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卷二十三 世家 卷第二十三 高宗 37年 8월 (1250)
○ 庚申 築江都中城.
중성을 쌓았다.
고려사 卷八十二 志 卷第三十六 兵 二 성보
○ 고종 三十七年 始築江都中城, 周回二千九百六十餘閒, 大小門凡十七. (1250)
강도에 중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약3000칸이고 크고 작은 성문이 17개가 있다.
현재 강화도에서 이 기록과 일치하는 성채 유적을 찾아보라!
고려사 卷二十四 世家 卷第二十四 高宗 43年 8월(1256)
○ 辛巳 車羅大·永寧公·洪福源等到甲串江外, 大張旗幟, 牧馬于田, 登通津山, 望江都, 退屯安亥縣.
강화도에 군마목장이 있다.
고려사 卷四十五 世家 卷第四十五 恭讓王 元年 12월 (1389)
(상략) 臣感其言, 下其書於都堂, 咸請如諫臣等議. 臣於是, 誅禑于江陵, 誅昌于江都, 旣正其罪, 齊明擇辰, 敢告于聖祖眞前.(하략)
우왕을 강릉에서 목 베고 창왕을 강도에서 목 베다.
강릉에는 우왕과 강화도에 창왕의 릉이 있어야만 한다. 있다면 조선조에서 만든것이다.
더 많은 증빙 기록이 있으나 나중의 글을 위해 밝히지 않습니다.
위의 모든 기록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아래 지도에 답이 있다.

원나라 순제의 명으로 원나라 승상 탈탈(원사,금사,요사의 저자)과 고려 명장 최영 그리고 고려군 15000여명이 장사성의 홍건적 반란군을 잡으러 려-몽군이 육합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해 승기를 잡았으나 몽고군 수뇌부의 명예욕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패전한 곳이 강소성 육합성 유적이다.
고려사절요
공민왕3년(1354) 11월 조
○원나라에서 이부낭중(吏部郎中) 합라나해(哈喇那海) 등을 보내어, 탈탈승상(脫脫丞相)이 황제의 명이라 하여 유탁(柳濯). 염제신(廉悌臣). 권겸(權謙). 원호(元顥). 나영걸(羅英傑). 인당(印當). 김용(金鏞). 이권(李權). 강윤충(康允忠). 정세운(鄭世雲). 황상(黃裳). 최영(崔瑩). 최운기(崔雲起). 이방실(李芳實). 안우(安佑) 등 40여 명과 서경(西京)의 수군(水軍) 3백 명을 부르고, 또 날래고 용감한 군사를 모집하여, 8월 15일을 기해서 연경(燕京)에 집합하게 하여 장차 고우(高郵)의 적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인안(印安)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태사(太師) 탈탈(脫脫)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우성(高郵城)을 공격할 때 유탁(柳濯)등 정벌에 나간 장수와 사졸.연경(燕京)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 총 2만 3천명을 선봉(先鋒)으로 삼았다. 성이 함락되려 할 때 달단지원로장(달단知院老長)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공을 독차지할까 두려워서 명령을 내리기를, ‘이제 날도 저물었으니, 내일 처부시도록 하자’ 하고는 군사를 회동하여 퇴진하였다. 그날 밤에 적은 성벽(城壁)을 견고하게 설비하여 다음 날에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어떤 자가 탈탈을 참소하여 황제가 탈탈을 회안(淮安)으로 유배보내니, 이로부터 남쪽에 있는 적의 세력이 날로 강성하여졌다. 우리 군사는 육합성(六合城)을 함락시키고, 또 회안로(淮安路)로 이동하여 적을 막았는데, 이권(李權).최원(崔源)등이 싸움에서 죽고, 최영(崔塋)은 힘껏 싸우다가 몸에 두어군데나 상처를 입었다” 하였다
양주부 강도가 바로 고려말의 강화도이자 江都인 것이다.
(진실로 믿기어렵다면 운영자에게 메일로 질문 바랍니다.)
심제 글.
첫댓글 서토에서 의기투합하여 일어난 홍건적이든가 황건적이 별다른 명분이 없이 이 동쪽의 한반도지경까지 쳐들어왔었다고 역사를 해설하는 이들이 얼마나 맹랑한 자들인 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 기록자료라고 보겠습니다...
감솨합니다.
杏村 李嵓과 江都, 신찬팔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의 괴리가 어우러진다.
門中 杏村연구가의 긍정적 확인이 주는 의미를 새겨 볼만 하다.
江都 위의 淸平 지명에서 새로운 사실 관계를 추적한다.
范樟이 또 그 家門이 목숨처럼 지켜 온 오백년 禁書에 담긴 焚書의 현장 기록,
가슴 아린 기록이 이러한 史實 기록을 확인해 준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丁亥 印安, 還自元言, “太師脫脫, 領兵八百萬, 攻高郵城, 柳濯等赴征軍士及國人在燕京者, 摠二萬三千人, 以爲前鋒. 城將陷, 韃靼知院老長, 忌我國人專其功, 令曰, ‘今日暮矣, 明日乃取之.’ 麾軍而退. 其夜, 賊堅壁設備, 明日攻之不克拔. 會, 有人譖脫脫, 帝流于淮安.”
심제형님, 붉은색 번역문의 원문은?
印安,還自元,言,太師脫脫,領兵攻高郵城,柳濯等赴征,將士及國人在燕京者,摠二萬三千人,以爲前鋒,城將陷,韃靼知院老長,忌我國人專其功,令曰,今日暮矣,明日乃取之,麾軍而退,其夜,賊,堅壁設備,明日攻之不克拔,會,有人譖脫脫,帝,流脫脫于淮安,自後南賊日盛,我軍,陷六合城,又移防淮安路,李權,崔源等,六人戰死,崔瑩,力戰身被數槍.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 동일 내용이지만 부분적으로 틀립니다. 절요가 더 현실감 있게 썼습니다.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