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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운명
모리스 마테를링크. Maurice Polydore Bernard Maeterlinck. 1862~1949
「벨기에 태생으로 유일하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자 극작가, 수필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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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 인간의 고뇌이듯 고뇌는 인간의 질병입니다. 질병에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고뇌에도 의사가 필요합니다.
세상 누군가는 행복을 생각하고, 행복을 말하고, 행복을 행동해야 합니다. ‘가장 시급한 과제’부터 살피는 것이 옳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늘 현명함의 척도는 아닙니다. 가장 드높은 과제를 살피는 것이 상책일 때가 종종 있지요. 네덜란드 농부의 가옥이 침수 위기에 처할 때, 바닷물이나 강물이 마을의 제방에 구멍을 뚫으려 할 때, 가장 시급한 사안은 자기 가축과 사료, 개재도구들을 부랴부랴 챙기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현명한 자는 급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제방으로 달려갑니다. 둑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마을을 향해 외칩니다. 어서 모여 둑을 지키자고.
지금까지 인간은 휴식을 찾아 침대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는 환자와도 같습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은 환자가 아니라고 말해줄 때 그 말이 주는 위안은, 인간이 본래 행복하기 위해, 건강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 존재이기에 빛이 나는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에게 행복의 전망을 선사하는 것은 결코 부적절한 행위가 아닙니다. 설사, 그것이 오늘내일의 현실이 아니어도 인간의 본능은 항상 행복 속에서 숨을 쉽니다. 조금 더 많은 삶의 열정으로 언젠가는 진실과 기쁨의 문이 활짝 열리리라 믿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좋은 일에 대한 상상은 절대로 허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행복하고 현명해지기를 얼마든지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 해도 희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행복을 어딘가 특별하고 아득히 멀기만 한 무엇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만약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 행복의 동기를 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슬픔과 기쁨 사이의 차이라는 것이 실은 어떤 상황에 대한 분하고 우울한 굴종과 웃으며 긍정하는 태도 사이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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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로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겪는 수많은 일들이 빛 속에서는 어둠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암호의 열쇠를 손에 쥐기까지 이 삶을 묵묵히 이어가야 합니다. 언제나 위대한 발견을 앞둔 사람처럼 세상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가 이르러 자신의 전 존재를 열어 그 발견을 끌어안을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발견을 끌어안는다는 것, 그것을 준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당장 오늘부터 최선을 다해 발견의 순간을 상상하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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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의식 안에서만 우연의 변덕으로부터 안전하고 편안하며 행복하고 강합니다. 어떤 한 존재가 성장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의식을 얼마만큼 성장시키느냐에 달렸으며, 그의 의식이 성장하는 것 또한 그가 얼마만큼 성장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놀라운 순환이 거기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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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으로 충만한 존재들은 미래의 자기 자신까지 알기에 그만큼 강합니다. 그들에게 자의식이란 자신의 별, 자신의 운명에 대한 깨달음과 동의어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미래를 아는 것은 그들 스스로 이미 그 미래의 일부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의 사태가 자신의 영혼에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잘 알기에 그들은 내일의 자신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당장 닥치는 일 자체는 어쩌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 한바가지 입니다. 거기에 맛이나 색깔, 냄새 따위는 없지요.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영혼의 상태에 따라 그 물은 썩은 구정물이 될 수도 있고, 물레방아를 돌리는 청정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겨운 장맛비이기도 하고 반가운 단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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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사태는 우리가 평소에 갖고 있는 생각의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아주 오랜 기간 말없는 영웅으로 묵묵히 살아오지 않은 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영웅이 될 기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고산준령을 오르내리고 세계 끝까지 걸어가 보세요. 우연의 길목에서 당신과 마주치는 것은 당신 자신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벌통 주위를 맴도는 벌떼처럼 우리 주위를 맴돕니다. 우리 영혼에서 어떤 생각이 튀어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러다 여왕벌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야말로 벌떼처럼 거기 달라붙습니다. 거짓말을 해 보세요 세상의 온갖 거짓이 그리로 달려들 겁니다. 사랑을 해 보세요 세상사 다발이 사랑으로 후들거릴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면의 신호 하나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저녁과 함께 우리의 영혼이 좀 더 현명해지면, 잠복 중이던 불행 또한 밝아오는 아침 속에 더욱 신중해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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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지혜로워지는 딱 그만큼 본능적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지혜를 향한 욕구가 존재하며, 그것은 우연으로 점철된 인생살이 대부분을 의식으로 소화하는 일에 매진합니다.
한번 의식으로 소화시킨 경험은, 설사 그것이 고통의 경험이라 해도 더 이상 해롭지 않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포용한 고통은 영적인 의미로 빛나며, 당신이 정면으로 직시하는 한 당신의 그 어떤 결함도 더는 당신을 해칠 수 없습니다.
본능과 운명의 서로 얽힌 관계는 생각보다 단단하고 집요합니다. 그 둘은 안팎으로 서로를 지탱하고 지지하면서 생각 없이 부주의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 안에서 본능의 맹목적인 힘을 다스리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운명의 힘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불행을 극복한 사람의 영혼을 괴롭힐 수 있는 운명이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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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을 갖지 못한 지혜는 진정한 지혜가 아닙니다. 정말로 현명한 사람은 멀리 내다볼 뿐 아니라 멀리 내다보면서 깊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 없이 본다는 것은 어둠을 더듬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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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운명은 질병이나 사고, 예기치 않은 죽음과 같이 외부적인 불행 속에서만 구체성을 띠며 다가드는 그 무엇입니다. 순수하게 내적인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우리의 신체에 치명적인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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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형상은 계곡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워 그 전체를 어둠으로 덮은 인상을 주곤 합니다. 그러나 산마루에 올라 내려다볼 줄 아는 자에게는 계곡에 드리운 그림자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림자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이 거기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왜소함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존재를 그 어두운 영역에 붙잡아 매 둘 때, 욕망과 사유를 통해 가끔은 어둠에서 멀어지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담한 일입니다.
그 모든 시련을 불가침의 사고와 감정으로 순화하는 우리의 영혼까지 무력화할 수 있는 힘은 세상에 없습니다. 바깥에서 침범하는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은 영혼의 문턱에서 내면의 삶을 지키는 침묵의 수문장과 맞닥뜨려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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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존재에 대한 명료한 의식을 갖추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지혜가 의식보다 더 심오한 어떤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릅니다. 의식의 성장을 갈구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 의식 앞에 드러나는 보다 심오한 무의식에 눈뜨기 마련이지요. 지혜의 가장 맑은 샘은 바로 그 무의식의 심연에 자리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동일한 무의식의 유산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개개의 경우 사람들은 그것을 의식의 표면 아래 깊숙이 묻어둔 채 살아가지요. 하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깊은 곳에 가닿을 길을 내지 않고서는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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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지혜에 이르는 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지혜가 이성 안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이성이 사악한 문명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맞지만, 선량한 운명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은 우리의 지혜입니다. 이성의 역할은 방어하고 금지하고, 후퇴하고, 제거하고, 파괴하는 데 있습니다. 반면 지혜는 공격하고, 장려하고, 전진하고, 보태고, 창조하는 일을 도맡지요. 지혜는 이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보다 우리 영혼에서 우러나는 어떤 갈망과도 같습니다. 진정한 지혜의 본질은 오히려 이성이 승인하지 못하는 것, 이성의 테두리로 좀처럼 묶을 수 없는 가치를 실현하는 데서 빛을 발하지요. 지혜가 이성에게 악을 선으로 갚고, 원수를 사랑하라 이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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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형체가 있듯 지혜에도 형체가 있습니다. 다만 그 형체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불꽃처럼 다채롭지요. 지혜는 결코 딱딱한 옥좌에 부동자세로 앉아 자리를 지키는 여신이 아닙니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는 삶의 현장 곳곳을 파고들며 우리와 함께 울고 웃습니다.
당신이 만약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당신의 그 지혜는 분명 어린 시절부터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환골탈퇴를 거듭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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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다는 것은 이성적 판단만을 높이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능을 저급한 것으로 치부하고, 이성을 통한 문제 해결에 치중함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 이성이 아주 다른 차원의 본능, 이를테면 영혼의 본능에 깊이 머리 숙일 줄 모른다면,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그로 인한 소득은 보잘것없는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혜로움이란, 그 자체가 우리의 신성한 본능을 보다 자유롭게 표출시킨다는 점에서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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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합리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이것이 현명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합리적인 것이 반드시 현명한 것은 아니며, 매우 현명한 것은 차가운 이성의 눈으로 보면 거의 언제나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이성 안에 사랑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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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신호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이성의 소유자는 결코 현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구상에 영웅적인 발자취를 남긴 수많은 현인들의 위대한 행위가 이성의 한계를 초극하지 않았던 적이 있나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지혜를 담아 가꾸어야 할 곳은 이성이 아닌 사랑의 화분입니다. 물론 이성이 지혜의 뿌리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유력한 가치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이성의 꽃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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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사랑의 빛이요, 사랑은 빛의 연로입니다. 사랑이 깊어갈수록 그 사랑은 지혜를 닮아갑니다. 지혜가 높아질수록 그 지혜는 사랑에 다가가지요.
사랑하십시오. 당신은 지혜로워질 것입니다. 지혜로워지십시오. 당신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심을 다해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는 것은 보다 지혜로워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지혜를 먹여 살리고, 지혜는 사랑을 먹여 살립니다. 사랑과 지혜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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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성은 명료한 생각 속에서만 제대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과 품성의 가장 소중한 요소인 지혜는 그리 명료하지 않은 생각 속에서도 살아 숨 쉴 수 있지요. 명료한 생각을 가질수록 명료하지 않은 생각의 영역을 존중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명료한 생각이 주로 우리의 외적 삶을 주도한다면 그렇지 못한 생각은 대개 우리의 깊은 내면에서 주도권을 행사합니다. 아울러 눈에 보이는 삶은 거의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흐름을 따르기 마련이지요.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추구하는 결정적 진리의 대부분은 어렴풋한 생각들에 뒤섞인 상태로 자신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지요.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역동적인 기다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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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무색투명한 것은 그 안에 우리 영혼의 과거를 담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눈물은 종종 뉘우침이나 아쉬움을 반영하곤 하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아무리 울어도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은,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기억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기억은 그 기억을 낳은 시간들 못지않게 아름다운 눈물로 흘러내리기 마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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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그보다 더 나아지기를 열망하는 모든 존재들 속에서 맥을 못 춥니다. 운명은 여전히 미개한 상태이지요. 운명은 진부하게 살아가는 우리 삶을 통해 스스로를 무장합니다. 운명의 무기와 갑옷은 너무 무겁고 거북해, 오이디푸스 시대에 인간을 괴롭히던 방법을 아직도 사용합니다. 미련한 궁사가 쏜 화살처럼 그저 눈앞으로 직진하지요. 조금 더 나은 목표물을 향해 쏘아 올린 운명의 화살은 맥없이 곤두박질치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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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도 불행도 설사 그것이 외적인 요인에 의한 것일 때조차, 우리 안에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를 에워싼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 상태에 따라 천사도 되고 악마도 되는 것입니다. 잔다르크는 천사의 목소리를, 멕베스는 악마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 목소리들은 모두 같은 소리였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운명의 무기도 어쩌면 우리 손으로 만들어 쥐어준 것일지 모릅니다. 운명은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습니다. 운명은 결코 판결을 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것은 변장한 전달자에 불과합니다. 삶을 앞에 두고 우리 스스로 판단할 때가 왔음을 알려주는 존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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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우연에 의한 판결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운명에 복종한다고 말하지요. 운명에 복종하는 사람의 삶은 천편일률적입니다. 스스로 내린 판단에 따라서만 운명의 모양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운명에 복종하는 사람은 자신이 겪는 사태를 변화시키는 대신 그 사태에 맞춰 스스로 변신합니다. 심지어 불행을 탓하면서도 그 불행의 모양대로 자기 삶을 즉시 두드려 맞추지요. 그러다 보니 그에게 닥치는 모든 사건에서는 운명의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에게 운명과 우연은 비슷한 단어입니다. 물론 우연이 행운의 모습을 하기는 매우 어렵지요. 우리 안에 영혼의 힘이 장악하지 못한 영역은 그 즉시 적대적인 힘이 차지합니다. 마음과 머리의 텅 빈 공간은 숙명의 영향권에 속수무책으로 내맡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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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말하지만 행복은 얼마든지 배워 터득할 수 있으며, 행복만큼 쉽게 깨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축복할 줄 아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다 보면 머지않아 당신도 당신 삶을 축복하게 될 거니다. 미소는 눈물만큼이나 전염성이 강하지요. 행복하기 위해서는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풍성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삶에 모자란 것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의 깨달음입니다. 스스로 행복하다든 사실을 모른다면 아무리 행복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가장 작은 행복을 절실하게 실감하는 것이 엄청난 행복을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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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다는 것은 행복하고자 하는 욕심을 극복한 상태입니다. 몹시 부러워할 만한 행운의 사나이가 우리 앞에 나타나 이렇게 얘기해준다고 생각해봅시다.
“나는 여러분이 매일 갈망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쥔 사람입니다. 부와 명예, 건강, 젊음, 권력과 사랑까지 모두! 그렇기에 지금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행운이 내게 쥐어준 것들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복이란 보다 높은 차원의 다른 무엇임을 그것들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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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지성의 나무라기보다 양심의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이 가장 소중한 보물을 숨겨두는 곳은 지성의 내부가 아닙니다. 지성이 발견하는 진리란 영혼을 거쳐 정화되고 순화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생명을 부여받습니다. 세상에는 대단한 지성을 소유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찾아 바로잡거나 남을 아끼고 돕는 일에 현저한 무지를 드러내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양심으로 진행하지 않는 지성은 공허할 따름이지요. 우리 마음의 가장 깨끗한 그릇에 담아내지 못하는 두뇌의 수액은 부패하거나 유실되기 쉽습니다. 매우 강력하고 높은 수준의 지능을 갖추고도 좀처럼 행복에 근접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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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만족이란 없다는 생각에 안주하는 사람의 태도는 어찌 보면 매우 빈약한 오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런 식의 은폐된 자기만족은 은근한 불만 심리를 감추고 있지요. 불만 심리는 결국 이해의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유래합니다. 세상사를 무시하거나 폄하함으로써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자기만족을 경계합시다. 그런 만족감은 노쇠함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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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없는 체념의 감정은 부지런한 일벌들로 분주한 벌집에 들이닥친 낯선 침입자와 같습니다. 그 즉시 모든 벌들은 하던 일을 멈춰야만 하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에 체념의 감정이 침입하면, 영혼을 채우고 있던 모든 활력과 열정이 작동을 멈추고 무례한 불청객 주위로 몰려들게 되어 있지요. 체념의 감정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자존심의 충족이라 할 만한 어떤 만족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체념한다면, 가장 덧없고 기만적인 그런 만족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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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적 차원의 선의만 가지고 현실의 벽을 뛰어넘길 기대해봐야 헛일입니다. 의도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게 아닙니다. 정의와 용기, 선행을 위한 작은 행위조차 구체적인 의지가 충분히 축적되어야 가능하다는 뜻이지요. 손금을 보는 사람들은 우리 인생 전체가 손바닥 안에 새겨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련의 구체적인 행위들이 살 속에 고스란히 각인된 상태를 근거로 인생을 논하자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의 사고와 의도는 거기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셈입니다. 예컨대 오랜 세월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을 계획에 몰두한 사람의 손은 그 살의와 관련하여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누군가를 해치거나 반대로 생명을 구해줄 경우, 그의 손바닥은 살인과 영웅적 행위의 궤적을 평생 간직하게 됩니다. 손금이라는 것의 신비성 여부는 논외의 문제입니다.
다만 삶에서 행위와 의도의 변별이 갖는 정신적 의미가 중요합니다. 생각은 이 한 몸 죽을 때까지 나라는 존재를 우주의 일정한 위치에 붙들어 매놓을 수 있습니다. 반면 행위는 거의 언제나 자신으로 하여금 존재의 여러 층위를 오르내리게 만들지요. 생각이라는 것은 오늘 앞으로 전진 하다가도 내일이면 다시 보이지도 않을 고립된 힘입니다. 하지만 행위라는 것은 오랜 노력과 함께 현실의 지렛대를 움직일 욕망과 의지의 군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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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부딪치는 불가피한 사태들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는 것은 때로는 긴요하고도 올바른 삶의 자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투쟁의 여지가 남아 있는 지점에서라면 한낱 위장된 무기력과 나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태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뚜렷한 의식과 적절한 대상의 지향 없는 막연한 희생은 체념의 허무한 제스처로 그치기 십상이지요. 다수의 행복을 위해 희생이 요구될 때 결연하게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희생할 기회만을 찾아 자신의 삶을 유보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익한 태도입니다. 간혹 자기희생을 육체에 대한 정신의 승리처럼 포장하는 견해가 있는데, 오히려 그런 승리는 삶의 총체적 패배로 간주해야 마땅합니다. 값싼 희생이 삶의 행로에서 발견한 꽃 한 송이와도 같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삶이 나아가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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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내려놓기란 쉽습니다. 실로 어려운 것은 운명을 완성하는 것, 자연이 우리에게 할당한 숙제를 끝까지 완수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정작 어려운 것은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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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뜻은 우리가 서로의 삶과 행복을 통해 생존하는 것이지 죽음과 불행에 힘입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이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잇지만, 분명 하늘이 원하는 것은 부모가 아이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모든 진정한 관계가 그런 식으로 지탱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이 아닌 기쁨을 통해 서로를 돕습니다. 인간은 서로를 위해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각자 강해지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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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내가 나 자신을 편협하고 유치하게 사랑한다면, 결국 내 이웃도 그런 식으로 밖에는 사랑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먼저 나 자신을 건강하고 폭넓게, 그리고 지혜롭게 사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통찰력이 강한 영혼의 자기애는 아둔하고 허약한 영혼의 헌신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사랑으로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 살기 전에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내어주는 것 또한 나를 갖춘 다음에야 가능하지요. 살아가면서 최대한 자주적이고 행복해하며 완성을 자랑하는 것이 우리 영혼의 책무입니다. 그것은 편협한 자존심이나 에고이즘과는 차원이 다른 자의식의 경지입니다.
인간은 충만한 자의식을 갖추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겸허함과 세상을 향한 애정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자기희생의 열정은 바로 그런 의식 상태에서 진정한 가치를 발휘합니다. 희생으로 고귀한 인간이 된다기보다는 고귀한 인간이기에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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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타심은 분명 고귀한 영혼의 무게중심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애타심이라도 나약한 영혼은 타인의 존재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반면, 강한 영혼은 타인의 존재를 통해 자신을 재발견합니다. 이는 매우 큰 차이점입니다.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이웃 사랑 안에서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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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의 책무가 무엇이든, 노력과 기대의 목적 또는 고통과 즐거움의 결과가 무엇이든,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른 채 거저 주어진 이 삶을 한시적으로 맡아 보관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실이며, 인간의 운명을 확정하는 유일한 고정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의 의미를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훼손되거나 파괴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삶의 열기를 짓누르는 모든 것이 비윤리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삶의 의미와 열기는 자신에게서 시작해 모두에게로 확산되는 항상성을 가집니다. 누군가가 어떤 고귀한 행위를 했을 때 그 행위가 주는 최고의 보상은, 곧 다른 누군가가 그만큼 고귀한 또 다른 행위를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성장하면서 그런 나와 더불어 당신도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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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할 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수준을 지향하며 사랑합시다. 사랑의 감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동정심으로 사랑하지 맙시다. 정의를 근거로 용서할 수 있을 때, 신의를 남용해 용서하지 맙시다.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때, 위로하는 법을 배우지 맙시다.
아, 사람을 향한 사랑의 수준을 끊임없이 향상시킵시다! 동네 우물에서 길어 올린 적선 한 동이보다 산꼭대기 샘에서 담아낸 사랑 한 사발이 훨씬 더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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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 종교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보상과 징벌의 편협한 윤리는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보상을 바라고 선을 행한다면, 그것은 어떤 이득을 바라고 악을 행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신다운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는 아마도 신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한 인간부터 주변에서 내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결코 선을 행하지 않았을 인간들, 사람 사는 미덕보다 신의 뜻만을 맹종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물론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의 윤리관은 어린 시절에 배우던 바른 생활 교과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보다 아름다운 윤리는 윤리를 초월하는 실존의 영역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비로소 인간 본연의 힘을 되찾는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반대로 보상과 징벌의 압박 속에서는 선을 위한 선행의 필요성만이 대두될 뿐입니다. 도덕률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때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다 광활한 윤리의 영역이 항상 펼쳐지기 마련이니까요. 운명이 결코 정당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눈뜰수록 우리는 보다 나은 윤리의 영역을 넓혀갈 수 있습니다. 신이 정의롭지 못해서 미덕의 토대가 허물어진다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인간의 미덕은 오히려 신의 부당함 위에 흔들림 없는 토대를 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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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을 기대하지 않기에 고귀하며, 고귀하고 순수하기에 더없이 행복한 것이 바로 선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보통 왜 악을 행하는지 압니다. 그런데 왜 선을 행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외로움에 대해 궁금하면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 물어보십시오. 답변할 것이 가장 적은 사람을 가장 외로운 사람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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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자체를 위해 선행을 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선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마음 말고는 다른 기대 없이 선행에 몰두합니다. 생쥐스트의 말대로 “자기 마음 말고는 다른 증인 없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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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내면의 자유에서 우러나는 현상입니다. 이 자유는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켜지고, 악을 행할 때 잦아들지요. 용서와 자비 속에서 새로운 진리를 깨칠 때마다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현실적인 체험의 증언입니다. q나대로 악행이 거듭될수록 그 죄의 고리에 점점 더 엮여 들어가는 맥배스의 심리 또한 문학적 은유만은 아닙니다. 위대한 영혼과 비장한 운명의 주인공에게 진실인 것은 평범한 인생의 나그네에게도 진실입니다
우리 내면의 용적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부실해도 그것을 무시하여 관리를 소홀히 하면, 외부의 유해한 기운이 삶 전체를 점령해 버립니다. 가슴의 침묵 속에 숨은 나 자신에 대한 거짓은 광장에 폭로된 거짓 못지않게 내면의 자유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합니다. 그리고 내면의 자유가 타격을 입는 순간, 마치 야수가 오랫동안 노려온 먹잇감을 덮치듯 운명이 자신의 삶을 덮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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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대한 대가는 떠들썩하나 선에 대한 보상은 조용하기 마련입니다. 악은 결국 요란한 재앙으로 귀결되지만 선은 존재의 심오한 법칙에 소리 없이 귀의하지요. 정의의 저울이 빛보다는 어둠 쪽으로 쉽게 기우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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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수줍은 나그네입니다. 문 앞에서 그를 맞이하는 집주인의 표정 하나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요. 시간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우리 영혼을 쉼터 삼아 들른 손님일 뿐, 그런 시간을 우리가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문가에 서서 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준비가 되어 있는 집주인이야말로 지혜로운 자이지요. 그러려면 가장 단순한 행복의 이유들을 자기 안에 많이 쌓아두고 있어야 합니다. 행복의 어떤 이유도 평소에 소홀하게 취급해선 안 되는 이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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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있을 때마다 눈에 띄게 행복할 줄 알아야 보이지 않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취해서 마구 떠드는 시간의 목소리를 유심히 들어두어야 소리 없는 시간의 언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어설픈 조심성보다 지혜에 어긋나는 것은 없습니다.
불가에 쪼그리고 앉아 오지 않을 이상적인 행복을 기다리기보다는 사소한 행복일지언정 부둥켜안고 미친 듯이 춤추는 편이 훨씬 현명합니다. 두문불출하는 사람의 집 지붕 위로는 아무도 원하지 않을 시시한 즐거움밖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성이 허락하고 경험이 충고하는 감정의 한계선을 절대로 넘어서지 않는 사람은 지혜로운 자라 불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정의 끝을 염려하여 친구에게 헌신하지 못하는 친구, 사랑에 빠져 자멸할까 봐 사랑에 몸 바치지 못하는 연인은 더 이상 그와 같은 명칭으로 불려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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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갖춘 사람은 인간적인 모든 욕망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툭하면 불합리한 욕망들에 시달립니다. 그것들은 장차 견고한 삶의 궁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자연이 우리에게 보낸 일꾼들입니다. 이 일꾼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혼자서 존재의 토대를 다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영혼이 거할 장소로 차갑고 비좁은 골방밖에는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욕망을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라, 욕망을 순화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삶의 계단에서 각자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로 결정됩니다. 가령 위기와 실패가 내려가는 계단을 의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똑같은 위기와 실패가 오르는 계단을 의미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지혜를 갖추었다 해도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저지르는 행동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습니다. 다만 지혜롭지 못한 사람의 오류는 자신을 무의식 속으로 더 깊숙이 잡아끄는 데 반해, 지혜를 갖춘 사람의 오류는 존재의 어두운 구석에 대한 각성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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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공 상태에서 번창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쓸모없는 오만입니다. 무엇을 해야만 한다든지, 어떻게 해야 바람직한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런 정도는 적당한 시간을 투자해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배워 깨칠 수 있습니다. 고결하게 살려는 의지를 마음에 품고 안전한 골방에 처박혀 그것을 소중히 보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도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면, 그런 지혜는 우리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친구의 조언만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힌두교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폭풍이 몰아치기 전이 아니라 몰아친 후에 고요히 피어나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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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란 행복의 기술을 터득하는 능력입니다. 우선 잘 행복할 줄 알아야 자기 안에 행복이 차지하는 비중을 조금씩 조금씩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기왕에 행복인 것, 최대한 행복을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복의 문을 통해 자기를 벗어나본 사람은 슬픔의 문을 통해 자기를 벗어나본 사람보다 훨씬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머리와 마음을 모두 맑게 해주지만, 슬픔은 마음만을 맑게 해줍니다. 행복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밤에만 여행해본 나그네를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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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불행 속에서 배우는 겸손보다 더 깊고 더 순수한 겸손을 행복 속에서 배웁니다. 사실 세상에는 무모한 자기희생, 눈치 보기, 무의미한 결벽증, 맹목적인 단념, 임의적인 굴종, 막연한 죄의식 등 겸손의 왜곡된 통념들이 넘쳐납니다. 나는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런 저실 겸손들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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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소홀히 다룬다는 것은 어제를 누리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에 소홀한 자는 스스로 떠돌이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떠돌이로서 거쳐가는 이 세상에 그가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미 지나간 어제에 비해 확실히 현존한다는 점. 우리를 위해 새로 마련된 시공간이라는 점에서 단연 우월합니다. 당장 우리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오늘은 어제보다 더 강하고 광활하며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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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사유에 보다 넓은 체험의 장을 더하는 것입니다. 행동한다는 것, 그것은 생각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빨리, 더 완벽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동한다는 것, 그것은 머리만이 아니라 전 존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행동한다는 것, 그것은 꿈속에서 눈을 감아 현실 속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행동한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노력하고,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행동한다는 것, 그것은 또한 경청하고, 묵상하며, 침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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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정작 중요한 것, 우리 삶에 빛을 던져주고 우리 삶을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머릿속 생각들이 아니라 그 생각들이 내면에 일깨우는 감정들입니다. 생각이란 종착역과도 같은 것입니다. 여행의 종착역 말입니다. 이 경우 우리의 관심은 여행의 과정, 그 여정의 각 단계들에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마주치는 인연이랄지 우리에게 닥치는 낯선 사건들 말입니다. 여기서 끝까지 남아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이 갖는 진정성입니다. 생각의 경우, 그것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의 존재를 영구히 사로잡지요. 한번 죽은 사랑이 새로운 사랑으로 부활해 끝없이 명맥을 이어가면서도 그 광채와 기운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에 진정한 자아를 구축하는 것은 형체를 빚어내는 관념들이 아니라 그 관념들을 하나로 끌어 모아 결집시키는 질긴 감정들입니다. 그렇기에 진실 자체보다 진실이라 믿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거대한 진실에 소극적으로 동의하는 것보다 거대한 오류에 적극적으로 몸 바치는 것이 때로는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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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얽매여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것보다 가끔은 생각에 반한 행동을 저지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적극적인 실수는 언제든 뜯어고칠 수 있습니다. 반면 현ㅅ리과의 접점조차 찾기 힘든 소극적인 오류는 바로잡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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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는 천상의 빛에 둘러싸여 주변의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감지하고는, 자신이 멈춰 선 것인지 아니면 신의 권좌를 향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때 베아트리체가 눈에 들어왔지요. 그녀가 평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졌다는 걸 깨달은 그는 비로소 자신의 목적지가 가까이 있음을 인지했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함께해온 모든 것이 점차 아름다워짐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실에 근접헤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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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은 항상 불만족을 부릅니다. 우리가 삶을 원망하는 이유 중 대부분은, 삶을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할 것 이상을 삶이 우리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삶을 위해 최대한 높은 이상을 품을 필요가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강력한 내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이상은 게으르고 비굴한 거짓일 뿐입니다. 도달할 수 없는 이상 두어 개면 인생이 마비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영혼의 높이가 극서의 꿈 혹은 갈망의 높이로 측정될 수 있다는 생각은 심각한 착각입니다. 나약한 사람일수록 강한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더 많은 꿈을 꾸기 마련이지요. 꿈속에서 그만큼 많은 에너지와 활동력이 증발해버리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정신적 고도를 평가할 때 꿈의 높이가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단 하나, 그 꿈의 누운 그림자가 지나온 삶과 그 과정에서 충분히 단련된 의지를 반영할 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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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서도 기다림이란 거의 언제나 쓸데없는 시간의 낭비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비로소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소소한 사랑들을 통한 환멸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남은 생애를 언젠가는 밝혀줄 위대한 사랑의 불꽃에 기름을 부을 수 있는 것입니다.
환멸이란 진실의 첫 인상일 뿐입니다. 당신이 의욕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롭고 현명하며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이 불만족스럽다고 해서 거짓된 모습 속에 파묻혀 지내겠습니까? 현실을 외면한 채 착각과 꿈으로 짜깁기된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까? 불가피한 현실의 법칙에 맞서 싸우는 아름다운 꿈. 그 아름다움은 꿈의 기력이 바닥나고서야 우리 눈에 들어오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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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영혼이 자랑하는 힘은 살면서 일일이 주워 모은 환멸의 조각들로 이루어집니다. 각종 실망과 좌절, 실패한 사랑, 깨진 희망의 찌꺼기가 무게를 못 이겨 하나 둘 떨어지면서, 결국에는 거대한 진실이 위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잎이 다 떨어진 겨울 숲 나뭇가지 사이로 태양이 보다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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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름다운 꿈만 꾸면, 그 꿈에 걸맞은 멋진 세상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꿈과 바람과 욕망을 너무 쉽게 내걸고는 그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대가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당신이 이상적인 영혼을 만나고자 한다면, 당신 자신부터 당신이 찾는 그런 영혼을 닮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이상에 스스로 가까워질수록 그 바람과는 많이 다른 이상의 자연스러움을 깨달아갈 것입니다. 당신의 이상이 삶과 접촉하여 현실화되면서, 그 이상은 더욱 넉넉하고 유연해지고 더 나아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당신이 사랑하는 영혼 속에서 당신 영혼의 사랑받을 만한 점들을 찾아내는 것도 그땐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원래 내면의 좋은 것들이 호응하지 않고서는 바깥의 좋은 것들에 감응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Review]
"우리는 모두가 행복하고 현명해지기를 얼마든지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 해도 희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우리가 운명을 점치는 자들을 꺼리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혹, 그들이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고 해도 이미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운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얼마든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희망적인 존재다.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본문)
여기서 말하는 본성은 타고난 운명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내면에 축적된 지혜다. 작가는 그 지혜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지혜로워지는 딱 그만큼 본능적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지혜를 향한 욕구가 존재하며, 그것은 우연으로 점철된 인생살이 대부분을 의식으로 소화하는 일에 매진합니다.” (본문)
지혜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고 난 후에 얻어지는 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서에서도 지혜는 지식을 전제로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전도서 7:12)
물론 성서가 말하는 지식과 세상이 말하는 지식은 다르지만, 배운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 책은 지혜를 얻는 책이다. 벨기에 태생으로 시인이자 극작가 수필가이기도 한 저자는 191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 책에는 단문 형태로 지혜에 관한 200여 편의 글이 담겨 있다. 조용한 시간 인생을 돌아보는 시기인 중년에 어울리는 책이다.■
(본문)
“사랑의 힘을 갖지 못한 지혜는 진정한 지혜가 아닙니다. 정말로 현명한 사람은 멀리 내다볼 뿐 아니라 멀리 내다보면서 깊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 없이 본다는 것은 어둠을 더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사태는 우리가 평소에 갖고 있는 생각의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아주 오랜 기간 말없는 영웅으로 묵묵히 살아오지 않은 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영웅이 될 기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사람은 지혜로워지는 딱 그만큼 본능적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지혜를 향한 욕구가 존재하며, 그것은 우연으로 점철된 인생살이 대부분을 의식으로 소화하는 일에 매진합니다.”
“이성은 지혜에 이르는 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지혜가 이성 안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
“아름다움에 형체가 있듯 지혜에도 형체가 있습니다. 다만 그 형체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불꽃처럼 다채롭지요. 지혜는 결코 딱딱한 옥좌에 부동자세로 앉아 자리를 지키는 여신이 아닙니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는 삶의 현장 곳곳을 파고들며 우리와 함께 울고 웃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명료한 생각 속에서만 제대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과 품성의 가장 소중한 요소인 지혜는 그리 명료하지 않은 생각 속에서도 살아 숨 쉴 수 있지요.”
“운명에 복종하는 사람은 자신이 겪는 사태를 변화시키는 대신 그 사태에 맞춰 스스로 변신합니다. 심지어 불행을 탓하면서도 그 불행의 모양대로 자기 삶을 즉시 두드려 맞추지요. 그러다 보니; 그에게 닥치는 모든 사건에서는 운명의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에게 운명과 우연은 비슷한 단어입니다.”
“인생에서 정작 중요한 것, 우리 삶에 빛을 던져주고 우리 삶을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머릿속 생각들이 아니라 그 생각들이 내면에 일깨우는 감정들입니다. 생각이란 종착역과도 같은 것입니다. 여행의 종착역 말입니다. 이 경우 우리의 관심은 여행의 과정, 그 여정의 각 단계들에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마주치는 인연이랄지 우리에게 닥치는 낯선 사건들 말입니다. 여기서 끝까지 남아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이 갖는 진정성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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