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4일 화요일 맑음. 3도 영하 3도
<최춘해 회장님 별세>
오늘 아침 7시에 윤별하 선생님이 혜암아동문하회 회장 자격으로 <근조> 소식을 전해왔다. 최춘해 선생님이 어제 별세하셨단다. 가슴이 먹먹했다. 평소 편찮으시다는 말씀을 한 번도 못 들은 터라 더 충격이 커서 몸이 벌벌 떨렸다. ‘이렇게 가볍게 떠날 수 있다니….’
근조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오늘 14일 12시에 입실, 15일 입관, 16일 발인이다.
차차 정신을 차리고 내가 우선 할 일들을 챙겨보았다.
1. 경북아동문학회 이름으로 조화를 근정하자고 김위향 총무님께 연락드리는 일
2. 조문 갈 회원선생님들에게 카톡방에 일시 알릴 일.
그래서 카톡방에 근조(謹弔) 메일을 올렸더니 윤태규, 이호철, 김영길, 김진문, 오승강, 오세관, 김일광, 임우희 선생님이 한마디씩 인사를 올렸다. 입실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뭘까? 어제 돌아가셔서 오늘 입실하면 오늘 조문객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일까? 윤별하 선생님께 전화해 물었더니 오늘 조문이 가능하단다. 정순오 선생님께 전화했더니 혜암아돔문학회원들은 오늘 2시에 조문을 하기로 했단다. 그래서 우리 문학회원들도 2시에 함께 모여 조문하기로 하고 카톡방에 ‘함께 조문하실 분은 파티마병원 장례식장 로비에 2시에 모이자는 메시지를 올렸다. 그리고 윤태규 회장님에게 전화했더니 서정오 선생님께 전화해 보겠단다. 이호철 선생님은 오늘. 내일 이틀간 서울 병원에 다녀오겠단다. 이선영 선생님도 전화했더니 처음에는 같이 가자고 하시더니, 전번에 갈비뼈 다친 것 때문에 병중인데 일어나 앉으니 어지러워서 민폐가 될 것 같다며 포기하셨다. 매사 행사에 열심인 분이신데 얼마나 아프면 포기하실까? 그래서 나 혼자 윤 회장님 차를 얻어 타고 병원으로 가면서 경북아동문학회 40집 특집 방향과 혜암 선생님 이야기를 나누며 회의 같은 의논을 하였다. 이번 경북아동문학회 40집 특집에는 최춘해 회장님 추모 특집을 함께 넣어야겠다.
혜암선생님은 교직 퇴직 후부터 아동문학계 후진 양성을 위해 무료 아동문학 수업을 평생 해오셨다. 그런 일이야 나부터 꿈꿔온 일이지만, 선생님은 퇴직 후 당장 실천에 옮겨 돌아가실 때까지 20년간 20명씩 키웠다해도 양성한 제자가 400명이 넘을 것이다. 사비 2억 5천만 원도 혜암아동문학 재단에 희사해 두셨다. 그래서 어제 ‘혜암 아동문학회’ 회원들은 연락을 받고 16명이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 미리 찾아보았단다. 백수를 누릴 만큼 건강하셨지만 94세로 돌아가시니 안타까웠다. 나한테도 이오덕 선생님 돌아가신 뒤로 제일 마음 의지하고 첫 번째 스승으로 의지하고 있는 분이신데 떠나가셨다. 2시에 로비에 모인 사람은 김영길, 서정오, 윤태규, 정순오, 김현숙, 유병길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정순오. 김현숙, 유병길 선생님은 우리 회원이지만 혜암아동문학회원으로 인연이 더 깊다 보니 그쪽으로 섞였다. 들어가면서 보니 식장 앞에 놓인 근조 화분이 셀 수 없도록 많이 서 있었다. 선생님이 평소 사람들에게 따스하게 나눠 오신 온기가 근조 리본에 이름으로 새겨져 되돌아와 고즈녘히 담겨 있었다. 김영길, 윤태규, 서정오, 박경선은 근조 화환들을 스쳐 지나 상주를 보러갔다. 김영길 회장님이 앞장서는 바람에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어 마음 든든하게 의지가 되었다. 김영길 회장님이 서서 조문을 드리자고 해서 영정사진 앞에 놓인 국화꽃을 한 송이씩 영정 사진 앞에 놓고 묵상하듯 절을 하였다. 최 회장님 아드님이 조문객을 맞이했다. 폐렴을 앓다가 폐에 섬유질이 많아져서 돌아가셨단다. 조문을 드리고 나오면서 보니 영정 사진을 올린 단 옆에 부조함이 있어서 ’참 편리하네.‘ 싶으면서도 쓴웃음이 났다. 예전에 부조금을 훔쳐가는 사건들이 생겨서 요즘은 여기에 부조함을 놓아두는 것이리라. 우리는 각자의 부조 봉투를 부조함에 넣고 돌아서는데 최춘해 회장님 사모님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박경선 선생 아닝교?”
“어머! 사모님이 저를 알아보시다니요.”
나는 감격해서 손을 맞잡았다. 최춘해 회장님이 아동문학 평론사가 주최하는 방정환 문학상을 받을 때, 나는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양쪽 부부가 함께 서울에 올라갔다. 1993년도인데, 그때, 동행했던 사모님이 2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얼굴과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시다니. 우남희 정순오 선생님 말로는 요즘 사모님이 치매기가 있어서 사람들 얼굴을 잘 못 알아보신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멀쩡하셨고 특히 나를 기억하시니 신통방통하였다. 대구아동문학회원 김성민 선생님. 안영선 선생님, 권영욱 선생님. 우남희 선생님. 윤별하 선생님과도 한 공간을 오가며 스쳐보았다. 윤태규. 서정오, 김영길, 박경선 넷이서 식당에 앉으니 권영욱 선생님이 곁에 와 앉았다.
“권 선생님은 평소 문학기행 다닐 때도 최춘해 회장님 손잡고 부축해 다니시며 잘 챙겨드렸으니 마음이 좀 흡족하지요?”
했더니 저번 혜암아동문학회 행사 때 서울 계신 신현득, 김종상 선생님을 모셨을 때 노년의 연세라 음식은 잘 맞는가 신경이 쓰였는데 신현득 회장님이 “여기 소주 없나? 소주 가져오소.” 하는 바람에 긴장이 풀렸다고 해서 웃었다. 나는 돌아보니 최춘해 회장님 구순 때 우리 시골집에서 경북아동문학회 사람들과 구순 축하잔치를 해드린 기억이 그나마 남아 있어 자위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문학회는 회원 수도 적지만, 누가 죽더라도 네 명 이상은 참석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씁쓸하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윤 회장님께, 주위 사람들이 다쳐서 병원다니는 소식 들으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더니 ‘자동차가 낡으면 수리 해 써야 하고 수리가 되지 않으면 가는 거고 그렇지 뭐!’ 쉽게 비유했다. 맞는 말씀이지만 씁쓸했다. 집에 돌아와 남편한테 최 교장 사모님이 1993년에 본 박경선을 알아보더라고 했더니 단번에 명쾌한 답을 가르쳐 주었다.
“그야, 세상에 당신 같은 호박이 어디 또 있겠어. 그래서 알아봤을걸?”
“맞아요!”
남편의 명쾌한 해석에 손뼉을 치며 웃었다. 최 회장님 돌아가시고 이렇게 빨리 웃음을 되찾기도 쉽지 않은데, 남편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