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 : 대승불교의 바탕이 근본 불교이듯.. 근본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하겠군요.
주나 : 그렇지요. 다행인 것은 근본으로 불리는 내용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이미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다만 부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지요.().
근본 불교에 대한 이해는 새김질하듯 반복을 통해 바른 이해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 깊이는 알 수 없듯이.. 근본 불교는 넓어지는 게 아닌 깊어지는 공부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불교에 대해 말을 하려 할 때.. 근본 불교를 알고 있으면 그 다음부터 접하는 불교는 그 위에 쌓이게 됩니다.
접하면서 저 분의 말은 어디는 맞고 어디는 틀리다는 판단도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불교를 말할 수 있는 불자가 되는 것이죠.
서연 : 위 비디오에서 스님 설명을 들으면
불매인과란 분별을 하지 않는다 하여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보이는데..
분별을 하지 않으면서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나요?.
주나 : 서연님이 아는 뜻이 불매인과를 말하는 뜻과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불락인과란 내가 한 행위에 의해 내가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죠.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지은 행위에 내가 과보를 받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으니.. 인과법이 위험해지지요.
다만 아라한에 이르면 무아를 깨친 것이므로 내가 없기에 인과를 받을 자아가 없다는 입장에서 불락인과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했다는 이유로 축생의 몸을 받고 있다는 거지요.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걸까요?.
서연 : 인과에 떨어지는 자아가 없다고 말하는 순간에 생긴 자아가 있기 때문 아닐까요?.
주나 : 저 역시 그렇게 봅니다. 곧 말은 자아가 없다고 하지만.. 실은 여전히 인과 안에 자아가 있는 게 되니..
그럼 인과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은요?^^.
서연 : 인과는 틀림없이 있으나.. 어떤 과보를 받든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요?^^.
주나 : 그 말을 바꾸어 말하면 인과는 틀림없이 있지만 인과를 벗어나 있다는 게 아닙니까?.
서연 :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하게 들린데요. 그럼 근본 불교에서는 어떻게 말을 하나요?.
주나 :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고 합니다.
서연 : 인과와 업보는 무엇이 다른가요?.
주나 : 인과는 주체인 인(因)이 있는 대신에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고 할 때 업보는 인(因)처럼 분명한 주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인과법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인(因)이라고 여기는 주체는 무엇인가?.
하고 더 나아가 그대들이 믿고 있는 주체인 작자는 없다고 하는 겁니다.
<잡. 265. 포말경>에..
색(色)은 모인 물방울 같고
수(受)는 물 위의 거품 같으며
상(想)은 봄날 아지랑이 같고
모든 행(行)은 파초와 같으며
모든 식(識)과 법(法)은 허깨비와 같다고 관찰하라.
태양 종족의 존자께서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두루두루 자세히 사유(思惟)하고
바른 기억으로 잘 관찰해보면
알맹이 없고 단단하지도 않나니
거기에는 나[我]도 내 것[我所]도 없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색 뿐 아니라 수.상.행.식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프로팰러 비행기가 움직이고 있을 때 프로팰러는 둥그런 디스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디스크가 아니라 날개는 빨릴 움직여 마치 둥그런 드시크처럼 보이는 것이죠.
날개가 아닌 디스크로 보는 것은 보고 있는 자일 뿐입니다.
색.수.상.행.식을 존재로 여기는 것은 보는 자의 인식[마음]일 뿐입니다.().
그리고 <잡. 335. 제일의공경>을 보면..
335.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류수의 조우라고 하는 마을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설법하리라.
그 법의 내용은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모두 좋으며,
좋은 뜻과 좋은 맛이 담겨있는 것으로서 순수하고 한결같고 원만하고 깨끗하며 범행이 맑고 깨끗한 것이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도록 하라.
이 경은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이라고 하나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도록 하라.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리라.
어떤 것을 제일의공경이라고 하는가? 모든 비구들아,
보는 자(眼)는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보는 자(眼)는 진실이 아니건만 생겨나고, 그렇게 생겼다가는 다시 다 소멸하고 마나니,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유업보이 무작자]
이 음(陰, 작자)이 소멸하고 나면 다른 음이 이어진다.
다만 세속의 수법(數法, 俗諦)은 제외된다.
라고 하시지요.
서연님은 분별을 하지 않으면서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분별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분별하는 자아가 없을 뿐! 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유업보이나 무작자만 분명히 보고 있다면..
불락인과라고 답을 해도 여우 몸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