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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조남철
운명의 갈림길
1943년 11월의 어느 날, 현해탄의 물결을 가르는 여객선 한 척이 있었다.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 항구를 떠나 조선의 부산으로 가는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도쿠슈마루(德壽丸)호, 당시로서는 호화여객선이었다. 전란(戰亂)의 시절이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일본은 전쟁의 당사국이었다.
구라파(歐羅巴)에서도, 태평양(太平洋)에서도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고 있었다. 몇 달 전인 7월에는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인 9월에,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는 백기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엊그제,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蔣介石)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만나 전후(戰後)의 문제를 논의하는 중에 조선을 독립시키자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승객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눈에 띄는 청년 한 사람이 있었다. 기골이 장대하거나 이목구비가 특히 수려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통보다도 마른 체격이었는데, 키가 좀 크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인상이나 옷차림으로 보아 조선인 같았다. 청년은 자주 가방을 열어 무슨 종이 한 장을 꺼내 가만히 펼쳐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음을 짓곤 했다. 청년이 눈에 띈 것은 그런 그의 행동 때문이었다. 올해 만 20세가 된 청년 조남철이었다.
모두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나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는 일 같았다. 나는 목표를 달성하지 않았는가. 나는 바둑의 전문가가 되지 않았는가. 나는 어엿한 프로기사 초단(初段)이 아닌가. 앞으로 2단이 될 것이고, 3단이 될 것이고…, 9단이 될 것이다. 타이틀을 따고 돈과 명예를 거머쥘 것이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조선인의 긍지를 빛낼 것이다.
바둑 신동 출현
장난 같았던 입문 기념
기타니 선생 댁에 도착해서 며칠이 지났을 때,조남철은 기타니 선생에게 바둑을 한 판 배우기는 했었다. 경성에서 일곱 점으로 몰패를 당한 후 4년만의 대국이었다.
기타니 선생이 손수 바둑판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그 바둑판이 라는 것이, 남철이 평소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딴판의 것이었다. 적어도 기타니 선생 댁의 바둑판이라면, 우선 두께도 여섯 치나 일곱 치는 되고, 나무는 은행나무나 아니면 그 비슷한 수준의 재질일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고아(高雅)한 분위기와 품격을 지니고 있는 명품일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바둑판은 장난감 같았다. 두께도 없었고 볼품도 없었다. 꾀죄죄한 판자 조각이었다. 치수는 다섯 점이었다. 4년 전에 비해 두 점이 내려갔다.
남철은 이번에야말로 원가를 보여 드리고 싶었다. 다섯 점씩이나 놓고, 계가로 이기기는 싫었다. 통쾌한 불계승을 거두고 싶었다. 바둑판 이곳 저곳에 선생의 미생마들이 떠다녔다. 남철은 선생의 대마를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미생마가 너무 많았던 것이 오히려 탈이었다. 미생마가 하나나 둘 정도였다면 집중적으로 추격을 할 수가 있었고 그랬으면 설령 잡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성과는 거둘 수가 있었을 텐데, 이건 이리 저리 정신 없이 돌아다니기만 했지 아무 소득이 없었다. 선생의 미생마는 전부 완생을 했고, 그러자 흑에겐 남은 것이 없었다. 또다시 참패였다.
그것이 말하자면 입문기념대국이었다. 제자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 사제의 연(緣)을 맺게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는 바둑이었다. 물론 일생에 한 번 있는 바둑이었다. 한 선생님에게 두 번 입문하는 경우란 없는 것이니까.
남철은 후회막급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꾀죄죄한 장난감 비슷한 바둑판으로 둔 그 바둑이 입문기념대국이었다니. 정식으로 다시 한 판 둘 수는 없을까. 그러나 그것은 약과였다. 그 한 판 이후 남철이 바둑돌을 잡은 것은 무려 3년이 지나서였다.
폭풍 전야 속해서
일본에 건너간 지 3년 반 만에, 1941년 봄에 조남철은 일본기원 초단이 되었다. 조남철은 입단 포상 휴가를 받아 고향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조남철의 목표가 초단은 아니었다.
조남철이 일본에 건너갈 때, 초단을 따면 즉시 돌아와 조선에서 바둑활동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아니다. 조선은 전문기사로서 바둑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조남철의 목표는 일본 바둑계에서 대성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돌아갔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은, 앞서 말했듯, 중국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조선에도 들르기로 되어 있는 기타니 선생의 환영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기타니 선생이 조선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환영 모임은 성공적이었다. 기타니 선생은 조남철이 당연히 자신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갈 것으로 알았으나, 조남철은 몸이 좋지 않으니 당분간만 집에서 요양을 좀 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분간 집에서 요양을 하겠다는 것이 조남철 본인의 뜻은 아니었다. 부친의 뜻이었다. 부친은 불안했다. 지리산 자락에 묻혀 있는 구례(求禮) 땅은 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그것은 폭풍 전야의 고요와 같았다. 전쟁은 이제 막바지인 것 같았다. 일본은 여전히 큰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전황(戰況)은 일본이 크게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조선이고 일본이고를 막론하고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불려나가는 것 같았다.
이제 남철이 일본으로 돌아가면, 그도 전쟁터로 나가야 할지 모른다. 바둑으로 대성하려면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그것도 목숨을 부지하고 나서의 일이다. 천황을 위한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곳이 낫다.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자.부친의 생각은 옮았다.
조남철은 은인자중하라는 부친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바둑인들과 교분을 쌓아갔다. 피끓는 스무 살이었다. 운수 사나워 붙잡혀가는 한이 있더라도 구례 땅에 처박혀 지낼 수만은 없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신혼의 단 꿈에 젖어있던 어느 날, 조선은 거짓말처럼 해방이 되었다.
꿈을 꾸기 시작하다
해방을 전후한 무렵 조선에는 바둑 두는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장소가 두 곳 있었다. 서울 안국동 네거리에 있었던 '경성기원'과 가회동 입구의 조선기원이었다. '기원(淇院)'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미 일본식 바둑과 바둑문화가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경성기원에는 노국수들은 물론이고 일반 애기가들도 많이 출입했다. 조선기원은 친일파 한상용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전쟁의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문을 닫았다.
한상용은 묘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친일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의 조카로서 조선총력연맹장을 지낼 정도로 위세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겉으로는 친일파의 거두로 행세하면서도, 집안에서는 가족들로 하여금 절대 일본말을 쓰지 못하게 했으며 또 일본인 고관들이 거드름을 피울라치면 반말로 호통을 쳐 혼을 내 주었다.
그는 바둑을 굉장히 좋아해 노국수들이나 일본인 전문기사에게는 깍듯이 예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친일파 노릇을 한 것은, 사실은 동포를 돕기 위해서였다는 얘기도 전해지는데, 물론 확인할 길은 없다. 예컨대 그는 노국수들과 바둑을 두는 것으로 일본 경찰의 눈을 따돌린 후 그 자리에서 은밀히 독립군의 군자금을 건네주었다는 식이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아마 4단의 짱짱한 기력(棋力)이었으며, 노국수들과는 전부 한 판 이상 선(先)으로 대국을 해 보았는데, 바둑을 둘 때마다 노국수들에게 후하게 사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한상용은 친일 행각의 여부를 떠나 바둑인들로부터는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조남철은 구례의 집에서 가깝게는 전주(全州), 멀리는 경성으로 오르내리면서 뭔가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경성기원으로는 바둑을 위한 일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빠른 속도로 한 장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전주에서 김명환(金明煥)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전남 장성(長城) 출신으로 인물도 바둑도 출중했던 김명환은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조남철의 한국 바둑계 건설의 동지가 된다.
조남철의 큰 형 남준(南俊)은 어릴 때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기개가 뛰어나 주변에서는 과연 학자로 대성할 것이라고 기대를 걸었으나, 휘문중학 재학 시절 장티푸스에 걸려 심하게 앓으면서 뇌 세포 손상을 입는 바람에 학문을 포기하고 장삿길로 들어서 평생을 지내다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까운 인물이었다.
작은 형 남석(南錫)도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부친은 남석이 사업가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철도청의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퇴직을 했다. 조남석은 지난 1999년 1월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79세였다.
부친은 줄포로 좌천당한 지 10년만에 다시 본점으로 발령을 받아 경성에 올라오게 된다. 조남철이 여덟 살 되던 해, 1931년 이었다.
남철은 서울 교동소학교에 입학했고, 바로 이때부터 부친은 남철에게 바둑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 바둑사 여명의 첫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부친도 몰랐고 남철도 몰랐다. 이 아이가 커서 나중에, 한국 현대 바둑의 개척자, 선구자, 대부(代父)가 되리라고는 가르치는 아버지도 배우는 아들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철은, 처음에는 바둑에 대해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향상은 빨랐다. 열한 살 무렵에는 6급이 되었다. 현행 한국기원 아마단•급 규정에 따른다면 3급 정도가 된다. 요즘은 초등학교 어린이 중에도 아마 유단자급 강자가 수두룩하지만,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바둑 신동(神童)의 출현이었다. 남철은 장안의 화제 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 바둑계의 젊은 패자(覇者)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6단과 중국의 바둑 천재 우 칭위엔(吳淸源) 5단, 이 두 사람이 바둑 사절(使節)로 중국을 순회하고 돌아가는 길에 경성에 들러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애기가들과 모임을 갖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일본인 애기가들은 바둑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던 남철을 그 자리에 불러 주었다. 남철의 부친은 쾌재를 불렀다. 천재일우였다.
기타니가 누군가. 우 칭위엔은 또 누군가. 4백년 일본 바둑사의 일대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신포석(新布石)’의 주창자, 당대의 기린아들 아닌가. 남철도 부친도 그들의 명성과 신포석의 위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들은 흠모의 대상이었다.
남철은 바둑판을 사이에 하고 기타니 6단과 마주앉았다. 남철은 무릎을 꿇고 절을 한 후 떨리는 손으로, 바둑판의 아홉 곳의 화점 가운데, 상변과 하변의 가운데 화점을 뺀 일곱 개의 화점에 흑돌을 놓았다.
일곱 점을 놓고 몰패
바둑을 조금이라도 두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아무리 하수라도 바둑판에 일곱 점을 놓으면, 상수인 백으로서도 사실은 둘 데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일곱 점 위에 여덟 점도 있고, 아홉 점도 있지만, 둘 데가 없기로는 아홉 점이나 여덟 점이나 일곱 점이나 매한가지라는 것을 말이다.
조남철은 자신이 넘쳐 흘렀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바둑에 관한 한 하늘과 같은 존재요, 신(神)에 가까운 존재라고 하지만, 일곱 점이나 놓고서도 진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조남철은 소신껏, 마음껏 두어나갔다. 대세력을 펼쳤고 발빠르게 대세점을 차지했으며 화려하게 공격했다. 조남철은 스스로의 박력과 패기에 스스로 취해 버렸다. 무아지경 속에서 그렇게 바둑돌을 나르다가 기타니 선생의 가벼운 웃음 소리에 조남철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바둑판을 들여다 보았다.
조남철의 병사들은 지리멸렬, 전멸이었다. 조남철은 쥐구멍을 찾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물이 나왔다. 도무지 고개를 들고 기타니 선생과 부친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기타니 선생과 부친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지만,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느껴질 뿐 한 마디도 제대로 들려오지를 않았다.
"아드님의 용기가 가상합니다. 기백이 좋아요. 재주도 있는 편이고… 어떻습니까. 내가 일본으로 데려가 정식으로 바둑 공부를 시키고 싶은데, 그럴 의향이 있으십니까?"
비록 몰패를 당했을지언정 그 바둑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조남철의 일본 유학을 제안하는 말이었다.
"너무나 고마우신 말씀입니다만, 아직 철부지라… 게다가 말도 서툴고… 좀 준비를 한 후에, 소학교나 졸업한 후에 보내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이 아니면 늦습니다. 대성하려면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부친이 완곡하게 사양을 하자 기타니 선생은 한두 번 더, 이를테면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눈치였지만, 끝내 부친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조남철이 일본에 건너간 것은 그로부터 4년이나 지난 1937년이었는데, 훗날 조남철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아버님으로서야 당연히 그러실 수밖에 없었겠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기타니 선생을 따라가는 것이 나의 장래를 위해서는 올은 일이었다"고 후회를 하곤 했다.
이야기 속의 소년처럼
조남철의 부친은 남철이 소학교를 졸업하기를 기다렸다가 기타니 9단에게 일본 유학을 하겠다고 편지를 띄웠다. 뜻밖의 회답이 왔다. 기타니 9단이 난색을 표한 것이다.
나이가 이미 많아, 이제 시작해서는 대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친은 거듭 간청을 해 뜻을 관철했다. 1937년 11월, 조남철은 마침내 장도(壯途)에 올랐다.
생각해 보면, 요즘보다도 오히려 50 ~60년 전, 그 시절의 아버지들과 아들들이 더 담대했던 것 같다. 아무리 가까운 일본이라고는 하지만, 요즘도 이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아들을 혼자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소년 조남철은 혼자 부산으로 가, 거기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그리고 기차를 여러 번 갈아 타면서 기타니 선생 댁을 찾아갔다.
조남철은 기타니 9단의 내제자惰弟子)가 되었다. 내제자란 선생의 집으로 들어가 같이 살면서 배우는 제도를 말한다. 스승과 제자는 단순히 지식과 기술만을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부자(父子) 이상의 연(緣)을 맺게 된다.
내제자 생활은 한 마디로 혹독한 시련의 길이었다. 조남철이 혼자 상상을 하며 때로 낭만적인 색깔로 그려보기도 하던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분명 바둑을 배우러,부모님 슬하를 떠나 이 먼 곳까지 온 것인데, 바둑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기타니 선생님은 얼굴을 뵙는 시간조차 많지 않았다. 대신 조남철에게는 빨래하고 청소하고 불 때고 심부름하는 일들이 할당되었다. 집안의 온갖 궂은 일, 잡일은 조남철의 몫이었다. 조남철은 내제자가 아니라 하인이었고, 머슴이었다. 이야기로만 듣던 일이었다.
일본에 건너온 지 벌써 6년이고, 이번이 세번째 귀국이다. 입단하기 전, 공부를 하다가 휴가를 얻어 왔었고, 재작년에 입단하고서 바로 건너와 인사를 했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서울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조금 있다가 기타니 선생님과도 재회를 할 것이다. 선생님은 중국을 여행하시고 돌아오는 기에 서울에 들르신다고 하셨다.
선생을 기다리며
미국은 어떤 나라일까. 일본은 지금 미국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고 한다. 만주를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동남아로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미국에게도 이긴다고 장담하고 있었지만, 그리고 한때는 정말 그럴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현재 전황은 만만치 않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니 거꾸로 일본이 조금씩 밀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일본이 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 조선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
기타니 선생 댁을 떠날 때는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뵌다는 즐거움에 마음이 들떠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조선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져 있었다. 일본인들의 횡포는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괴로운 일이었다. 나에게 일본은 무엇인가. 조국의 산하를 짓밟고 동포를 죽인 원수의 나라인가. 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해 준 은사의 나라인가.
괴롭고 걱정이 되었다. 이런 판국에 기타니 선생이 조선에 오셔도 과연 무사하실 지, 봉변이나 당하시지 않을 지, 걱정이 되었다. 기타니 선생은 약 한 달 예정으로 먼저 몽골에 가셨다가 중국의 난징(南京)과 베이징(北京)을 거쳐 경성(京城)에 오신다고 했다. 몽골의 실력자가 선생을 초청했다고 하는 데, 사실은 이번 샌생의 여행도 ‘친선-위문사절단’ 같은 것일 게다. 일본 정부는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부대의 위문과 현지인들에 대한 선무(宣撫)공작을 위해 전문기사들까지도 동원하고 있었다.
같이 가자고 하셨던 기타니 선생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를 생각해서 끼워주려 하신 것임이 분명하지만, 왠지 내키지가 않았다. 선생에 대한 고마움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선생과 나는 처지가 다르지 않은 가. 선생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침략자를 위해 광대 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전문기사의 위문여행이니 필시 현지에 가면 지도다면기 같은 것을 하게 될 텐데, 못할 짓이다. 내가 바둑을 배운 것이, 적군의 병사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배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리산 자락의 전남 구례의 산골에 칩거하면서 선생을 기다리는 조남철의 심사는 착잡했다. 확실한 그 무엇을 보거나 느낀 것은 아니엇지만, 어쩐지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가까워 오는 것 같았다.
선각자였던 부친
조남철은 1923년 전북 부안(扶安)에서 출생했다. 정확하게는 부안군의 남쪽 바닷가 마을 줄포(茁浦)이다. 줄포는 아름다운 포구이며 그 앞바다에는 위도(蝟島)가 있다. 조기가 많이 잡힌다. 예전에는 우리나라 조기의 3대 어장의 하나였다. 요즘은 주변에 개발된 곳이 많아 예전의 명성과 분위기는 찾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래도 줄표에서 변산반도로 이어지는 해안의 절경은 변함이 없다.
조남철의 선조가 대대로 살던 곳은 강원도 홍천이었고 조남철의 부친 대에는 경성이었다. 조남철의 부친 조봉구(趙鳳九)는 서울법대의 전신인 ‘경성법전’을 졸업한 엘리트였는데, 법관의 길을 버리고 식산은행(현재의 산업은행)에 다녔다. 법관이 되어봤자 결국은 죄 없는 조선인 동포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을 해야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식산은행이라고 해서 조선인에게 유리할 것은 없었다. 조봉구는 이유없는 차별대우에 시달렸고 그러다가 좌천을 당해 밀려 내려온 곳이 줄포였다. 조봉구는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줄포에서 셋째이자 막내인 조남철을 낳았다.
최고 학부를 나오고도 조선인이라는 것 때문에 뜻을 펴지 못했던 조봉구는, 자신의 세 아들은 가능하면 차별 대우의 여지가 적은 분야로 나가기를 원했다. 장남에게는 학문의 길을 권했다. 둘째는 사업가로 키우고 싶었다. 그리고 막내 남철은 바둑으로 대성시키고 싶었다. 학문이나 사업은 그렇다 하겠지만, 그 실절에 어떻게 바둑을 생각했는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조봉구 자신이 바둑을 좋아하고 실력 또한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자신의 아들을, 바둑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발상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 시절이라면, 바둑은 ‘잡기’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프로기사는 오늘날에도 희귀한 직업이다. 조봉구는 정말 선각자였을까. 바둑을 두는 것이 정말 직업이 될 수 있다고 내다 본 것일까.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보내기까지 했으니, 그렇다면 그에게는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짧게는 20~30년, 길게는 50년 앞을 예견한 선각자가 된다. 그러나 이 대목은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그리고 한 가닥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혹시 막내 아들 만큼은 험난한 세파 속으로 떠나 보내기가 싫었던 것은 아닐까.
남산동 한성해원
두 갈래 길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가 바둑 수업에 더욱 정진해 전문기사로 대성해 보느냐, 아니면 해방된 조국에서 바둑 보급을 하느냐. 이 땅에 남아서는 일단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얼른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현실은 불확실하고 미래는 불투명했다. 조그맣게 바둑집이나 열어 놓고 노국수들과 어울리거나 후진들을 몇 명씩 가르치는 것으로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지낼 것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노국수들은 물론이고 바둑 깨나 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내기바둑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들과 어울려 내기바둑으로 돈이나 따먹으면서 한 세상 보낼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일본에 건너가야 할 것 같았다. 전쟁이 끝났으므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도 군대에 끌려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일본은 패전국이 되기는 했지만,그것과는 상관없이 무슨 분야에서든지 전문가는 우대를 받는 나라이니 내 인생만을 생각한다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이 안전하고 평탄할 것이었다. 설령 대성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한 몸 지켜 가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으리라.
조남철은 고개를 흔들었다. 남아야 하리라. 해방이 된 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늘이 나에게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 땅에 바둑을 보급하자.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의 바둑을 잡기의 수렁에서 건져내자. 이 땅에 바둑문화의 꽃을 피워 보자. 그것이 하늘이 내게 주신 사명이리라. 며칠 밤을 고민한 끝에 결단을 내리기는 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두려웠다. 그러나 이제 움직여야 한다. 조남철은 지리산 자락 구례를 떠나 서울 종로3가에서 지물포를 운영하던 큰 형님 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공식적인 단체나 모임을 조직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지리산 자락에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노국수들은 조남철이 하는 일에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 들은 여전히 순장 바둑을 고집하고 있었고, 바둑은 그저 소일거리의 신선놀음일 뿐이라는 생각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조남철은 굴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뛰어 1945년 11월, 서울 남산동의 한 건물에 마침내 '한성기원(濫脚刻fi)'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개인병원 별채의 2층, 다섯 평 남짓한 다다미 방이었다. 집세는 없었다.
대신 '당분간만'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쫓겨가는 일본인들로부터 사들인 바둑판 8조와 바둑책 열 몇 권이 시설의 전부였다. 초라한 출발이었다.
방 한 칸 없었지만
보잘것없는 '한성기원'이었기는 하지만, 그 의의는 컸다. 해방 후 만들어진 '민간 문화단체'로는 아마도 최초의 것이리라. 단, 단체의 이름을 '기원'이라고 한 것이 훗날 논란의 여지를 남겨 놓게 되었다.
별 생각 없이 '일본기원'만을 생각하고 그런 명칭을 본 딴 것이리라. 그것은 해방 직전에 있었던 '경성기원'이나 '조선기원'도 마찬가지 였으리라.
그러나 일본의 경우, '기원(淇院)'은 '일본기원' 하나만이 존재할 뿐이고, 일반 아마추어들이 바둑을 즐기는 장소는 '기소(淇所)'라고 한다. '일본기원'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본바둑협회'가 된다.
'한성기원'의 간판을 내걸 당시는 이것이 장차 협회가 된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협회도 되고, 일반 애기가들이 와서 바둑을 즐기는 곳도 되는 그런 장소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긴 그런 것을 굳이 구분할 계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성기원이 종당에는 오늘날의 '한국기원(韓國淇院)'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니, 적어도 '사단법인 한국기원'이 발족되던 1955년 그 때에라도 '사단법인 한국기원'이 아니라 '사단법인 한국바둑협회'로 이름을 바꾸는 것을 고려해야 하지 않았을까.
한국기원이 일본기원을 본 딴 명칭이어서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용어의 혼란이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얘기다.
남산 밑, 명동 맞은편의 남산동에 있었던 한성기원은 이듬해 여름, 경복궁 옆 적선동(積善洞)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바둑판과 살림살이 등을 리어카에 싣고 가는 조남철은 비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나를 희생하면서 뜻을 세웠건만 방 한 칸이 없어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발전은 있었다. 독지가도 생기고 회원도 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학진(李鶴鎭), 권희철(權熙哲)과 같은 후원자를 만난 것은 특히 행운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조남철 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았지만, 바둑으로 의기투합하면서 친구요 동지며 후원자가 되었다.
이학진은 고종(高宗)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공의 사위이다. 일제시대 일본의 명문 게이오(慶應) 대학 경제학부 유학 시절, 당시 일본 바둑계에 새바람을 일으키며 무서운 신예로 이름을 날리던 사카다(板田榮男)에게 정식으로 수업료를 내고 바둑을 배운 바 있는, 바둑 선각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만족할 수 없어
권희철(權熙哲)은 일본 외국어대학을 졸업한 중국문학가였고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교육자였다. 그리고 해학가(譜誰家)였다. 교단을 떠난 후에는 바둑계와 인연을 맺어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명인전의 관전기를 집필했다. 필명은 '일범(-凡)'이었다.
조남철이 명인전의 전담 해설자여서, 바둑 한 판을 조남철이 강평을 하고, 권희철이 관전기로 읽는 식이었는데, 일본 유학시절부터 교분을 쌓았던 두 사람인지라 명콤비라는 평판을 얻었다. 권희철은 특유의 해학적 문장으로 30여 년간 명인전 관전기를 통해 바둑팬들을 울리고 웃기다가 지난 91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여름의 어느 날, '월간 바둑' 편집부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권희철이었다. 권희철은 그 무렵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며 노환을 다스리고 있었다.
"나, 권희철인데,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거든. 그런데 지금 내가 위독해."
전화를 받은 기자는 깜짝 놀라 동료들과 한국기원 직원, 한국기원에 나와 있던 프로기사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그들은 택시 몇 대에 분승해 세브란스로 달렸다. 그러다가 택시 안에서 누군가 무릎을 쳤다.
"아니, 그런데 위독하시단 분이 어떻게 전화를 하실 수가 있어. 권선생님, 이거 엄살 아냐? 평소에도 엄살이 좀 심하시잖아."
역시 엄살이었다. 권희철은 환자복을 입고는 있었지만, 혈색 좋은 얼굴로 사과를 깎아먹고 있었다. 가벼운 감기 기운이었는데, 지레 겁을 먹고 자청해 입원을 한 것이었다.
"에이, 그냥 가벼운 감기래요. 우린 깜짝 놀랐잖아요."
"이 사람들아, 노인들은 모르는 거야. 감기로도 갈 수가 있어."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 준 권희철의 마지막 익살이었다.
적선동으로 이사를 간 지 1년쯤 되어 새 봄이 오자 조남철의 가슴에도 또다시 새로운 번민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애기가 몇 명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성기원에서 조선기원으로
적선동 한성기원은 발전이 없었다. 조남철도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심기일전을 위해 석 달쯤 구례에 내려가 쉬다가 돌아오자 기원은 또다시 통의동으로 이사를 가 있었고 그나마 규모도 반으로 줄어 있었다 위기였다. 바둑보급이고 뭐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조남철은 직업전환을 심각히 고려하게 되었다.
그러나, 뜻대로 커 주지를 않는 한성기원에 낙담이 되어 인생의 진로를 바꾸어 보고픈 마음도 간절하기는 했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내가 바둑 말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바둑을 떠나 내 존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달리 없었다. 그것에 또 분하고 안타까웠다.
그런 조남철에게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출장지도, 방문지도였다. 회원이 찾아와주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알아서 사람들이 바둑을 배우러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 골목 구석까지 누가 알고 그렇게 많이 찾아올 수 있겠는가 말이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가 바둑을 가르쳐야 한다.
출장지도는 뜻밖으로 성공이었다. 바둑클럽과 기우회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구락부(俱樂部)라는 이름이 흔했다. 구락부라는 말을 떠 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 쪽이 아련해지곤 한다. 고민도 많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그 때 그는 젊었다.
출장지도에 열을 올리고 있던 중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남산동 시절부터 조남철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이학진이 앞장서 사동궁(寺洞宮)의 열 다섯 칸 짜리 사랑채를 빌려 기원 간판을 걸어준 것이다. 종로 2가 네거리, 예전의 화신백화점 뒤편, 80년대까지 종로예식장이 있었던 자리다. 의친왕 이강 공이 거처했던 곳답게 그 때는 정말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다.
시내 중심가여서 찾아오는 애기가들의 수가 급증했다. 사동궁의 안 사랑채에서 바둑을 두다 보면 왕족이 된 듯한 착각이 드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기원의 이름도 '한성기원'에서 '조선기원'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꿀 때에는 그 나름의 야심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이제는 조국을 대표하는 단체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전국 규모의 바둑대회
한성기원의 간판을 내리고 조선기원이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할 때는 한성기원과 경성기원을 통합한다는 원모(遠謀)가 있었다.
여기서 잠깐 명칭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정리를 하고 넘어간다. 해방 직전에, 친일파 한상용이 원장으로 있던 조선기원과, 노국수들이 모이던 경성기원이 있었다. 전쟁 말기에 조선기원은 문을 닫았다.
해방 후 조남철이 처음 만든 기원이 한성기원이었다. 한성기원이 조선기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노국수들은 계속 경성기원에 모이고 있었다.
조남철은 바둑계가 발전을 하려면 노국수들과 젊은 바둑인들이 힘을 합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하고,두 기원의 통합을 추 진했지만, 그게 의외로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통합의 원칙에는 신·구(新舊) 바둑인들 사이의 이견이 없었으나, 운영권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고, 피차 양보가 없었다.
통합에는 실패했으나 사동궁 조선기원은 그런 대로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개인지도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사범으로서 개인적으로 꽤 많은 수입을 올릴 수가 있었다. 다만 하루에 대여섯 판, 어떤 때는 일곱 여덟 판씩을 대국을 하고 복기를 해 주느라 건강이 문제가 되었다.
사동궁의 주인 의친왕 이강공은 당시 70이 넘은 나이셨으나 척 보기에도 비범한 인물임을 느낄 수 있었다. 홍안백발(紅顔白髮)의 비범한 용모였던 것이 생각나고, 의친왕께서 직접 바둑을 두시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가끔 사랑채로 나오셔서 다른 사람들이 바둑 두는 것을 신기한 듯 구경하시던 모습은 기억에 생생하다.
사동궁 조선기원은 문을 연 지 반 년 후에 '조선기원 창립기념 제1회 전국바둑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 데까지 발전을 했다. 해방 후 최초로 열린 전국 규모의 바둑대회였다. 당시 우리 사회
에서 차지하는 바둑계의 비중이나 볼륨은 정말 미미한 것이었다.
다른 분야와 비교한다면, 바둑은,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한 구석에 모여 자기들끼리 즐기는 그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바둑계는 의외로 앞서 달리고 있었다. 바둑처럼 전국 규모의 동호인 잔치를 개최할 수 있었던 분야는 많지 않았다. 바둑은, 덩어리가 작았기 때문에, 오히려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기보 게재는 무료?
조선기원 창립기념 제1회 전국바둑선수권대회 때 있었던 일이다. 신문기자가 대회장을 찾아왔다. 기자는 바둑대회라는 것이 신기해 도대체 어떻게들 하고 있나 구경이나 한번 하고, 괜찮으면 간단하게 기사라도 한 줄 내 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진지하고 뜨거운 대회장의 분위기를 보자 기자의 생각이 바뀌었다. 기자 쪽에서 먼저 뉴스는 물론이고 기왕이면 기보(淇譜)도 소재하자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조남철은 그만 감격하고 말았다. 대회 소식을 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거늘, 기보까지 게재할 수 있게 되다니, 눈앞이 훤해지는 기분이었다. 기보를 게재하려면 해설이 따라야 할 것 아닌가. 원고를 써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원고료라는 것도 받을 수있는 것 아닌가. 신문사는 돈이 많을 테니 원고료도 시시하게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꿈이었다. 기보까지 게재한다면, 신문사로서는 마땅히 광고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바둑만큼은 특별 대우를 해 무료로 할 수 있도록 위에다 건의를 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조남철은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튼 사동궁 조선기원은 발전을 거듭했고, 모두들 신명이 났다. 그렇게 2년이 흘러갔다. 1948년이었다. 해방이 된 지 3년이 지났건만, 정정(政情)은 오히려 갈수록 이상해지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남한에 들어온 미국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의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는 것 같더니, 급기야 미 ·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좌우합작운동도 파탄이었다. 조국의 운명은 또다시 위태로워 보였다. 온 국민은 한결같이 통일정부를 열망하고 있었지만, 한반도의 통일정부는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과는 이제 서로 협력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면서 소련의 팽창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대소(對蘇) 봉쇄정책을 선언했다.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이었다. 냉전(冷戰)체제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사동궁의 호시절도 2년이 한계였다. 이왕가(李王家)의 몰락이었다. 사동궁이 팔려 버린 것이다
집시 생활을 청산
소용돌이치는 해방 정국 속에서, 노국수들의 아지트인 경성기원은 큰 어려움 없이 그런 대로 버텨가고 있었지만, 조남철과 조남철의 기원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표류를 거듭하고 있었다.
사동궁에서 밀려난 조선기원은, 조선기원의 이사(理事)였던 한 애기가의 배려로 창경궁 근처 원남동의 여관방을 빌려 겨우 간판을 걸었다. 원남동 여관방의 조선기원은 두 달 만에 다시 철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쫓겨난 것이 아니었다.
사동궁에서 나올 때 받아낸 이사비용이 꽤 되었었는데, 그 돈으로 명동성당 건너편 골목의 2층 짜리 적산가옥을 사서 이사를 하는 것이었다. 아래 층은 조남철의 살림집이었고 2층 다다미 방에 바둑판 14조가 놓여졌다.
그 유명한 '명동시대'의 개막이었다.
명동시대는 훗날 우리 현대 바둑사 초창기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추억의 보고(賓庫)가 되었다. 명동성당 건너편은 명동이 아니라 저동이어서, 이때부터가 명동시대는 아니고, 사실은 조금
후에 조남철이 진짜 명동에 기원을 연 시점부터 명동시대라고 하지만, 그래도 명동과 최초로 인연을 맺은 것은 이때였다.
1948년 1월에는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 임시 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위원단은 남북한과 좌·우익의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한 총선을 의논할 계획이었으나, 소련의 거부로 북한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고, 남한에서도 남로당과는 접촉을 하지 못했다.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도, 남한만이라도 우선 총선을 치르자는 쪽과 남북통일을 위해 남북회담을 먼저 개최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우여곡절이 계속되었다.
1948년 5월, 남한에서는 제헌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실시되었고 7월에는 우리나라의 국호(國號)가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결정되었다.
조국 광복과 함께 바둑 보국(報國)의 뜻을 세워 정열을 불태운지 3년 만에 작으나마 '내 집'을 갖게 된 조남철은 감개무량이었다. 셋방살이, 더부살이로 떠돌아다니던 지난날들이 괌만 같았다.
그것도 전화위복이 되었다. 여러 곳을 떠돌아다닌 덕분에 많은 바둑팬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들이 모두 명동으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명동(정확히 말하자면 저동) 조선기원의 발전은 비약적이었다. 조남철은 훗날 이 시절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예감이 아주 좋았어. 젊은 학생층과 직장인 팬들이 눈에 띄게 많았거든. 바둑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였지. 바둑이 노인들의 소일거리만은 아니라는 거지. 물론 부족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심신이 피곤한 시절이었기는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우리 바둑계의 장래는 밝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어요."
조선기원의 비약적인 발전에는 연합신문의 협조가 결정적이었다. 게다가 문화부장이 조선기원의 단골손님이었던 5급 실력의 애기가였는데, 그가 발벗고 뛰어준 덕분에 조남철은 창간호부터 바둑란에 기보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기보의 대국자에게 지급되는 대국료는 없었다. 그러나 원고료만큼은 특별대우를 받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 매일신보에서 광고료는 받지 않겠으니 대신 원고료없이 무료로 기보 연재를 하자던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실로, 조남철 본인의 말마따나 하늘의 도움이었다.
신문의 바둑란이 바둑보급에 얼마나 효과적인가에 대해서는 일본 유학 시절 직접 눈으로 보았던 터라 조남철은 연합신문의 배려가 눈물겹도록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찾아 다니면서 바둑의 효용을 역설하고, 기원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바둑지도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하루 일과가 끝나면 심신은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지만, 조남철은 신명을 바쳐 원고를 썼다.
연합신문의 바둑란은 바둑팬들의 인기를 독점하게 되었다. 파급효과는 컸다. 조남철을 찾는 새로운 손님들로 조선기원은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조선기원은 종로 2가 낙원동으로 장소를 넓혀 이전했다. 번화가였다. 낙원회관 2층 전체를 얻었다.
"예전에 비하면 대궐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넓었는 데도 얼마 안 가서 다시 장소가 좁아지더군. 어떤 때는 바둑판이 없어 그냥 돌아가는 사람도 많았어. 희망에 부풀었지… 이런 식이라면 일본기원을 따라잡는 것도 시간 문제 같았지. 그 무렵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정해지더군. 그래서 우리도 이름을 '대한기원'으로 바꾸고 조직을 새롭게 정비했어요. 일반 기원으로 머무를 수는 없는 것이잖아. 대한기원이 곧 우리 바둑의 총본산이 되도록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
단위결정대회·전문기사
낙원동 대한기원에는 일반인을 위한 대국실과는 별도로 자그마치 30평이나 되는 사범연구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조남철은 행복했다. 아침에 나와 연구실에 조용히 앉아 있노라면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 연구실 창가에 앉아 청년 조남철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꿈을 꾸면서 한국 바둑계의 청사진을 그려나갔다.
창가에 앉아 원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조남철에게 대한기원의 임원 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건냈다.
"조 사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사람이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아, 아닙니다. 그냥 이것저것… 기분도 좋고, 생각도 많고 그렇네요."
"뭘 그래. 조 사범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어."
"그러세요? 하하,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나하고 똑같은 생각인 것 같은데…"
그랬다. 대한기원이 문화단체로서 어느 정도 행정적 골격을 갖추게 되자 조남철과 대한기원의 임원들은 이심전심, '다음의 것'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전문기사'였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무 때나 바둑을 두며 즐길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 조남철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었다. 아무리 손님이 많고 잘 된다 하더라도 기원은 기원일 뿐이었다.
단순히 바둑을 보급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기원이 잘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남철의 목표는 바둑을 그냥 보급하는 것이 아니라, '바둑의 문화'를 보급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취미로 바둑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바둑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바둑만을 전문으로 하는 것도 어엿한 하나의 직업이 되고, 그걸로도 생활이 되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1950년 여름, 대한기원에서는 이색적인 바둑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단위결정대회'였다. 한국 바둑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전문기사제도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활동하던 노국수들과 추천 케이스 몇 명에게 일률적으로 초단이 인허되었다. 거기서 총 호선, 풀 리그로 대회를 시작해 평균 75점 이상을 얻은 사람에게는 2단, 80점 이상에게는 3단을 인허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해마다 봄·가을로 두 번 승단대회를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최초의 전문기사들
초단의 자격으로 '단위결정대회'에 출전한 사람은 모두 14명이었다. 민중식(閔仲植), 이석홍(李錫泓), 윤주병(尹周炳), 유진하(柳鎭河), 신호열(辛鎬烈), 권재형(權載衡), 김명환(金明煥), 윤승우(尹承禹), 이성범(李成範), 김봉선(金鳳善), 조남철 등과 추천 케이스로 참가한 변호사 엄보익(嚴補翼), 국회의원 배상연(裵相淵), 의사 민영현(閔泳鉉) 등이 그들이었다. 모두가 그 나름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이었다.
이석흥은 조선조 중종 때의 명신 이언적(李彦連)의 후손인데, 경북 월성 출신으로 호방한 성품이었으며 순장바둑과 내기바둑의 대가였다. 쌍립을 끊은 이야기, 내기바둑에서 한 번에 두 수를 두어 이긴 이야기 등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해방 후 정계의 실력자였던 이시영(李始榮), 조병옥(趙炳玉), 장택상(張澤相) 등과 교분이 있어 바둑계 인사들이 그를 통해 음양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유진하는 '현호실거사(賢秊室居士)', '청구산인(靑邱散人)' 등의 필명으로 부산일보와 동아일보의 바둑란에 기보 해설을 연재했다. 경북 안동 사람. 해박하고 도도한 문장력에 '삼국지(三國志)'를 인용하면서 풀어나가는 그의 바둑 해설은 바둑 팬들의 인기를 독점했다.
신호열은 전남 함평 출신인데, 세 살 때 흰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천하경무진(天下更無塵…'이라는 한시를 지을 정도의 신동이었으며 청년 시절에는 시서금기(詩書琴棋)에 두루 능해 '사절(四絶)'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특히 한학(漢學)의 대가였다. 한국기원 초창기에는 대회에 참가도 하고 2단에 승단하는 등 바둑 활동을 했으나, 본업인 학문으로 돌아가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교수로 연구와 강의에 전념하면서 고전국역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김명환은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인물이어서 여기서는 소개를 생략한다.
이성범은 전북 줄포 출신으로 말하자면 조남철과는 동향이다. 타고난 재주가 많아 바둑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청년 시절에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와 함께 시에 몰두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통상분야 외교관으로 활동했고 중년을 넘어서는 다시 사업가로 변신해 해운업으로 성공했다.
말년에는 바둑과 문학으로 돌아와 출판사를 열고 '신과학(新科學) 계통'의 서적을 번역 출간하는 한편 한국기원 이사장으로 바둑계 중흥에 일익을 담당했다.
바둑계는 통합되는데
단위결정대회를 마친 결과 조남철만이 평균 80점 이상을 얻어 3단으로 승단을 했고 나머지 참가자들은 전부 초단에 머무르게 되었다.
대회는 성공적이었다. 전문기사 제도의 토양이 만들어지고 씨앗이 뿌려졌다. 대한기원의 골격도 완성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노국수들이 대한기원으로부터 초단을 인허받고 대회에 대거 출전함으로써 그 동안 조남철의 대한기원과 노국수들의 경성기원으로 갈라져 있던 바둑계가 대한기원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쳐진 것이었다.
"단위결정대회가 성황리에 치러지는 것을 보면서 아버님 생각이 났어요. 노국수님들은 아무래도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라 완고하신 면이 조금씩 있었지. 일본식 바둑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계셨던 것도 사실이지. 그런데 그 분들이 어쩐 일인지 모두들 흔쾌히 참가를 해 주셨거든. 이게 다 따지고 보면 아버님의 음덕(蔭德)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지.
옛날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이 다동(茶洞)에 있었어요. 그때는 기원이란 건 없고, 오늘은 이 아무개 집 사랑방, 내일은 김 아무개 집 사랑방 하는 식으로 사랑방 바둑이었잖아. 그런데 우리 아버님이 수시로, 언제든지 방 하나를 열어 놓고 노국수들님께 장소를 제공했거든. 노국수님들은 물론 좋아들 하셨지 아마 그때 내 선친에 대한 의리를 지켜 준다는 마음으로 대회에 참가하신 것일 게야. 당시는, 야, 이거 내가 그래도 큰 일을 했구나 싶었는데, 나중에 나이가 더 들어 생각해 보니 그게 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더라 이거야."
조남철의 회고다.
그런데 단위결정대회가 끝나갈 무렵, 출전 선수들은 어디선가 멀리서부터 은은히 들려오는 포성(砲聲) 같은 것을 들으며 바둑을 두었던 생각이 난다. 비록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지만, 이른바 대동아전쟁을 경험한 그들의 귀는 그것이 포성이라는 것을 정확히 구분할 수가 있었다.
누군가 바깥에 나갔다 오더니 "전쟁이 일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38선 부근에서는 크고 작은 다툼이 수시로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소리에 크게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모두 바둑삼매에 빠져 있었다.
끊어진 다리
1950년 6월25일, 대한기원에서는 사람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어디선가 포성 같은 것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서울은 아직 평온했다. 26일에도 대한기원에서는 사람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긴급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와 작은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중인데, 우리의 용감한 국군의 반격으로 곧 진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전에도 그런 일은 자주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것이 결코 작은 무력이 아니었다. 북한 괴뢰군은 38선을 넘어온 정도가 아니라 의정부를 지나 서울로 쳐들어 오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가 들려왔다. 국군은 반격을 하기는 커녕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일패도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로 이미 들어왔다는 말도 있었다. 미아리를 넘었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대한기원의 사람들은 수시로 날아드는 온갖 풍문을 반신반의하면서 바둑을 두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다급해져 있었다. 우리가 잠깐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적의 기습을 받았던 탓에 현재는 우리가 다소 밀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전상 후퇴일 뿐이고, 대한민국 정부는 수도 서울만큼은 사수할 것이며 신속히 전열을 정비해 반격을 개시할 것이라고 했다.
대한기원의 사람들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바둑을 두었다. 그렇게 '단위결정대회'를 마쳤다. 그러나 대회를 마치고 나서 보니 작전상 후퇴라고 큰 소리치던 국군 수뇌부는 물론, 서울만은 사수를 하겠다던 이승만 대통령도 진작에 서울을 버리고 달아난 뒤였다. 그리고 한강 인도교는 허리가 끊어져 있었다.
대한기원에서는 단위결정대회와 아울러 제2회 전국 바둑선수권대회가 열렸었는데, 조남철과 김명환이 결승에 진출해 있었으며, 단위결정대회가 끝나면 곧 두 사람이 결승 3번기를 벌이게 되어
있었다.
한강 인도교가 끓어진 채 대통령도 국군 지휘부도 서울을 버린 마당에 더 이상 바둑을 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전쟁이 터졌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이제 누구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조남철은 바둑판 앞에 앉아 바둑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목숨처럼 귀한 바둑판
조남철은 쓴웃음이 나왔다. 전쟁이 무섭지는 않았다. 죽음에 대 한 실감도 없었다. 반드시 살아남아 바둑 보급을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전쟁이 곧 끝날지, 아니면 아주 큰 전쟁으로 변할지는 모르지만, 남들은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바둑을 두었다는데, 아무려면 원자폭탄보다 더하기야 하랴 싶기도 했다.
1945년 8월6일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해방이 되기 열흘 전쯤이었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교외에서는 마이니치(每日)신문이 주최하는 제3기 본인방전(本因埼戰) 도전 제2국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국자는 하시모토(橋本宇太郞) 본인방과 도전자 이와모토(岩本薰) 6단이었다. 그 바둑의 관전기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갑자기 엄청난 폭음이 들렀다.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무엇인가 번적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밝다고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밝음보다 훨씬 더한 밝음이어서 온 천지가 그냥 하얗게 바래지는 느낌이었다. 유리창들이 박살이 났다. 일곱치 바둑판이 마구 흔들리더니 바둑판 위에 놓였던 바둑돌들이 우르르 흩어져 버렸다. 이것들이 모두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랐다. 지진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는 지진에는 그래도 익숙해 있었다. 우리는 바둑돌을 주워 국면을 복원하고 주변 정리를 하고는 대국을 계속해 바둑을 끝냈다…
6월28일 아침에 조남철은 맨손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집을 나서니 서울 거리는 이미 북괴군의 탱크가 장악하고 있었다. 낙원동 기원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이리저리 몸을 숨겨가면서 기원에 가보니 하룻밤 사이에 기원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냥 주저앉아 통곡을 했어. 그렇게 서럽고 야속할 수가 없더군. 약도 오르고 말이야. 바둑판과 돌들을 성한 걸 골라내고 책들도, 타버리고 찢기고 엉망이었는데, 그것들도 추리고 해서 김명환 사범과 함께 리어카에 싣고 청계천에 살던 김유항 씨 집에 감추어 놓았어."
조남철은 지금도 김명환과 김유항, 두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남부여대(男負女載)의 행렬은 남으로 남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남철은 그들처럼 먼 길을 떠날 형편이 못 되었다
부친이 병환 중이었고 아이들은 어렸다. 조카도 데리고 있었다. 조카는 바로 상연(祥衍, 조치훈의 큰 형)이었는데, 상연은 그때 열 살이었다.
조남철 일가는 양수리에서 강을 건너 외가쪽 친척이 있던 경기도 광탄으로 피난을 갔다.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兩水里)는 이름 그대로 북한강과 남한강, 한강의 두(兩) 물줄기(水)가 만나는 곳으로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러나 경치를 감상할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광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지만, 경기도와 강원도의 접경지역이어서 풍물은 오히려 강원도의 분위기였다. 강원도는, 요즘은 사정이 좀 달라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바둑의 불모지로 통했을 정도로 바둑 인구가 적었다. 조남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인민군으로 끌려가지 않으려면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식솔의 생계를 조남철의 아내가 떠맡게 되었다. 조남철의 아내 최충순(崔忠訓)은 구례의 3백석 지주의 딸로 태어나, 조남철을 만나기 전까지는 고생이라고는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런 아내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다니며 식량을 조달했다.
죽음이 지척인 참담한 시절이었으나 시간은 흘러갔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밤이면 휘영청 보름달이 밝았던 생각이 나니 추석 무렵이었을 것이다.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능선을 타고 허겁지겁 패주하는 괴뢰군들이 보였다.
조남철은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난장판이 된 집을 수습하고 바둑판 몇 조를 꿰어 맞춰 차려 놓았으나, 위로차 들러주는 애기가들이 몇 명 있었을 뿐, 바둑을 두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웃음이 나요. 그 난리통에 누가 바둑을 두겠어. 바둑을 둔다면 그게 정신병자지. 그런데 기원을 재건한답시고 바둑판 몇 개 놓고 손님을 기다렸으니, 코미디가 따로 있어?
내가 참 한심한 사람이었어. 덕분에 아내가 고생을 죽도록 했지. 허허…"
소집영장·'행마의 기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별 수 있나. 노가다(막노동)라도 해야지. 근데 그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하마터면 허리만 다칠 뻔했어. 도저히 안되겠더군 그래서 또 뭘 했느냐. 채소장사를 했지, 자전거 타고 저쪽 섬까지 가서 물건을 받아다가 파는 거야. 내가 바둑 아닌 걸로 돈을 벌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그러다가 중공군이 쳐들어온 거지. 아직 1·4후퇴는 아니었고, 1·4 후퇴 한 달쯤 전이었는데, 서울 사수(死守)'에 속았던 시민들은 이번에는 서둘러 서울을 떠났어. 나도 보따리를 싸고 있는데, 소집영장이 날아들더군."
나라의 부름이었기는 하지만, 그것은 곧 죽음에의 초대장이었다. 영장을 기피했다고 해서 잡으러 쫓아 올 사람도 없었으므로 얼마든 지 달아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이야 어차피 하늘의 뜻이었다. 하늘이 내게 바둑 보급의 길을 허락하셨다면 살려 주실 것이요,그게 아니라면 싸움터에서 죽든, 피난길에서 죽든 마찬가 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왕 죽을 목숨이라면 그래도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나은 것 아닌가.
소집장소는 비원(秘苑)의 돈화문 앞이었다. 아수라장이었다. 오합지졸이었다. 조남철은 오합지졸의 일원이 되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 훈련소로 떠났다. 할아버지와 큰 형님과 아내가 전송을 나왔다. 할 말이 없었다. 조남철은 흐느끼는 아내의 손을 잡고 "그 동안 바둑책을 내려고 원고를 써둔 것이 있는데, 그걸 내가 만일 전사하더라도 나중에 꼭 책으로 내도록 하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돌아섰다. 1950년 12월 8일, 28세의 청년 조남철은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었다.
"그 말 때문에 내가 두고두고 아내에게 기를 못 펴고 살잖아, 허허… 말하자면 생사의 이별 장면인데, 이거 살아서 다시 만날 수나 있느냐, 없느냐 하는 판에 이것저것 처자식 걱정을 해야지, 그래 기껏 한다는 소리가 바둑책이 다 뭐야. 내가 그렇게 부족한 사람이에요."
그 원고는 전쟁이 끝난 후, '우리 바둑책'이 전무하던 시절, '행마의 기초'라는 책으로 엮어져 첫 빛을 보게 되거니와, 입문 단계의 애기가를 위한 바둑 참고서로는 지금도 그만한 책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명저(名著)였으며, 뒤따라 나온 '행마의 급소'와 함께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바둑을 배우려는 사람이면 모름지기 한번은 읽고 지나가야 할, 필독서였다.
생사를 넘나든 횡성 전투
조남철은 대구 훈련소에서 최소한의 훈련만을 받고는 곧장 전선(戰線)에 투입되었다. 배운 것이라고는 소총을 어떻게 다루며 쓸 때는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과 수류탄 던지는 법, 그리고 포복하는 요령 정도였으니, 훈련이랄 것도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전황(戰況)은 그만큼 다급했다. 조남철은 1951년 1월 3일 천안에 배치되었다.
1·4 후퇴 하루 전이었다. 피난민들의 행렬과는 반대로 조남철이 속한 부대는 북진을 거듭해 한강을 건너고 양평의 용문산을 넘어 횡성에 이르렀다.
"식량 보급이 잘 될 때도 있었지만, 북진할수록 그렇지를 못했지. 비어있는 집들을 뒤져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 그랬어. 그런데 희한한 것은, 내가 평생 몸무게가 45킬로를 넘어보지 못했어요. 딱 한 번 살이 쪄봤는데, 바로 그때야. 먹으며 굶으며 하는데도 살이 찌더군."
횡성에서부터는 행군이 지지부진이었다. 낮에는 쉬고 밤이 되어야 움직였다. 최전선이었다.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빨리 중공군을 만나 죽든 살든 싸우고 싶었다.
죽을지도 모른다. 요행히 살아남는다 해도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 오른팔 하나만이라도 무사한 상태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나는 바둑을 둘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월 2일. 산중의 해는 짧았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소대장의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마침내 전투였다. 고지(高地) 쟁탈전이었다. 그렇게 높은 고지는 아니었다. 중공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남철은 제1 돌격조로 선발되었다. 수류탄을 던지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조남철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돌격했다. 자세를 낮추어야 한다고 배웠지만, 마 음대로 되지 않았다. 조남철은 수류탄을 던지고 돌아섰다. 그 순간 앞가슴 한복판이 불에 덴 듯 화끈했다. 조남철은 고꾸라졌다. 조남철의 머리 위로는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이 줄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엄청난 통증이더군.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그 엄청난 통증 속에서 오히려 아, 나는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야. 안도감이 생기는 거야. 고통의 희열이랄까."
조남철의 부대에는 우연히도 서울의 이웃집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그가 쓰러진 조남철을 등에 업고 뛰었다. 조남철은 원주로, 원주에서 다시 대구의 육군 병원으로 후송이 되었다.
육군병원이라고는 했지만, 부상병들을 수용하고 치료하기에는 모든 것이 태부족이었다. 병실은 비좁아 터져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가 부족해 진료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부상병도 많았다. 약품도 물론 부족했다. 병실의 생활은 고달팠고 불안했다.
"그러던 차에 퍼뜩 장경근(張暻根)씨 생각이 나더군. 당시 국방차관인가였거든. 무작정 편지를 썼지. 주소도 없이 그냥 대한민국 국방부 장경근 차관 귀하라고 말이야. 야, 이거 전쟁 중에 편지 같은 게 제대로 들어갈까 의심스러웠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이었어. 그런데 그 편지가 정확하게 배달이 된 거야. 하늘이 도왔던 거지. 돌이켜 보면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이 내 생애 몇 번인가 있었어요. 그런 걸 생각하면 참 감사하지 않을 수 없어요. 물론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겠지."
자유당 정권 시절, 국방부 차관, 법무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낸 실력자였는데, 조남철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훗날 한국 바둑계의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다. 정치인으로서의 공과(功過)와는 별개로, 바둑계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은인의 한 사람이었다.
장경근 차관은 편지를 받고는 깜짝 놀라 즉시 비서관 두 명을 대구 육군병원으로 보내 조남철을 위문하고, 최고급의 치료를 최우선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조남철은 졸지에 육군병원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게다가 고재필(高在泌) 대령을 또 만나게 되었다. 고 대령도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고재필은 조선기원 시절부터 단골 손님이었으며 5·16 후 보사부 장관을 지냈는데, 역시 바둑계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주말이면 고 대령의 지프를 타고 대구 시내로 나가 바둑을 두었다. 대구는 예로부터 바둑열이 높은 곳이었다. 대구의 바둑팬들은 뜻밖의 귀한 손님을 환영해마지 않았다.
부상을 당한 덕분에, 목숨을 건진데다가 귀인을 만나 군대 생활 말년을 신선처럼 지내던 조남철은 피난 수도였던 부산으로 전출되었다가 8·15 광복절에 명예제대를 했다.
"군복 차림으로 신발주머니 하나 달랑 들고 부대 정문을 나서니 한 바탕 꿈을 꾸고 난 기분이더군. 일장춘몽이란 말을 그때처럼 실감한 적이 없었어. 부러울 것 없는 신선에서 정처 없는 나그네로 전락하는 게 순간이더군.그나저나 돈이 한 푼도 없어 앞 길이 캄캄하더군. 차라리 병원에 계속 있는 게 낫다 싶었어. 허허…."
사설기원으로 새 출발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 부산에는 김병호(金秉浩)라는 애기가가 있었다. 바둑 실력이 준프로급이었다 그의 집은 부평동 번화가에 있었는데, 꽤 넓은 저택이었다. 김병호는 맨발로 뛰어나오며 조남철을 반겨 주었다. 김병호의 집 2층 사랑은 이미 애기가들의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이 거기에 다 모여 있었다. 유진하, 이석홍 같은 노국수들이 "어디 갔다 이제와"하면서 너털웃음을 웃었고, 괴뢰군들의 눈을 피해 가며 함께 리어카에 바둑판을 실어 날랐던, 고마운 사범 김명환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며칠을 잘 쉬었어. 사람이 참 간사한 동물이에요. 제대를 했으면 당연히 집으로 가야지 식구들은 얼마나 애를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겠어 물론 차비도 없었지만, 아무튼 거처가 생기고 숙식이 해결되니까, 그제야 고향 생각이 나더군 부리나케 부안으로 달려갔지. 그런데 천만다행인 것은, 까딱했으면 아버님 임종도 못 지킬 뻔했어요. 나를 보시고는 곧 돌아가셨거든. 참, 우리가 산다는 게 아슬아슬한 일이야. 삶 자체가 줄타기의 연속이거든. 옛 어른들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하시더니, 정말 그랬어."
부산으로 돌아온 조남철은 심기일전, 대한기원의 재건을 위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조남철은 재건 전략을 수정했다. 우선 사설기원을 차려 세를 불린 다음 대한기원을 재건한다는 것이었다. 그 작전이 맞아 떨어졌다. '상이용사 조남철'은 대한상이용사회의 이응준(李應俊)장군의 배려와 부산 애기가의 도움으로 상이용사회 요양원의 방 하나를 얻어 1952년 2월, 새 출발의 간판을 올렸다. 기원은 대성공이었다. 불과 3개월 만에 더부살이를 면하고 중앙동으로 진출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지. 그런데 정치가들은 피난을 와서도 싸움질만 하고 있었어. 비상식과 비정상이 판을 치는 그 와중에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었던 단체나 모임으로는, 아마 중앙동 기원이 유일했을 게야.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부심이 생겨요. 바둑이란 게 참 대단한 거야."
그 무렵 피난 수도 부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집권을 위한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었다.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할 경우 대통령에 재선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51년 12월1일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러나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개헌안을 부결시키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52년 4월에는 거꾸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해 이 대통령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한 달쯤 후, 헌병대가 견인차를 동원해 국회통근버스를 통째로 끌고 갔다. 10명의 국회의원이 국제 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구속이 되었다.
김성수(金性洙) 부통령이 이 대통령을 격렬히 비난하면서 이에 대한 항의로 사퇴성명을 내고, 국회도 석방결의안을 채택했으나 이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에 국회 양원제를 곁들인,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거부할 경우 국회를 해산하겠다고 협박했다. 발췌개헌안은 결국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기립투표로 통과되었다. '부산 정치파동'이었다.
"정치가들 하는 꼴을 보니, 이거 잘못하면 전쟁에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더군. 물론 그 무렵엔 한편으로는 휴전 협상이 진행 중이기도 했으니까, 사정이 좀 다르긴 했지만, 대신 전투는 더욱 소모전이었어 아무튼 적과 전쟁을 하는 마당이잖아. 똘똘 뭉쳐도 부족한 판에 싸움질들을 하고 있으니 그게 말이 돼 이승만 대통령이 너무 했던 거지. 에라, 모르겠다, 나는 내 할 일이나 열심히 하자고 생각하고 뛰었지."
정국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거리에는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아내의 길' 같은 노래가 피난민들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었다. 조남철의 중앙동 기원은 매일 만원사례였다. 중앙동 기원은 기료(棋料)가 색달랐다. 기료란, 손님이 기원 주인에게 내는 돈이다.
요즘은 대개 기료가 4천 원 아니면 5천 원인데, 한 판을 두고 나오든, 하루 종일 죽치고 있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중앙동 기원에서는 소정의 기료 외에 대국을 할 때마다 진 사람은 커피 반 잔 값을 부담하도록 만들었다. 손님들은 대국표를 옆에 놓고 바둑을 둔다. 한 판이 끝날 때마다 기원 종업원이 승패를 확인하고 대국표에 표시를 한다. 손님은 기원을 나설 때 그 대국표를 카운터에 제출하고 패국 수에 따라 요금을 지불하는 것인 데, 너무 많이 진 사람은 할인을 받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외상도 가능했다고 한다.
요즘의 기원들이 참고할 만한 운영 방법이다. 시간에 관계없이 일정액을 받는 것은 모순이다. 그래서는 어차피 집세를 내기에도 벅차게 되어 있다. 요금 체계에 변화가 없는 한, 오늘날처럼 새로 개업하는 기원과 문을 닫는 기원의 숫자가 비슷할 수밖에 없다.
사단법인 한국기원 출범
서울이 수복되었다. 1953년 9월29일, 조남철은 바둑판, 이삿짐과 함께 트럭을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부산에서 보낸 2년은 즐겁고 유익했다. 많은 바둑팬을 새로 사귀었다. 바둑 행사도 많았다. 중단되었던 아마추어 선수권대회를 속개해 두 번이나 치렀고, 김명환 사범과의 3번기도 마무리가 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조남철은 종로 2가에, 10여 평 짜리 방을 얻어 간판을 걸고 '환도(還都) 기념 바둑대회'를 개최했다. 바둑대회는, 나중에는 참가자를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대성황이었다. 바둑대회 이후에도 기원은 연일 초만원이었다. 장소를 또 옮겨야 했다. 그러던 중에 나타난 것이 명동 동사무소 2층이었다. 적산가옥이었는데, 넓었다.
조남철은 다시 장경근을 찾아가 대한기원을 재건하고 싶다는 뜻을 말했다. 장경근은 즉석에서 흔쾌히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
"1954년 1월 17일이었어. 날짜까지도 아직 잊어 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지. 명동기원에서 대한기원 재건 회의가 열렸어요. 대한기원의 전(前) 임원이 전부 참석한 가운데, 장경근 씨가 주재를 했지. 그런데 회의 결과는 엉뚱하게도 대한기원을 해산하고, 명칭을 '한국기원(韓國淇院)'으로 바꾸되 사단법인체로 하자는 것이었어요.
나는 무조건 오케이였지. 장경근 씨는 당시 자유당의 중진으로 시쳇말로 빽이 좋았어. 바둑계 발전을 생각한다면, 나 같은 사람은 일선에서 열심히 뛰고,장경근 씨 같은 분이 단체장으로 앉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거든. 실제로도 그렇잖아.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은 허전하고 서운하더군. 어떻게 키워온 대한기원인데 하는 생각에 말이야. 장경근 씨는 키가 작고 뚱뚱했는 데, 성격이 아주 서민적이고 소탈한 사람이었어요. 특히 바둑에 대한 애착이 대단해서, 실력도 셌지, 바둑 관계 일이라면 언제나 발벗고 도와주었어요. 이사회를 자주 열었는데, 기원에는 손님들이 있으니 장소가 있나. 그래서 다방의 구석진 자리를 주로 이용했지. 그런데 장경근 씨는 개의치 않고 회의 때마다 빠짐없이 주재를 하는 거야."
해방 후 조남철이 남산동 후미진 곳에 한성기원의 간판을 건 지 10년 만에, 11번이나 쫓겨다닌 끝에 마침내 '사단법인 한국기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사단법인 한국기원의 공식 출범일자는 1954년 1월 28일. 한국기원은 정부가 인정하는 문화단체가 되었고, 한국 바둑의 총본산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재단법인 한국기원'의 모체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장경근과 조남철은 황금콤비였다. 사단법인 한국기원에는 총재나 부총재도 있었지만, 기원 운영을 주도한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물론 야전군 사령관은 조남철이었다. 그리고 조남철을 도와 헌신적으로 일했던 또 한 사람의 사범이 있었다. 이일선(李日善)이었다.
"장 이사장이 당시 만으로 마흔 셋 인가였고, 내가 서른 하나였으니 모두들 한창 일할 나이였지. 그리고 이 사범은 나보다 열 살이 위였어요.부산 피난 시절에 알게 되었지, 어느 날 우연히, 본인 말로는 부산에 볼일이 있어 내려왔다가 시간이 남아서 돌아다니다가 기원 간판을 보고 반가워서 들어왔다는 건데, 바둑이 1급이라는 거야. 그때 1급이라면 프로기사만큼이나 대접을 받았어요. 지금은 아마추어도 3단이네 5단이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게 어디 있었나?
아무튼 그래서 바둑을 두는데, 체격이 건장했는데, 체력도 엄청난 거야.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체력이 좋은 사람은 별로 못 본 것 같아. 게다가 아주 심한 골초였어. 밤새도록 담배를 피워대면서 바둑을 두더군. 그러더니 내일 올라간다던 사람이 올라갈 생각을 안 하는 거야. 그렇게 내일 간다, 내일 간다 하면서 반년을 머물렀어요. 가히 바둑광(狂)이었지."
이일선은 인천의 유지였다. 집이 부자였다. 젊을 때는 금융조합에 근무하면서 축구선수로도 활약했던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금융조합은 농협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지. 그 이일선 씨를 서울에서 다시 만났던 건데 무조건 나를 돕겠다고 해서 한국기원 총무 겸 사범을 맡겼어요. 초창기 어려울 때 참 많은 일을 했어요."
이일선은 그 후 자신의 승단(昇段)이나 기전 성적보다는 인천의 바둑보급과 기재(淇材)양성에 앞장서 김익영(金益英) 6단(작고), 김덕규(金德奎) 7단, 유병호(劉丙虎) 7단, 장수영(張秀英) 9단, 서능욱(徐能旭) 9단 등 쟁쟁한 후학을 배출했다. 이일선은 93년에 4단으로 은퇴해 98년에 세상을 떠났다.
"노년은 불우했어요. 그 많던 재산 다 잃어 버린데다가 중풍으로 쓰러지기도 했어요. 바둑계로서나 내 개인적으로 정말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이었지. 말년에 즘 도와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이 아파요."
명동 동사무소 2층의 한국기원은, 승단대회와 전국 바둑선수권 대회가 열리는 기간을 제외하고는 일반 애기가들에게 개방이 되었다. 두 사범에게 지도대국을 받고자 하는 사람도 줄을 셨는데, 그들에게는 '교수권'을 끊어주어 한 판에 한 장씩 받고 지도를 해 주었다. 이를테면 쿠폰제 지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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