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2025년 봄호>
한국은 사랑과 정(情)이 다르다. 사랑은 어느 나라에도 있는 것이지만
한국은 사랑보다 정이 더 강세다. 요즘 세대들은 정을 알지 못하고 사
랑이란 낱말에 익숙하지만 한국을 대표할 만한 인간관계의 마음 온도
는 정이라는 점에서 탁월한 지표가 된다.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지만 정은 쌓이는 것이다. 모든 결핍과 패악을
견디며 사는 시간 동안 마음이라는 공간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정이
결을 다지고 있는 것이다.
정은 나무의 화음과 같은 것이다. 나무의 뿌리가 가지는 수분을 혼자
가지지 않고 위로 가지와 잎으로 끌어 올리고 가지와 잎이 받는 햇살을
혼자 가지지 않고 뿌리로 내리며 생명을 키워 가는 사이 한 생명으로
운명을 같이 하는 것처럼 사람의 정도 그렇게 질겨진다.
사랑은 출발점에서 일어나는 감정이지만 정은 마지막 부분에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일이 묘하다. 프랑스 노벨 수상자 르 끌레지오는 우리나
라에 제법 살았다. 그가 떠나면서 한 말이 인상적이다.
“한국에서 아주 귀한 것은 정이라는 겁니다. 어느 나라 말로도 번역
이 되지 않는 정이라는 말은 정말 정이 들게 합니다.”
- 신달자, 이 계절의 언어, 「사람들은 회복중이라고 말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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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 서주홍
네가 진 짐을
내 지게에 옮겨도
남는 것을,
내가 진 짐을
내려놓으려도
그리 못 하는 것은
내가 너에게 진 빚을
어떤 도리로도 다
갚을 수 없음이고,
설사 갚는다 해도
내 지게에는
지어도 지어도
질 자리가 남아 있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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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오는 오늘/ 신향인
파르스름하게 깨어나는 새벽 공기가 낯설다
아침이 이렇게 왔었던가?
너를 한번도 바라보질 않았구나
밤을 깨고 나오느라
멍 들어 있는 너를
한번도 보듬질 못했구나
나에게 너는
항상 환하게 빛나는 미소인 줄만
따뜻이 안아주는 품인 줄만 알았다
찬란하기만한 너에게도 아픔이 있는데
내 아픔이 너를 덮어 버렸다
이제
걱정거리는 너의 뒤편에 숨겨 놓고
신발끈을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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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 이은선
막차는 떠났습니다
아니, 떠났다는 말보다 떠나보냈다는
말이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인생의 짧은 보폭은
언제나 막차와의 싸움이었고
어쩌면 막차는 내가 다가섬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채 떠나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젠,
내가 막차를 떠나보내기로 했습니다
막차를 향한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뜀박질은 그만하기로 했습니다.
막차가 떠난 자리
곧, 첫차가 오겠지요
나는 막차를 타기보다
새벽 첫차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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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공화국/ 문주환
흐릿한 창 너머로 가로등은 참 밝다
새로 난 길바닥은 불빛으로 반짝이고
찬바람 소리도 없이 겨울 강을 건너간다.
짊어진 어둠의 길 갈수록 무거운데
왔던 길 낯설어서 꿈결도 어수선한
하늘의 먹장구름은 하얀 세상 만든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내일은 다시 오고
매서운 바람 끝이 살갗을 후비는데
여의도 겨울 공화국 언제쯤 봄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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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지구가 차가워졌으면 좋겠어/ 김선영(하남)
나는 북극에 사는 어린 곰이에요
배가 고파 빙하와 빙하 사이를
부지런히 다녔어요
그러다 멀리멀리 떠밀려 오게 되었죠
할머니 댁이 가까이 있는지 몰랐어요
그저 커다란 통에 먹이가 있는지
킁킁 냄새를 맡았을 뿐이에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거대한 빙하는 너무 멀리 있어요
나를 태워 줄 빙하를 잡아줄 수 있나요?
예전처럼 차갑고 빛나던 빙하 위를
친구들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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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학 2025년 봄호>
상/ 서연정
혀끝 화염을 끄고 끼니를 받들었다
꿈을 향해 걸어라 눈빛으로 전하는 말
정갈해 그 상의 둘레 두고두고 안 잊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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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명희
한 줌
햇볕에 바랜
바위의 미열 같은
빈자리 얼어 서는
시간의 두께 같은
그 온갖
만상 다듬어
혼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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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 머신/ 전학춘
남을, 목 조르고
부수고 뒤집었다
뺑뺑이로 탈진시켜
살 마음 앗아갔다
해거름, 고물상 모퉁이
제 혼자 녹슬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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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파/ 조민희
햇살 긴 손가락이
피아노를 탄주한다
날개 편 음표들이
바람의 등을 타고
바다에
미소 흘리시네
살랑대는 저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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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화 그늘 아래서/ 김옥중
그 누가 나를 보고 꽃 한 폭 치시라면
선지보다 더 하얀 바람 한 필 끊어다가
저 핏빛 내 가슴을 적시는 당신만을 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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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란다/ 강성남
아침이슬은
풀잎을 만나
영롱하게 빛나고
바람은
갈대를 만나
소리를 냅니다
우리는 선생님을 만나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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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풀은 외롭다/ 이상현
강아지를 보면
아이들은 좋아서 소리친다
아이들을 만나면
강아지는 더 좋아서 꼬리친다
길가의 강아지풀!
혼자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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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학 제52회 신인상 당선작 가운데 1편>
싸움/ 최애진
엄마,
방금 내 입냄새랑
치약이 싸웠거든요
누가 이겼는지
엄마가 봐줘요
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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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인문학 2025년 봄호>
섬/ 서연정
씻은 마음 온전히 전할 길이 없을까
외로워 다리 놓고 두려워 다리 놓고
폭풍우 눈보라 쳐도 상록수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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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만 연두색 종이에 어머니라고 쓰자 눈물이 났습니다. 휴지를 찾고
있을 때 전화가 왔습니다. 올해 94세 되신 김낙중 선생님의 전화였습니다.
새해 인사를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순간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땅
속으로 숨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지만, 정말 ‘이럴
수는 없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는 마음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죄송
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송구스러워하는 마음을 읽었는
지 나뿐이 아니라 선생님이 평소 좋아하시는 분들 스무 명을 적어놓고 이
렇게 차곡차곡 전화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인사는 아무나 하면 되는 게지 순서가 무슨 대수냐”라고 하
셨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셨으니 94세까지 장수하신다는 마음이 들었습
니다.
- 김풍배, 수필 「새해 인사」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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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다리기/ 김완수
봄은
땅속 비밀을 두고
하늘과 땅이
줄다리기하는 때
하늘은
꼭 꺼내 보려 하고
땅은
안 내놓으려 한다
안 보이는
햇살 밧줄을
하늘이 힘껏 당겼을까?
새싹 나왔으니
하늘이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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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메일/ 하빈
그래,
알았어
조금 있으면
소리 지른다고?
천둥이한테서
놀라지
말라고
번 쩍
번개메일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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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이남순
1
접때 준거 안중 잇따 가져가 차비해라
내 찬데 뭔 차비요?
니 차는 물 묵고 가나?
오매가 차창 안으로 한사코 던진 봉투
2
추운데 기름 사서 보일러 돌리이소
심여 전긴데 웬 지럼깝?
전기는 물 묵고 도요?
딸네도 차창 밖으로 기어코 던진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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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언덕에서/ 이명희(청원)
다시는 건널 수 없는 강인 줄 나도 안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아무런 속절도 없이 흘러갔다는 것도 안다
저 홀로 붉어져서 저무는 칼칼한 노을
굽이치는 붉은 강 온몸으로 재워놓고
꿈처럼 닿을 수 있다면 가 닿고 싶은 마음
비바람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아픔을 꿰매주는 사랑의 손길 있어
비탈 밭 마음속에서도 꽃은 피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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