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싸움
고후 10:3-6
“마더 테레사의 편지”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인도의 극빈 지역에서 청빈하고 헌신된 삶을 살던 마더 테레사의 인생을 토대로 한 영화입니다.
예수님의 본을 받아 고귀한 헌신의 삶을 산 마더 테레사였지만, 수녀원을 나와서 독립적으로 임종자의 집을 시작하면서 영적, 감정적 눌림이 시작됩니다.
그런 증상이 심해지면서, 가까운 사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테레사 수녀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자신이 버림받은 것 같이 느껴진다고 언급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논란이 되어, 로마 가톨릭에서 마더 테레사를 성인으로 추대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런 고통을 겪게 된 원인을 추정할 만한 단서가 영화에 나옵니다.
마더 테레사가 죽어가는 콜카타의 인도 사람들에게 사랑과 안식을 누리게 해주기 위해서 임종자의 집을 세울 장소를 물색했는데, 좀처럼 구하지 못하게 되자 이전에 칼리 사원으로 사용했던 버려진 건물에서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칼리란 여성 에너지의 상징으로 ‘죽음의 신’이며 힌두교의 샤크티파와 불교의 밀교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칼리는 인도 전역에서 두루 숭배되는 죽음의 신이며, 그 중에서 테레사 수녀가 있었던 콜카타의 사원이 가장 유명합니다.
칼리 사원에서 100년 전에는 아이들을 잡아서 목을 잘라 바쳤다고 하는데,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영국이 그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 후부터 짐승을 제사로 바쳤는데, 지금도 제사를 위해 염소의 목을 치는 끔찍하고도 피 비린내 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영적인 일을 잘 이해합니다. 셈족의 후예인 동양 사람들은 영적인 부분이 발달했습니다.
세계 4대 종교의 발상지가 모두 동양이라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유교 모두 동양입니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비교적 이성적이라서, 철학, 과학, 신학적 교리 등이 서양에서 발달했습니다.
알바니아 계의 유고슬라비아 출신이었던 테레사 수녀도 서양인으로서 이런 영적인 부분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에서는 다소 각색이 되었겠지만, 테레사 수녀가 칼리 사원 자리에 임종자의 집을 시작하고 칼리 사원을 드나들면서부터 그녀의 영적, 정신적 고통이 시작된 것은 분명합니다.
테레사 수녀처럼 감정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덜어주고 도와줄 사람들을 찾아다니지만 쉽게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런 교인들을 돌봐주는 사역자들도 엄청난 에너지 사용에 따른 탈진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중 하나는 이런 영적, 감정적, 정신적 문제를 가진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고, 그 원인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 그 중 태반이며 심지어 사역자들조차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환경을 통해 영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할 정도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5)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교회를 잔멸하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고, 넘치는 혈기와 유대교에 대한 열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200마일도 넘는 거리를 달려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첫째 : 육신으로 싸우지 아니한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3절)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깊은 차원의 치유를 해야 하는 이유는, 악한 영들의 활동에서 이런 것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의 영 안에는 악한 영들이 절대 들어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은 깨끗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에서 배우듯이, 악한 영들이 우리의 혼과 몸에 들어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혼(soul)은 ‘지정의’의 영역, 즉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숲속에 악령들이 자기 모습을 감추고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식, 또 잘못된 믿음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고 감정을 자극시키면서 잘못된 의지로 고집을 부리게 함으로써 묶임 가운데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특히 ‘상처’라는 것은 ‘상처 난 감정’입니다. 지성과 의지도 잘못될 때 문제이지만 특히 악한 영들은 우리의 상처 난 감정을 자극하여 역사할 때가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결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받은 우리의 구원을 취소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정말 강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믿었다면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최대한 우리 믿는 자들을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하여 황폐하게 살도록 괴롭히는 것이 마귀의 목적입니다.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둘째 :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해야 한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4절)
바울이 싸우기 위해 지닌 무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기는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파괴하는 강력한 것입니다.
엡 6:11-17절에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니 영적인 무기,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그 전신갑주는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가슴에는 의의 흉배, 허리에는 진리의 띠, 발에는 평안의 복음의 신을, 왼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그리고 오른손에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육체에 속한 병기 즉 세상적 학문, 인간적인 영향력, 권위 있는 추천서(3:1), 사람을 현혹 시키는 수사학적 달변(고전 2:1)등 인간적인 것들을 가지고 맞서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병기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병기는 곧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온유하고 관대한 예수의 성품을 가지고 대응(對應)함을 말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바울의 무기는 약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그 능력으로 덧입혀질 때 그 어떤 대적도 당할 수 없게 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육의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적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고 사람들이 적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전쟁입니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가 싸우는 적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이길 수 있는 무기는 준비하였습니까? 적에 대하여 가장 잘 설명되어 있는 책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어떤 무기로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 까지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적에 대하여, 무기에 대하여 성경에서 배우지 않고 토속신앙, 주술, 영화나 소설 등에서 배웁니다.
그래서, 고작 준비한다는 무기가 십자가 형상, 성인들의 형상, 성화나 주문으로 사용되는 기도문 정도입니다.
셋째 :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5절)
우리의 싸움은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드리고 복종하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복종하지 못하게 태초부터 방해하고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싸움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곧 하나님을 인정하고 무릎 꿇고 그 분 앞에 항복하고 나아가 복종하는 것입니다.
(빌2: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깨어있어 싸움의 대상과 싸움의 목적을 바로 알아야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람은 싸움의 대상도 목적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원수까지도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성경에서는 구약의 사울왕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하는 다윗까지도 죽이려 하였습니다.
(삼상18:10,11)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사울왕은 판단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누가 자신의 적인지, 자신을 위하는 사람인지도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