 한강 이남에 있었으며 마한은 경기, 충청, 전라도에 변한은 가야, 진한은 경상좌도의 경주지역으로 확정한 학설을 제창하여 그의 학설은 지금까지 삼한의 위치 비정의 정설이 되었다.
한백겸은 동생 한준겸이 평안도 관찰사로 가 있을 때 평양에 가서 토지구획된 유적을 실측하여 기자가 만든 유적이라는 기전론을 제기하여 조선 조 실학자인 반계 유형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당고종의 둔전론이라는 설도 제기되었지만 조선 시대 사람들이 기자조선을 추숭함에 일조한 학설이다. 여기서 나는 잠간 시간을 빌려 답사자에게 그의 학문적 업적을 소개했다.
점심 후 우리는 흥원창 유적지로 가서 섬강과 충주에서 오는 남한강과 합류하여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조선 조의 공물, 조세가 수운으로 서울에 올라오는 것을 이해하고 담론했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
우리는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를 들렸다. 이는 고려 문종대의 지광국사의 부도비가 국보 59호 지정되고 그 동안 5차례 발굴되어 4만2천 평방미터의 사지가 노출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사학회에서 이에 대한 준비가 부족해서 나는 현장의 주추돌을 보면서 만복사지를 발굴한 경험을 토대로 석등지, 석탑지, 대웅전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전혀 준비하지 않은 설명이어서 현장에서 보고 즉석에서 한 개략적인 설명이었다.
지광국사부도탑에는 웅장한 거북이가 큰 비석을 바치고 있었다. 그 머리에서 큰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의 삼층탑은 일본 오사카로 반출되었다가 일제시대 총독부로 반환되어 현재 고궁민속박물관 뜰에 있다. 이번 답사에서 조선시대학회와 고려시대의 중세사학회가 크게 단절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귀가해서 “조선금석총람”에 실린 지광국사의 비문을 전체를 읽어 보았다. 그는 원주 원씨였고, 법상종의 고승으로 문종 대 많은 승려가 그를 존숭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일 다시 한 번 답사해보고 싶은 곳이다. 이곳의 맞은 편에는 도동서원을 복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다음 들린 곳은 부론면 손곡리에 이르러 시인 이달의 시비와 공양양이 이곳에 와서 왕위를 내주었다고 해서 지금의 마을 이름이 손곡(遜谷 손위실)리라고 칭한다고 한다. 심승구 교수가 공양왕의 묘소가 삼척, 간성, 고양 등 세 곳으로 옮기게 된 자세한 보충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에서 고려왕조에 대한 조선 정부의 악랄한 조치를 알 수 있었다.
손곡리 이곳에서 임경업 장군의 이야기도 있었다. 임장군은 전쟁의 영웅으로 당시 어려운 과정을 겪었지만 후일까지 우리나라 무장으로 임진왜란 이후 관왕묘 신앙처럼 관우와 함께 존숭되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현재 여주시에 속해 있는 한백겸 묘소를 둘러보았다. 한백겸의 신도비 받침대인 거북이 머리가 왼쪽으로 비툴어졌는데 이는 풍수지리사상으로 그렇게 했다는 설명이 있었다.
나는 한백겸에 대해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내용을 보충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전공자임을 최초로 자처한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한백겸의 삼한설을 일천년의 학설을 바로 잡은 탁설이라고 했다는 점, 그리고 1896년 광무개혁 때에 '대한제국'이란 의 국호 개칭에 공헌했고, 이는 1919년 상해의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으로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의 탄생으로 한국=삼한이라는 연구 성과에 힘 입은 바 있음을 말해주었다. 즐겁고 뜻 깊은 답사였다.
담사계획을 추진한 송양섭 조서시대사학회 회장, 그리고 한 달여 동안 답사 내용과 일정에 대해 헌신적 노력을 한 김의환 교수, 그리고 연락 관계를 한 김동영 총무간사, 및 임원진, 그리고 안전한 운전을 해주신 기사님, 숙소를 대여해 편안히 이용하게 하고 아침 식사를 제공해주신 박경리 토지문화관 여러분 그리고 일일히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여러분에게 깊고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한백겸의 묘소 아래에 세워진 신도비의 거북머리 옆으로 튼 것은 풍수지리의 영향이라고 한다.
첫댓글 날씨도 고르지 못한 계절에 먼길 뜻있는 답사를 하셨습니다.
한백겸의 묘소 아래에 세워진 거북머리가 특이합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거북머리가 옆으로 튼 것은 처음 대합니다.
풍수지리에 따라 그렇게 했다니, 더욱 눈길이 갑니다.
늘 강녕하셔서 유익한 학술 답사 여행 즐기시길 기원합니다.
장천 선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악산 등산은 전에 몇 번 한 적 있으나 원주에 그런 많은 역사 유적이 있다는 사실에 놀랬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현장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후손들이 잘되어야 조상의 묘소도 지켜지지만 공적인 업적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리고 박경리 토지문화관에서 문학인의 업적과 활동에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거듭 감사를 표합니다.
선생님께서 손쉽게 작성해 주신 답사기 덕분에1박2일간 원주지역 답사의 즐거움이 생생히 느껴집니다. 특히 한백겸 생가와 묘소에서 주신 설명 덕분에 원주가 오래 기억되리라 여겨집니다. 촘촘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전체 일정을 함께 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학회에 후의를 더해 주신 점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 뵙기를 기대하며, 늘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심승구배
심선생님 조선시대사학회의 답사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심 교수를 만나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되어 더욱 유익했습니다. 앞으로 또 답사계획이 있으면 참가해보겠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가끔 좋은 내용 올려주십시오.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문은 문종 대의 한림학사요, 감수국사였던 鄭惟産(정유산이 엄청히 많은 전고와 해박한 유불교의 지식을 동원하여 쓴 난해한 비문입니다. 이를 이지관 법사님이 교감 역주한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3. 고려편2을
구해서 전문을 읽었습니다. 지광국사는 983년(성종3)에 태어나서 현종 문종대에 크게 활약한 천재 고승으로써 초명은 海麟(海鱗으로개명 이때 자가 巨㡣이었고, 원주 원씨이었다. 그의 법호는 여러 차례 올려졌고, 문종 대 지광국사로
봉해졌다. 1067년(문종 21) 87세 승랍 72세로 법천사에서 입적했다. 그의 많은 제자들이 비 음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탑은 1085년(선종 2)에 왕명으로 세워졌다. 그 중 우리나라에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고 하는 부분 普化仁? 한 글자가
판독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한 글자는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추상명사인듯한데 이는 앞으로 풀어야할 숙제입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주석본을 두 번째 읽었습니다. 잘된 작업입니다만 이에 대한 해석과 번역, 주석, 원문의 띄어쓰기 등에서 수정할 부분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문종 대의 학문과 역사, 사상을 이해함에도 필요한 자료이고, 불교문헌을 해독함에도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뜻을 같이하는 분이 나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