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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집 제2권 / 시(詩)
통례 권남천 공의 〈호구일록〉 뒤에 기록하다 병서 〔題權通禮南川公虎口日錄後 幷序〕
측실 강씨의 열성이 있어 처음에 공의 죽음을 막았고, 진사공의 효성이 있어 마지막에 공이 죽음을 벗어났으니, 공이 충성을 온전히 함은 자못 하늘이 공을 곡진하게 이루어준 것이리라.
비록 그렇지만 그 열성과 효성은 실상 공의 집안 가르침에 근본을 두었으니, 공이 본래 그 충성이 있었음이 더욱 분명하고, 이것이 공께서 하늘의 도움을 받은 까닭이리라.
을사년(1665, 현종6) 청화절(3월)에 후학 홍여하는 산택재에서 공경히 쓰고, 절구 두 수로 잇는다.
당웅을 배운 듯 몸으로 선뜻 칼날에 맞서더니 / 身輕白刃學當熊
만 길 높은 푸른 벼랑에 홀연 몸을 던졌네 / 忽墮蒼崖萬仞崇
옥 깨어지고 꽃잎 날리는 건 쉬운 일이지만 / 玉碎花飛容易事
막아 지킴이 하늘의 도움인 줄 누가 알았으리오 / 誰知捍衛所天功
저녁 내내 허공 가득 바람 우레가 진동하고 / 憑虛一夕動風雷
쇠로 겹겹이 잠긴 문이 또 저절로 열리네 / 鐵鎖重關也自開
누가 알리오 하늘이 정성스런 기도에 감응해 / 誰識天翁感精禱
마침내 한밤중에 아비 업고 나오게 한 줄을 / 終敎夜半負爺來
[주-D001] 통례 …… 기록하다 :
남천공은 권두문(權斗文, 1543~1617)을 가리킨다. 본관은 안동, 자는 경앙(景仰), 호는 남천(南川)이다. 1592년(선조25) 평창 군수(平昌郡守)가 되었으나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에게 잡혔다. 적중에 있으면서 적의 정세를 탐지해 관군에게 알렸는데, 당시의 일을 기록한 것이 〈호구일록〉이다. 《南川集 卷2 虎口日錄》
[주-D002] 측실 강씨의 열성 :
임란 때 권두문이 적장에게 사로잡히자, 그의 측실(側室) 강씨(康氏)는 왜적의 칼날을 자신의 몸으로 막았으며, 절개를 지키고자 31세를 일기로 응암진(강원도 평창군)에서 투신하였다. 그 정렬을 가상히 여겨 1612년(광해군4) 절부(節婦)로 정려(旌閭)되었으며, 정려비가 경북 영주시 영주동 구성공원에 남아 있다.
[주-D003] 진사공의 효성 :
권두문의 아들 주(𪐴)는 뇌성벽력이 치는 야밤을 틈타 벽을 허물고 아버지를 업어 탈출시켰다. 《春睡堂 行狀》
[주-D004] 산택재 :
1660년(현종1) 홍여하가 황간 유배를 마치고 경북 문경시 영순면 율리로 돌아와 우거한 곳이다. 《木齋集 卷11 贈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行通訓大夫司諫院司諫府君行狀》
[주-D005] 당웅 :
곰의 앞을 막아선다는 말로, 위태로움에 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용감하게 앞에 나서는 여성을 뜻한다. 《漢書 卷97 外戚傳 孝元馮昭儀傳》
[주-D006] 옥 깨어지고 :
의리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죽은 것을 슬퍼할 때 쓰는 표현으로 《북제서(北齊書)》 권41 〈원경안전(元景安傳)〉에 “대장부는 차라리 옥이 부서지는 것처럼 죽을지언정, 기왓장이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 법이다.〔大丈夫 寧可玉碎 不能瓦全〕”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전재동 (역)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