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비공개 입니다
믿음의 보배를 품고 살아가요 / 출6;23
한상원목사
PW : 믿음 BIW : 보배를 품으라 AG : 엘리세바
TS : 믿음은 축복의 보배를 품고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신앙이 아주 좋은 개그우먼 이성미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성미 집사님은 갑상선 암을 달고 사는 환자입니다.
그런데 이성미 집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 갑상선에는 10개의 종양이 있고, 간에도 있고, 자궁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얘네들이 나를 닮아서 더 이상 크지를 않네요.”
그렇습니다. 믿음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똑 같은 일인데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믿음의 힘이 솟구쳐 오릅니다.
긍정적인 마음이 아니라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원망, 불평,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괴롭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사람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삶이 행복하고 즐겁고 기쁨이 넘칩니다.
오늘도 우리들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고 우리 모두를 사랑하고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넘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좋지 않은 현실을 극복해낼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의 보배를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P4.
오늘 우리가 만나려고 하는 여인은 아론의 아내인 ‘엘리세바’라는 여인이다.
‘엘리세바’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단 한 번밖에 기록되지 않는다.
성경을 잘 안다고 자랑하는 분들도 엘리세바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더욱 아론의 아내 이름을 아는 사람도 흔하지 않다.
‘엘리세바’라는 말은 ‘하나님은 충만이시다. 내 하나님은 큰 재산이시다’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히브리어 ‘엘리세바’라는 이름을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로 바꾸게 되면 세례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이 된다.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을 히브리어로 바꾸면 엘리세바라는 이름이 된다.
본문 출6:23에 보면 “아론은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엘리세바에 대해서 암미나답의 딸이라고 되어 있고, 암미나답의 아들 이름이 나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암미나답과 그의 아들 나손에 대해서는 유다지파의 방백으로 등장하는 이름이다.
민1;7, 7;12, 7;17, 10;14, 룻4;19-20, 대상2;10에 보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엘리세바는 유다지파 출신의 딸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결혼풍습을 제대로 알면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체적으로 자기 지파 안에서 혼인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이다.
고대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일반적으로 같은 지파 안에서 대가족제도를 근본으로 하는 가족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살아간다.
대가족공동체 안에서, 같은 가족들 간에서 4촌 지간에 혼인이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이다.
가능하면 타 지파와는 혼인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파에 부여해 주시는 기업과 계보를 다른 지파로 넘어가지 않고 계속 지키면서 상속되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대상 6:22에 보면 “그핫에게서 난 자는 곧 그 아들은 암미나답이요 그의 아들은 고라요 그의 아들은 앗실이요”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출애굽기 6;21에서는 “이스할의 아들들은 고라와 네벡과 시그리요”라고 기록하고 있다.
곧 고라의 아버지는 아므람의 동생인 이스할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스할’이라는 사람이 곧 ‘암미나답’이라는 사람이다.
같은 사람인데 ‘이스할’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할 때도 있고, ‘암미나답’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사람을 각각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성경에서 종종 등장하는 모습들이다.
그런가하면 역대상 15:10에서는 “웃시엘 자손 중에 지도자 암미나답과 그의 형제가 백십이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웃시엘도 아므람의 동생이다.
그러니 웃시엘의 아들들 중에도 암미나답이라는 아들이 있는 것이다.
엘리세바의 아버지가 이스할인지, 아니면 웃시엘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스할일 가능성이 아주 많다.
그런 관계로 엘리세바는 레위의 4대 손녀이고, 고핫의 손녀이다.
아론도 레위의 4대 손자이고, 고핫의 손자이다. 엘리세바와는 4촌 관계가 성립되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결혼관계가 4촌지간이다.
엘리세바는 아론과 결혼하여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이렇게 4형제를 낳게 된다.
아마 딸들도 많이 낳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엘리세바를 낳고서 엘리세바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믿음의 보배를 품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신다.
왜냐하면 엘리세바라는 이름이 ‘하나님은 충만이시다. 내 하나님은 큰 재산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에 충만하신 하나님, 큰 재산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려면 믿음의 보배를 품는 여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레위 지파의 딸로서, 고핫자손의 손녀로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면 믿음의 보배를 품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 여성들은 많은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믿고 살아간다.
엘리세바가 여성으로 태어나서 장차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출산하는 축복을 받으려면 믿음의 보배를 품고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축복을 기대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출산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태중에 넣어주신 고귀한 생명을 10개월 동안 품고 잘 키워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를 출산하는 것처럼 믿음의 보배를 품고 살면 믿음의 보배다운 하나님의 축복을 품에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D4.
① 마음고생을 많이 한 엘리세바를 품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촌인 아론과 혼인할 수 있도록 엘리세바의 아버지에게 감동을 주신다.
중동지역의 여성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결혼하면 남편에게 속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엘리세바의 아버지는 딸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아론과 혼인을 주선한다.
엘리세바는 아론과 혼인하여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 아론과 결혼한 엘리세바는 어떻게 살았던 여인일까?
ⓐ 아론과 결혼한 엘리세바는 마음고생을 많이 한 여인입니다.
남편 아론은 모세의 형이다.
모세보다 3살이 많은 형인데도 동생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모든 것들이 동생의 지도에 따라서 아론은 모세의 입노릇만 하게 된다.
아론은 모세가 시키는 일만 한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중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이상득이라는 형이 있다.
노무현대통령에게도 노건평이라는 형이 있다.
국가적으로는 이명박씨가 지도자이지만, 가정안에서는 이상득씨가 형이 된다.
국가적으로는 노무현씨가 지도자이지만, 가정안에서는 노건평씨가 형이 된다.
이런 역학관계는 동서지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아론과 모세의 관계는 곧 동서지간이 되는 엘리세바와 십보라의 관계가 된다.
이런 동서지간에서 마냥 좋기만 했을까?
‘내 동생이 대통령이야. 내 동서가 영부인이야’ 하면서 좋기만 했을까?
말로는 좋은 것처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속으로는 무척이나 불편한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다.
엘리세바와 십보라의 관계에서도, 모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이기 때문에 십보라가 아랫동서이지만 마치 형님처럼 모셔야 되는 위치가 된다.
아내들의 직급은 남편과 동등한 위치를 지니기 때문에, 가정 안에서는 엘리세바가 형님인데도 형님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항상 아랫사람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한 형제 안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심적인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
자신이 자신의 위치에 맞게 대접을 받으면서 살 때, 곧 자신의 위치에 걸맞게 살아갈 때, 사람은 존재감을 인식하게 되고, 자존감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엘리세바는 자신의 위치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심적인 고통, 마음고생이 아주 심한 여인이다.
자신이 감당해야 될 역할 때문에 받아야 되는 심적인 스트레스는 정말로 견디기 어렵다.
이런 역할담당 때문에 받아야 되는 심적인 스트레스는 그래도 괜찮다.
계속적으로 남편과 아들들에게서 일어나는 사건 때문에 받아야 되는 심적인 스트레스는 정말 감당하기 어렵다.
ⓑ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금송아지 사건의 주범이 바로 남편인 아론이다.
시내산으로 올라간 모세가 몇 십일이 지나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달려와서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지게 된다.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출32;2)”라고 한다.
이에 아론은 백성들이 가져온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소리친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낸다.
이 금송아지는 잡다한 애굽의 신들 중에 하나이다.
애굽인들은 대표적으로 태양신 RA를 섬기면서 동시에 이리시스(Irisis), 호러스(Horus), 하토르(Hator)라는 암소신, 아피스(Apis)라는 황소신을 비롯하여 다양한 신들을 섬기는 민족이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10재앙은 애굽인들이 섬기는 신들에 대한 심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 고센땅에서 종살이하면서 애굽인들의 섬기는 신들을 따라 섬기면서 살았다.
그래서 아론은 시내산에서 애굽인들이 섬기는 황소신을 본떠서 금송아지형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금송아지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금송아지 앞에서 온갖 추악한 추태를 부린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아론은 모세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게 된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라고 책망한다.
이에 아론은 사실대로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지 않고 변명만 하기에 바쁘다.
아론은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라고 하면서 거짓말까지 합니다.
이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입장에서는 어떤 마음일까?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심정이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다.
어디론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다.
정말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
ⓒ 지도자 모세를 비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세롯이라는 지역까지 이동했을 때 모세가 십보라 대신에 구스여인을 후처로 맞아들이게 된다.
이미 십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천국으로 가셨고, 대신에 구스 여인이 십보라의 빈자리를 대신 채우게 되었다.
이 때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과 형 아론이 정면으로 모세를 향해서 비방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수기12;2)”하면서 모세를 향하여 비방하게 된다.
이에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를 두둔하시면서 미리암과 아론을 책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서 한 주간 동안 격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리암이 나병에 걸리는 징계를 받았다면 아론도 이에 합당한 징계를 받았어야 옳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비방하는 것은 그 지도자를 세우신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비방하는 꼴이 된다.
② 믿음의 보배를 품은 엘리세바에게 은혜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
엘리세바에게 영원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남편이 금송아지형상을 만드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남편 아론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서 마땅히 죽어야 마땅한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일이 바로 우상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온갖 추태를 부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9-10)”
하나님께서 애굽에 10재앙을 내리면서 출애굽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런 마음을 가지셨다면 마땅히 하나님은 금송아지의 주범인 아론을 죽여야 옳다.
또한 모세가 구스여인을 후처로 얻는 것을 비방하는 사건도 아론이 죽어야 되는 사건이다.
모세를 비방하는 것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운 여호와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상숭배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 불만, 비방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신다.
아론은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고 섬겨야 될 사람인데도,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하면 잘 설득시키고 믿음으로 살도록 가르치고 지도해야 될 위치에 선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우상을 만들어서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서 온갖 비방을 일삼는다.
그러면 마땅히 하나님께서 아론을 징계하고 심판하여 죽여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론을 죽이지 않는다.
죽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하나님께 제사하는 민족으로 세우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하나님 앞에서 제사 드리는 일에 가장 중요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겨주신다.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대제사장으로 관유를 부어서 세우시는 것이다.
단 한 번으로 끝나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히 상속되어지는 대제사장의 가계를 이어가도록 선언한다.
아울러 아론의 아들들은 대제사장이신 아버지 아론을 도와서 일반 제사장이 되게 하신다.
아버지 대제사장이 죽으면 아들이 대제사장의 직분을 상속받아서 대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도록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후손들에게 주시는 엄청난 축복이다.
말로 다 표현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남편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은혜와 축복을 받은 것은 아내인 엘리세바에게도 똑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세바에게 큰 은혜와 축복을 입혀 주었다.
마땅히 남편이 죽어야 되는 죄악 중에서도 죽지 않고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받아서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드리는 일을 감당하는 사명을 받은 것은 엄청난 은혜요 축복이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모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과 그 후손들 중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 없다.
모세에게만 한정된 지도자의 사명이었다.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사람은 에브라임 지파의 눈의 아들 여호수아이다.
모세의 아들들이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없다.
모세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단지 모세의 후손들은 레위지파에 속한 백성, 고핫의 후손이기 때문에 제사장들을 도와서 제사하는 일에 쓰임 받는 정도이다.
그런데 아론의 아들들은 계속 대제사장으로, 일반 제사장으로 상속되어 간다.
현대 21세기에도 여전히 아론의 후손들은 코헨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게리 코헨 박사는 아론의 147대 후손으로 예수님을 믿는 메시애닉 쥬이다.
게리 코헨박사를 중심으로 코헨대학교를 전 세계 153개국에 신학대학을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히브리적인 사고에 의해서 해석하여 올바른 성경을 가르치려고 하고 있다.
그러니 모세가 받은 축복보다 아론이 받은 축복이 더 크고 놀라운 것이다.
엘리세바가 이런 영광을 받아 누리게 된 것은 남편과 결혼하여 살면서 받았던 모든 서러움, 슬픔, 고통, 마음의 고생, 스트레스, 두 아들을 먼저 보내면서 가슴이 묻어야 하는 한 맺힌 삶을 한꺼번에 다 보상받는 은혜요 축복이 되었다.
③ 아들들에게 불어 닥친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믿음의 보배를 품은 여인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
남편 아론이 하나님의 배려하심과 은혜로 대제사장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위임식을 거행하게 된다.
엘리세바가 낳은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이렇게 4명의 아들들은 대제사장이신 아버지 아론을 도와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일반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집례하게 된다.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드리다가 불이 하나님 앞에서 나와서 즉사당하는 불행을 당하게 된다.(레위기10;1-2)
두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 드리다가 즉사당하는 것이다.
두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 드리다가 즉사당하는 것이다.
두 아들이 다른 살인죄나 절도와 약탈하는 죄악을 저질러서 즉사했다면 그래도 납득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 예배를 드리다가 즉사당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한 엘리세바는 어떤 마음일까?
거룩하신 하나님, 어떠한 경우에도 온전한 제사를 받으시려는 하나님께서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징계하신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죽이시는 것은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엘리세바의 마음은 숯덩이처럼 타들어간다.
두 아들을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으로 죽음을 당하고 보내야 되는 엘리세바는 어떤 마음일까?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먼저 보내야 할 때 애미가 당하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다.
흔히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엘리세바는 두 아들을 자신의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두 자식을 자신의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한 맺힌 여인의 삶이다.
물론 아직도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살아 있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대제사장이 되고 이스라엘의 한 축의 지도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지도자로 살아가지만, 그래도 두 아들을 잃은 슬픔은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슬픔이요 고통이다.
두 아들이 즉사당하는 사건으로 인하여 아론과 다른 두 아들은 더욱 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온전하고 흠이 없는 제사를 드리게 된다.
두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릴 때마다 형님들이 받은 모습을 생각하면서 깨어서 믿음의 보배를 품고 제사드려야 됨을 깨닫게 된다.
두 아들이 죽음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이 사건으로 인해서 다른 두 아들은 늘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깨어 있으면서 제사드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런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은 엘리세바의 아픈 마음을 누구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품어주신다.
하나님은 두 아들을 잃은 엘리세바에게 더욱 더 믿음의 보배를 품고 살아가도록 하신다.
믿음의 보배를 품고 살아온 엘리세바에게 이미 남편이 죽어서 생과부가 되었어야 하는데 남편을 죽이지 않고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겨주시고, 자신은 대제사장의 사모님이 되는 축복을 입게 된다.
엘르아살이 아버지 아론의 뒤를 이어서 대제사장이 되면서 자신은 대제사장의 어머니가 되는 축복을 입는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드릴 수 있는 영적인 지도자로 세워주시는 은혜를 입는 모습을 보면서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바울이 고전15:10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한 그 고백은 바로 엘리세바의 고백이 되었다.
모든 것들이 믿음의 보배를 품고 살았던 엘리세바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고백이기도 하다.
우리 성도님들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온갖 일들, 사건들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믿음의 보배를 품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드릴 수 있는 고백이다.
‘엘리세바’라는 여인이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보배를 품고 살았기 때문이다.
진주조개는 모래알을 품고 그 모래알로 인하여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
자기 입 속에 들어온 모래알을 내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진주조개는 죽을힘을 다하여 모래알을 자신의 몸에서 보내려고 진액을 쏟아낸다.
고통 중에서 쏟아내는 그 진액이 모래알을 감싸면서 조개와 한 몸이 된다.
그럴 때 아주 영롱한 진주가 만들어진다.
진주조개는 고통스런 모래알을 품고 진액을 쏟아내면서 살지만 결국은 가장 좋고 화려한 진주를 만들어내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아주 작은 모래알이 보배가 되어서 진주로 거듭나게 된다.
이런 것처럼 엘리세바는 아론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다른 여인들처럼 행복하게, 다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에게 시시각각으로 쉬지 않고 찾아오는 각종 사건들은 결코 행복하지도, 다복하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정말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만 되었던 여인이다.
정말 한 맺힌 삶을 살아야만 되었던 여인이다.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고통들을 이겨내기 위해서 삶의 진액을 쏟아내야만 되었던 여인이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세바의 한 맺힌 고통의 진액을 가장 귀한 믿음의 보배로 삼아 주시고 가장 축복된 여인으로 탈바꿈시켜 주신다.
지금 우리들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고 진액을 쏟아내고 있는가?
지금 우리들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마치 죽을 것 같은가?
지금 우리들의 삶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만큼 고통스런 진액을 쏟아내고 있는가?
진주조개가 진액을 쏟아내면 낼수록 더욱 더 영롱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진주를 만들어내듯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진액을 쏟아내면 낼수록 더욱 더 아름답고 영롱하고 가치있는 신앙인이라는 진주와 같은 보배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진주조개가 진액을 쏟아내기를 포기하면 진주는 진주로되 가치없는 진주, 별 볼 일없는 진주를 만들어낸다.
우리들이 믿음의 진액을 쏟아내기를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의 보배를 품고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감당할 시험 외에는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고, 피할 길도 주신다고 하셨는데, 우리들이 진액을 쏟아내기를 포기해 버리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급도, 면류관도 없다.
엘리세바가 온갖 고통의 시간들을 묵묵히 믿음으로 이겨냈기에 십보라보다, 모든 이스라엘 여인들보다 더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이 묵묵히 고통의 시간들을 믿음으로 이겨낸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되갚아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진주와 같은 믿음의 보배를 품고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이라는 진액을 쏟아내면서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들은 축복의 보배를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마음이 합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우리들이 믿음의 보배를 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① 믿음의 보배를 잉태하여 가장 영롱한 믿음의 진주를 만들겠다는 꿈과 비전으로 살아야 한다.
② 믿음의 보배를 만들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사랑이라는 진액을 쏟아내며 살아야 한다.
③ 믿음의 보배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④ 믿음의 보배로 인하여 주실 하나님의 상급과 면류관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배를 품고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믿음은 보배를 품고 살아갈 때 축복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매력덩어리이다.
믿음은 보배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