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구천동
백 정 자
시원한 느낌으로 떠난 길이다. ‘무주’ 하면 한여름에도 늘 서늘하다고 하니 말이다. 무주를 다녀온 친구도 구천동 계곡은 추워서 겉옷을 하나쯤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원시림이 살아 숨 쉬는 구천동 계곡은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숲 속에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9000개의 산봉우리가 무슨 한이라도 품고 있듯 겹겹이 싸인 심심산골은 누구에게도 자신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와 친구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3km 정도 위에 있는 백련사를 목표로 걷기 시작했다. 계곡을 따라 트래킹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산속의 나무들은 햇볕을 받지 못해서 초록색 이끼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끼를 보니 음습함 마저 느껴지고 습기를 머금은 나무들을 손으로 만지니 폭신폭신하고 축축하다. 계곡과 나란히 한 오솔길도 물기에 젖어 미끈하다. 원시림 속에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잠시 몸을 쉴 겸 물가에 앉았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작은 폭포 아래 앉아 떨어지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는다. 한여름인데도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여 입술이 새파랗다. 폭포 아래에 옷을 잃어버린 선녀가 울고 있는 듯, 하얗게 날리는 물보라가 가슴을 적신다. 계곡 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무지개가 오색찬란하고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구천동의 유래는 조선 명종 때 광주 목사를 지낸 임갈찬이 쓴 “덕유산 향적봉기”에 나온다. 속세를 등진 승려들이 9000명이나 깨달음과 진리를 찾아 도를 닦으려 들어왔다고 하여 구천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인근에 사는 한 여인의 남편도 깨달음을 얻는다며 삼 년을 목표로 입산하였다. 하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아 남편을 백방으로 찾았지만 산세가 험하고 계곡이 깊어 찾을 수 없어 포기했다. 남편을 기다리다 지친 부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한을 품고 죽은 여인이 매미로 환생하여 한풀이라도 하듯 울어대는 소리는 서럽고 애절하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계곡물과 이끼를 뒤집어쓴 원시림과 애달픈 매미 소리가 어울려 가슴이 먹먹해진다. 병풍처럼 둘러친 계곡은 거대한 산수화를 보는듯하다. 나도 모르게 자연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별유천지비인간이라 했던가. 내가 자연인지, 자연이 나인지 모를 신비 속에 빠져 걷다보니 어느 듯 쉼터가 눈에 들어온다. 꿈속을 헤매는 길손을 쉬어가라는 듯 손짓하여 부르는 송어회집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허기를 달래자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송어 회 한 접시와 소주 한 병 시켰다. 송어 이름은 소나무를 닮았다 하여 붙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송어 속살에는 나이테가 새겨져 있나 보다. 송어 회는 속살이 탱글탱글하고 고소하다. 겨자 장의 똑 쏘는 매콤함은 콧속을 뻥 뚫어주고, 초장의 달콤새콤함은 첫사랑처럼 내 몸에 번져온다. 잘 숙성된 된장은 오래 묵은 벗을 만나는 것 같다. 매콤하고 새초롬하고 담백한 세 가지 맛이 육질 속에서 만나 혀에 감겨온다. 각각의 맛이 어우러져 함께한다. 우리 삶도 다름이 어우러져 보듬어주고 모자람을 서로 채워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송어를 보니 언젠가 월출산 계곡이 생각난다. 월출산은 산세가 깊고 물이 맑아서 송어가 살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낚싯대에 물고기 모양의 미끼를 끼우고 낚싯대를 살살 풀었다 당기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저만치 송어가 나타났다. 제법 큰 송어가 물살이 깊고 빠른 쪽에서 미끼를 물지 않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동생이 그 송어를 잡는다며 조금씩 물속으로 들어갔고, 이내 동생은 사라졌다. 동생의 머리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며 물살에 떠밀려 아래로 멀어져 갔다. 마치 아래에서 낚시하던 사람이 동생을 물가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축 늘어진 동생을 자갈밭에 눕히고 심폐소생술을 했다. 한참을 씨름하니 입에서 물이 쏟아졌고 숨을 쉬기 시작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송어를 내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 생각했다. 동생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던 송어가 지금 내 앞에서 미각의 감미로움을 채우고 누워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바위마다 가로 줄무늬들이 새겨져 있는 게 보인다. 어쩌면 이곳은 몇 억 년 전에 바다이지 않았을까. 오랜 세월을 거쳐 토사가 퇴적되었다가 어느 날 뭍 위로 솟아올라 우뚝 선 심산유곡이 되었나 보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저 많은 물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산은 몸속에 바다를 품고 있어 많은 물을 토해 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내 안에 무엇을 간직하기나 한 걸까? 끊임없이 솟아나는 계곡의 물을 보면서 자꾸만 왜소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많은 이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살고 싶다고 늘 기도 하면서도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닫아버렸다. 나와 의견이 다른 이와 마주 서면 이내 돌아서버렸다. 그러나 어쩌면 그러한 상처들이 저 바위의 지층처럼 마음에 새겨져서 품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며 상념에 젖어 걷고 있는 사이 어느덧 백련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백년사는 신라 신문왕 때 백 년이 초암을 짓고 수도하던 중 그곳에 흰 연꽃이 솟아 나와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눈을 감으니 한때 9000명이나 되었다는 수도자들이 불경을 외우고 정진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백년사는 고즈넉하기만 했다. 우리는 백년사 맨 위 산신당 앞에 섰다. 석축을 쌓아 올린 산신당은 뒤로는 병풍처럼 둘러친 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확 트인 앞산을 보면서 서 있다. 나는 사찰의 꼭대기에 산신당이 있는 이유가 늘 궁금했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불교가 전래할 당시 토속신앙을 품에 안는 조건으로 정착했다 한다. 그래야만 서로 싸우지 않고 불교를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사람도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 사귐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였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쩌면 세상의 종교나 문화는 그 나름대로 각각의 존재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인정하며 받아들일 때 진정한 화합과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9000 승려들의 염불 소리가 이제야 큰 깨달음이 되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일까. 계곡의 물소리도 매미 소리도 아스라해져 가는 명상 속으로 나는 깊이깊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