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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역사 문화 스크랩 정몽주와 정도전 누가 옳았는가?
백온/권영섭 추천 0 조회 60 18.12.23 08: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정몽주 정도전, 누가 옳았는가?

 

   고려말 기득권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 최영과 정몽주이고, 신흥무장세력은 이성계와 정도전입니다.

   기득권세력은 신망을 얻고 있는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음모로 요동정벌계획을 꾸밉니다. 신흥무장세력을 전쟁터로 몰아 죽이자는 속셈으로 요동정벌을 단행한 것이지요.

   이렇듯 요동정벌계획은 단순히 민족적인 문제가 아니고, 정치적 음모였습니다. 이것을 우리 역사에서는 민족적 사건으로 과대포장하고 있습니다. 요동정벌계획은 사회적 모순을 감추려는 기득권세력의 추악한 정치적 음모가 들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민족적 차원으로 겉칠을 하고 속으로는 신흥무장세력의 우두머리 이성계를 죽이고 기득권세력에 대한 위험요소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는 거지요.

   결국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된 이성계와 정도전의 신흥무장세력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최영, 조민수 등 권문세족의 기득권세력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경제기반을 만들기 위해 귀족들의 토지(私田)를 회수하는 과전법(科田法)의 단행합니다. 이는 토지소유권을 국가가 갖고 농민들에게 경작권을 돌려주는 제도로서 빈부격차 완화, 국가재정 확충, 국방력을 강화 등의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1392, 드디어 고려에서 조선으로 그 왕조가 바뀌는 역성혁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와 같은 개혁이나 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대통령(김대중, 노무현)이 등장하여 나라개혁을 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표방해도 늘 용두사미가 되는 것은, 수구적 기득권세력들이 우리 사회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교실 제6강

일시 :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장소 : 성공회영주교회(천제욱신부)

강사 : 황보윤식 전 인하대 교수

주관 : 영주시민연대, 민실련, 성공회영주교회

대상 : 영주시민 누구나

 

1강 : 단군조선은 실존의 역사다!

2강 : 부족국가인가 초기국가인가?

3강 : 만주역사와 동북공정의 실체는 ?

4강 : 통일 신라인가, 남북국역사인가?

5강 : 삼별초, 반란인가 항몽인가?

6강 : 조선건국, 정몽주와 정도전, 누가 옳았는가?

7강 : 당쟁인가 붕당정치인가?

8강 : 실학자의 근대의식은 무엇인가?

9강 : 왜 일제식민지를 당했는가?

10강 : 식민지 근대화론은 옳은 생각인가?

 

★ 강사 황보윤식 교수는 인하대 강단에 섰었다. 몇 년 전 소백산자락에 들어와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현재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시민모임〉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 〈민실련 민본주위사상연구소〉에 관여하고 있다. 저서로는〈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씨올의 희망과 분노〉〈생각과 실천〉〈함석헌식 현실인식 비판과 역사 인문학〉등이 있다.

 

 

1. 고려 말 제1의 모순-기득권세력과 개혁세력

 

   고려라는 나라도 망할 때가 되어 모순(矛盾: 지배층의 부패와 타락과 민심의 이반. 이것을 자기모순, 또는 사회적 모순이라고 합니다)이 극대화 됩니다. 수구 기득권세력과 신흥 개혁세력들이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전날도 이야기를 했지만, 사회모순을 변증법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물(정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는 어떤 사물도 영원할 수가 없는 어떤 물건도 썩지 않는 게 없습니다. 돌도 풍화작용을 일으켜 수천 수만 년 이후는 모래가 되고 모래는 다시 더 작은 모래가 되어 흙으로 변합니다. 흙도 다시 썩어서 공중으로 사라집니다. 이렇게 사물(물체)이 썩듯이 사람이 만든 모든 정책도 시간이 가면 틀린/썩은 정책이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모순이라고 합니다. 모순을 변증법에 대입하면, 모든 물체/정책을 일단 정(正, 모순이 내포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정(正)도 물체가 썩듯이 정책도 틀리게 됩니다. 이것을 반(反,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세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정(正)과 반(反)은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정(正)을 만들어냅니다. 기존의 정(正)과 이에 반발하는 반(反)이 새로운 형태의 물체/정책을 만들어 내는 것을 합(合, 止揚/합의에 의한)이라 합니다. 사회적 모순 정도에 따라 반(反)의 세력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정(正 1)의 모순이 심하면 반(反1)의 성격도 거칠게 나옵니다. 이러한 반(反1)의 모습을 지배층들이 기록한 역사에서는 반란(叛亂)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반란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려는 지배층 간의 갈등과 대립입니다. 한편 사회적 모순에 대한 피지배층의 저항행동은 반란이 아니고 기의(起義)입니다. 피지배층의 저항행동이 커지면, 이러한 행동을 사회개혁운동이라고 하고 이러한 개혁운동이 더 확대되면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정과 반이 타협하여 새로운 합을 만들어내어 사회를 전쟁이 아닌 평화의 방법으로 만들어가는 형태를 지양(止揚)이라고 하고 이를 정치나 사회에 적응할 때는 지양이론(止揚理論)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려 말은 기존의 수구 기득권세력과 신흥 개혁세력이 서로 자기 이익을 둘러싸고 극한 대립을 하게 됩니다. 수구 기득권세력이라고 하면,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유, 사회적 특권, 문화적 독점을 모두 장악(쥐다)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신흥세력은 과거를 통하여 이제 겨우 관리가 되었기에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유, 사회적 특권을 조금밖에 가지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고려말 기득권세력의 대표적인 사람은 무신 최영과 문신 정몽주입니다. 그리고 신흥세력은 무신 이성계와 문신 정도전입니다.

 

고려사회는 분명히 봉건사회입니다. 봉건사회라는 말은 서양역사학/사회학에서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이를 우리나라 역사에 적응하면, 경제(생산)를 담당하는 계층이 누구냐 하는 문제에서 전체사회를 구성하는 인구의 먹거리 생산을 담당하는 계층이 농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농민의 삶의 형태가 마치 노예와 같은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이를 서양역사에서는 농노(農奴=농민존재+ 노예 같은 신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농민의 양태는 고려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굳이 한국역사에서는 이를 부정하려고 하지만, 사실 고려시대 농민은 말만 평민/양인이었지만,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습니다.

 

고려 말은, 분명히 모든 생산수단(인간이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는 모든 도구들=농토, 농기구, 가축, 농민의 노동력을 총망라하여 생산수단이라고 합니다)을 지배층인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족층에서도 앞의 시간에서도 말했지만, 기득권과 신흥 귀족 사이에 생산수단을 소유한 양이 서로 달랐습니다. 기득권층은 생산수단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막 과거를 통해 들어온 신흥 귀족들은 생산수단을 적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권력의 무게도 달랐습니다. 기득권층은 큰 권력(높은 관직)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흥 귀족들은 작은 권력(낮은 관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귀족세력끼리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신흥 귀족들은 권력과 재산을 자기네도 많이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사람의 욕심이지요. 하여 신흥 귀족들은 기득권층이 가지고 있는 재산과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면, 이제까지 고려의 기득권층이 만들어내고 대대로 지켜온 경제구조와 정치구조를 바꾸지 않은 한, 자기네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재산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없다는 생각을 작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곧 정(正)에 대한 반(反)이라는 역사현실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기득권세력은 정(正)이 되고 기득권세력에 대한 불만을 가진 신흥귀족은 반(反)이 됩니다. 정(正)과 반(反) 사이에 나타난 사회적 모순=고려의 자기모순의 현실인식은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유(재산)의 독점입니다. 곧 모순의 핵심내용은 나라의 제도(制度)입니다. 여기서 기득권층은 고려의 제도에 안주(安住)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고, 신흥귀족은 고려의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고려말 모순(제도와 구조)을 놓고 기득권세력(正)과 신흥귀족(反)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순의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을 역사적 사실에서 요동정벌계획과 위화도회군이라고 합니다.

 

2. 모순의 극복노력- 反(최영과 이성계의 대립)

 

고려말 기득권세력(권문세족)의 대표적인 인물이 무관 최영과 사대부 정몽주이고, 신흥 무관(무장세력)과 신흥귀족(사대부)은 이성계와 정도전입니다. 기득권세력(최영을 중심으로 하는)들은 당시 왜구의 격퇴와 홍건적의 격퇴로 고려사람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는 신흥 귀족세력의 대표격인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그것이 요동정벌계획입니다.(1388) 요동(遼東)은 남만주(南滿州)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으로, 고조선의 중심영역으로서 요동반도(랴오둥 반도)를 이북이 포함됩니다. 이 일대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인과 중국인, 그리고 만주 북방민족(여진=말갈, 거란) 사이에 늘 영토분쟁을 일으켰던 지역입니다. 진나라 이후 중국영토로 남게 된 지역입니다. 그러다가 고구려 광개토왕이 다물사상에 의거하여 다시 회복하고 요양에 요동성과 안시성을 쌓고 한족 및 북방민족을 막아내는 요새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통일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요동지역이 당나라에 귀속된 지역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발해가 건국되면서 우리영토가 되었다가 발해가 요나라에 망하면서 거란 땅이 되었다가 요가 금에게 망하면서 금(여진)의 땅이 됩니다. 그리고 명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만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명은 철령 이북의 요동땅이 원의 지배 하에 있었다고 이 지역의 땅을 명에 반환하라는 요구를 해들어 옵니다. 철령의 위치에 대하여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기존학계는 함남 안변군과 강원 회양군 (현 강원 고산군과 회양군)의 경계에 있는 고개라고 말하지만 신진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오늘날 중국 요양성, 심양근처에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아마도 요동정벌이라고 할 때, 요동은 심양근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곧 명이 만주경략의 요충지로 삼았다면, 철령은 한반도 안이 아니고 두만강 밖이 맞다고 봅니다.

 

여기서는 철령위 위치가 문제가 아니고 고려 내의 문제이기에 다시 최영과 이성계의 문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최영은 명이 요동에 설치하려는 철령위 설치문제를 기회로 고려의 제도개혁을 요구하는 신진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요동계획을 하게 됩니다. 곧 최영의 전략을 보면, 겉으로는 원명교체기를 이용하여 명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우리 땅 요동 땅을 되찾는다는 명분이지만 내면은 음모입니다. 최영의 반대파(신흥 무장세력)를 전쟁터로 몰아 죽이자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성계를 이성계(우)와 조민수(좌)를 좌우도통사(左右都統使)로 임명하고 요동정벌을 단행합니다.(1388) 이렇듯 불행하게도 요동정벌계획은 단순히 민족적인 문제가 아니고, 정치적 음모였습니다. 이것을 우리 역사에서는 민족적 사건으로 과대포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요동정벌계획은 사회적 모순을 감추려는 기득권세력의 추악한 정치적 음모가 들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민족적 차원으로 겉칠을 하고 속으로는 신흥무장세력의 우두머리 이성계를 죽이고 기득권세력에 대한 위험요소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는 거지요.

 

결국 이러한 정치적 음모를 알아차린 이성계는 기득권세력에 속했던 조민수를 꾀어 요동정벌을 반대하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1388)을 하게 됩니다. 위화도회군은 최영의 운명을 천당에서 지옥으로 끌어내리는 큰 사건입니다. 위화도회군으로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게 된 신흥귀족(무장세력과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최영, 조민수 등 권문세족을 일거에 몰아냅니다. 그리고 기득권세력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경제기반을 만들기 위해 경제개혁(당시 명칭은 전제개혁田制改革, 反)을 단행합니다. 곧 고려의 사회적 모순의 하나인 토지제도의 모순을 개혁하는 셈입니다. 이 과정에서 토지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은 당연히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세력이겠지요.

 

3. 모순의 극복노력(반)- 정도전과 정몽주의 대립

 

고려말 사회적 모순의 하나인 토지제도(田制)의 개혁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신의 난(무신들의 권력쟁탈) 이후 무신귀족들은 정당성과 정통성이 없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병(私兵, 개인적으로 거느리고 있는 군인들)과 가신(家臣, 개인적으로 두고 있는 부하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재산)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재산은 곧 땅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땅의 소유가 필요했습니다. 그리하여 힘이 없는 농민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거나(이를 토지점탈土地占奪, 또는 겸병兼倂이라고 합니다), 사패(賜牌, 나라가 주는 토지개발허가서) 등을 독점하여 산간과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자기 땅으로 만드는 짓거리를 하면서 어마어마한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면적의 땅을 농장(農莊)이라고 합니다. 농장은 처간(處干, 소작인을 말한다)과 노비들이 경작하였습니다.(이를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려시대 농장의 처간과 노비는 서양의 봉건시대 영주(領主)들의 장원(莊園)을 경작한 농노와 같은 신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토지제도(正)의 모순은 신흥귀족(무장세력과 사대부)들이 소유할 땅을 적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기득권세력에 반발하여 신흥귀족이 위화도회군을 일으키고 첫 번째로 단행한 제도개혁(反)은 토지제도개혁(경제개혁)이었습니다. 위화도회군으로 기득권세력의 영수였던 최영이 제거되었지만, 고려의 모순현상 중 하나인 경제개혁을 하려는 과정에서 또 다시 기득권세력과 개혁세력 간의 갈등․대립이 일어납니다. 곧 전통시대 나라나 귀족에 있어서 경제기반은 토지입니다. 그래서 토지제도에서 마찰이 생기는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전제개혁과정에서 기득권(세습귀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사전(私田, 농장=궁원전宮院田·사원전寺院田·양반전(兩班田=공음전,군인전軍人田)·기인전其人田)의 폐해만 혁파하자는 주장이었고 신흥 귀족들은 전면적으로 사전을 혁파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무슨 정책을 만들면서 꼭 자기 개인의 이익을 먼저 머릿속에 두고 주장합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공적(나라와 사회 전체) 이익을 생각하며 제도개혁을 추진하자는 사람은 적습니다. 사실 고려말 사전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이면에는 자기이익을 만들어 보겠다는 속셈이 머릿속에 들어있었지요. 그래서 전면적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신흥귀족)은 사전의 전면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사상적 근거는 성리학의 도덕주의와 한당유학의 공리주의를 절충한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전을 많이 가지고 있는 개혁론자(이를 온건개혁파라고 합니다, 정몽주, 이색 권근이 대표)들은 사전의 폐해만 없애는 방향(토지소유권을 인정하는)에서 토지를 개혁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사상적 근거는 성리학의 명분론과 왕도주의사상이었습니다. 이러한 논쟁을 사전구폐법(私田拘弊法) 논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같은 개혁세력인 정도전과 정몽주는 생각을 달리하면서 분열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위화도회군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성계의 지지를 받고 있던 정도전일파(이를 급진개혁파라고 합니다)의 전면적 토지개혁론이 힘을 받아 결국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라는 정치기구를 통하여 사전혁파를 단행하고(1388, 고려우왕 14.8)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개인적 토지(私田)를 나라에서 회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곧 개혁세력에 의해 기존사회(正)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혁명(反)이 시작된 셈입니다. 토지개혁은 사전혁파가 시작된 3년 뒤에 새로운 토지분급법인 과전법이 마련되면서 완성됩니다.(1391, 공양왕 3)

 

고려말 토지제도개혁의 핵심골자는 과전법(科田法)의 실시입니다. 원래 과전법은 중국 서진(西晉) 때에 처음 나오는 토지제도입니다. 즉 토지국유제 원칙 아래 농민(정남丁男, 정녀丁女 모두)에게 논밭을 일정하게( 남자 50≥여자 20) 할당하고 나라에서 조세를 징수하던 토지 제도였습니다. 정도전과 조준의 과전법에 근거한 토지개혁사상은 성리학의 국가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한 《주례》(周禮) 사상을 도입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례의 국가사회주의사상이란 철저한 공개념(公槪念)입니다. 토지의 공개념이란, 토지소유권을 국가가 소유하고 농민들에게 경작권을 돌려주는 제도입니다. 그러니까 농민은 나라와 귀족에게 이중으로 물던 세금(조세)을 나라에만 내게 함으로써 농민의 조세 부담은 줄면서 국가는 조세수입이 늘어나게 되는 제도입니다. 개혁세력의 토지개혁을 하는 명분은 이렇지만, 그 뒤에 숨은 속셈은, 1) 빈부격차를 완화하여 민심을 얻고, 2) 조세권을 국가가 다시 찾아옴으로써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여 2-1)국방력을 강화하여 혁명을 하는데 나라밖 외부세력의 침입이라는 방해요인을 사전에 차단하면서, 2-2) 개혁세력들의 개혁기반을 마련해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득권세력(正)에 반발하여 개혁세력(反)들이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권력을 장악한 뒤 고려말 사회적 모순의 하나인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과전법을 실시함으로써,

 

1) 수취제도도 따라서 개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수조권 중심의 조세제도가 소유권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곧 토지소유권을 나라에서 일괄 통제함으로써 농민들은 토지소유주인 나라에 세금/조세를 내는 일원화가 추진되었습니다. 그 만큼 나라/국가의 재정(財政)은 튼튼하게 되었지요. 나라의 재정이 튼튼해 졌다는 말은, 나라권력을 장악한 세력들의 정책추진이 쉽게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말하면, 개혁세력들이 기득권세력(권문세족)들이 장악하고 있던 나라의 경제기반을 자신들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2) 과전법 실시는 고려의 지주전호제로 시달려왔던 농민/양인을 사적지배로부터 공적지배로 돌려놓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농민해방은 아닙니다. 다만 농민(전호)에 대한 통제형태가 개인에서 나라(왕조)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물론 농민들의 경제적 부담(“밭 한 뙈기 땅에 주인이 5~6명씩 되고, 세금/조세를 8~9차례나 내야 하는”)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도 덜어진 것은 사실 곧 개혁세력들이 자기네들이 나라를 지배하는데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러운 세력을 제거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을 사회진화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발전적 사회개혁은 필요한 수단입니다. 여기서 가정몽주세력을 약세에

 

4. 또 다른 모순극복노력- 신돈의 개혁정치와 대립

 

경제개혁을 성공시킨 신흥귀족(사대부와 무장세력)들은 다음으로 정치개혁(反)을 단행합니다. 바로 폐가입진론과 역성혁명입니다. 경제적 토대를 마련한 개혁세력들은 다음으로 정치개혁에 들어갑니다. 그 첫 번째 일이 왕권의 정통성문제를 제기합니다. 폐가입진론은 고려가 원/몽골의 정치적 간섭을 받고 있을 때 31대 왕(공민왕)이 된 왕전(王顓)과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왕전의 이야기를 들어보지요. 왕전의 부인은 노국공주(몽골왕실여자, 왕가진王佳珍)입니다. 역사이야기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왕전은 자신의 부인인 노국공주를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국공주가 애를 낳다가 애와 함께 죽게 됩니다. 이후 왕전은 그림 그리고, 노국공주의 혼령을 위한 불사에만 열중합니다. 그리고는 정치는 신돈(辛旽)이라는 중(왕사)에게 맡겼습니다. 신돈이라는 사람은 賤人(어머니가 사찰의 노비였음) 출신으로 공민왕이 혼건적의 침입으로 잠시 안동 왕유동에 피신해 있을 때 왕을 호위하였던 김원명(金元命)의 소개로 왕사(王師)가 된 사람입니다. 신돈은 왕전(공민왕)이 정권을 맡기자. 나름으로 민생을 위한 개혁정치를 하려했으나 양면(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으로 공격을 받아 정치적 개혁(전민변정도감을 통한 토지개혁 시도)은 실패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진사대부들이 크게 성장합니다. 정치판국이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왕전은 왕이라는 작자가 나라관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추잡한 짓거리에 몰두합니다. 바로 자제위(子弟衛)의 설치입니다. 자제위는 왕전이 공신 및 귀족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만든 자신의 호위부대입니다. 그런데 이 자제위 소속의 병사들과 동성애(同姓愛: homosexuality)를 즐기게 됩니다. 이때 자제위 소속의 홍륜(당시 시중侍中홍언박洪彦博의 손자)가 공민왕의 후궁인 익비(益妃)와 간통하여 익비가 임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과 연관되어 자제위의 반란(홍륜과 최만생)으로 왕전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왕전이 죽고 바로 뒤를 이어 왕우(王禑)가 뒤를 잇게 됩니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나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 보면 왕우는 신돈의 자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왕우가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신우(辛禑)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왕전이 노국공주가 죽고 실의에 빠져 있자 신돈이 그의 비첩(婢妾)인 반야(般若)라는 여인을 왕전에게 소개하여 반야와 잠시 사귀었으나 이 또한 실증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반야가 애를 낳게 됩니다. 이 애가 바로 왕우(고려 32대 왕 우왕이 됨)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이성계 등 개혁세력들은 왕우가 신돈의 비첩인 반야가 낳았기 때문에 신돈의 자식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왕우가 낳은 아들이 왕창(王昌)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개혁세력들은,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 가짜를 없애고 진짜를 세운다)과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 우왕이나 창왕은 왕씨 혈통이 아니다)’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여론을 조성하고 왕창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이를 폐위廢位라고 함) 왕요(王瑤, 뒤에 34대 공양왕이 됨)를 왕으로 앉힙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이야기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고 내세운 주장으로 해석됩니다. 바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어떤 사실을 왜곡하여 유포시킨다는 갓이지요. 물론 이러한 ‘폐가입진론’, ‘우창비왕설’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후대 왕우와 왕창의 무덤을 발견하고 그 시체에서 DNA(생물유전자의 본질)을 추출하여 왕실 혈통의 진부(眞否)를 가릴 수 있지만 지금은 거의 어렵습니다. 역사라는 게 바로 이렇습니다. 지금 여기서 왕우와 왕창의 혈통이 왕씨인지 신씨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져 진실이 밝혀지면 역사적 사실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의 진리는 언지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역사를 변하지 않는 것처럼 고정시켜 말하는 것은 틀립니다. 그리고 역사는 역사인식에 따라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정된 역사적 사실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당시 고려말 급진적 개혁론자(혁명파)들은 고려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고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왕의 혈통이 가짜라고 마치 고정된 사실로 강요합니다. 권력자들은 거짓된 사실도 정말인 사실로 왜곡하여 강요하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바로 권력장악을 위한 정당성 확보를 위한 꾸밈(거짓/음모)이지요. 신돈을 요승으로 기록한 것도 마찬가지 치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혁명파 개혁세력들은 왕요를 왕으로 앉힌 뒤 계속하여 왕요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고(이를 하야下野라고 합니다), 그러나 온건파 개혁론자들은 이를 반대합니다. 고려왕실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급진개혁세력에게 기울고 있었습니다. 급진개혁파 안에 권력에 야욕을 가진 이성계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고려를 타파하고 새로운 왕권을 창출해 내기 위하여, 유혈사태를 일으킵니다. 바로 고려왕실을 지키면서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온건개혁파의 영수(領袖) 정몽주를 격살(擊殺, 때려죽임)했습니다. 그리고 정몽주를 지지하는 온건개혁파들을 모조리 몰아냅니다. 그리고 왕요(고려 공양왕, 공양이라는 말은 뒤에 조선왕조에서 이방원이 내린 시호諡號임)에게 하야를 압박했습니다. 결국 왕요는 혁명세력이 내민 칼의 힘에 압박을 받고 마음에도 없는 하야를 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이를 역사에서는 선양(禪讓/禪位)라고 합니다. 선양이라는 말은, 중국 고대사에서 처음에 왕이 살아있으면서 자기의 혈통이 아닌, 올바른 인격을 지닌 다른 혈통의 사람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뒤에는 왕이 살아있을 때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도 선양이라고 했습니다. 선양의 시초는 기록에 의하면,

 

“요가 말년에 임금 자리를 순에게 양보했다”는 요․순의 선양(禪讓)은 널리 알려진 고사입니다. 사마천(司馬遷)의 《史記》 권 1, 〈五帝本紀〉(四庫全書薈要, 권26, 34쪽))에는 요가 순에게 임금 자리를 살아생전에 양보했다는 ‘선양(禪讓)’의 전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선양고사는 그 후 유가학자들에 의해 가장 이상적인 권력 이양의 형식으로 크게 찬양 고무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록에 남은 선양의 사례들은 대부분 강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요 임금이 순에게 쫓겨난 것으로 보고 있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선양이라는 행위를 변증법으로 설명하면 지양이론이 됩니다. 지양이론이라는 말은 곧 正과 反이 타협(妥協/使無訟)을 통해 合을 만들어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지양에 의해 탄생한 이 合(합1)은 곧바로 正(정2)이 됩니다. 그리고 정2는 시간이 가면서 자기 속에 배태되어 있던 자기모순을 노출시키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사회적 모순으로 발전하면 反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역사발전법칙을 신채호 선생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설명하였지요.

 

5. 止揚-이성계의 조선건국

 

고려 마지막 왕인 왕요(시호 공양왕)에게 정도전 등은 무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성계에게 왕위를 양위하라는 압력을 가하게 됩니다. 이성계에게 즉위교서를 내리게 됩니다. 그 내용을 보면, “나라 이름은 前代로 高麗라 하며, 의장과 법제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를 따르기로 한다."로 시작합니다.(1392) 그러나 이성계와 정도전은 나라이름을 고려에서 조선으로 고칩니다. 이렇게 해서 고려와 조선의 교체는 역성혁명이라는 역사적 용어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이렇게 고려의 개혁세력(사대부-훈구사대부)과 고려 왕실간의 타협(지양=역성혁명)에 의해 탄생하게 됩니다. 이 탓으로 조선은 끊임없이 사대부관료와 왕권이 갈등을 겪어가면서 나라를 끌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신권(지배계급)이 왕권을 경제하면서 조선 500년을 끌고 가다가 일제라는 강한 적에게 나라를 넘기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현재도 마찬가지로 수구적 지배계급(친일적, 친미적인)이 나라의 힘을 흔들고 있기 때문에 ‘개혁’이라는 말은 늘 용두사미가 됩니다. 어느 대통령(김대중, 노무현)이 등장하여 나라개혁을 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표방하여도 늘 용두사미가 되는 것은, 수구적 기득권세력들이 우리 사회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방자치제가 되었다고는 하나, 단체장은 어느 지역이든, 토호세력들이 당선/장악함으로써 지역사회가 더욱 보수화되는 경향으로 나가는 딱한 현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에 의한 역성혁명은 말이 선양이었지, 사실은 힘에 의한 압력으로 고려왕실의 권력을 찬탈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위에서 강제로 물러난 왕요는 원주로 유배를 당하였가 끝내는 조선건국세력들에게 살해를 당하고 맙니다.(1394) 말을 돌려 이야기를 해 봅니다. 조선건국세력의 핵심이었던 정도전이 선양에 의한 역성혁명을 취한 것은 바로 전통시대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곧 민심의 동요를 막는 일이었고 정통성 확보를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참고] 정도전의 신권정치 주장 배경-역성혁명론

 

鄭道傳은 天과 人을 하나로 보는 天人合一說을 인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천지와 인간은 같은 근원과 같은 종류의 陰陽의 氣를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陰陽의 氣가 부조화하면 그에 감응되어 천지 음양의 氣도 부조화하여 홍수, 한발 등 각종 재해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인간의 氣가 조화를 이루면 그 반대현상이 나타난다고 보아 인간 세상의 吉, 凶, 災, 祥은 모두가 음양 기의 조화여부에 달려있는 것인데 여기에는 동시에 有意志的인 인격신으로서의 上帝가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인간 음양의 기를 조화시키려면 통치자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인민 가운데 통치자에 대한 원성이 쌓이면 惡氣가 생겨 음양의 조화기 깨지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통치자는 마음을 바로잡고 덕으로써 정치를 행하여 한편으로는 민심을 얻음으로써 민의 요구에 부응하고 동시에 음양의 기를 순화시켜 천재지변을 방지하고 天心=上帝心에 부합될 때 비로소 천명을 얻어서 통치권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天理를 어겼을 때 그의 혁명론은 정당성을 갖는 것이고 조선왕조의 개창도 합리화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주자학적인 천인합일사상은 고려로부터 조선으로 天命이 바뀐 것을 합리화시키는데 이용되었고 또한 군주에 대하여 엄격한 도덕적 의무를 지움으로써 국왕에의 권력집중을 견제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관념화된 天에 公의 개념을 포함시키고서, 天을 대신해 보상과 벌 등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인간의 군주는 公에 입각해서 그것을 행해야지 私的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고 함으로써 관념화된 天을 公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鄭道傳의 '혁명론'은 天 때문이 아니라 公 때문에 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鄭道傳의 정치사상상에 나타나는 역성혁명론을 살피기 앞서 유가사상사들이 내걸었던 민본 사상에 대해 우선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리학에 대해서는 중국 당 중엽 이래 농업생산력 발전에 따른 지주전호제의 확대라는 사회적 조건의 변화에 대응하여 종래의 불교적 사유 구조를 극복하고 나타난 사상체계로 지주층의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관점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즉 성리학의 기본 시작인 명분론이 봉건적 신분 질서유지를 위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실제로 명분론은 일체의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예의로 구체화되어 현실사회에 주입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예의를 범한다는 것은 곧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중벌로 다스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으로 봅니다. 즉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채택된 성리학의 정치사상은 봉건적 지주계층의 지배를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명분을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전통적 유교에서부터 내려오는 민본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왕조가 추구한 이상사회는 봉건적 신분질서가 유지되는 유교적 민본사회였고 그것은 성리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유가의 궁극적 관심은 治國平天下에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사상으로서 지배층에게 요구된 것이 바로 민본사상이었습니다.

 

民을 나라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민본사상은 원시유교, 특히 맹자의 위민사상에서 비롯됩니다. 즉 맹자는 "민을 얻으면 이는 곧 천하를 얻는 것"이라 하면서 민심을 얻기 위한 구체적 방도를 《孟子》 전편에 걸쳐 누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맹자의 입장이 종국에는 "임금에게 큰 과오가 있으면 諫하고, 반복해서 諫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왕위를 갈아버린다"는 '혁명론'으로까지 진전되어 송대 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의 이론은 명분론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론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평범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임금다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이 '임금다워야 한다'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맹자가 통치자에게 요구한 것이 바로 '仁政'을 바탕으로 한 민본 정치였습니다. 맹자는 仁政을 행하는 왕도정치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德治로 들었습니다. 즉 刑이나 法 같은 제도로 다스리는 의미가 아닌, 德治에 의한 仁政이야말로 전통적 민본사상에서 추구했던 목표였고 또한 끊임없이 통치자에게 요구된 덕목이었습니다.

 

鄭道傳은 이 입장에 누구보다도 충실하여 君主보다는 國家가, 國家보다는 民이 우위에 위치하므로 民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군주는 民을 극진히 존중하고 사랑해야할 의무가 있으며, 통치자의 모든 행동이나 명령, 법제 따위가 하나하나 民을 위하고, 民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옛날에 군주가 관리들에게 권력과 녹봉을 준 것은 관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민을 보호하고 사랑하고 이롭게 해주기 위한 것이며 관리가 군주에게 보답하는 것도 군주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민을 위한 보답이었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군주나 관리는 民을 지배하는 권력자라기보다는 民을 위해서 일하는 봉사자라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鄭道傳은 고려말 통치자에 대하여, 옛날의 통치자들과는 달리 통치자들로서의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 관리가 民을 괴롭히는 벌레가 되었다고 개탄했는데, 그의 민본 정신은 고려 말기의 부패 타락한 관료지배층의 학정 밑에서 신음하던 광범위한 民의 처지를 동정하고 그들의 지위를 높여주려는 현실적인 개혁사상에서 출발합니다.

 

정도전에게 있어서 민은 나라의 근본으로, 민을 사랑하고, 민을 위하고 민을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통치자에게 요청되는 도덕규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만약 통치자가 위와 같은 民本, 愛民의 도덕규범을 저버리고 이에 위배되는 악정을 행한다고 가정할 때 이를 구제하는 방법은 무엇일가? 바로 여기에서 정도전은 孟子의 혁명론을 그 대안으로 제가했습니다. 혁명론에 의하면 통치권은 天命=天工=天理에 의해 부여되고 합리화되는 것으로서 天命이 떠나면 통치권은 소멸되고 다른 有德한 자에게 天命이 옮아가서 그가 새로운 통차지로서의 통치권을 부여받는다고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이 그로 하여금 易姓革命론을 주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통치권자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民心=민의 주체적인 동의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鄭道傳은, 天心은 곧 民心의 반영이므로, 혁명이 하늘의 주체적인 의지로서만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는 민심을 얻느냐 못얻느냐가 군주의 통치권을 정당화 하느냐 안하느냐의 관건이 됨을 설명하며 民의 주체적인 동의여부가 군주의 통치권의 성공 혹은 실패를 가늠하는 궁극적인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곧 군주가 덕을 잃어 民心과 天命을 잃었다고 가정할 때 새로운 통치자와 교체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는 민심을 잃은 군주가 자기의 失德을 자인하고 스스로 다른 有德者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형식이다. 이것을 이른바 '선양(禪讓)'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민심의 추대를 받은 다른 有德者가 덕을 잃은 군주를 폭력으로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는 것이니 이를 '放伐'이라고 합니다.

 

이라한 鄭道傳의 혁명사상은 조선왕조 건국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조선왕조의 건국과정 그 자체가 이러한 혁명사상에 입각하여 진행되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새로운 왕 李成桂는 스스로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民心의 추대와 天命의 허락을 받아서 이른바 '應天順人'(하늘과 인민의 위지에 순응함)함으로써 왕위를 얻었다고 보았습니다. 李成桂가 민심의 추대를 받았다는 것은 위화도회군 당시 광범위한 軍과 民의 지지를 말하고, 당시 국가의 최고정무기관이던 도평의사사의 발의로 신왕의 추대가 결정되었다는데서 그 증명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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