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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얼마전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쇼킹한 증언을 하여 체포당한 조웅 목사의 정보라인이었던
문명자 기자의 취재 파일(단행본) 전문(全文)인데 분량이 많은 관계로 편의상 1, 2편으로
나눠 게시합니다.
1편(1~3부 수록), 2편(4~7부 수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문명자 지음
- 백악관 출입기자 문명자의 40년 취재파일
4부 박정희의 비자금
제 1장. 박정희의 비자금 조달선 외자기업 (프레이져위원회 조사보고서)
박정희는 청렴했다?
97년 [중앙일보]는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씨의 회고담을 연재했다. 그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비서실장의 증언을 사실 확인도 없이 객관적 진실인 양 보도하는 언론사의 양식도
문제려니와, '청렴결백했던 박 대통령 이야기'에 열화 같은 성원을 보냈다는 많은 독자들의 때
이른 건망증에도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김정렴 씨의 말대로 대통령 박정희가 집무실에서
선풍기도 틀지 않고 구멍난 러닝셔츠를 그대로 입었다고 치자. 그것이 그의 진면목인가.
그의 18년 통치는 과연 간디와 같은 철학에 입각한 것이었는가.
박정희는 취약한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워싱턴 정가에 거액의 달러를 뿌렸다. 김동조 주미
대사는 의회를 돌면서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막대한 현금을 주려다 말썽을 일으켰고, 박동선 역시
대미 로비를 한다며 의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주었다가 그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한국
으로 도피했다. 김한조 사건 역시 이 로비의 일환이었다.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강영훈 씨도 중앙
정보부에서 돈을 받아 한국문제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어 미국 하계와 언론계에 친 박정희 여론을
조성하려고 활동하다가 FBI측의 소환이 있자 가족을 놔두고 자기 혼자 손가방 하나만 들고 한국
으로 도망갔다.
이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한국의 권익보다는 박정희 개인 찬양과 정권 연장에 더 힘썼다는 점이다. 심지어 한국 정부로부터 60만 달러를 받아먹고 미국 국회의원을 매수해 미국 국회의사록에 박정희를 찬양하는 글을 올리게 하고는 그것을 가져다가 박정희에게 보이고 자신의 공을 과시한 자까지
있었다.
청와대 침실 변기에 벽돌을 집어넣어 한 방울의 물까지도 아끼려 했다는 박정희가 스위스 은행에 비밀구좌를 만들어 거액의 외화를 예치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 돈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갔는가.
유신체제하에서 아무도 그 비밀에 칼을 대지 못하고 있던 1977년에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세칭 프레이져위원회)는 '코리아게이트' (박동선이 벌인 미 의회 의원 뇌물 로비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활동에 나선다.
프레이저위원회를 비롯한 미국 상.하원 윤리위원회의 조사활동에 의해 박정희의 비자금 전모는
낱낱이 드러났다. 한국 현대상에서 미국이란 나라가 차지하는 지위는 별개로 하더라도, 적어도 70년대 후반 미 의회의 코리아게이트 조사위원회들은 한국 국민을 위한 중앙정보부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할 만하다.
수많은 증인들이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 증언대에 섰다. 그 중에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아들 이동훈, 사위 정화섭,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주미대사관 중앙정보부 참사관 김상근,
박정희가 기용한 로비스트 박동선. 김한조, 국제 석유재벌 걸프, 칼텍스, 유니언 오일사 대표 등
박정희의 비자금 조성과 집행 과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나는 미 의회의 2년에 걸친 코리아게이트 조사 과정 내내 그것을 취재했다. 전두환. 노태우 일당이 주무른 4천 억원에 달하는 정치자금에 이미 혼이 빠진 한국 국민들에게는 박정희의 '몇 억 불'
규모의 정치자금쯤이야 푼돈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따라 우리
가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통치의 대가로 받은 청산금이 불과 3억 불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 당시 박정희가 주무른 몇억 불 정치자금의 가치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쌀 한 말을 들여놓을 목돈이 없어 한 되 두 되씩 봉지쌀을 사다 먹던 시절이 아닌가.
"박정희는 청렴했다"고 외치는 90년대의 박정희 신화 제조자들 앞에 나는 그 때의 취재수첩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미 의회가 수상스러운 한국인들의 활동에 주목하게 된 것은 75년 하원에서 여러 차례 열렸던
'한국의 인권 문제에 대한 청문회' 때였다. 75년 6월 10일 이 청문회에 대단히 흥미로운 증인이
출석했다. 그는 바로 73년까지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다가 미국에 망명한 이재현 씨였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미국 내에 있는 반한파 한국인들을 탄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국 내에서
반(反) 박정희 여론과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규모 회유, 매수 공작을 벌일 모종의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분명히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와 의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금품 제공 등의 수단으로 로비를 벌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도 법무성은 이 증언을 적극적으로 조사하려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분노하면서 박정희의 미국 의회에 대한 로비 부정의 진상을 끝까지 캐 보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하원의 프레이저 의원이었다. 그는 미네소타 출신으로, 미네소타 대학 법대 학장이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대단히 강직하고 정의감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제야 밝히는 일이지만 그가 박동선 사건의 진상을 밝히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된 데에는 필자
도 나름대로 기여한 바가 있었다. 장기집권을 위해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돈을 뿌려 가면서 나라
망신을 시키는 박정희의 행각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정의와 불의를 가릴 줄 모르고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그의 사고방식에 경악하면서 내 나름대
로 결심했다. 좋다. 힘이 정의고 돈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박정희에게 돈과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고.
프레이저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던 미 하원의 국제기구소위원회는 76년부터 이재현 씨의 증언에 대한 소규모의 자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한국정부가 불법 행위들을 자행하고 있다는 여러가지 증거들이 드러났다. 프레이저 의원은 이를 근거로 77년 2월 3일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
서 한.미 관계를 조사할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로써 이른바 프레이저위원회로 불리는 미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조사가 시작됐다.
프레이저위원회가 박정희의 비자금에 대한 첫 번째 단서를 잡은 때는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가
진행되던 75년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조사 과정에서 상당수의 미국 대기업들이 미국 정부와
외국 정부에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제공해 왔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그러자 미국 전역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고, 상원의 다국적소위원회는 이에 대한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5월 16일 열린 이 청문회에서 석유재벌 걸프는 "우리가 전 세계의 외국 정부에 제공한 5백만 달러에 달하는 정치자금 중 80%가 한국의 공화당 정권에 지불 되었다" 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프레이저위원회는 3년에 걸쳐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 조성과 사용처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다.
이 조사는 미국 내 28개 주와 전 세계 11개 국가에서 이루어졌다. 정부기관과 민관기구 그리고
개인들에 의해서 수천 종의 문서가 검토 되었고, 37명의 증인이 참석한 가운데 청문회만도 20회
나 개최되었다. 그 결과를 정리해 프레이저위원회가 발표한,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 조성과 대미 로비에 관한 내용들을 우선 서술형으로 소개해 본다.
5.16쿠데타 세력들은 쿠데타 직후 '부패 추방'을 첫 번째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집권 과정에서 그 공약은 그야말로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는 62년 워커힐 건설 프로젝트로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고, 63년 봄에는 은밀히 증권시장 조작에 개입해 4천만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거두는 등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일으켰다.
더욱이 비밀리에 진행된 한.일 국교정상화 예비회담에서 김종필이 청구권 문제와 평화선 문제를
합의(이른바 '김-오히라 의정서') 해 주는 대가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사용될 선수금 조로
1억 3천만 달러, 63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공화당의 정치자금 조로 2천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 기정사실화하면서 한국 내에서는 비난 여론이 빗발쳤다.
결국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63년 2월 25일 김종필이 이른바 '자의 반 타의 반'의 외유길에
오르고, 박정희 의장은 중앙정보부의 부패 혐의를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다.
63년 야당이 들고 나온 '삼백사건'은 공화당이 정치자금 상납을 조건으로 이병철 등 소수의 기업인들에게 설탕과 밀가루, 시멘트 산업에서 막대한 이윤을 축적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의혹의 표적이 된 것은 단연 공화당 의원 김성곤이었다. 그가 당시에 한국 시멘트 산업을 주도하던 기업인이었기 때문이다.
63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김종필을 비롯하여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국회의원 김성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장기영 등으로 자신의 주위에 부패의 그물을 더욱 촘촘히 둘러쳤다.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을 재개하기 위해 김종필을 일본에 파견했다.
이로 인해 한.일 회담 반대 데모가 전국을 휩쓸고 박정희 정권은 급기야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당시 학생.민주 인사들은 일본과의 수교를 무조건 반대한 게 아니라, 일본
자금을 들여와서 군사정권 유지에 악용하려던 박정희 정권의 정략적 매국 행위에 반대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이 수립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행할 자금 및 공화당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에 급속히 감소하던 미국의 원조를 대체할 자금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65년 1~2월 김종필의 형 김종락(한일은행 상무)은 일본으로부터 정치자금 조달을 기도한다.
5.16 이후 김종필이 혁명실세로 등장하자, 그 전까지 은행원으로 있던 형 김종락까지 원님 덕에
나발 부는 격으로 군사정권의 자금 대리인으로 데뷔했던 것이다. 그런데 외국에서 들여오는 정치
자금을 그럴듯하게 세탁하려면 상당수의 합작회사가 필요햇다. 65년 이후 외국과의 합작회사
설립은 증가 일로를 걸었고 박 정권이 외국에서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체계도 점점 세련되어 갔다.
김성곤. 이후락. 김형욱 3인이 나눠 맡은 정치자금 조달체계
한편, 그 무렵에 의심 많던 박정희는 이 쿠데타 이후 독보적으로 정치자금 조성 역할을 담당해 온
김종필에게서 그 역할을 거두어들이고 김성곤. 이후락에게 더 많은 역할을 맡기기 시작했다.
이 점은 65년 김종필 계열의 기업인과 이후락 계열의 기업인들이 맞붙은 '자동차 전쟁'에서 박정희가 이후락을 지지한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공화당 의장 김종필을 견제하기 위해 박정희가 기용한 김성곤. 이후락. 김형욱 3인은 정치자금
조달체계에서 각기 다른 책임을 맡았다.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은 수표로 지불되는 정치자금
을 접수하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김성곤으로부터 그 수표들을 건네받아 현금화하는 동시에
현금으로 지불되는 정치자금을 접수하며, 비서실장 이후락은 그 자금들을 스위스은행의 비밀구좌에 예치하고 관리하였다. 이런 '역할분담' 체계에서 66년 공화당 재정위원장에 임명된 김성곤이
헌납의 주요 창구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이었다.
박 정권의 이와 같은 정치자금 비밀 조달 체계는 67년 대선에서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67년 대통령 선거는 당시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타락하고 부패한 선거로 평가되었다. 67년 선거에서
미국의 일부 대기업들이 박 정권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실은 76년 코리아게이트 조사 과정에서 상.하원 윤리위원회와 프레이져소위원회에 의해 낱낱이 밝혀진다.
이 같은 정치자금 수수와 부패 문제는 박정희가 3선개헌을 추진 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71년 선거에 박정희가 출마하지 않을 경우 공화당은 새 후보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극심한 분열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그것은 야당의 승리를 의미했다. 정권을 잃는다면 공화당 지도부는 정치자금과 부정부패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위험이었다.
67년 선거 직후, 3선개헌 문제를 놓고 김종필과 박 정권의 다른 중간 보스들 간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김종필과 김성곤은 3선개헌을 반대했고, 김형욱과 이후락은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들의 찬반입장은 각자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김종필은 박정희 퇴임이후 대통령직을
계승할 사람은 자기라는 개인적 야심에 차 있었다. 그러니 박정희의 3선 기도에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김성곤은 자신의 기업활동과 축재를 방해하는 김형욱과 이후락을 밀어내기 위해 3선개헌에 반대했다.
개헌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3분의 2의 동의가 필요했다.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과 공화당
의장을 지낸 김종필 양인은 모두 국회에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지만 김형욱과 이후락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박정희는 김종필과 김성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김형욱과 이후락을
3선 개헌 후 사임시킨다. 당시만 해도 박정희는 유신체제와 같은 절대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고 있
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겪어야 했던 이와 같은 번거로움이 유신이라는 절대권력을 꿈꾸게 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69년 사임한 후에도 이후락은 정치자금 모금책으로 계속 활동 하다가 70년 12월에는 중앙정보
부장으로 다시 기용 되었다. 그러나 김형욱의 정치적 위상과 자금모금책으로서의 역할은 쇠퇴하
기 시작했다. 불안을 느낀 김형욱은 미국으로 탈출한 73년까지 부정축재한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리는 한국을 방문한 한 프레이저위원회 조사 위원과의 인터뷰에서 "70년 이후락, 김성곤, 김형욱이 각각 1억 불 이상을 축재했다"고 증언했다. 훗날 김형욱은 프레이저위원회에서의 증언에서 "김성곤이 모금한 정치자금 중에서 75만 불을 내가 개인 용도로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 "김성곤이 박 대통령, 육여사, 정일권, 이후락, 박종규에게도 그런 자금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이후락이 모금한 자금은 대통령 개인 용도로 스위스은행 비밀구좌에 예치되었다. 이후락 외에 다른 측근들도 대통령에게 돈을 제공했다. 박정희는 그 돈의 일부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책상 뒤의
금고에 보관했다. 박정희의 스위스은행 비밀구좌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프레이저위원회가
찾아낸 은행 기록과 이동훈(이후락의 아들)의 청문회 증언, 청와대 고위 측근의 증언들에 의해
명백히 확인되었다.
이동훈은 프레이저청문회 증언에서 "스위스은행에 있는 돈을 비록 아버지(이후락)가 관리했지만, 그 돈은 아버지의 돈이 아니고 박대통령이 사용하기 위한 정부 자금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동훈은 "나도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일본 은행에 2백만 불을 예치했다"고 말했다.
도대체 왜 박정희는 이 같은 비밀구좌가 필요했던 것일까.
이동훈은 "박 대통령은 여당 인사들뿐 아니라 야당 인사들에게도 돈을 주었다"고 했다. 코리아
케이트에 대한 미국 행정부 보고서에는 "한국의 한 유력 기업가에 따르면 70년 당시, 거의 모든 야당 의원들이 박정희의 돈을 받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동훈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그는 또한 "70년대 초반 박 대통령은 군부의 불복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요 군 지휘관들에게도 상당한 자금과 혜택을 주었다"고 했다.
박정희가 3선을 위해 출마한 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은 더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이
필요하게 되었다. 70년 6월 박정희는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에게 공화당에 10만 불씩을 기부
할 수 있는 기업체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김성곤이 작성한 명단에는 럭키그룹, 현대건설, 삼성그룹과 김성곤의 쌍용그룹 등 한국 유수의 기업들이 포함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기업
대표들 중 다수가 5.16 직후 부정축재자로 기소되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외국 기업들 역시 71년 선거를 위한 정치자금 조달에 이용되었다. 예컨대 걸프 사는 공화당에 1천
만 불을 제공하도록 요청받았는데, 결과적으로는 3백만 불을 제공했다. 같은 석유재벌 칼텍스 사도 최소한 1백만 불을 제공했다. 미 행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다른 한국 대리인을 통해 청와대에 커미션으로 수백만 불을 제공했다고 한다. 그 중 1백만 불은 71년 선거 이전에 대리인의 이름으로 해외 계좌에 지불되었다.
71년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외국 기업은 미국 기업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71년 4월 지하철 전동차를 한국에 판매했던 4개 일본인 무역회사 즉 미츠
비시 , 니쇼이와이, 미츠이, 마루베니사가 미국의 한 은행구좌에 1백 20 만 불을 이체한 사실이
일본 국회 청문회가 결과 밝혀졌다. "프레이저 소위원회가 이 자금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77년에는 은행측의 5년 기록 보유 규칙에 따라 은행 거래 기록이 폐기되었기 때문에 소위원회는 이 자금이 결국 어디로 갔는지를 명백하게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금이체 시점이 71년71년 4월이라는
점과, 1백 20만불 이체 이후에 지불된 1백 30만 불의 커미션이 김성곤의 이름으로 된 미국은행
구좌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일본 기업들이 제공한 총 2백 50만 불의 정치자금이 71년 선거에서 공화당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 정권의 이와 같은 거액의 정치자금 조달은 71년 선거로 끝나지 않았다. 프레이저소위원회와
상.하원 윤리위원회, 법무부의 조사 결과로 잘 알려진 바대로 69년부터 75년까지 '박 정권의 대미 로비스트' 박동선은 여타 대외무역에서 흘러나온 1천만 불 외에 미국쌀 수입 커미션으로 9백만 불
을 거둬들였다. 이 자금으로 박동선은 한국과 미국 관리들에게 선금, 차관, 기부금 및 현금을 제공
했다.
코리아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박동선의 집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미국쌀 수입에서 떨어지는 커미션
이 미국의회에 대한 로비자금의 출처였슴을 보여 주고 있다. 한국 중앙정보부는 미국 의회의 지원
을 얻기 위해 박동선을 내세워 특정 미국 기업을 지원하도록 했다. 한국 정부가 지지를 얻고자 하는 의원들의 선거구에 있는 기업을 지원함으로써 해당 의원을 친한파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한국의 대미 외교 정책의 필요성]과 [한국의 대미 외교정책 계획]이란 두 개의 문서는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이 문서들의 관련 부분을 살펴보자.
Ⅱ상.하원 의원의 이익증대를 통한 외교활동
A. 상.하원 선거구에 대한 지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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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투자 기업 원조
(a) 만일 하원 의원의 선거구에 있는 기업이 한국 투자에 대한 이해관계를 암시하면 우리는 그 기업을 지원한다.
(b) 우리는 이미 한국에 투자하고 있는 대기업(걸프, 칼텍스, 아메리칸 에어라인,, 페어차일드)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그 기업의 본부가 있는 지역 출신 하원 의원의 지지를 획득한다.
B. 선거구 지원의 두가지 이점
1.선거구민을 도움으로써
a)상.하원 의원들이 인기를 얻게 된다.
b)그렇게 되면 그들은 한국을 지지할 것이다.
2.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
a)그들 지역의 생산품을 구매함으로써, 우리는 선거인뿐만 아니라 선출된 관리들의 영향력도
우리에게 유리하게끔 이용할 수 있다.
b)그들의 생산품 구매와 다른 거래로부터 발생하는 커미션을 우리의 활동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일거양득이다.
박동선의 집에서 발견된 이 문서들의 작성자가 누구인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앙정보부 의전국장 스티브 김(한국명 김상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70년 12월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후 중정이 벌인 부정거래행위는 박동선의 활동을
능가했다. 73년 3월 국내 유수의 한 기업인은 "이후락은 여전히 대통령 집무실을 통해 이권을 따내고자 기업인들의 활동을 부추기는 동시에 감독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당시에 이후락은 비서실장 시절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후락의 중앙정보부 또한 수백만 불의 불법 대출을 포함한 대규모 은행 대출 공작에 개입했다.
그 과정에서 떨어진 자금과 커미션은 중앙정보부 예산과 중앙정보부 고위 관리들의 부정축재에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서 면직된 후 6개월 동안 한국 금융계의 전격적인 개편이 단행되기까지 했다.
이후락의 중앙정보부는 또 수출.입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는데 신진자동차, 대한농산, 선경 등이
이후락의 통제 범위에 들었던 기업이었다. 이후락은 연간 섬유수출 쿼터 배당을 조작해 자기 영향
권하에 있는 회사들에 특혜를 주는 수법으로 대규모의 수입을 올렸다.
이후락 재임 이전에 시작된 중정의 공작으로서 그의 재임 기간중 더욱 가속화한 것이 주한미군
군수품 조달에 대한 개입이다. 73년의 미 행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군수물자 조달을
감독하고 청부업자들을 관리하여 중앙정보부에 대한 상납을 독려할 목적으로 상공부 내에 분실을 설치했다고 한다.
또한 이후락 중앙정보부는 '블랙 백(black bag) 공작'에 개입했다. 이것은 중앙정보부가 국제적
환전상인 딕 사(Deak & Co)를 통해 거액의 달러를 검은 가방에 넣어 청와대로 수송한 작전이다.
73년 9월 한 미국 기업이 하와이의 딕 사 구좌에 2만 불을 예치했는데, 그 자금은 한국대리인(
한국기계제작회사)의 요구에 따라 미국 기업이 지불한 커미션의 일부였다. 한국 대리인은 문제의
미국 기업에 정일권에게 5천 불, 당시 미국에 상주하던 한국 관리 이상격에게 1만 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딕 사는 자사 명의 구좌의 돈을 찾아 검은 가방에 담아 지정인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락의 중정부장 재직시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보았다. 박동선과 슐 아이젠버그가 그 중 대표적
인 사람들이다. 아이젠버그는 자유당 때부터 한국 재계에 깊숙이 침투해 온 이스라엘 출신 유태계 무기상이다. 그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 때 일본 가마쿠라 지방으로 피신했는데, 그 때 그를 구해 준 일본 여인과 결혼해 동양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유당시절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차린 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접근해 충주비료공장 건설권을 따내는 등 한국의 정.재계에 깊숙이 침투했고,
나아가 자유당에 3.15 부정선거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5.16 이후 포항제철 건설 과정에서 컨소시엄을 형성할 때 한.일 간에 문제가 생기자 아이젠버그는 장기영을 통해 유럽 투자가들을 알선해 유럽 금융시장의 자금을 한국에 끌어들익기도 했다.
미 대사인 필립 하비브는 미국 기업들과 뇌물 거래를 했던 아이젠버그의 전력을 들어 그와의 거래를 피하라고 경고했으나, 박정희는 73년 초, 한국 기업의 사업자금 조달처인 아이젠버그의 편의를 봐 주라고 한국 정부에 지시했다. 60년대 초 미국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이 실현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을 때 아이젠버그가 필요한 자금을 대주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박정희의 지시로 한국 정부는 아이젠버그가 대리인으로 있던 캐나다의 캔두(CANDU) 핵원자로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덕분에 아이젠버그는 캔두 판매 커미션으로 2백만 불을 챙겼다. 김종필과 전 대통령 비서실장 민충식은 아이젠버그의 커미션에서 일부를 뇌물로 받았다. 그 후 캔두 판매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자체조사로 이 사실이 드러나 75년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과 한국전력 사장이었던 민충식이 해임 되었다.
한편,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된 직후 박정희의 이른바 '가지치기'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후락은
73년 12월 3일 영국을 거쳐 바하마로 피신했다. 그 후 이후락은 형사처벌이나 기타 신체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박정희의 친필서신을 받은 후인 74년 2월에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들 이동훈은 청문회 증언에서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해임된 것은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중앙정보부의 부정부패 때문이 아니라, 커 가는 이후락 세력에 대한 박 대통령의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락의 측근 중 한 사람이 모 요정에서 벌어진 기생파티에서 '이제 그만 박 대통령이 물러나고 이후락이 그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에 의해 녹음되어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고 말했다.
이동훈은 또한 "73년 이후락이 해임된 후 권력의 중심은 이동했지만 부패 관행은 계속되었다. 신임 신직수 부장에 의해 중앙정보부의 활동이 가차없이 축소된 반면, 경호실의 비호하에 부패는 지속되었다. 미 행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74년 5월까지 청와대측은 기업활동에 개입한 박종규의 미심쩍은 행적에 대해 두 번이나 경고한 것으로 되어있다.
74년 8월 육여사가 피살된 후 박종규는 사임했다. 71년 오치성 항명 파동 이후 박정희로부터 버림받고 술로 날을 보내던 김성곤이 75년 말 사망했고, 비슷한 시기에 국무총리 김종필이 해임되었다. 이로써 이전 15년간 주요 정치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한 박 정권의 중간보스들은 모두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김종필은 여전히 막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캐두 원자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와 박정희 사이는 불화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이후락의 경우는 달랐다. 78년 이동훈은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 증언에서 "아버지는 74년
2월 귀국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박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시기는 청와대가 '권력과 부패의 구심점이 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정보와 자료가 결국에는 청와대로 향했고, 이를 바탕으로 청와대가 모든 돈을 거두어들였다. 기업가들이 사업을
하려면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이 들었다.
미 행정부 보고서는 "이 시기에 한국 정부는 하급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가혹하게 처벌했지만, 경제정책 결정과 그에 다른 정치자금의 청와대 집중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78년에는 오직 박정희만이 한국 정부 내의 유일한 정책 결정자였다"고 평가했다.
프레이저소위원회는 미국 기업의 한국 정부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과
거래하는 1백 35개 미국 기업에 질의서를 보냈다. 그 중 1백10개의 기업들이 조사에 응했는데,
그 가운데 48개 기업이 한국과의 거래에서 정치.경제적으로 문제가 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미국 기업들은 소위원회에 대한 답변에서 "한국 정부인사 혹은 그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미국 기업을 정치자금원으로 간주하고 접근했다"고 밝혔다. 그들 한국인들은 공화당에 대한 직접적인 기부(야당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은 보고된 바 없었다)나 한국 정부의 관리. 대리인. 정치자금
모금책에 대한 자금제공이나 뇌물 공여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 기업이 한국 정부로부터 정치자금을 요구받을 때 한국 정부의 핵심인사로부터 직접 요구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이후락만은 직접 두 미국 기업에 정치자금을 요구했고, 그 기업들은 모두 요구에 응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정치자금 모금책의 측근이 미국 기업에 접근했다. 상당수 기업들이 이후락,
정일권, 김성곤, 김종필의 측근으로부터 자금을 요구받았다. 콜트(Colt)사는 71년 대통령 선거시,
박종규의 수석보좌관이었던 미키 김(Mickkey Kim, 김운용 IOC위원)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요청받
았다. 김운용은 콜트 사 대표에게 "박종규가 나에게 자금을 요구하라고 지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사 고문의 조언에 따라 콜트 사는 그 요청을 거절했다. 또 다른 기업은 김동조 주미대사
로부터 한 미국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에 자금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받았다. 그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위원회가 미국 선거법에 따라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자금 제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글라스 항공사(Douglas Aircraft)는 한국 정부로부터 항공기의 대한 판매를 보장받기
위해 부총리 장기영을 통해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이 회사는 또 6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두 명의
한국 정부관리에게 7만 불 이상을 제공했는데, 이 돈은 공화당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프레이저소위원회와 행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71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미국 기업들은 공화당의 대리인이나 자신들의 사업 파트를 통해 총 8백 50만 불을 공화당에 제공했다. 8백 50만 불 중 걸프사가 3백만 불, 칼텍스가 4백만 불(1백만 불은 차관 조로 3백만 불은 선불 조로)을 한국 파트너를
통해 지불했으며, 세 개의 다른 미국 기업 한국 대리인들이 선거 3주 전쯤 총 1백 50만 불의 커미션을 받았는데 이 자금의 최종 수령자는 공화당인 것으로 보인다.
신민당 후보 김대중이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8% 미만의 표차로 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같은 대규모 정치자금 제공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 기업이 제공한 정치자금이 71년 대통령 선거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는지를 정확히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8백 50만 불이 다른 자금원에서 나온 정치자금과 함께 대중에 살포되는 상황은 김대중과 박정희의 득표차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8백 50만 불이란 수치는 단지 프레이저소위원회가 확인할 수 있었던 액수일 따름이다. 예컨데 한미 합작회사의 한국측이 공화당에 제공한 정치자금이 얼마나 되는지는 프레이저위원회나 미 행정부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사항이다.
프레이저위원회가 조사한 두 미국 기업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사례를 살펴보자
첫 번째 사례는 69년 삼선개헌 국민투표 때 발생한 것이고, 두 번째 사례는 71년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것이다.
칼텍스가 스위스 은행 이후락 관리 구좌에 정치자금 예치
70년 10월 칼텍스의 한국 합작회사인 호남정유 사장 서정귀는 칼텍스측에 "공화당이 2백만 불의 정치자금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정귀는 "공화당이 69년 3선개헌 투표 때 들어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요구가 뉴욕의 칼텍스 본사에 전달 되었으나 본사측은 "정치자금 제공은 회사 정책에 반하는 것"이라고 서울대표부에 통고했다.
그러자 호남정유 경영진은 1백만 불 상당의 자금을 원화로 공화당에 제공했다. 후에 칼텍스측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한국 내 정부 및 공적 관계에 대한 책임은 한국측이 맡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남정유의 자금제공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만일 호남 정유가 공화당에 1백만 불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대략 50만 불이 배당금으로
분배되었을 것이다. 칼텍스 사는 계약상 어떠한 경우에도 첫 배당금 중 33만 불과 잔여 배당금 중
20%를 받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1백만 불 제공으로 칼텍스측은 총 36만 4천 불의 손해를 본
셈이었다. 프레이저위원회는 그 액수를 칼텍스가 공화당에 제공한 간접적인 정치자금으로 간주
했다.
그런데 71년 초 서정귀는 칼텍스측에 다시 한 번 "공화당이 다가오는 대선을 위한 정치자금 1백만 불 제공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서정귀는 "호남정유의 현금 유통 문제로 그 자금이 국외에서 달러화로 지불되어야 한다"고 못박으면서 칼텍스측에 1백만 불의 대부를 요청했다. 그는 칼텍스측에 이 돈을 스위스은행에 있는 파나마 국적의 '아시아무역회사' 구좌에 이체시켜 달라고 했는데, 71년 3월 15일 이 돈이 이체되었다.
서정귀가 미국 기업으로 하여금 스위스은행에 정치자금을 예치하게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
었다. 69년 9월, 걸프 사는 서정귀가 소유한 기업의 주식 2백만 불어치를 매입한 후 그 대금 중 20
만 불을 스위스은행 구좌에 서정귀 명의로 예치했다. 그런데 그 거래에서 서정귀가 입회한 가운데 이후락이 은행 신용카드에 서명했고, 이후 잔액명세서는 이후락의 사위 정화섭에게 우송 되었다.
20만 불이 궁극적으로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프레이저위원회가 이 모든 은행
기록을 찾아내 제시하자, 이후락의 아들 이동훈은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정화섭이 이후락을 위해
돈을 관리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호남정유는 72년 후반부터 74년 초까지 칼텍스가 호남정유로부터 구매한 연료용 기름값을 깍아 줌으로써 칼텍스에서 빌린 1백만 불을 갚았다. 호남정유는 그 금액에 대한 이자는 지급하지
않았다. 호남정유가 기름값을 깍아주지 않았더라면 호남정유 주주들에게 추가분으로 50만 불의
배당이 돌아갔을 것이고, 칼텍스측도 약 1백 68만 불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칼텍스는 호남정유를 통해 70년과 71년 공화당에 적어도 50만 불 이상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셈이다.
더욱이 70년 이래 두 번에 걸쳐 호남정유의 한국 주주들은 8백만 불에 달하는 선불중계료를 칼텍스가 스위스 은행 구좌에 입금하도록 하는 계약에 합의했다.
이 자금은 한국 주주들의 배당권 감소와 호남정유의 칼텍스 지분 구매권의 양도를 보상하기 위해
지불된 것이었다. 칼텍스측은 프레이저위원회에서 "우리는 그 자금이 실제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어디에 쓰이는지를 알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텍스의 한국 파트너 호남
정유가 70년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기업일 뿐 아니라 공화당에 대한 유력한 정치자금 제공 기업인 럭키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점만 봐도 사실은 명확하다.
더욱이 럭키르룹의 소유자인 구씨 형제 중 구태회는 공화당의 핵심지도부 중 일인이었다. 그는 70년부터 73년가지 공화당 당무위원이었고, 71년부터 72년까지 정책위원회 의장이었으며, 73년에는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이후 그는 유정회 정책위 의장과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럭키그룹과 공화당의 이 같은 관계나 호남정유 서정귀가 69년 20만 불을 공화당에 제공한 사실로 볼 때, 스위스은행에 예치된 8백만불 중 상당 부분이 공화당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72년 가을 한국 기업인 최기림(럭키그룹 구 씨 집안의 사위)은 미국 기업 퍼모스트 인터내셔널 사
에 한국 정부가 퍼모스트의 상품및 용역 구매를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고한 후, 퍼모스트가
판매사업을 추진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통고한 후, 퍼모스트가 판매 사업을 추진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퍼모스트는 대표를 서울에 보내 최기림 및 정부 관리들과 그 문제를 논의했다. 그런데 최기림은 2명의 퍼모스트측 간부와 협의하는 자리에서 "우선 박 대통령이 속한 정당에 정치자금을 헌납해 달라"고 요구했다. 퍼모스트측 대표는 미국으로 돌아가 본사와 협의한 후 최기림에게 "회사의 사규상 그런 조건으로는 협상을 계속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최기림은 퍼모스트측에 "만일 '지방적 규모'의 미국 기업이라면 정치자금 제공 협상에 쉽게 응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지방적 규모의 기업'은 미국 군수품 청부업자로서 한국에서 활동 중인 미국 기업 에이펙스 인터내셔널이었다. 최기림은 정치자금 제공을 쉬게 하기 위해 에이
펙스 사가 퍼모스트 사의 하청업자로서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조정했다. 결국 에이펙스 사와
퍼모스트의 일정한 계약하에 퍼모스트 사는 50만 불을 최기림에게 건네 주었고, 최기림은 이 돈을 공화당에 전달했다.
최기림과 퍼모스트 간의 협상 직후 다른 한국 기업가 엄익호가 협상에 참여했다. 퍼모스트 사의 대표는 "엄익호는 최기림의 상급자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엄익호는 한 한.미 합작기업의 부사장이었고, 당시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태완선과 절친한 사이였다. 엄익호는 퍼모스트 사 간부와 만나 한국적 윤리관에 대해 얘기하면서 "한국에서는 정치자금 헌납이 부도덕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암시했다. 그런데 퍼모스트 사는 한국측과의 공급계약 이전에 정확한 시장성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한국 정부와 최기림, 엄익호는 퍼모스트가 시장성 조사를 끝낸 후 한국과 총판계약으로는 한국에 이를 수행할 유능한 전문가가 없다고 결론짓고 이러한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느 이자계약 방식을 제안했다.
그러나 퍼모스트의 이 같은 제안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퍼모스트 대표가 74년 6얼 20일자 편지로 퍼모스트 본사에 보고한 것처럼 엄익호는 서울에서의 회의 때 "그런 조건으로는 이 프로젝트 자체가 심각한 난관에 부딪칠 것"이라며 퍼모스트 대표를 위협했다.
결국, 퍼모스트 사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관심이 있는 다른 기업을 물색했는데 미국기업 AHFI가 물망에 올랐다. 그래서 퍼모스트는 공화당의 정치자금 중개상 엄익호, 최기림과 AHFI 간의 만남을 주선했다.
74년 12월 AHFI 사는 최기림을 대리인으로, 에이펙스 사를 주요청부업자로 선임했다. 그와 함께 최기림과 에이펙스 사는 최기림이 에에펙스의 대리인이 되는 별도의 계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최기림은 에이펙스 사와 AHFI 사 양측으로부터 약 1백75만 달러에 달하는 커미션을 기대할 수가 있었다.
최기림은 이 커미션을 당시 서울대학병원장이자 정부 관리였던 김홍기 박사에게 어느 정도 나누어 주었다. 서울대학병원은 퍼모스트와 AHFI의 물품 및 용역을 구매하는 기관이었다. 에이펙스 사는
73년 2월 최기림과 김홍기를 위해 찰리와 피터라는 암호명을 사용해 김박사의 은밀한 역할을 기술해 놓았다.
프레이저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정부 관리들에게 제공된 자금은 AHFI 사와 에이펙스 사가
지불한 커미션으로부터 나왔다. 그 자금은 김박사에게 제공 되었고, 나머지는 경제기획원과 정부
관리들에게 제공되었다.
그뿐 아니라 최기림이 사용한 비용 중 50만 불도 문제다. 이 돈은 AHFI 사로부터 나온 커미션으로, 에이펙스 사 간부의 은행 구좌를 거쳐 한국과 미국에 있는 제3자의 구좌로 위장되거나 최기림의
구좌에서 현금으로 인출되었다.
이 돈 중 엄익호에게 최소한 3만 불, 프레이저위원회가 입수한 당시의 거래 수표에 등장하는 '이름
을 판독하기 어려운 인물'에게 18만 불이 돌아갔고, 33만 불은 에이펙스 사 간부의 은행구좌를 통해 구범(?)에게 전달되었다. 구범은 럭키그룹 창업주 구종회의 아들이다. 구범의 삼촌 두 명이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이었고, 그 중 특해 구태회는 당 지도부 인사였다. 최기림의 구좌에서 인출된 현금이 공화당으로 전달되었슴은 이와 같은 인맥 관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기업이 미국 기업의 상품 및 용역을 구매할 때 한국 정부는 가격 할인 및 상납을 통해 정치자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런 일은 항공, 곡물, 선박, 가발, 유류 관련 생산품및 용역산업 등에서 특히
성행했다.
가장 좋은 예가 석유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석유 및 석유화학 제품의 최고 가격은 한국 정부가 통제했다. 70년대 후반 국방부 관리들은 걸프와 칼텍스 사의 한국측 파트너에게 국방부에 판매할 기름 가격을 인상하도록 요청했다.
그런데 걸프와 칼텍스가 제시한 가격과 인상된 최종판매가의 차액은 국방부에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국방부는 그 자금이 군인 및 그 가족들을 위해 사용될 것이며 한국의 모든 기업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칼텍스와 걸프 사는 처음에는 이를 거부하다가 결국 받아들였다. 프레이저소위원회에 따르면, 71년부터 75년까지 이런 식으로 조성된 차액이 약 75만 불에 달한다.
비록 그런 거래를 주도한 것이 국방부 관리였지만 그것은 명백히 불법 행위였다. 국방부측이 기름 구입 차액을 어디에 썼든, 그것은 예산안을 승인하는 국회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더욱이
비싼 기름값 때문에 한국의 국방예산은 실제보다 부풀려졌는데 이 때문에 한국 국회와 미국 군사
정책 입안가들은 한국 국방비의 실제수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카길 사의 방계회사인 호엔버그 브라더스 사가 한국의 대한농산과 한 면화판매 거래도 정치자금
조성과 관련해 주목된다. 그 거래에는 대한 농산의 뉴욕 지사가 개입됐다. 카길이 한국의 대한 농산에 면화를 판매했을 때, 대리인인 뉴욕의 대한농산은 거기서 발생하는 커미션 지불을 카길측에 요구했다. 이에 따라 카길측은 대리인에게 몇%, 대한 농산에 몇 %, 그리고 '미국에 있는 다른 관련업체'에 몇 %씩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카길측은 프레이저위원회에 대한 답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국측 구매 대리인은 면화 가격을 높이 책정하라고 종종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한국의 대한
농산에서 나왔으며, 그러한 과잉가격 책정에서 나오는 이윤은 커미션 등의 형식으로 한국 내의
다른 곳에 지불되는 듯 했다."
면화 가격 차액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우리는 당시 대한농산이 중정부장 이후락의 영향권하에 있는 기업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한농산은 중앙정보부가 미국 학계와 교포학자들 사이에 친박정희 세력을 조성할 목적으로 강영훈을 내세워 설립한 전위조직인 한국문제연구소의 재정 기부자였다.
더욱이 70년대 초반 이후락과 김성곤의 압력으로 대한농산은 쌀 수입 커미션 중 1백 50만 불 이상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다.
이 밖에도 프레이저위원회는 유태인 무기상 슐 아이젠버그가 수년간 한국 정부의 최고위층에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아이젠버그는 계약 성사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만 한 청와대 보좌관들에게 계약액의 25%에 달하는 커미션을 지불하고 계약을 따냈다는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 아이젠
버그는 공화당과 고위 관리들에게 차관, 증여, 상납금 조로 5백만 불 이상을 지불했다고 한다.
또한 캘리포니아의 유니언 오일(Union Oil) 사는 "우리 회사의 한국 합작회사인 경인에너지의 주식 50%를 소유한 C.H. 김(김종희 한국화약 회장)에게 우리는 때때로 대여, 선수금, 그리고 다른 자금 등을 지불했다"고 프레이저위원회에 보고했다.
김종희(일명 다이너마이트 김)는 이후락의 친구이자 사돈이다. 73년 후반부터 74년 초반에 걸쳐
김종희는 박정희와 박종규에게 이후락이 아무런 보복도 받지 앟고 귀국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탄원
했다. 김종희와 그의 형제 김종식 및 그의 회사, 한국화약은 이후락의 중정부장 재직시 미국에서의 중정 공작에 적극 참여했다. 김종식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학국교포 단체였던 남캘리포니아
한인회에서 지명도가 높았는데, 이후락의 사위이자 전 중앙정보부 2국장 정화섭의 공작을 지원
했다. 김종식과 정화섭은 반 박정희 인사를 한인회 회장직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런 유의 활동은 73년 중앙정보부와 한국 외무부에서 작성한 '한국교민 지도지침'이란 문서에 나
타나 있다. 김종식은 또 한미정치협회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는데, 그 협회는 문선명 교단과 한국 정부 관리들이 개인적, 재정적으로 깊숙이 개입하고 있던 단체였다.
한국화약은 중앙정보부 전위조직인 강영훈의 한국문제연구소에 중앙정보부 및 타 기관들이 기부한 총 27만 달러 중 2만 달러를 냈다. 이는 유니언 오일 사가 김종희와 한국화약에 제공한 자금이 미국에서 중앙정보부 공작에 사용되었슴을 잘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