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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 김정호 목사
아마도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설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라는 주제일 것이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너무 많이 들어 이제는 짜증이 날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마도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지만 가장 실천하지 않는 설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는 설교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마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는 설교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루어지겠지.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나를 이끌어 가실거야.’하는 소극적 태도를 취합니다. 아마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는 설교를 듣고 정말 그렇게 살기를 작정한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제멋대로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마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절대로 감추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끔 하나님께서 이해 안 되는 일을 시키시는 경우에도 지나고 나면 아하! 하고 깨닫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안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기심과 불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아람 왕 벤하닷은 엘리사를 잡으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또 다른 군사를 모아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에워쌌습니다. 이 때문에 사마리아 성은 혹독한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여인들이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는 참극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 여호람을 향하여 하루만 지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예언을 믿으려 드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뜻밖에도 성 밖으로 추방되었던 나병환자들로 말미암아 엘리사의 예언을 확인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나병환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나병환자들이 ‘오늘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아름다운 소식을 모두에게 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본문 3절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율법에 따르면 나병환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존재라 하여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성 밖에서 친지들이 공급해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육지를 떠나 소록도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성 안의 건강한 사람들도 목구멍에 풀칠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나병환자들에게 음식 공급이 단절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나병에 걸린다는 것은 큰 비극입니다.
한 번 나병에 걸리면 거의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환자로 살다가 인간답게 실지도 못하고 인간다운 대접도 못 받고 초라하게 들이나 산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아프고 외롭고 춥고 배고픈 모든 고통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본문의 네 나병환자들은 아람 군사들의 포위까지 당하고 있으니 그 곤경이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총체적인 고통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의 ‘독수리와 닭’이라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어느 날 모험을 좋아하는 소년이 근처 산에서 발견한 독수리 알을 암탉이 계란을 품을 때 살짝 집어넣었습니다. 드디어 병아리도 독수리도 알에서 깨어났습니다. 이 독수리 새끼는 자기가 병아리라고 생각하며 병아리와 똑같이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독수리 하나가 닭장 상공을 날아 멋지게 맴돌다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독수리 새끼가 자세히 보니 자신과 너무 닮았습니다. 그 독수리 새끼는 ‘야 나하고 닮았지 않았느냐? 나는 지금까지 병아리하고 왜 안 닮았나 생각했는데 저 공중에 나는 저 어마어마한 새하고 나하고 닮았구나.’라고 생각하며 비로소 자신의 참된 자화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닭장을 벗어나 푸른 창공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옛사람이 아닙니다. 옛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살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모습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자화상을 항상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개들도 자녀의 사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할 때에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이 말을 했으므로 네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느니라’는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자기의 변화된 자화상을 입술로 늘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자화상을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기억하고 우리는 늘 주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며 그 은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새로운 자화상에 반대되는 생각이나 느낌이나 환경은 단호히 대적하고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정체불명의 사람이 아니라 정체가 확실한 사람이 되었다’라며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생각이나 일이 다가오면 단호하게 서서 예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내 신분을 확실하게 붙잡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마음 판에 자기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 모습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만일 그 자화상이 부정적이고 열등하며 패배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대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화상이 소망차고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모습이면 또한 그렇게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
리 삶의 성공과 실패가 우리의 외면적인 모습이 아닌 내면적인 자화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네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더럽고 추한 죄인이었으나 이제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살아가는 구원의 정체성이 분명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4절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네 나병환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적군에게 항복하는 길이 낫다고 생각해서 항복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판사판이고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을 선택한 것입니다. 항복해서 살려 주면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녹슬어 죽기 보다는 닳아서 죽겠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람 진영에 가 본즉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에게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 왕이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군대를 동원한 것으로 상상하여 모든 금과 은과 의복과 말과 나귀와 모든 것을 두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한 시골의 할머니가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키웠는데 이 아들도 이 할머니의 정성을 아는지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서 판사가 되었습니다. 힘든 농사일을 하며 판사 아들을 키워낸 노모는 밥을 한 끼 굶어도 배가 부른 것 같고 잠을 청하다가도 아들 생각에 가슴 뿌듯함이 넘쳐나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노모가 한 해 동안 지은 농사걷이를 이고 지고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아들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마침 아들 며느리는 없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판사이기도 하지만 며느리는 부잣집 딸이었습니다. 이 덕택에 신기하기만한 살림살이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집안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안방에서 뜻밖의 물건을 보게 되었는데 그 물건은 바로 가계부였습니다. 부잣집 딸이라 가계부를 쓰리라 생각도 못했는데 며느리가 쓰고 있는 가계부를 보고 감격을 하고는 그 안을 들여다보니 각종 세금이며 부식비, 의류비 등 촘촘히 써내려간 며느리의 살림살이에 또 한 번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조목조목 나열한 지출 내용 가운데 ‘촌년 10만원’이란 항목이 있었습니다. “아니? 무엇을 샀기에 이렇게 쓰여 있나?”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1년 12달 한 달도 빼놓지 않고 같은 날짜에 돈이 지출 됐고 그날이 바로 자신에게 용돈을 보내준 날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죄인 된 기분으로 도망치듯 아들의 집을 나와 시골길에 올랐습니다.
화가 나서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은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 왜 안주무시고 그냥 가셨어요?”
그러자 노모는 가슴에 품었던 마음을 터트렸습니다. “아니 왜! 촌년이 거기 어디서 자!!”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들은 “어머니 무슨 말씀을?”하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 나보고 묻지 말고 너의 방 책꽂이에 있는 가계부한테 물어봐라. 잘 알게다”며 수화기를 내 팽개치듯 끊어 버렸고 아들은 가계부를 펼쳐 보고 그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내와 싸우자니 소문이 날거고 때리자니 폭력이라 판사의 양심에 안 되고 사태 수습을 위한 대책마련으로 몇날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쁘단 핑계로 아내와 친정 나들이를 뒤로 미루던 남편이 아내에게 처갓집을 다녀오자고 했습니다. 처갓집을 다녀오자는 말에 아내는 신바람이 나서 선물 보따리며 온갖 채비를 다합니다. 길 내내 너무도 신이 나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의 마음은 더욱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처갓집에 도착해 아내와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모두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마당에 서 있었는데 장모님이 “아니 우리 판사 사위는 왜 안 들어오는가?”하며 쫓아 나왔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촌년 아들이 왔습니다.
촌년 아들이 감히 이런 부잣집에 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차를 돌려 가버리고 말았는데 그날 밤, 시어머니 촌년의 집에는 사돈 두 내외와 며느리가 납작 엎드려 죽을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달라며 빌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다음 달부터 며느리 가계부엔 촌년 10만원은 온 데 간 데 없고 ‘시어머니의 용돈 50만원’이란 항목이 며느리의 가계부에 자리했습니다.
부모님의 허물을 들추어내려면 한없습니다.
자녀보다 못한 시대에 교육도 못 받고 사신 분들이 아닙니까? 자녀 교육시키느라 자신의 몸단장도 못하신 분들입니다. 어찌 자녀들보다 똑똑하며 어찌 자녀들보다 아름답겠습니까? 그러나 이 무능함과 이 추함이 다 자녀를 위한 것들 때문이 아닌가요? 시어머니들!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 모두 용기를 냅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아도 툭툭, 훌훌 다 털고 일어납시다. 네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용기를 냅시다. 반드시 아름다운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용기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본문 9-10절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가서 성읍 문지기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서 보니 거기에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하는지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의 손가락 하나 움직이게 하지 않고서 강대한 아람 군사들을 몰아내어 버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에만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처음에는 먹고 마시고 은과 금과 의복을 감추고 또 감추었습니다. 욕심을 채웠습니다. 그러다가 이 아름다운 소식을 침묵하면 벌이 임한다고 생각하여 왕궁으로 날이 밝기 전에 뛰어가 아름다운 생명의 소식을 전하여 나병환자들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성의 모든 백성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생명의 소식을 전하면 모두가 삽니다.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치고 모두 죽게 됩니다. 나병환자들은 욕심과 상처와 아픔도 참고 달려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복음 전파는 모든 것을 넘어야 합니다. 성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어떤 청년이 차 사고로 인하여 큰 충격을 받아서 그만 두 눈, 안구를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게 될 때 의사는 말했습니다.
“자네가 너무 출혈이 심하기 때문에 수술을 하겠지만 어차피 안구가 다 빠져나가서 눈을 볼 수는 없을 것일세.”하고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장님으로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지” 그런고로 나 수술하지 말아달라고 이대로 죽을 것이라고 바락바락 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 사람아, 생명은 소중한 것이야.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지.” 그리고 강제로 붙들고 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며칠 후에 붕대를 풀게 될 때 의사는 말했습니다. “축하하네. 자네는 분명히 실명을 했지만 자네를 위해서 안구를 기증해 주는 분이 있어 눈 하나는 볼 수 있을 것 같네. 축하하네.” 그랬습니다. 또 소리 질렀습니다. “자네를 위해서 멀쩡한 눈을 빼준 고마운 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네. 무슨 망령된 발악인가?” 그러며 붕대를 풀어주었습니다. 뿌옇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점 점 점 밝게 환하게 보이는 데 눈앞에 서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청년은 여기서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저는 한평생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감사한 이 감격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거저 받았습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여러 가지 인간적인 성에 갇히어서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뛰어가서 전해야 합니다. 전하면 모두가 삽니다. 미루지 말고 지금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십시오. 선교사나 70인 전도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나병환자들은 버림받은 사람이었으나 용기가 있었고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모두에게 전하며 사는 이 시대의 선교사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