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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3월 29일 토요일
[(자)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이고,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를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6,1-6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4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5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6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루카 18,9)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비유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바리사이는, 자신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들과 같지 않다고 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세리는, 자신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죄인이기에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이 비유를 듣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유다인에게 의로움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바리사이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히 하느님께 다가가지 못하는 죄인 세리를 보면서 업신여기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곧 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움과 업신여김을 구분하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움과 업신여김에 대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기준을 완전히 뒤엎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느냐 아니면 낮추느냐가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판단 기준을 적용하기 전에 오늘의 복음을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충실한 종교적 실천을 낮게 평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기준이 전부인 양 그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경계하도록 강조하시며, 특별히 세리가 보여 준 겸손의 덕행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겸손하고 진솔한 세리의 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께서 수시로, 사사건건 강한 대립각을 세우시던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란 말은 ‘~로부터 분리되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바리사이들의 머릿속에는 자신들이 죄인들이나 이방인들, 불결한 사람들과는 철저히 분리되는 존재, 하느님으로부터 선별된 거룩한 존재라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러한 바리사이들의 선민의식과 우월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신앙을 절대 그냥 못 넘기셨습니다. 눈에 띄는 즉시 그들의 말씀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은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그들의 기도를 보십시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 11-12)
교만과 자만으로 똘똘 뭉쳐진, 기가 차지도 않은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그가 바친 기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겸손의 결핍입니다. 성찰과 자기 인식의 부족입니다. 바리사이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의식보다 ‘유익한 종’이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큰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티끌 같은 자신을 축복하셨음을 까마득히 잊고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오늘 여기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사람은 하느님 은총을 통한 의화(義化)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은 필요 없으며 결핍과 한계와 모순투성이의 인간인 자신에게만 의존하므로 그 길의 끝은 결국 멸망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꽤뚫어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때, 하느님께서도 결코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감 없는 진솔한 대화를 좋아하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차라리 반항적인 예언자 예레미야의 기도가 돋보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예언자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아주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 건넨 욥의 대화는 더 솔직합니다. “저는 너무나 비참해서 주님께서 저를 만든 날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으로 세리의 기도를 소개하십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자비하신 주님 앞에 언제나 부당한 죄인인 우리가 눈만 뜨면 드려야 할 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언제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틈만 나면 쏘아 올려야 할 화살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 재의 수요일에는 제가 주례를 했기에, 올해 재의 수요일은 부주임 신부님이 주례를 하도록 했습니다. 키가 큰 부주임 신부님은 이마에 재를 바르는 것도 큼직하게 발라 주었습니다. 저는 상대적으로 작게 재를 발라 주었습니다. 교우들의 이마에 새겨진 십자가 모양이 마치 악의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몸에 새겨진 ‘백신’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숱한 전투에서 공을 세운 군인들이 받았던 ‘훈장’처럼 보였습니다. 작년보다 많은 200여 명의 교우들이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 백신을 맞은 것처럼 보여서 든든했습니다. 내년 재의 수요일에는 더 많은 교우가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백신’을 이마에 새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마에 새겨진 재가 외적인 백신이라면 신부님의 강론은 교우들의 마음에 새겨진 백신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순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기억하며 우리도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 하는 시간이기에 고난과 아픔의 시간일 수도 있지만, 사순시기는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첫사랑’이 시작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말랐을 때 하느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이 샘솟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배고팠을 때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니 사순시기는 회개와 참회의 시간이면서,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는 감사의 시간입니다.” 저는 단식은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지만, 단식의 진정한 의미는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대화이지만, 기도의 또 다른 의미는 지금 외롭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생활과 그릇된 신앙생활을 비유로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헌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헌금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정성 된 마음으로 봉헌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할 때도, 단식할 때도, 자선을 베풀 때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면 이미 상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아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한국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도 미국에서 제일 부자인 사람에 비하면 가난한 것입니다. 희생과 겸손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성인들의 삶에 비하면 매우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세상에서 너무 쉽게 좌절하기도 하고, 교만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상대적으로 평가하거나, 순위를 정하시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들의 모습을 사랑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거짓 희망을 보게 됩니다.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좋아지고, 국민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고 하는 말들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기도와 실천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선하고 착한 사람들은 거두어 주신다는 확신을 통해서 현실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이겨내는 것이 참된 희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희망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배가 항해할 수 있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이 빠지면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면 살이 빠지고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생활이 안정되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생활도 안정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행동 없는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느님 곁>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곁
늘 열려있으나
스스로
있을 수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에게
하느님 곁은
거추장스러울 뿐이요
스스로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느님 곁은
든든하기 그지없으니
하느님 곁
가까울수록
스스로
있을 수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은
한걸음 또 한걸음
거기에서 물러서고
스스로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은
한걸음 또 한걸음
거기에로 다가가니
하느님께서
곁에 두고 싶어도
스스로
있을 수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을
억지로
품지 않으시고
스스로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을
기꺼이
보듬으신다네
오늘의 성인
성 베르톨드(Berthold)
신 분 : 은수자
활동지역 : 카르멜산(Mount Carmel)
활동연도 : +1195년
같은이름 : 베르톨도, 베르톨두스
St. Berthold of Mt Carmel
San Bertoldo Priore generale dei Carmelitani
Sec. XIII (1198~1231)
12세기 말경에 일단의 프랑스 계통의 은수자들이 솔리냑의 성 베르톨드의 지도아래 팔레스티나의 가르멜 산에서 생활하였다.
베르톨드는 프랑스의 리모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수학하였으며, 이곳에서 서품되었다.
그는 친척 에이메릭과 함께 십자군에 가담하였으나, 안티오키아에서 사라센인들에 의하여 체포 투옥되었는데, 그는 이때 크리스챤 군인들의 나쁜 길을 포기하고, 그들을 개혁시키라는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가르멜 산에 일단의 은수자 집단을 모으고 원장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가르멜 수도회의 창설자 중의 한사람이며, 거의 45년 동안 수도회를 육성하였다.
베르톨드가 임종할 때에는 프랑스 계통인 성 보로카드가 원장직을 승계하였는데, 그는 예루살렘의 라틴계 총주교이던 베르첼리의 성 알베르토가 만든 규칙에 따라 사는 은수자들의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가르멜 수도회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현재까지 이해되고 그러나 이 두 장상들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별로 없다.
성 군들레오 (Gundleus)
활동년도 : +6세기경
신분 : 은수자
지역 : 뉴포트(Newport)
같은 이름 : 군들레우스
성 군들레우스(또는 군들레오)는 웨일스(Wales)족의 족장이었는데 글래디스(Gladys)라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신부의 부친이 극구 반대하므로 그 딸을 납치한 뒤에 결혼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어쨌든 이들 부부는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첫 아들 성 카독(Cadoc, 1월 24일)을 낳고부터는 생활을 일신하여 웨일스 남동부 만머스셔(Monmouthshire)의 뉴포트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여 성공하였다. 그 후 성 군들레우스와 성녀 글래디스는 합의하에 서로 별거한 후 뉴포트에서 은수자로서 여생을 보냈다.
성 루돌포 (Ludolf)
활동년도 : +1250년
신분 : 주교
지역 : 라체부르크(Ratzeburg)
같은 이름 : 루돌푸스, 루돌프
성 루돌푸스(Ludolphus, 또는 루돌포)는 프레몽트레 회원으로 1236년에 라체부르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수도자의 생활을 그대로 보전하였고, 자기 교구의 사제들에게 성 노르베르투스(Norbertus, 6월 6일)의 회칙을 실천케 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의 자유 때문에 그 지방의 공작인 알베르트와 갈등이 많았으므로, 여러 번 투옥되거나 고문까지 받다가 결국은 그 후유증으로 운명하였다. 그래서 그는 순교자로 공경을 받는다.
Ludolf was a Norbertine priest (a canon regular of the Premonstratensian Order). In 1236 he was chosen to become bishop of the German see of Ratzeburg. While fulfilling his episcopal duties, he continued the practices of his Norbertine religious life. For his courageous defense of the Church, he was imprisoned and harshly treated by Duke Albrecht of Saxony-Lauenburg. Subsequently he fell ill and died from what he had suffered. A soldier tormented by excruciating pains in his head resulting from an arrowhead that had become embedded in his flesh during battle invoked the intercession of Saint Ludolf. Soon afterward, he found that the arrowhead had shifted to the surface of his head wound, so that he was able to extricate it with his hand. In thanksgiving to God, the Blessed Virgin Mary, and Saint Ludolf, the soldier donated to the Church a lavishly decorated missal and several beautifully adorned liturgical vestments.
성 세쿤도 (Secundus)
활동년도 : +119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아스티(Asti)
같은 이름 : 세군도, 세꾼도, 세꾼두스, 세쿤두스
일부 지방에서는 성 세쿤두스(또는 세쿤도)의 축일을 3월 30일에 지낸다. 그는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Piemonte) 지방 아스티의 귀족으로 황제군의 하급 장교였다. 성 세쿤두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하의 아스티에서 참수되었으나 그는 테반(Theban) 군단의 순교자들 중의 한 명으로 기억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말과 함께 있는 젊은 전사로 표현되며, 때때로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 9월 22일)와 성 엑스수페리우스(Exsuperius, 9월 22일)와 함께 등장한다
성녀 글래디스(Gladys)
신 분 : 은수자
활동지역 : 뉴포트(Newport)
활동연도 : +6세기경
같은이름 : 글라디스
성 군들레우스(Gundleus)는 웨일스(Wales)족의 족장이었는데 글래디스라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신부의 부친이 극구 반대하므로 그 딸을 납치한 뒤에 결혼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어쨌든 이들 부부는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첫 아들 성 카독(Cadoc, 1월 24일)을 낳고부터는 생활을 일신하여 웨일스 남동부 만머스셔(Monmouthshire)의 뉴포트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여 성공하였다. 그 후 성 군들레우스와 성녀 글래디스는 합의하에 서로 별거한 후 뉴포트에서 은수자로서 여생을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