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釜山停車場
12열차가 떠나던부산역(釜山驛)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는 기차역
▼앞으로 큰 변화를 가져올 부산역광장 조감도
부산역의 변천
임시정거장으로 초량역과 부산역 사이 선로의 연장선상에서
1908년 4월 1일에 보통역으로 업무가 시작되었다. 1908년 3월
공사비 97만 4천원을 들여서 부산역 본관과 부대설비 공사에
착수하여 1910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정거장 구내 면적은
8만 8,340㎡로 본관은 총 건평 1,183㎡이며, 건축면적 358평, 연면적
689평(2,238㎡), 건물 최고 높이가 22m로 벽돌조의 2층 건물이었다.
붉은 벽돌에 흰색 화강석을 섞어 전체의 구성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한 철충 양식으로 공사는 하야가와 하지매가 수행하였다.
그 후 1943년 12월 10일 부산부두역으로 개칭하였으며 1945년 6월 10일
부산역으로 개칭함에 동시에 화물구와 구내구(構內區)로 분리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일 화물구와 구내구의 2개구를 통합하였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대화재로 역사가 전소하여 중앙동에 임시
가건물을 역사로 사용하다가 1965년 11월 1일 부산진역과 통합하여
부산진역에서 영업을 하였다. 그 후 1968년 지금의 위치에 역사를 신축하여
1969년 6월 10일 역사를 준공하여 역무를 이전하였으며, 현재의
부산역사는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에 맞추어 증·개축되었다.
구성
1910년에 준공한 부산역은 1층에 각 대합실과 매표실, 전신실,
역원실, 화물취급실, 식당, 욕실, 화장실을 두었고, 2층 이상은
호텔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승강장 상옥의 철골조는 한국철도의 효시이다.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에 맞추어 증·개축되어 대지면적은
21만 1,536㎡, 건축면적 3만 8,946㎡, 연면적 6만 1,880㎡로 지상 5층,
지하 1층에 철골 및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건축되었으며, 중앙집중식
냉난방 및 공조시설과 에스컬레이터 14대, 엘리베이터 12대가 설치되어
있다. 1만 6,457㎡의 선상주차장에는 승용차 기준으로 총 245대가
동시에 주차할 수 있으며, 역 광장 주차장에는 25면의 승용차를 주차할
수 있다. 일반열차와 KTX 열차를 이용할 수 있는 5개 승강장이 운영되고
있으며, 3층 맞이방에는 매표창구 및 현금자동발매기, 종합관광안내소,
유아방, 트레인 솦, 종합식당가, 편의점, 패스트 푸드점, 제과점 등 편의시설이
분포하고 있다. 1층 맞이방에는 각종 편의시설로 코레일 멤버십 회원을
위한 아늑한 휴식처 KTX 라운지, 빠른 배송을 하는 KTX 특송, 미용실,
편의점, 의류매장, 패스트푸드점, 서점 등이 입지하고 있다.
현황
부산진역 다음에 입지한 경부선의 종착역으로 2008년 현재
KTX 열차 1일 운행회수가 상·하행선 각각 53회이고, 일반여객 승강객수는
14,896,209명으로 이 가운데 승차인원과 강차인원은 각각 약 50%를
차지한다. 열차별 승강객수를 보면 KTX 열차가 약 74%를 차지하여
가장 많고, 그 다음은 무궁화 열차(약 22%), 새마을 열차(약 4%)
의 순이다. 한편 화물 수송량은 없었다.
참고문헌
『2008철도통계연보』(한국철도공사·한국철도시설공단, 2009)
『한국철도건설백년사(하)』(한국철도시설공단, 2005)
『한국철도요람집(韓國鐵道要覽集)』(철도청, 1986)
1950년6월25일00시
북한 전면 남침 한국전쟁 발발
▲ 1950년 6월 28일 서울 시내에 진입한 북한 인민군 전차.
06.2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한국군
원조 및 북한 도발 무력 제재 결의
미, 해?공군에 한국 전선 참가 명령
(06.30 미 육군 파병 명령 07.03 미 해병대 파병 명령)
06.28 국군, 서울 한강 인도교 폭파…퇴각
군인?피란민 등 최소 500여 명 폭사
수도 서울 함락
07.01 미군 지상군 선발대 부산 상륙
CRIK 원조 도입 시작
07.02 세계 36개국, 대한 군사 지원 성명 발표
07.07 유엔군 결성…한국군, 유엔군에 편입
유엔군 통합 사령부 창설
07.08 대한학도의용대 결성
07.12 한-미 대전 협정(「재한 미국 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한-미 협정」) 체결
07.15 한국군 작전지휘권(이후 작전통제권)
유엔군 사령관에 이양
07.20 인민군, 대전 점령
07.31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유엔군 통합
사령부에 한국민 구호 요건 결정 요청 결의
08.01 대구매일신문 창간
08.03 유엔군, 워커 라인구축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방어선)
08.18 정부, 임시 수도 부산으로 이전
08.22 국민병 소집 개시
09.15 인천 상륙 작전 개시
▲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점령한 인천 옐로 비치
(Yellow Beach)에 도착한 수송선에서 보급품과
탄약 등을 하역하고 있다.
▲ 맹렬한 함포 사격!
09.16 낙동강 전선서 유엔군 총반격 개시
09.26 서울 탈환…09.28 완전 수복
▲ 정부의 서울 환도 기념식에서 중앙청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흑백 동영상 1950년대 6,25동란의 우리나라 (1) -1950년 서울의 봄,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의 모습-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20분, 북한의 남침-구름처럼 몰려든 학도병,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변경-사격술 등의 교육후에 곧바로 전선에 투입됨.-B29의 융단 폭격, 인천 상륙작전,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이 됨.-국군과 유엔군이 만남,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함.-공산군의 만행 현장, 학살당한 양민들의 시체,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나선 시민-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 압록강에 도착함.-흥남 부두로 피난가는 사람들,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주민들-피난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열차에 오르는 사람들-부산을 임시 수도로 지정하고 제2대 이승만 대통령을 선출함.-어려운 여건에서도 공부를 하는 학생들-서울의 재탈환,중앙청에 태극기 게양-공산군의 학살로 무참하게 죽어간 양민들의 시체들-38선 돌파, 10월 26일 압록강 도착-흥남부두를 빠져나오는 피난민들,북한을 탈출하는 북한주민들-정부,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하고 국회도 부산으로 이전-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한태영 후보를 각각 선출-국군과 유엔군, 1951년 3월 14일 서울 재탈환에 성공-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을 가짐.-휴전을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측 대표를 파견하지 않음.-우리측 불참한 가운데 유엔군과 공산군이 정전협정에 조인-무너진 한강 다리, 폐허로 변해버린 서울-돌아온 피난민, 다시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고장난 대포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배급 쌀로 근근히 생활하는 사람들-부산 피난살이, 부두에서 일하는 사람들-판자집, 천막집, 토굴 같은 움막집의 모습-전쟁 중의 설의 모습, 널뛰는 아이들-전쟁 고아 10만명, 전국 곳곳에 고아원이 생겨남.-식사를 하는 어린 아이들, 해외의 복지가들이 전쟁고아를 받아 들임.-비행기로 시가지에 살충제를 뿌리는 모습-육군본부 환도, 국력을 강화함.-전투 비행단 창설, 해상 전력을 강화, 경찰력의 증강을 꾀함.-1953년 8월 국내 최고 특급열차 통일호가 등장-1954년 가을 제34회 전국체전이 열림.-체조, 축구, 권투, 농구를 한 경기장에서 치룸.-한국 마사회 뚝섬 경기장 개장.서울 화양리에 골프 대회 개최-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되어 인기가 있었던 '자유부인'-댄스가 전염병처럼 번져, 전국에 댄스홀 폐쇄령을 내림.-50년대 중반 계 파통-전파를 타고 대중가요, 연속극[ 출처 : 까칠한( http://blog.daum.net/atrhas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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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부산정거장'
영화 '국제시장'이 천만관객을 돌파한 이유 중에는
현인(玄仁)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가 화두가 되고
?당시 이 노래 못지않게 전국의 남녀노소가 애창하여 가히 국민가요가
되다시피 한 노래가 하나 더 있는데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한국 가요계의 제1세대를 대표하는 가요황제(歌謠皇帝)요,
불세출(不世出)의 가객(歌客) 남인수(南仁樹, 1918 ~ 1962)가
1953년에 부른 노래다. 남인수는 열여덟 살인 1936년에 데뷔하여
평생 1,000여 곡의 노래를 남긴 가요계의 산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勃發)한 한국전쟁이 소강상태를 맞으면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停戰協定, The Korean War Armistice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휴전으로 총성이 멎자 전화(戰禍)를 피해 고향산천을 뒤로하고 남으로
피난 내려와 부산 국제시장에서 뜨내기장사를 하며 고달픈 삶을 이어가던
실향민(失鄕民)들이 각박했던 피난살이를 끝내고 환고향(還故鄕)하는 기쁨과
그동안 갖은 고생 속에서도 정들었던 경상도 사투리 아가씨와의 눈물어린
이별이 교차하는 부산역에서 객실이 열두 개나 매달린 십이열차(十二列車)에
몸을 싣고 하나씩 둘씩 고향 찾아 떠나는 가슴 아픈 사연을 노래한 것이 바로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다. 남쪽에서 태어났다는 우연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겪지 않아 실향민의 아픔을 알지도 못하면서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를
큰 소리로 부르고 다녔던 철없던 어린 시절이 바로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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