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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수退修”의 사전적인 의미는 “물러나서 닦다, 또는 수련하다.”입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는 현실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서 어떤 형편인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내왔던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하나님께서 어디든지 보내시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갈고 닦다.”라는 신앙적인 의미로 의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집요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사십 일 동안의 금식을 무사히 마치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셨습니다.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소문은 순식간에 주변의 여러 지역으로 두루 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회당을 순회하듯 차례대로 방문하셨습니다. 권위 있는 탁월한 가르침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탐욕이 목구멍까지 들어차 있었던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에게는 단 한 번도 들어볼 수 없었던 탁월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소리를 높이며 환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번에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사렛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안식일이 돌아왔습니다. 늘 하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희년יובל(요벨)을 선포하셨습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후 첫 번째 돌아오는 해 곧 오십 년마다 지켰습니다. 모든 묶인 것들이 해방되어 자유를 누렸습니다. 실제로,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노예로 팔렸던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팔렸던 땅의 소유권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논밭의 경작은 중단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인류를 영원한 죽음으로 몰아넣는 허물과 죄로부터의 완벽한 해방을 가리킵니다.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쓰고, 몸부림치고,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 내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은혜를 값없이, 일방적으로, 주권적으로 부어주실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년 선포는, 당신의 메시아 되심의 선포였습니다. 곧 당신이 유대인들이 사무칠 정도로 간절한 마음으로 고대하고 있었던 메시아라는 선포였습니다. 순간, 회당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드디어 로마의 지긋지긋한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그들 역시 너나 할 것이 없이 다 같은 마음으로 회당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은 유대인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민족과 국가를 초월해서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의 메시아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이방인을 위한 메시아도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내가 해 뜨는 곳에서 너의 종족을 데려오고, 해 지는 곳에서 너를 모아오리라. 내가 북쪽을 향해 ‘그들을 어서 내놓아라.’라고 외치리라. 남쪽을 향해서도 ‘그들을 잡아두지 마라.’라고 외치리라.”(사43:5b-6a)라는 증거에 따르면, 이방인의 구원은 구약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습니다. 구속사의 핵심을 이루는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문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배타적인 선민의식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이방인을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는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겼습니다. 경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도전이었습니다. 회당 안은 순식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환호성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경배와 찬양은 냉소와 불신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분노로 돌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환호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폭도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들은 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에는 호산나를 외치며 찬양했습니다. 그야말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해 줄 메시아라고 확신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돌변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극단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도무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아니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가증스러운 존재들이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럼에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죽는 순간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예 죽여버리고 말겠다는 살의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민족의 반역자로 몰아세웠습니다. 범하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반역자를 낭떠러지에 떨어뜨려 죽이는 전통적인 형벌 제도대로 처단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서 함께 힘을 모았습니다. 낭떠러지로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이제 떨어뜨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까지도 당신을 그들 손에 맡겨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끌려갈 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다 실제로 죽을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눅4:29)라고 이어집니다. “가다επορευετο”의 시제는 미완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창세 전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길, 당신이 기쁘게 여기시는 길, 마음에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던 길,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 불구덩이로부터 건져낼 수 있는 길로 걸어가셨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와 관련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의 절대 권위를 나타내셨다고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스스로 고비를 넘기셨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순간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는 전혀 상관없이 당신에게 주어져 있었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이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수없이 많은 고난을 만나셨습니다.
그때마다 당당하셨습니다. 결코 타협하거나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역사의 전면에 우뚝 서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복음을 외치고 또 외치셨습니다. 외치는 선에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보여주셨습니다. 허울뿐인 박제된 복음이 아니라 인류의 삶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회당 안에서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중병을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고쳐주기를 바라고 당신을 찾아 나온 온갖 병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을 붙잡고 있던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일단의 무리가 자신들을 떠나지 말고 함께 해주기를 바랄 때는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한다며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시몬과 친구들의 배를 가득 채워주신 이후로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서는 언제나 탁월한 가르침에 대한 감탄과 마치 신음 같이 쏟아지는 탄성이 넘쳤습니다. 환호성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기와 명예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습니다.
소문을 들은 수없이 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기 위해서 시도 때도 없이 구름떼같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물러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눅5:16)라는 증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 대한 인기와 명성이 하늘로 치솟을 바로 그때 무리로부터 물러나셨습니다. “물러나ην υποχωρων”는 현재분사입니다. 직역하면 “물러나고 있었다.”입니다. 물러나신 이유는 당신을 찾아 나온 무리를 귀찮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퇴수退修였습니다. 내면을 적나라하게 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칠 것이 있다면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워내야 할 것이 있다면 조금도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채울 것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게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갈고 닦기 위해서였습니다. 수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는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한 지역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보면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무리가 믿고 따르고 있었던 수없이 많은 우상 가운데 하나 정도로 만족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물러나야 했습니다. 물러나야 할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수없이 많이 다가오고 있던 환난과 시험은 물론 십자가 죽음까지도 감당할 힘과 능력을 공급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니 당신 안에 이미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게 내재 되어있었던 힘과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러남을 통해서 온전히 회복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셨습니다. 세상은 물러났다 돌아온 예수 그리스도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무려 사십 년 동안이나 역사의 전면에서 물러나 있었습니다. 퇴수였습니다. 유대 역사 속에서 가장 탁월한 지도자로 거듭났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과 벌인 영적 전쟁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왕후로부터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호렙산으로 물러났습니다. 퇴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를 뒤바꾸어 놓는 아람 왕과 북 왕국 이스라엘 왕을 세우는 위대한 선지자로 거듭났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로 물러났습니다. 퇴수였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위대한 선지자로 거듭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당장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혔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으로 물러났습니다. 첫 번째 퇴수였습니다. 삼 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의한 사람들로부터 위협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고향으로 물러났습니다. 두 번째 퇴수였습니다. 거기서 십삼 년을 보냈습니다. 합쳐서 십육 년을 흘려보냈습니다.
두 번에 걸친 퇴수를 통해서 탁월한 사도로 거듭났습니다. 1989년 11월 10일, 저는 조금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1년 365일 스물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거의 육 개월에 한 번씩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생활은 2,000년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국내 생활을 마무리하고 중국에서 자비량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면, 1년 365일 스물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생활로부터의 강제 퇴수였습니다. 가진 물질은 물론 후원자도 없었습니다. 예배 인도를 제외하고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고독했습니다.
우울했습니다. 기도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일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던 저는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금요일이었습니다. 설교를 끝내고 각자 흩어져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습관대로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때부터 제 의지와는 전혀 다른 기도가 쏟아졌습니다. 제어할 수도 없었습니다. 정신만큼은 또렷했습니다. 두 시간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기도를 끝냈을 때, 평소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몸은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습니다. 마음도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런 경험이 몇 차례 더 있었습니다. 불현듯 선교는 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에 충만해졌습니다. 스스로 궁리해서 얻은 깨달음이 아니었습니다. 찾아온 깨달음이었습니다. 환경과 상황과 조건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지만 편안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은 쉬지 않고 이어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일 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벼랑 끝에 서서 오직 당신 한 분만 의지 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또 일 년이 지난 다음에는,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개인적인 노력이나 수단 강구를 중단하고 당신이 이루어 가시는 일에 동참하라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돌아보면 이것 역시 강제 퇴수였습니다. 쉽지 않지만 순종하기 위해서 여전히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퇴수는 두 걸은 전진을 위한 한 걸음 후퇴입니다. 더할 나위 없는 은혜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성도 수를 늘리고 건물을 짓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목회 현장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개념입니다. 실제로, 한 번 사역을 시작하면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바쁘게 달립니다.
성도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문제해결에 급급합니다. 전전긍긍하며 복만 부어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외칩니다. 하나님을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여러 가지 수단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깁니다. 이들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 증진을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물러나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하나님께서 어디든지 보내시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갈고 닦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언제 적 일입니까?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의 저자인 그Ernest M. Hemingway는 투우 경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수백 번이 넘도록 투우장을 드나들었습니다. “케렌시아가 있으면 소는 말할 수 없이 강해진다. 케렌시아가 있는 이상 투우사는 소를 넘어뜨릴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케렌시아Querencia는 스페인어입니다.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일전을 앞둔 투우장의 소가 잠시 쉴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곳입니다. 투우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소는 스스로 투우장의 어떤 한 공간을 케렌시아로 지정합니다.
그곳에서 숨을 고릅니다. 다시 싸울 힘을 회복합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무장합니다. 어떤 투우사도 이길 수 없는 강한 소로 거듭납니다. 이런 소를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는, 소가 지정해 둔 케렌시아를 찾아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소가 케렌시아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케렌시아가 되십니다. 안식처가 되십니다. 피난처가 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환경과 상황과 조건 속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결단코 물러서거나 지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한편, 집중과 몰입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실제로, 집중은 대상과 함께 주변까지 볼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음이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몰입은 대상 하나밖에 볼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음이 흩어질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이 아니라 몰입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퇴수退修할 수 있는, 물러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닦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유일한 케렌시아, 안식처,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만 집중을 넘어 몰입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환난과 시험을 만날 수밖에 없는 인생의 한복판에서도 가쁜 숨을 고르고, 다시 맞서 싸울 힘을 회복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무장하고, 어떤 환난과 시험도 이길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쓰시기에 어디든지 보내시기에 합당한 복된 삶,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복된 삶, 무엇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을 거룩한 희생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온전히 쫓아가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