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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는 과거(過去)
김광한
며칠 전 내게 한통의 일반 전화가 걸려왔다.혹시 조흥일이란 사람을 아느냐는 것이다.이미 세상에서 물러난지 40년 가까이 되는 사람을 알아서 뭣하겠냐만 또 묻는 사람의 의도가 뭔지도 모르면서 안다고 할 수 없고, 그래서 왜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느냐고 그랬더니 자신의 소개를 간단히 했다.자신은 음악저작권 관계의 일을 하는데 내가 옛날에 썼던 조흥일 관계의 글을 읽어서 혹시나 해서 전화했다는 것이다.즉 배모란 작곡가가 작곡한 노래에 조흥일이란 이름이 작사가로 올라있어서 비록 사후지만 조흥일과 연관된 직계 비속같은 사람의 허락을 얻어야 그 곡을 쓸수가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문득 기억속에 묻어두었던 40여년전의 일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갔고 젊었었지만 암울했던 그 시대의 날들과 만났던 사람들과의 교제같은 것이 의식속에 살아움직였던 것이다.과거란 기억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이고 기억을 하면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처럼 그 시대속으로 틈입이 되어 내가 자리잡을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리라.
조흥일 선배를 이야기하자면 조금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야 한다. 그를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미 중년을 넘어 섰거나 할아버지가 된 사람들뿐이다. 아무튼 그는 1900년 대에 태어났고 2천대대 훨씬 못미처 세상을 떠났다. 그는 중앙대학교 국문과 3년 선배였던 학생시절에 문학 회장도 했었고 그 시절 벌써 시나리오 작가로서 우리 한 학생들에겐 선배 역할을 톡톡히 했다.
69년도에 졸업을 했 을 때, 그는 어느 잡지의 편집장으로 있었는데 자기와 함께 근무 할 기자를 찾기 위해 가끔씩 강의실을 들락거렸다. 그가 올 때마다 그의 곁에는 이름 있는 가수, 또는 영화배 우를 대동했고, 우리는 근접하기조차 힘든 연예인들에게 반 말지거리를 해가며 오늘 스케줄이 어떻고 네 노래는 어디 가 잘못됐다는 등 충고할 때마다 그들은 조 선배에게 쩔쩔 맸다. 조 선배는 대학신문사에 있던 나를 보자 대뜸 "야, 너 나하고 일할 생각 없냐? 글 쓸 줄 알지?" 하며 그의 특유의 상소리(?)를 해댔다. 아무리 선배라지만 처음 보는 후배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데 조금 언짢았으나 그의 솔직한 맘을 알고는'친형 같아 몇 번 대하자 나는 그에게 스스럼없이 형님이란 호칭을 썼다. 그는 큰 키는 아니었으나 체구가 아담했고 눈썹이 짙었으며 눈매가 선량하고 서늘했다. 꾸밈이 없었다. 졸업과 동시에 나는 그가 근무하는 Y잡지사에 취직이 됐 다.
무슨 증명서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력서 한장으 로 족했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기자라면 흔히 교과서에 나오듯이 "무관의 제왕"이니 "사회의 목탁"이니 하는 사회 정의에 투철하고 또 기자가 근무하는 건물도 꽤 웅장 하리 라 예상했었다. 급우들도 내가 기자로 발령(?)이 났다는 것 을 알고 은근히 부러워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조 선배를 따라간 잡지사는 충무로 대원호텔 맞은편 중국집 2층에 있었는데, 말이 건물이지 적산가옥 2층, 층계를 올라갈 때마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요란한, 그래서 당장 허물어질 것 같은 건물 의 2층에 세들어 있었고, 기자란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생활에 주눅이 들어 찌든 얼굴들이었다.
왼손목에는 잉크가 번질까봐 대서소 직원이나 차는 토시를 끼고 있었고 연탄 재가 바닥에 널려 있었다. 벽에는 온통 일본 스크린 잡지에서 오려낸 외국배우의 사진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장동 중고가구점 에서 사왔는지 짝이 맞지 않는 책상들이 어지럽게 널려있 었다. 사장이란 40대 중반의 사나이에게 그는 "우리 후밴데 제법 글줄께나 날리죠. 보십시요. 명기자가 될겁니다." 하며 조 선배가 나를 소개했다. 그는 내 이력서를 들여다 보며 "문장력 데스트를 한번 해보시지" 하며 내게 원고지를 몇 장을 던졌다. 그러나 조 선배는 그럴 필요 없다면서 자기가 책임지겠다 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날로 잡지사 기자가 된 것이다. 나 는 퇴근할 때를 기다려 조 선배에게 "형님, 이런 데가 잡지삽니까? 다른 잡지사도 다 이렇습 니까?" 했더니 그는 껄껄 웃으며 "야 임마 이래봬도 여긴 대한민국에서 방귀께나 뀌는 놈 들은 모두 찾아오는 데야. 두고 봐." "월급은 얼마나 됩니까?" "신입기자는 오천 원인데 넌 내가 특채를 했으니까 천원 더 주지. 6천원 어때? 딴 놈들한텐 절대 얘기 하지마!" 하며 대포나 한잔 하자고 했다.
아무리 돈 가치가 귀한 시절이라지만 6천원이라면 이건 등록금의 10분의 일도 안 되는 셈이다. "왜 실망했어?" 그는 내 얼굴을 신기한 듯 그윽히 바라보다가 "괜찮아. 차차 하다보면 요령도 생기고 다 그런거야." 하며 툭툭툭 내 어깨를 쳤다. 조 선배가 있던 곳은 대중 오락지였고 당시 잡지가 별로 없어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선 이름 있는 가수나 영화배우 들도 이런 잡지의 창구를 이용, 선전하는 것이 유일한 매스 콤(?)이었다.
그래서인지 남진이나, 나훈아 등 일류가수들도 이곳에 올 때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왔고 생활이 넉넉지 않을 성 싶은 기자들은 그들에게 은근히 겁을 주기 일쑤였다. "야 너 요즘 말썽 피운다면서?" "아닙니다. 헛소문이죠. 그건 봐주십시요." 하며 그들은 술값이나 하라고 봉투를 두고 가기도 했다. 내가 Y잡지사에서 맡은 분야는 고작 펜팔 정리나 독자문 예 등 알아서 쓰는 기사들이었으나 가끔 특별 취재라면서 흉악범을 검거한 형사들을 인터뷰해 흥미 본위로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는데 워낙 초보자라서 서툴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고 또 그 잘난 경쟁 심이 그 시대의 기자들 간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들 경계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어느 날 조 선배는 내게 부천 경찰서 의 K서장을 인터뷰 해오라고 했다.
K서장이 주민들을 위해 선행을 베풀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기·때문이었다. 나는 특별 취재 비 5백원을 타 갖고 부천으로 내려갔다. 부 천이 시로 승격되기 전이라서 빈 들판에 초라한 건물만이 우뚝 서있어 그것이 경찰서임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엄두 가 나질 않는 건 고사하고 서장이란 사람이 겁이 나 떨리 기까지 했다. 나는 몇 번이나 경찰서 주위를 맴돌다가 용기 를 얻기 위해 대폿집에 가 막걸리를 몇 사발 퍼마신 후 경비 실로 갔다. 마침 K서장은 자리에 있었다. 나는 서울의 모집 지사 기자란 것을 말하고 몇 마디 질문을 던져 보았다. K서 장은 내가 기자란 말에 다소 긴장을 했다. 기자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니까 당연히 그럴만했다. . 그런데 이런데 능숙한 K서장이 상대를 보아하니 질문요 지도 엉망이고, 너무 겁먹어 보이는 것 같아 되레 물었다.
"기자한지가 얼마 안됐구려,"
"예 사실은 일주일밖에 안됐습니다. "
"그래서 겁이나 대포를 몇 사발 퍼마셨군. 술 냄새가 지독 해."
"죄송합니다. "
"질문은 육하원칙이 있어야 돼. 횡설수설 물으면 나중에 어떻게 정리하려고 해요. 내가 잘 가르쳐 줄께."
하며 조서용지를 갖고 오게 하더니 문답식으로 자세히 써주는 것이었다. 취재를 하러갔다가 취재요령을 교육받고 온 셈이었다. K서장은 헤어질 때 내게
"기자생활 하려면 담이 커야해."
하며 교통비하라고 5천원을 찔러주었다. 내 생전에 남의 돈 받아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촌지(寸志)였다. 나는 그 돈을 돌려주려고 했으나 K서장은 그것까지 가르쳐주었다.
"젊은 양반, 이런걸 가리켜 촌지라고 하는 거야. 절대 탈 이 없는 돈이니 편집장과 저녁에 대포나 마셔요."
하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사무실에 돌아오니 이미 퇴근시간이었다. 사무실에 그대 로 들어갈까 하다가 아래층 지하다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조 선배를 불러냈다. 조 선배는 내게
"취재 잘 했겠지?"
하고 물었다. 내가 취재한 걸 내보이자 그는 그걸 받아들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사무실의 다른 기자 를 시켜 원고지를 다방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조 선배는 다 른 기자가 가져온 원고지에다 자신이 직접 인터뷰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30장을 썼는데 꼭 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는 자신이 쓴 것을 내게 베껴 쓰라고 했다. 왜냐하면 사장이 자신의 필적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글을 베끼면서 역시 조선 배는 글 쓰는데 천재적이 란 걸 느꼈다. 그때 이미 조 선배는 "월남에서 온 김상사"란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고 그 영화의 조감독을 끝낸 후였던 것이다.
한 구절도 오식 없는 인터뷰 기사였다. 그는 내가 모주 자기 글을 베끼자 자기가 쓴 것을 모두 찢어 버렸다. 그러더니 내게
"사장이 아직 퇴근하지 않았으니까 사무실로 올라가자."
하며 앞장을 섰다.
나는 그에게 촌지로 받은 돈 5천원을 내밀었다. 그는 씩 웃으며
"어쭈 이 새끼 재주 좋네. 알았어. 그건 네 주머니에 넣어 둬. 용돈도 없을 텐데."
하며 도로 내 손에 쥐어주었다.
사무실엔 도안사 김 선생이 예의 그 도리우찌를 쓰고 사진부장과 광고부직원 등 몇이서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조 선배는 사장실로 가더니 내가 베낀 기사를 사장에게 보여주면서
"역시 내가"보는 눈은 틀림없습니다. 앞으로 대기자(大記者)가 될 것입니다. 물건이죠. 한번 읽어보십시요."
하며 읽길 권했다. 나는 그 옆에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사장이 그 원고지를 받아들고 몇 줄 읽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괜찬찮군. 소질이 대단한데."
하고는 내게 앞으로 열심히 하라고 격려까지 했다.
조 선배는 자기가 쓴 글을 사장에게·보여줌으로써 내 체면을 지켜주었던 첫 사람이다. 그가 쓴 글이라 탁월했을 건 뻔한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조 선배에게 받았던 사람냄새 풍기는 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 배운 것은 글 쓰는 것과 취재를 요령 있게 하라는 것 같은 현실적민 것이 아닌, 인간적인 사랑이었다. 남의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려는 따뜻한 그 마음이었다.
조 선배는 가끔씩 점심때 중부시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 백반을 사주었는데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반주로 소주 한 병을 시키곤 했다. 중부시장 안의 밥집은 조금 지저분했지만 밥반찬이 푸짐했고 다른 집에 비해 인정이 후했다. '그는 내가 밥을 먹으면서 반주하는 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보며
"야 몸 생각해. 그렇게 마시다간 일찍 가는 수가 있어."
하면서도 내가 술 마시는 걸 대견(?)하게 응시했다. 그때 그는 벌써 그의 몸에 당뇨와 혈압, 그리고 신장까지 병균이 깊숙히 침투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술 한 잔을 못했다. 그의 설합속은 마치 약 조제함 같이 각종 약으로 가득했다. 비타민을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약을 한 움큼씩 집어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열심히 시나리오를 비롯해 소설을 썼다.
그래선지 그의 주변에 연극지망생 아가씨들이 떠나질 않았다. 그들은 그에게 조감독이라고 불렀다. 조선배가 결혼을 한 것은 그 이듬해 봄이었다. 그때 이미그는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진희라는 대여섯 살 되는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국민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조선배의 배필이 될 여자는 부평서 살았는데, 부평의 술집에서 안 여자였다. 그의 집안에서 반대를 했지만 그는 날 때부터 술집여자가 어디 있느냐며 끝내 그의 주장을 관철했다. 결혼식 전날 신부 집에 가져갈 함을 내가 지고 갔다.
그의 결혼식은 충무로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했고 사회는 그의 대학동창인 아나운서 변웅전씨가 봤다. 김세윤씨를 비롯해 많은 탤런트들, 그러고 가수들이 참석해 그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는데, 결혼식이 성대한 것만큼 그렇게 화려한 결혼생활은 하지 못했다. 이미 그의 몸속엔 죽음의 그림자가 깊숙히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배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것은 결혼 후 7개월째 되던 겨울이었고, 거기서 본인에게는 그저 "몸조리나 잘하라"
는 담당 의사의 말과 함께 퇴원을 시켰다. 그러니까 그의 홀어머니에게만 알린 셈이었다. 그는 이미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 대소변도 방안에서 봤고, 손목엔 검은 반점이 생겼다.
그러나 그는 항상 희망적이었다. 그는 잡지사의 동료들이한명도 찾아오지 않자 흥분해서
"이 새끼들, 내가 복직만 해봐라. 죄다 모가지를 쳐버릴테니까."
하며 나에게
"넌 절대 배신 하지마. 요즘 새끼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놈들 뿐이야. 넌 의리의 사나이 돌쇠야."
하고 자기에게 찾아온 나를 고마워했다. 나는 그의 병색이 완연한 퀭한 눈을 들여다 볼 때마다 가슴아파 했다. 조 선배가 다시 회복되어서 건강하게 함께 지 냈으면 싶었다.어느 날 조 선배는 자신의 병세를 짐작했는지 부인에게
"야 너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딴 놈팡이 얻어 갈 거야?"
하고 다그쳤다.
"그런 말은 왜 해요. 끔찍하게"
"네가 하도 믿지 않는 행동을 하니까 그렇지."
그러면서도 그는 부인에게
"야, 나 외로워 죽겠다. 내 옆에 좀 있어다오. 나 죽더라도 재혼 않겠다고 약속해 응."
하면서 보채기까지 했다.
그가 멀쩡한 몸이었고 또 영화관계 일로 바빴을 때는 그 의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막상 병석에 눕자 한 명도 찾아오지 않는 몰인정에 인간적인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퇴근 후 거의 매일 그의 마포 신수동 집을 찾아갔다. 그는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흥미를 갖고 들었다. 어쩌다 하루라도 걸르면 화를 내기까지 했다.
그는 거의 매일 인슐린 주사를 맞았는데 퍼렇게 드러난 정맥이 측은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희색이 만면해
"야, 인제 봤더니 단식요법이란 게 있더라. 대구에 상원사 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단식도장이란 곳이 있어 각종 환자들을 받고 있단다. 거길 한번 가봐야겠어."
"선배님, 그 몸에 단식까지 하시면 되겠어요."
내가 걱정스레 묻자 그는
"몸속에 있는 나쁜 기(氣)를 뽑아버리는 거지."
하며 언제 알았던지 단식요법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는 단식요법에 희망을 갖고 있었다. 보름동안 단식을 하고 죽지 않으면 병이 완치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대학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그는 이미 절망적이었다. 그는 그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와 부인이 짐을 챙겨 대구로 내려갈 때 서울역까지 배웅을 나갔다.
"형님 꼭 건강한 몸으로 돌아 오십시요.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알았어. 염려 하지마.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날, 그때 우릴 배신한 놈들 작살나는 날이지."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코 행동은 강퍅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겨울, 금호동 산꼭대기에서 혼자 자취를 하던 여자 직원이 연탄가스에 중독, 죽었을 때 그는 사무실에서 점심도 거른 채 하루 종일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선천적으로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친이 경성방직의 사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생활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부친이 일찍 작고하자 있는 재산을 날렸고 어쩌다가 마포구 신수동까지 흘러들게 되었다. 그는 용산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나왔고, 이미 그때 문단에 등단, 주옥같은 시와 소설을 쓰고있었다. 그의 문장실력은 탁월해서 어느 곳 한군데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에게 남동생이 한명 있었는데, 트럼펫 연주자였다. 당시 이봉조 악단에서 트럼펫을 불고 있었는데 그 의 어머니는 장남인 조 선배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직장에 나간다면서 집엔 돈 한 푼 갖고 들어오지 않는 큰 아들이 뭐 그리 사랑이 가겠냐만 그의 어머니는 달랐다. 생활력이 강한 차남보다, 무능하지만 인정이 있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큰 아들에게 연민의 정을 갖고 있었다.
그가 대구로 내려간 후 처음으로 편지가 한 장 날아왔다. 건강하게 열심히 단식요법을 수행중이라고 했다. 그는 편지 서두에 내게 '감형'이란 호칭을 썼다.
내게 늘 '야 임마!''이 새끼!' 등 상소리를 하던 것과는 달리 문자로 표시되는 편지에는 예의를 갖춘 것이다.
"김 형,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나는 김형이 염려해준 덕분으로 상태가 꽤 호전되었소. 서울 가서 중부시장으로 갑시다.
내가 소주 한잔 사겠소. 그런데 김 형, 술이 너무 과하신데 술 좀 줄일 수 없소.그렇게 마시다간 제명에 못살아요.
그럼 그때 다시 만납시다.
조흥일"
그런데 그날 점심때, 그의 부인으로부터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냐고 했더니 조흥일 댁이라고 했다.
"그럼 대구입니까?"
물으니
"서울이에요."
"언제 올라오셨습니까?"
"오늘 아침에 올라왔어요."
"형님은 많이 괜찮아졌겠죠?"
그러자 상대의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는 나를 절망시켰다.
"돌아가셨어요."
"우석대 병원 영안실이에요."
"아, 그래요."
나는 얼른 전화기를 놓았다.
나는 다시 한번 조선배로부터 받은 편지를'읽어 보았다.
"김 형 !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그것이 그로부터 받은 마지막 편지였고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최후의 글월이었다. 명륜동 우석대 병원으로 갔더니 이미 거기엔 몇 안 되는 그의 친척들이 영안실에 앉아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검은 리본에 가린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서늘한 눈매와 입가에 웃을 듯 말 듯한 표정, 그의 나이 겨우 서른 둘이었다. 삼국지를 일곱 번 읽었고, 그 나이에 사서삼경에 통달했으며 영화 조감독, 시나리오 작가, 명편집장 등 그 나이에 그는 이미 해냈었다. 천재는 요절한다든가. 아까운 사람이었다. 소복을 입은 그의 부인은 영구가 장지로 나갈 때 땅을 치며 울었다. 결혼생활 7개월째에 변을 당한 것이다. 장지는 김포공원 묘지였다.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용산 고등학교 동창생인 탤런트 김세윤씨가 울먹이면서 내게 말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세상은 공평치도 못하지. 저런 친구가 오래 살아야 했는데, 인정도 많고 재주도 뛰어나고 아마 하느님이 일찍 부르신 건 속물들과 어울려 고생하는 걸 원치 않으셨던 모양이야."
김포벌판을 거쳐 산등성이에 있는 공원묘지에 도착했을 때 비는 멎어 있었고 멀리 무지개가 피어났다. 우리들 잡지 기자 몇은 그의 하관이 끝나자 옹기종기 모여 소주잔을 기울였고 그 자리에서 그의 묘비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란 한번 가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금방 잊혀지게 마련이다. 서로들 살기에 바쁘고, 세상이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을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은 이런 조선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 짙은 화장에 외출을 하느라고 바빴다. 조선배의 어머니는 내게
"아무리 전처 자식이 있다고 해도 저 애가 너무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배필을 잘못 만난 것 같아.출신도 좀 봐야 하는데 체격도 너무 크고, 손목아질 좀 봐라. 통뼈지."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 당시 조선배의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다리 한쪽을 못 쓰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의 수발을 거의 들 수가 없었다. 마땅히 조선배의 부인이 병간호를 해야 했는데 외출하는 시간이 많아 조 선배는 그것이 큰 불만이었다.
나는 그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즐겨 읽었던 시를 조용히 읊어 보았다. 그의 친구 남승만 시인의 '환자의 가을'이었다. 그는 이 시를 무척 좋아 했었다.
황금빛 눈부신 가을이 쏟아져 오는데
봄부터 가랑잎을 가슴에 쓸어모아서는
저승길 찾는 길목을 헤메는구나
몸은 반동가리
넋은 갈기갈기 찢기운 허수아비 옷자락
이슬 묻은 풀잎에 기대서서
그 영롱했던 노을빛 열매들을
꿈결인 듯 가슴에 담는다.
어머니
실로 위대한 계절이 왔는데
당신 계신 곳의 가을도
무슨 고운 빛깔입니까.
이냥 무너져 주저 앉을만한
어디 평화의 풀밭은 없읍니까.
절뚝거리고 방황을 해도
손가락질할 아무도 없는
마음 편한 골목은 없습니까.
울음이여, 울음이여, 이 크나큰 업보의
늪이여 !
어머니 어머니
죽음 같은 울음이여
죽어버린 가을이여,
낭승만의 <환자의 가을>에서
그는 이 시를 들여다보면서 가끔씩 울곤했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친구인 남승만 시인의 비장한 시가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가 세상을 뜬 후에도 가끔 틈나는 대로 그의 신수동 집을 방문했다. 관절염으로 누워계신 그의 어머님은 나를 그때마다 친아들처럼 반겼다.
"우리 애가 없더라도 너만은 자주 찾아와라. 내가 술 받아줄께."
그가 갔어도 그의 어머님은 그를 없다고 생각지 않았다.
20여 평 되는 한옥의 문패는 여전히 조흥일이었고, 그가 앉아 있던 책상위에는 살아있을 때의 그의 사진이 늘 걸려 있었다. 나는 그의 어머님을 내 친어머니로 돌아가실 때까지모시기로 했고, 부인을 형수로 생각했으며 그가 남기고간 단 한점의 혈육인 진희에게 작은 아버지가 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누가 말했던가 망각이란 잊는 것이라고, 잊을 수 없는 망각이란 결코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가 가고 나서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몇 번 찾아갔을 뿐, 그의 모습은 나의 뇌리에서 점차 잊혀갔다. 죽은 사람들보다 산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밥을 먹고, 살림을 해야 했으며 내 생존(生存)을 도모해야했기 때문이다.
80년 초였을까?
문득 그의 생각났었다. 어느 전문잡지의 편집장으로 있을때였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마음의 큰 상처를 입었을 때였다. 나는 그의 동생 집을 수소문해 겨우 조선배의 어머니가 이사한 집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서교호텔 맞은편 청자당 다과점 뒷 골목 2층에 어머니는 살고 계셨다. 나는 대낮부터 술이 엉망으로 취해 밤늦게 겨우겨우 그 집을 찾아갔다. 파출부로 보이는 중년여자의 안내로 골목입구에 있는 그의 어머니 집 문에는 여전히 '조흥 일'이란 음각된 문패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가 쓰던 책상위에는 여전히 그의 커다란 흑백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있어서 세월이란 아무런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어머니하고 부르자 그의 어머니는 한쪽다리를 아픈 듯이 끌며 겨우 일어나 앉아 나를 보더니
"이게 누구냐. 너로구나. 그래, 이 무정한 사람아! 한달에 한번씩 오지 않고서. 이제 찾아오다니. 그래, 잘 왔다. 거기 앉아라."
하며 내 손목을 꽉 움켜잡는 것이었다.
그녀는 더 늙어있었다. 야원 두손목에서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왔는지 내 손을 쥔 악력이 대단했다.
"어머니,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그래. 이젠 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죄 많은 것 빨리가서 우리 흥일이를 만나야 할 텐데. 그 애가 기다리기가 지루할 것 같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방안을 둘러보니 웬 처녀가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애야, 너희 작은 아버지다. 인사드려."
진희였다. 10여년의 세월은 그를 처녀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진희가 다시 내게 형식적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이 사람아! 한달에 한번씩 와서 진희 작은 애비노릇 좀 하지 않고. 그래, 사람이 그렇게 정이 없어서야."
하며 혀를 찼다. 내가 물었다.
"형수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나오던 눈물을 훔치고
"벌써 시집가서 사내애가 둘이란다. 가끔씩 전화 온단다.그것도 대견하지, 내가 주선해서 시집보냈지. 여자 팔자 두레박 팔자라고, 내가 데리고 있으면 제 팔자나 내 팔자나 그게 아니냐."
"시집가서 애가 둘이라고요?"
"잘 됐지. 상계동 무슨 아파트에 산다는데‥‥‥‥
아! 나는 그때 울고 있었다. 술기운에 범벅된 내 몽롱한 의식과 내 황폐한 영혼에 그 말은 비수처럼 다가와 꽂혔다.
그가 재혼하지 않고 착한 시어머니와 비록 남의 배를 빌어 태어난 자식이지만 어머니라고 부르는 진희의 엄마가 돼
한평생 살아 주었으면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희망사항이었던 것이다.
"그래 앞으로 자주 찾아와. 조금 있으면 진회도 시집갈 때가 될 텐데 그땐 자네가 데리고 나가야지. 누가 하겠냐."
그 집을 나설 때 내 가슴은 명 뚫려 있었다. 차라리 찾지않은 것만 못했다. 아직도 나는 구식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세상이 어떤데,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의 큰 며느리는 어디까지나 작품속의 인물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세월은 다시 흘렀다.몇 년 전 내가 근무하는 잡지사에서 설악산으로 야유회를 간 적이 있었다. 설악산 입구에서 나는 부인들 틈에 끼어 케이블카 승강장의 층계를 오르는데 그 부인들 가운데 낯익은 중년 여자를 발견했다. 그 여자 곁에는 아들인 듯싶은 중학교학생 둘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낯이 익어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디서 봤을까?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때 나의 뇌리를 스쳐가는 어떤 짙은 영상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왼쪽 눈썹 끝에 콩알 만 한 점이였다. 그리고 유난히 큰 체격이었다. 십 수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내 눈은 세월의 저편을 정확히 응시했던 것이다. 그녀였다. 조선배의 부인이었다. 아마 공휴일을 맞아 동창, 혹은 계모임 회원들과 단풍놀이를 왔던 것이리라. 나는 그냥 지나치기가 안 된 것 같아서
"형수님 아니 십니까?"
하고 먼저 아는 체를 했다.
그려나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글쎄요. 누구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 모르시겠습니까? 마포 신수동에서 왜 조흥일 선배님
그러자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전 그런 사람 몰라요. 마포란 곳에 산적도 없고요. 선생님께서 잘못 보신 것 같군요. 하긴 비슷한 사람도 많으니까 요.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이 못돼서요."
하며 부인들 틈에 끼어 승강장으로 사라졌다. 나는 과거의 꼬리를 놓친 것에 분해했지만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이미 신통치 않은 과거'를 하얀 백묵으로 지워버렸던 것이다. 생각조차 하기도 싫은 과거, 과거 속에 끼어 든 나를 그리 탐탐치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 이해해주자.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
그리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열심히 행복하게 사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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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남진 나훈아 때...
다시 들어와 정독하겠습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