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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샬 롬
에베소교회와 사랑의 비밀 (계 2:1-7)
[역사적 배경]
에베소의 위치는 현재 티르키예(터키)로서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역의 중심지로서 소아시아에서 제일 부유한 도시요, 종교적으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Artemis) 여신상이 있었고 황제숭배가 행해지던 부도덕한 곳이었습니다(행 29장). 정치적으로는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치기관이 있었으므로 명목상 '버가모'가 소아시아의 수도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에베소가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에베소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또한 바울이 이 에베소 지역에 2년간 머무르며 목회하였고 후에 디모데가 바울의 열심을 본받아 활동함으로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어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행19장, 딤전1:3).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에베소로 건너와 이 지방의 감독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였지만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기를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사랑과 능력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의 영적상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계 2:1-7)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처음 사랑이라는 용어는 본문에서만 발견되는 용어로 일반적인 사랑과는 다릅니다. 여기 처음 사랑을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의 순수한 열정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처음 체험했을 때의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볼 것인지 의견이 갈리지만 후자의 견해가 가장 타당합니다. 그것은 처음 신앙을 가질 때 모두가 동일한 뜨거움을 가진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외형적으로는 정상적인 모습을 유지한 걸 볼 때 이웃을 위한 봉사 역시 중단되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잃은 사랑은 다름 아닌 감격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첫사랑의 감격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을 잃었다는 것은 충만한 은혜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란 은혜를 크게 체험할 때 예수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고, 예수를 위해 그 무엇도 아깝지 않고, 예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행20:36-38에 에베소 교회가 바울에게 한 그 사랑처럼 하나님께 대한 감격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 감격은 주의 종들과 이웃 사랑으로도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과 감격스러운 관계 속에 사는 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요, 죄인을 구원하신 영원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잃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1. 믿음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2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한 마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약2:14-26). 사랑할 때 그 믿음도 온전해집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롬13:10), 온전하게 하는 비밀이요(골3:14), 장성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고전13:11).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의 감격을 잃어도 외형적으로는 문제가 없고 여전히 정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이 되어 의무적으로 다가옵니다.
2. 정통신앙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2절 하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에베소교회가 거짓을 분별할 만큼 바른 진리에 서 있었을 뿐 아니라 말씀의 실력도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주님에 대한 감격이 없다면 그 바른 말씀으로도 은혜를 끼칠 수 없습니다(고전13:1-3). 성령의 감동 가운데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목자의 음성으로 들려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헌신과 충성도 의미가 없습니다.
3절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당시 에베소교회는 많은 박해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서기 64년 사도 바울의 순교와 사도 요한의 밧모섬 유배 등 에베소교회는 죽음을 불사하고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선교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과 요한이 담임했던 역사상 가장 완벽하리만큼 위대한 교회인데 처음 사랑을 잃음으로 폐기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어떻게 처음 사랑을 회복할까요?
1. 문제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4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책망이 없었다면 문제없는 것로 착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잘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문제점을 요한에게 주신 편지를 통해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통해서 깨달으면 가장 좋지만 보조적 은사로 예언이 있습니다(고전14:24-25, 31).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말씀도 일종의 예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언도 예배순서 중 하나였지만(고전14:6, 26), 그러나 오늘날의 예언은 그 임무인 영적지도에서(고전14:3) 벗어나 무당식 실용주의로 타락하거나, 깨끗한 영과 충분한 경험을 소유한 은사자가 많지 않아 실수하는 등 건실한 예언자를 만나보기가 어렵습니다. 건실한 예언자를 만난다는 것은 대단히 복된 일입니다. 슬픈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당식 예언자는 인기가 있어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건실한 예언자에게는 바른 신앙을 갈망하는 사람들 외에는 인기가 없습니다. 반듯한 예언은사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지체의 도움을 받아 속히 깨닫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2. 그 원인을 추적해야 합니다.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사랑을 잃은 그 원인을 가르쳐 주시지 않고 그 원인을 살피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신 2-3절에서 그들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활동으로 볼 때 마르다처럼 주의 일에 너무 특심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너무 분주하여 주님 앞에 엎드릴 시간이 없다면 첫째 가는 목적을 잃은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경우 성령운동에서 제자교육으로 갈아탔는데 그 때부터 부흥의 불길은 한국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들이 성령운동이나 제자교육을 신앙의 관점이 아닌 교회성장을 위한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제자교육하는 교회들이 외형적으로 급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운동이 일어난 것은 좋지만 예수님의 삶을 본 받자는 제자교육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공부하는 모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일화이지만 제자교육운동을 시작한 모델교회의 최대의 고민이 왜 우리는 뜨겁지 않을까였다고 합니다. 이 계시록 강해 역시 예수님의 제자교육의 본래 의도를 떠나 성경공부로 끝난다면 귀만 커질 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걸 방지 하기 위해 실천강령 중 하나로 최소한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코로나로 시작된 영상예배 역시 간식이지 정식은 아닙니다. 처음 사랑의 감격을 잃었다면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은혜의 삶에 힘써야 합니다.
5절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행위는 처음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즉 율법적 행위가 아닌 은혜의 방편(방법)을 가리킵니다. 은혜의 방법은 말씀 기도 찬송 교제 순종 사랑 성례 사명 등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이 방편을 고집적으로 적용할 때 은혜가 임합니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시작된 요한웨슬리의 부흥운동도 규칙쟁이 즉 메도디스트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생활을 철저히 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나중 예수 안에서 이루신 그 복음을 충분히 이해함으로 완전해졌지만 부흥의 주축은 기도였습니다. 처음 사랑은 성령의 은혜로 다가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약해지지 않아야 합니다.
4. 주님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5절 하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는 교회입니다. 이처럼 성령에 무관심하면 부흥은 멈춥니다. 교회가 사라집니다. 교회가 있어도 주님은 ‘이것은 내 교회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계2:1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로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에서 에베소 교회의 영적상태와 주님의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주의 종들은 능력을 잃어버렸고, 하나님께서 함께 동거 동행하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부흥의 역사는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안디옥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렇게 계속 서진하며 달려가고 있는데 한국에 머문 시간이 짧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하신 그 말씀처럼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그만큼 갈망을 속히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옛날처럼 철야기도 새벽기도 부흥회 기도원까지 다시 회복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5. 작은 불씨라도 살리시기 바랍니다.
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감사한 것은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아주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의 향수를 잊지 못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이단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니골라당은 영원한 속죄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죄를 짓고 살아도 된다는 짐짓죄를 범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에 대한 감격을 잃었어도 그건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었어도 자유주의나 종교다원주의나 사이비이단이나 타종교나 신앙을 위축시키는 악법이나 공산주의가 독버섯처럼 퍼져가는 것을 염려하며 부르짖는 성도들이 있는 것은 아직 주님을 사랑하는 그 불씨만은 남았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에 절대로 동조할 수 없습니다. 어려움을 주시는 것도 이 불씨를 살리라는 메시지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6. 이겨야 합니다.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여기 처음 사랑을 강조하신 에베소교회에 생명나무의 열매를 약속하신 것은 사랑의 열매는 생명나무의 열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입법자와 심판자가 되어 선과 악을 따지는 율법의 나무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납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자신부터 일깨우시기 바랍니다. 다른 시간은 있어도 하나님께 드릴 시간이 없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보다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7. 은혜 받으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는데도 따라가겠다고 맹세하던 제자들이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다시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배반한 그들을 찾아가셔서 만나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첫 만남의 장소인 갈릴리 바닷가에서 찾아가셔서 처음 만났을 때 일을 재현하시며 함께 식사하시며 함께 동화되신 후 베드로에게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인 시몬의 이름을 부르시며 나를 사랑하느냐.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번이나 반복하신 것은 뭔가 확증을 심으시려는 것입니다. 옛날 주님을 사랑하던 베드로의 마음을 상기시키시며, 사랑한다. 용서한다. 다시 시작하라는 의미입니다. 3번이나 하실 때는 온전히 신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실 것까지 말씀하셨는데 네가 나를 위해 죽기까지 수고할 것이니 미안해 하지 말라고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까요?
끝으로 은퇴하여 허무한 노년기를 보내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보면 노년기는 최고의 전성기입니다. 야곱이 12지파를 축복했듯 자기 믿음과 영성이 가장 무르익은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노년기에 썼고, 바울도 마지막까지 관제와 같이 부어지기를 원했습니다. 70세 은퇴만 하면 버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고 은퇴한 본인들도 모든 것을 놓음으로 빠른 속도로 퇴화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노인들을 동력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노인을 귀히 여기고 건강의 비밀을 개발하여 젊고 건강한 모습으로 그 영성을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예수를 만나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랑은 성령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을 놓쳤기에 감격을 잃은 것입니다. 영적생활에서 감격을 잃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을 더 가까이 함으로 처음 사랑 다시 찾아 주님이 우리와 함께 동거 동행하시고 주님의 손에 붙들림 받는 자 되기 위해 무너진 제단 다시 쌓으며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