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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묵상글 들 ( 연중 25주토요일.- 즐거움, 그 만족과 허무의 관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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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연중 25주 토요일. 작은형제회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즐거움, 그 만족과 허무의 관계
허무를 얘기하는 코헬렛서가 오늘은 젊은이들에게 즐기라고 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그런데 이 말이 코헬렛의 진심입니까?
즐기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이기에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까?
그런 뜻도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들한테 즐기지 말고 오히려 고신극기하라고 하면 바로
그 말이 튕겨나올 뿐 아니라 즐기는 것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니
즐기는 것을 죄악시하거나 즐기지 말라고 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즐거움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퇴폐적이고 파괴적인 즐거움의 차원과
건설적이고 활력을 주는 즐거움의 차원이지요.
또 이 세상의 즐거움이 있다면 신락神樂도 있지요.
그래서일까 오늘 코헬렛서는 즐기라는 말에 이어 이렇게 충고합니다.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기쁘고 즐겁게 살되 하느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살라는 말씀이고,
쓸데없이 근심하거나 몸을 잘못 굴려 건강을 해치지 말라는 말씀이며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임도 잊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즐겁게 살되 허무로 끝나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허무란 허虛와 무無가 합쳐진 말이지요.
그리고 허란 비어있다는 뜻이고 차있던 것이 빠져나가 빈 거지요.
무란 없다는 뜻이고 있던 것이 사라지고 이제 없는 것이지요.
즐거움이란 순간적인 만족감이고 행위동시적인 만족감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이 갖고 싶은 것을 갖게 되었을 때의 소유적 만족감이라면
즐거움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의 행위적인 만족감인데
행위적인 만족감이기에 행위 때는 만족스럽다가 행위가 끝나면
사라지는 만족 그러니까 순간적인 만족이지요.
술을 먹거나 마약을 할 때 그것이 그 순간엔 대단한 만족을 주지만
술과 마약이 깨면 그 만족이 싹 빠져나가기에 만족만큼 허무도 큽니다.
성적인 만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없이 단지 성적인 욕구 차원에서의 만족은
성행위가 끝나는 동시에 사라지고 허무만 남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사랑이 없이 욕구와 욕망만 쫓는 만족과 즐거움은
늙기도 전에 그 즉시로 허무하고,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기도 전에
행위 자체로 단죄를 받는 퇴폐적이거나 파괴적인 허무 잔치입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모든 즐거움이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건전하면서도 우리 삶에 생기를 주는 만족과 즐거움도 있지요.
예를 들어 즐겁게 노래하거나 운동을 하면 쓸데없는 근심걱정과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행위 후에도 허무는 없고 생기가 남지요.
이런 행위와 만족은 욕망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인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행위의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움을 추구하되 사랑의 즐거움을 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독서가 취미이고 즐거움이면 좋고,
거룩한 독서가 취미이고 즐거움이면 더 좋고,
기도가 정말로 즐겁다면 그 즐거움은 최고의 즐거움이며
앞서 제가 얘기한 그 신락神樂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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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을 두려워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신들이 바란 예수님과 실제 예수님 사이의 깊고 깊은 간극 때문이었지요. 그 간극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일종의 비겁함입니다. 대개 비겁함은 제 잇속 계산과 상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지만은 아닐 테지요. 당시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멋진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른바 묵시적 열광의 시대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살아갔습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내일의 달콤한 인생을 향한 묵시적 환상은 활개를 칩니다.
그런 열망을 단번에 꺾어 버리신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제자들은 허탈과 허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뚜벅뚜벅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루카 복음은 19장까지 열한 개의 장(9,51―19,48)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수난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얼마간의 비겁함과 얼마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그야말로 제자들이 복잡한 감정의 다발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다가갈수록 점차 다듬어진 신앙의 정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꼬여 버린 삶의 방향에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제자들입니다.
신앙이란 알아듣고 깨닫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몰라서 무모하게 내맡기는 의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 수난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
그저 일상 속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겠지요.
잘 모르지만 이 몸짓이 앎의 또 다른 조각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살아 내야 합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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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44-45: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주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예고를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 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그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서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하신 분이고,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하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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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한상우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 44)
넘어지고
넘겨지며
이 가을은
새로이 익어간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 삶의
약함을 만나는
시간이다.
약함이
있는 곳에
강한 구원도
있다.
약함에
눈 감지
않는 것이
은총이다.
주님께서도
당신 약함을
나누신다.
가장 약한
모습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끈다.
약함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신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넘겨지시는
아픈
사랑이다.
당신 먼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맡기신다.
하느님께
무엇 하나
맡기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
넘겨지심으로
하나가 된다.
넘겨지는
사랑으로
우리는 또
이 고개를 넘는다.
사람을
바라보는 법을
넘겨지시는
주님의
연약함을 통해
배운다.
사랑은 서로의
약함까지 언제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약함의 이름으로
용서를 청하고
약함의 이름으로
간절한 사랑을
청하는 순교자
성월이다.
눈물
글썽이게 하는
서로의 약함이
은총이며
감사이다.
단숨에
넘을 수 없는
이 신앙의 고개를
나의 약함과 함께
오늘도 앞으로
걸어 나간다.
모두의 약함은
넘겨지시는
주님을
향하여 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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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연중 제25주간.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정적인 가사와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던 가수 존 덴버(John Denver)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존 덴버의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습니다. ‘Take Me Home Country Roads, Sunshine on My Shoulder'를 들었습니다.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불렀던 ‘Perhaps Love’도 기억납니다. 안타깝게도 비행기 사고로 50대 초반에 사망하였지만 그의 노래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아! 그의 노래 중에 ‘Today'도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 중에 ‘오늘이 바로 중요한 순간이고, 지금이 나만의 이야기가 있는 순간입니다. 오늘 나는 웃고, 울고 노래 부르렵니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에게 기쁨과 사랑을 주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제 세상을 떠났던 사람들이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 오늘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오늘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2020년 9월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는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텃밭을 가꾸기도 하였고, 잔디밭에 물을 주기도 하였고, 오랜만에 야영도 하였습니다. 십자군 이야기, 신을 위한 변론과 같이 꽤 긴 책들도 읽었습니다. 가까운 퀸즈 한인 성당의 미사도 도와 드릴 수 있었고, 부르클린 한인 성당은 매주 주일미사를 도와 드리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주어진 하루를 감사드리며 산다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풍랑을 잠 재우셨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 곁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넘겨지고, 박해를 받고, 죽을 것이라고 하시니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길을 가겠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최선은 아직 오직 않았다.(The best is yet to come)’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지금 처한 시련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최악이 아직 오지 않았다.(The worst is yet to come)’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금 만난 기쁨과 행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나쁜 일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걱정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넘겨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모함과 질시를 받아 힘들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직 최선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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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좋아하지요. 선배 한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판단이 흐려지기 쉬운 것은 무엇이라도 선물 받는 것이 좋고 또 좋게 말하는, 그것이 설 령 ‘아부하는 말’이라도 좋아지니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손자병법에서도 상대방을 우쭐하게 하는 심리를 이용해서 승리로 이끄는 예가 있습니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스스로 자만하거나 교만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우습에 하는 것으로 유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깊숙이 내재하고 있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로울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당신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그 때의 정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루카 9,43)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으셨을 때 주님께서 당신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9,44)
루카복음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묻기조차 두려워했다고 전합니다.
우리는 자연에서 많은 삶의 지혜와 교훈을 배우기도 합니다.
나무는 동물과는 달리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맛있는 많은 열매를 맺고 또 그 안에 자신의 종을 옮길 씨앗을 담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이 먹도록 유인하지요. 다람쥐가 도토리나 밤, 또는 잣을 옮겨서 자기의 은신처에 보관하는 법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땅에다 묻습니다.
그래서 냄새나 기억으로 묻어두었던 그것을 도로 꺼내어 먹습니다.
그런데 다람쥐가 기억의 한계가 있어서 70%는 찾아 먹지만 나머지는 못 찾는다는 것입니다.
다람쥐가 땅에 묻어둔 것이 그 씨앗이 그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자라기 때문에 산림은 골고루 새로운 나무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자연의 순리입니다. 동물들의 먹이가 되지 않는 열매 속의 씨앗이 겪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참 놀라운 순리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땅 속에 묻힌 밀알’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지만 그것은 스스로 어둠에 갇혀야 하고 외형적으로는 그 형태마저 썩어야 새로운 싹을 낼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이 썩는 밀알이 되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표현하기는 ‘썩는다’라는 표현은 이제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이 말씀은 그리스 사람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 주님께서 하셨는데 그들도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께 그 뜻을 묻기조차 두려워 하였습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젊은 이들에게 청춘도 허무로 끝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마음이 자신을 기쁘게 하도록 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사람이 언젠가는 죽음의 문턱으로 다가간다고 일깨워주면서 하느님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5-7)
주님께서는 한참 잘 나가시고 인기도 대단할 때에 이미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들판의 나무들의 과일이 동물들을 먹이며 자신의 종을 퍼트리듯, 주님께서는 당신이 썩는 밀알이 되어 당신 자신을 바치십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시며 죽음을 준비하시는 주님을 본받아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 말씀대로 자신을 희생하며 나누는 생활을 합니다.
오늘 간략하지만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라는 주님의 말씀이 실감 있게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십니다.
그러나 루카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5)
제자들은 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거는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에 ‘설마 사람들에게 넘어가실 리야 있겠느냐?’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더 풀어서 본다면 주님은 절대로 그래서도 안 되시고 또 그렇게 만만하신 분이 아니시라는 신뢰 때문 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귀담아 들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거는 메시아는 그때까지만 해도 세속적인 무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리시는 보상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을 것입니다.
예언자가 전하는 종말론적인 메시아에 대한 희망의 말씀입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4 -15)라는 표현은 폐허가 된 성전을 예언자가 체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은 수난과 죽음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며 받아들 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또한 바라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이웃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도 또 이해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고통과 부서지는 아픔을 통하여 우리를 정화하고 우리 세계에서 떠날 줄 아는 수련을 통해서만이 우리 이웃에게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자신이 될 수 있겠지요.
‘세상에 꽁짜가 없다.’라는 말대로 수고와 고통 없이는 우리 자신을 수련할 수도 주님부활도 성취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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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불편하지 않은 진실은 없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기적과 이적에 놀라워하고 있었습니다. 반전을 좋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필 이때,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스승을 따르는 기쁨에 취해있던 제자들에게는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해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무지(無知)라고 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을 영적인 무지라고 합니다. 어떠한 것이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스트레스를 원하지 않으면 진리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진리는 등 뒤에 항상 십자가를 숨기고 옵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십자가의 신비에 관해 묻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진리를 알고 싶어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진리들을 거부한다면 마지막 때에 진리 자체이신 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손에 넘겨지셔야 하는 이유에 관한 것은 성경에 수 없는 예시들이 나옵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과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아비멜렉은 이 세상의 왕에게 아무 힘도 없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는 자신의 여동생이니 맘대로 데려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아내를 그렇게 쉽게 빼앗기는 무력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왜 남의 아내를 탐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몰랐다고 항변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죄가 아니란 소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죄사함의 중재를 부탁해야만 죄가 사해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모르고 한 모든 행위도 하느님께 죄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싶어 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갈 때 하느님께 많은 것을 해 드린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하는 성체에 감사를 드리지 못한 순간순간이 다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마치 아브라함의 사라처럼 무기력하게 넘겨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모든 것을 내어드려도 마땅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관계가 완성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도 그렇게 계약을 맺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빚진 것을 깨달아 봉헌할 줄 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진리라는 이름을 가지셨다면 우리는 진리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 이전의 내가 무지요 어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무지한 우리를 빛으로 밝혀주려고 옵니다. 무지한 자아가 죽기를 원하면 진리는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영화 ‘조커’에서 한 남자가 왜 무자비한 악당이 되어가는지를 표현하려 하였습니다. 영화에서 이 남자는 착하디착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시대와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간다고 표현하려 합니다. 하지만 조커가 빠져있었던 것은 ‘지나친 자기애’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자아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기애는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진리는 자아를 죽이는 칼과 같습니다. 그러니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를 원치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찌르는 칼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지식은 이제 어둠만 더 짙게 만듭니다.
조커에겐 엄마가 있습니다. 조커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늘 웃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엄마는 토마스 웨인이라는 시장이 그렇게 잘 지내는 것은 자신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잠깐 그 집에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커는 엄마의 편지를 보고 자신이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라고 믿게 됩니다. 조커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피해자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더 많이 주고 더 많은 것을 빼앗긴 억울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냉혹했습니다. 토마스 웨인은 조커의 엄마가 과대망상증으로 미쳐있었고 조커는 입양한 아이라고 말해줍니다. 조커는 혼돈에 빠집니다. 엄마의 병력을 확인합니다. 사실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선해지고 싶거나, 더 악해지려거나. 여기서 조커는 악해지기로 했던 것입니다. 자기도 과대망상증에 빠져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토마스 웨인의 말대로 엄마는 자기애 과다 성격장애였고 밥도 안 주고 자신을 폭행하여 자신의 뇌까지 손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살해합니다.
만약 토마스 웨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고 그 많은 돈으로 병원의 기록까지 고쳐버렸다면 어쨌을까요? 조커는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은 것입니다. 악당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진리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해 나를 죽이고 싶은지, 타인을 죽이고 싶은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참 진리는 나를 죽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조커는 어머니를 죽이며 해방감을 느끼고 기뻐합니다. 나를 죽이며 기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진리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나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으면 진리도 들어오지 못하고, 그러면 영원히 그 불편했던 진리와 헤어져야 합니다. 그곳이 지옥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진리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불편한 진리를 향한 나의 문이 열리고 참 진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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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음이 다가온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죽음의 그림자는 새로운 생명의 서곡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코헬렛은 열흘 붉은 꽃 없고, 달도 차면 기울듯이, 세월 앞에 장사 없음을 장엄한 한편의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코헬렛 11장 9절, 12절)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월을 거스를수 없다는 것을 코헬렛은 온 몸으로 절절히 체험했겠지요. 저자는 그러한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오늘 우리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건네고 있습니다.
인간은 나이들어 늙고 나서가 아니라, 젊은 시절에 자신의 인생과 그 인생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라고 당부합니다. 또한 그 모든 기쁨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므로 감사히 받아들일 것을 강조합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백번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들어 골골하니 그 아무리 좋은 풍경도, 그 어떤 산해진미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나 영적생활 역시 젊은 시절에 그 맛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바쁘니 좀 더 나이들면 기도를 시작해야지!’ 하는 사람치고 성공하는 사람 별로 못봤습니다.
나이들어갈수록 기력도 떨어지고, 여기 저기 쑤시고 아프기 시작하면 기도도 힘들어서 못합니다. 그러니 기도를 미루지 말고, 한살이라도 젊을 때 본격적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그 깊은 맛을 들이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농촌의 현실이 점점 심각해집니다. 급격한 노령화 탓인지, 어린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산부인과나 산후조리원 같은 간판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근근히 마을을 지켜오시던 주민들도 점점 노쇠해지셔서, 동네 전체가 생명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결론격으로 코헬렛은 불행한 날에 만나게 될 끔찍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비가 오고 구름이 몰려오는 날은 희망이 사라진 노년기를 상징합니다. 파괴된 집은 노년기에 맞이할 고통을 의미합니다.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의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을 생기를 잃는다.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는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트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기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코헬렛 12장 3~5절)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라는 표현이 어찌 그리 제게 ‘확!’와닿는지 모릅니다. 한 며칠 허리가 삐끗해서 거동이 많이 불편했었는데, 오르막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노쇠한 어르신들이 하루 하루 얼마나 힘겹게 견뎌내시고 계시는가를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한 인간이 수명을 다해가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현실이 있습니다. 노화와 그로 인한 고통들입니다. 심각한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장애를 겪기도 합니다. 심연의 고독과 소외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코헬렛은 노화로 인한 고통과 슬픔의 순간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외칩니다. “여러분들, 이제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향한 여행 가방을 쌀 시간입니다.”
나이 들어간다고,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인간의 마지막 운명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새로운 시작의 서곡이기 때문입니다.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렛 2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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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억하라, 사랑하라, 찬미하라 - 창조주 하느님, 파스카 예수님을! -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오늘 제1독서 맺음말입니다. 오늘로서 세차례에 걸친 제1독서 코헬렛도 끝납니다.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끝납니다. 시작과 끝이 똑같습니다. 코헬렛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입니다.
희망이, 비전이, 꿈이 보이지 않습니다. 허무한 인생이니 인생을, 젊음을 말껏 즐겨라 권고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 창조주는 꼭 기억하라 하십니다. 공감이 갑니다만 웬지 허전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여라.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뿐이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코헬렛은 젊은이에 대해 충고한 후 늙음과 죽음의 현실을 상기시킵니다. 누구나 겪게 되는 늙음과 죽음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너무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생각있는 젊은이나 늙은이라면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문하게 됩니다.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 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되돌아간다.”
너무 어둡습니다. 허무의 짙은 구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쁨과 희망이, 찬미와 감사가 없습니다.
삶은 허무가 아니라 찬미입니다. 계속되는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약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할뿐 아니라 사랑해야 합니다. 찬미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이, 하느님 찬미가, 하느님께 감사가 답입니다.
오늘 복음의 파스카의 예수님이 답입니다. 창조주 하느님뿐 아니라 파스카 예수님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투명하게 드러나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허무가, 죽음이 결코 마지막 말이 될 수가 없습니다. 허무가 아니라 충만이,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 마지막 말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궁극의 답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어제에 이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내용은 이 간략한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고 묻는 것도 두려워했지만,
우리는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늘 함께 하기에 충분히 이해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되어 매일 평생 끊임없이 젊어서나 늙어서나,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찬미와 감사의 시편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니 결코 허무의 어둠이 스며들 여지가 없습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젊으나 늙으나 생명과 희망의 빛으로 충만한 일상입니다.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로 가득한 삶입니다.
하여 허무가 답이 아니라 충만이 답입니다. 회색빛 우울이 아니라 밝게 빛나는 찬미가 답입니다.
기억만으로는 너무 약합니다.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를 열렬히 사랑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하여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삶의 허무에 대한 결정적 답은 이 거룩한 미사뿐입니다.
우리의 심중을 대변하는 바오로 사도의 두 말씀을 나눕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제가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입니다.
바로 허무주의자虛無主義者이자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인 코헬렛에겐 이 기쁨이, 기도가, 감사가 없습니다.
기쁨과 희망이 없는 현실주의는 허무주의로 귀착되기 마련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바오로의 말씀도 코헬렛의 허무에 대한 결정적 답이 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허무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8-39).
‘허무’란 단어는 제가 집어 넣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구원 선물 둘이 영원한 생명,
하늘 나라의 실현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과의 일치를 실현시켜 주시는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허무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시고 생명의 사랑 충만한 빛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90,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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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이기우 신부님.
너희는 귀담아 들어라
- 정약용이 이벽을 스승으로 모신 이유
오늘 독서는 코헬렛 11장과 12장의 말씀입니다.
본시 ‘코헬렛’이라는 책은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을 수록한 성경입니다.
코헬렛은 인명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리나 직책을 뜻하는 보통명사인데,
당시의 독자들은 솔로몬 임금을 가리키는 것임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코헬렛에 쓰인 히브리 말은 솔로몬 시대의 언어가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가장 후대의 언어입니다.
기원 전 4세기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동방 지역을 무력으로 정벌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헬레니즘화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헬레니즘은 그리스 문화를 원천으로 하면서도 ‘길가메시 서사기’ 같은 고대 중동 공동의
정신문화 유산의 영향도 수용하고 ‘아멘엠오페의 지혜’라고 불리우는 이집트의 정신문화도 받아들였습니다.
아주 개방적이고 보편적인 성향을 띠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섬겨온 유다이즘이 희석되어 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코헬렛의 실질적인 저자들인 유다의 원로 현인들은
밀려들어오는 무신론적인 외래 사조를 개방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유다 젊은이들과 후대 유다인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유다의 신앙적인 전통 지혜를 솔로몬의 이름을 빌어 전하고자 했습니다.
헬레니즘의 영향을 나타내는 구절은,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하는 매우 개방적인 내용입니다. 하지만 유다이즘의 영향은,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같은 구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유다이즘의 결론을 보여주는 코헬렛의 이러한 사상은 이 세상에 하느님으로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극적인 반전을 이룩합니다. 바로 십자가 수난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 군중의 반응을 전하는 오늘의 복음도 단편적이라기보다는 총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 반응은 이스라엘의 평균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께서 드디어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기대하는 이 현세적 메시아 기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헛된 기대를 접도록 하셨습니다.
즉,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수난을 당하는 당신의 운명을 예고하신 겁니다.
군중은 물론이고 제자들도 이 말씀에 담긴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불의하고 부당한 체제 – 로마 제국의 군사적인 식민통치와
이에 빌붙은 친로마적이고 굴종적인 종교체제, 그래서 사실상 우상숭배적인 상황 - 를 타파하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독립과 유다이즘의 부흥을 이루어 줄 현세적 메시아가 너무도 절박하게 요청되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세적 메시아에 대한 열화와 같은 기대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딴청을 피우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정색을 하고 당신 수난의 운명을 선언하듯이 꺼내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이 십자가 선언이 훗날,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들의 제1구원명제가 되어 있습니다. 바라는 바 소망이 간절하고 기대가 클수록 이 소망과 기대를 기도하는 당사자들은 자기 희생을 각오하고 전제하고 나서야 그것이 실현되는 만고불변의 이치를 이 말씀은 담고
있습니다.
어제의 강론에서 저는 조선천주교회의 신앙고백자로서 이벽과 정약용을 들었습니다.
이벽의 신앙이 정약용의 학문을 통해 드러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실학이나 서학이 아니라 천주교를 통해서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 복음화시키기 위한 이벽의 신앙을
스승에 대한 제자의 예를 갖추어서 배우고 깨우친 정약용이 강진 땅에서 보낸 모진 18년 유배 생활을 오롯이
스승 이벽의 뜻을 학문으로 펴는 데 바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문중 박해를 받아 미처 뜻을 펴지 못하고
스러졌으나 자신이라도 받들고자 스승의 뜻을 5백여 권 여유당 전서에 담았습니다.
이 상황이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스승으로서 비장한 마음으로 밝히신 뜻과도 상통한다고 보입니다.
복음은 스승 예수님의 뜻을 소개한다면, 조선 천주교회 초창기의 현실은
제자인 정약용이 스승의 뜻을 정성을 다해서 귀담아 듣고 다산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최대의 성과로 평가받는 학술적 노력으로 펴낸 그런 상황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글을 소개합니다. 천진암 성지에서 한평생 이벽을 창립 성조를 모시며 연구한
수원 교구 변기영 몬시뇰이 1998년 4월 13일자 중앙일보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다산 정약용과 광암 이벽
아름다운 꽃을 보며 사람들은 그 꽃잎을 감탄하면서도 그 줄기와 뿌리를 알기는 쉽지 않다.
위대한 학자나 사상가의 뒤에는 그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일찍이 20여년 전 홍이섭 (洪以섭) 교수는 '이벽 (李檗) - 한국 근세 사상사상 (思想史上) 의 그의 위치' 라는
논문에서 다산 (茶山) 정약용 (丁若鏞.1762~1836) 선생에게 끼친 한국 천주교의 성조 광암 (曠菴) 이벽 (1754~1785) 선생의 영향을 처음으로 비교적 잘 서술했다. 정약용 선생과 이벽 선생은 나이가 8세 차이로,
삼촌이나 큰 형 뻘의 사돈관계였다.
그런데 다산 선생의 학식과 사상을 잘 아는 이들도 그러한 사상과 학식의 근원을 캐보며
이벽 선생과의 관계를 아는 이들은 매우 적다.
정약용 선생은 자신이 쓴 글, 특히 그의 묘지명 (墓誌銘)에서 “자신은 이벽을 추종했고 (從李檗) ,
자기 형 정약전 (1758~1816) 은 아주 일찍부터 이벽을 추종했으며 (嘗從李檗) , 뿐 아니라 권일신 (1742~1792) 은 열성적으로 이벽을 추종했으며 (熱心從李檗) , 이가환 (1742~1801) 역시 이벽을 추종했다 (從李檗)” 고 기록하고 있다.
강진에 유배돼 있을 때 정약용 선생은 중용강의 (中庸講義) 를 보충하면서 40여년 전 세상을 떠난 이벽 선생을
사모해 "나에게는 비교가 안될 만큼 출중한 덕행과 해박한 지식 (進德博學) 이 있던 이벽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누구에게 물어보랴.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 금할 수 없구나" 하고 그를 그리워했다.
정조 임금이 중용에 관한 질문 70조목을 선비들에게 숙제로 내준 적이 있었는데,
당시 수표동에 살던 이벽에게 물어 답을 올린 결과 승지 홍인호 등이 보고
"정약용의 답안을 본 즉 필시 특출난 학식을 가진 선비 (識之士)가 있어 도운 것이 분명하다" 고 했었다.
강진에서의 18년 귀양살이를 끝내고 1818년 고향 마재에 돌아온 정약용 선생은 우선 젊었을 때
이벽 선생과 함께 자주 찾았던 천진암 (天眞菴)에 와 "30여년만에 다시 찾아오니,
천진암은 이미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전혀 없구나 (寺破無舊)" 하며 추억을 더듬었다.
귀양가기 전 일찍이 단오날 둘째 형 정약전 선생과 천진암을 찾았던 정약용 선생은 이벽 선생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에서 “천진암에 오니, 전에 이벽이 늘 앉아서 글을 읽던 자리가 아직도 저기 있네 (李檗讀書猶有處) .
그때 짓던 시와 문장의 탁월한 그 풍류 문채는 정말 신비스러운 경지에 이르렀었지 (風流文采須靈境) ,
그리하여 지금 또다시 한나절내 술을 마시며 한나절 내내 읊어본다 (半日行杯半日吟)” 고 하고 있다.
정약용 선생이 이벽 선생으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으면 유배지 강진에서 중용강의를 손질하면서
중간 중간 이렇게 고백했겠는가. "내가 써내려온 문장은 사실 전에 광암 이벽이 썼던 문장이다 (此曠菴之文)" ,
또 한 두 쪽 넘어가다가 "이 학설은 광암 이벽의 학설이다 (此曠菴之說)", 또 몇 장 내려가다가 "이런 해석은
광암 이벽이 했던 해석이다 (此曠菴之義)".
광암 이벽 선생이 1785년 봄 세상을 떠나자 그 장례식에 참석한 정약용 선생은
존경하며 애통한 마음으로 다음의 만사 (輓詞) 를 지어 남겼다.
신선 나라의 학이 우리 인간들 세상에 내려오시니 (仙鶴下人間) /
신령한 그 풍채가 흔연히 빛남을 볼 수 있었도다 (軒然見風神) /
그 희고 또 흰 날개와 깃털은 눈처럼 새하얗었는데 (羽핵皎如雪) /
땅 위의 닭과 오리 떼들이 샘을 내며 골을 부렸네 (鷄鶩生嫌嗔) /
울음소리 한번 내면 아홉 하늘 높은 곳까지 진동시켰고 (嗚聲動九소) /
울부짖는 소리는 풍진 세상에 바람과 먼지를 일으켰네 (瞭亮出風塵) /
어느덧 가실 때 되어 가을 타고 문득 날아가시니 (乘秋忽飛去) /
애달퍼하고 구슬퍼하며 탄식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창空勞人).
정약용 선생을 보다 정확히 연구하기 위해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광암 이벽 선생에 대한 연구를
선행하거나 병행할 필요가 있음을 제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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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새벽을 열며.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빠다킹신부님.
정신 건강 전문가들은 양심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상태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소시오패시(Sociopathy), 우리에게는 사이코패시(Psychopathy)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수는 어떻게 될까요? 학자들은 그 수를 전체 인구의 4%로 즉, 25명당 1명에 이르는 것으로 봅니다.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의 수치가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점점 도덕적 불감증이 있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상관없다는 생각,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생각, 내가 받을 사랑에는 민감하면서 남에게 베풀 사랑에는 무감각한 것 등등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는 사람이 늘어만 갑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말만 번지르르하고 아주 매력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 곁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지만 모두 큰 상처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 반사회적 인격장애는 한 번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반복된 행동으로 이런 모습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운전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앞차가 속도를 내지 않고 있으면 막 화를 내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앞차는 규정 속도를 지킬 뿐인데도,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며 화를 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화내는 것에 전혀 죄책감도 느끼지 못합니다. 반복된 행동을 통해 양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푸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쌓이고 쌓이면서 함께 살아가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준비시키기 위해, 첫 번째 수난 예고와 거룩한 변모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혼란에 빠져 잘못 생각하는 제자들은 수난에 관한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함께 먹고 마셨으며, 바로 옆에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놀라운 표징들을 끊임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혼란에 빠집니다.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하면서, 정작 가져야 할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면서도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곁에 함께 있었던 제자들도 이 정도였는데, 우리는 어떠할까요? 더욱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만의 사랑이 아닌 함께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때,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되면서 이 세상 안에서의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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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내어 생각하는 대로 살아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머잖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폴 브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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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힘.
죽음의 힘이 얼마나 센 지를 ‘천국의 문’ 봉안당을 운영하면서 더 크게 깨닫게 됩니다.
언젠가 자신의 부모님을 개장해서 모신 팔십 대 후반의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아버지께서는 80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가 30년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본인도 팔십 대 후반의 나이로 이제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없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안치 예식을 하면서 눈물을 터뜨리십니다. 아이 같이 소리를 내어 우시면서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십니다.
죽음이 얼마나 힘이 센 지를 이 모습을 보며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 부활하셨습니다. 여기에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생깁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을 것이고, 이렇게 힘이 센 죽음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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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이영근 신부님.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다음,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들이 우매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
그렇습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아무리 알아들으려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은 믿음의 순명이 아니고서는 그리고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따를 수가 없나 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성경본문이 나에게 아무 말씀도 안 할 때도 있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말이나 난해한 구절을 마주할 때도 있습니다. 곧 말씀이 뜻을 감추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말씀의 침묵은 우리의 대화가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우리를 텅 빈 상태로 머무르게 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쳐주고, 성경 본문에 철저히 복종해야 함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는 동안 그분을 기다리도록 도와주고, 우리 힘만으로는 이해할 수도 기도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또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분 앞에 서 있다는 의식과 함께 사랑의 자세를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도 사랑의 마음,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고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을 따르고 나서야, 우리는 말씀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막의 마카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 분량에 만족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애쓰시오.
그리하면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바가 여러분의 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들은 말씀을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곧 삶은 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 혹은 삶은 품고 살아야 하는 선물이요,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 분을 만나야 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우리가 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바로 그분과의 만남의 신비를 사는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죽음으로서 만나게 되는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셨듯이, 오늘 우리도 형제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는 부활신비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
주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죽음에 넘겨져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죽어 사라져 되살아나는 사랑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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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연중 25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을 귀담아들어라>
학창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입니다.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가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하셨는데 제자들은 아직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주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은 참으로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불완전하고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의 손'이 하느님을 죽였습니다. 우리의 손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될 때 하느님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 탓이오"를 일깨우는 날 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1,21). 말씀을 귀담아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가10,38-43)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가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말씀 안에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119,97). 미룰 수 없는 사람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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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너희는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 영광의 순간에 마치 찬물을 끼얹으시는 듯합니다.
"귀담아들어라."
제자들이 당신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들립니다. 스승의 능력과 명성에 기대어 승승장구하리라는 제자들의 욕망을 염려하시는 듯합니다. 진정한 메시아의 업적은 한갓 인간의 찬사나 호평에 있지 않고, 모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간에 있다는 걸 반복해 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9,45)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모릅니다. 물리적인 귀는 열려있지만 마음은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저 지금의 영광이 계속 쭉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이대로라면 이스라엘의 자유와 해방은 물론 자기들의 입지도 탄탄히 보장될 것으로 보입니다. 성공으로 들뜬 마음에는 말씀이 들어갈 틈이 좀처럼 생기지 않습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루카 9,45)
하지만 복음사가는 무지의 탓을 온전히 제자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의 무지한 상태조차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을 한낱 인간이 알아낼 재간은 없으니까요. 주님께서 그 뜻을 감추셨다면 이유는 분명합니다. 아직 그들이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5)
제자들은 지금 스승의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에 들떠 있기는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불안의 진동을 미세하게나마 감지를 하기 시작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뭘까요? 사람은 어느 지점에서 묻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답을 두려워할까요?
사람은 무언가를 갈망하면서 나름 소신과 신념을 가지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실존적 불안을 완전히 떨쳐내기는 어렵습니다. 그 불안에 얼만큼 관심을 기울이느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불안이 수면 위로 드러나거나 그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지요. 뭔가 자기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미세한 불안을 일으킵니다. 이는 어쩌면 한치 앞도 모르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숙명같은 실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허무를 외치는 코헬렛 저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코헬 12,6)
오늘의 대목에서는 "주님을 기억하라."는 권고가 자주 반복됩니다. 말하자면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 찬란한 젊음의 때에, 무사태평 아무 걱정 없을 때에, 행복에 겨울 때에, 누리고 즐길 때에, 힘과 재물이 넘칠 때에, 세상 부러울 것 없을 때에, 잠시 멈추고 피조물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시는 분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 기억은 인간이 자신의 허무와 약함을 인정하고 삼가며 옷깃을 여미게 해 줍니다. 창조주 앞에 선 자신의 보잘것없는 실존을 깨닫게 되니까요.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7)
이것이 기억해야 하고 삼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직까지 모든 인간에게 공정하고 평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니까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과학적 의학적 연구와 시도가 있고 죽음을 겪기까지 받는 돌봄에 질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예외없는 현실입니다. 죽음은 재산, 성별, 학식, 신분, 인종에 상관 없이 모두에게 동등한 미래입니다. 그러니 지금 행복의 순간을 지나고 있건, 고통의 때를 지나고 있건 우리 모두가 "죽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세상도 좀 더 겸허해지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지금 당장 제자들을 깨우치거나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그들이 무릎을 치며 하느님 계획을 깨닫게 된 단초가 되었기에 복음서가 이를 기록한 것이지요. 훗날 스승의 수난 예고가 현실이 되었을 때, 이 기억은 그들에게 놀람이 되고 희망이 되었다가 결국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온전한 순종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과 죽음이 나 아닌 타자에게 달려 있다는 인식이 자칫 허무주의를 낳기도 하지만, 바로 그 타자이신 절대자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내어맡기는 신앙으로 승화될 수도 있습니다. 이 신앙은 더 견고한 희망이 되고 더 열렬한 사랑이 됩니다. 축배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고, 나를 위한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한뼘씩 더 자라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떤 처지에서나 주인이신 분을 기억합시다. 그분의 영광과 더불어, 그분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도 떠올립시다. 이 기억 안에는 이 험난한 지상 순례길을 인내하며 견딜 수 있는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쥐고 계신 분 앞에서 겸허히 삼가며 온전히 의탁하며 나아갑시다. 오늘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벗님을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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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창조시기 26일째-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9,44)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본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군중이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감추어져 있는 본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성이 드러나는,
부활의 본질이 드러나는 기적사화 앞에서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군중이나 제자들은 감추어져 있는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아직은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공관복음(마태오.마르코.루카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과 연관시켜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본질이고, 예수님 부활의 절대적 전제가 감추어져 있는 본질인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코헬렛의 저자는 우리의 목숨이 하느님께 되돌아가기 전에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나의 죽음이 오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면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반드시 한 번은 꼭 만나야 하는 죽음!
이 죽음 앞에서 "허무로다 허무!" 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나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하나의 본질을 잘 믿으면서 살아왔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의 죽음이 허무하게 다가오지 않고, 기쁘게 다가올 수 있도록 지금부터 잘 준비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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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연중 제 25 주간 토요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말씀 주제는 젊음을 즐기고 기쁘게 하라. 하느님의 심판을 생각. 과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는 예수님'입니다. 코렣렛은 젊은이에게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기쁘게 하라.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눈이 이끄는 데로 가라. 다만 모든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라. 고 전합니다. 루카에서는 제자들이 귀담아 들을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기쁨과 즐김, 바람과 희망을 갖습니다. 동시에 창조주이신 하느님 앞에 심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세상 삶의 좋음을 얻으면서도 창조주 하느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고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나 사람들. 만남 대화, 한 일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그릇됨을 봅니다.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함과 개선, 실행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네 마음에서 근심을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구일 뿐이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 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레가 깨어지기 전에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코헬 11,9-12,8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 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 9,43-45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사람은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 심판을 생각합니다. 코헬렛은 인생에 즐김이 있고 기쁨이 있지만 근심과 고통을 흘려버릴 줄 알아야 하고, 또한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것을 생각하라. 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쁨도 즐김도 인간의 눈이 이끄는 대로 가고 그렇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하느님께로 돌아감을 알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젊을 때 부터, 어릴 때 부터 하느님을 알수 있어야 합니다. 스승, 부모, 영적인 멘토들은 창조주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름다움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심판에 부르심을 아는 이는 세상 만사의 궁극적 기쁨을 알고 살아가며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모든 제자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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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6일 토요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매일미사
_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https://youtu.be/sOrIfjFfklA (31:11)
•2020. 9. 26.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 (서울대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집전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3ㄴ-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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