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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교실 스크랩 조선왕조 26대 임금/ 고종, 희
심상진 (호) 송정 추천 0 조회 7 14.02.17 18: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852(철종 3)~1919. 1. 21.
조선 제26대 왕(1863~1907 재위).
개요
 
 
 
 
고종 /고종
 
자본주의 열강이 침입하는 중에 재위했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뒤 황제라 칭했고, 광무개혁을 실시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자 했으나,
 
이 사건으로 폐위되었다.
 
1919년에 죽었는데 그의 독살설은 3·1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집권기
 
이름은 희(熙),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초자는 명부(明夫), 자는 성림(聖臨), 호는 성헌(誠軒)·주연(珠淵).
 
아버지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하응(昰應)이며,
 
어머니는 부대부인 민씨이다.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1863년 철종이 아들이 없이 죽자 안동김씨와 반목하던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즉위 후 10년간은 아버지인 대원군이 섭정했
 
다. 1865년 경복궁의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강제징수했다.
 
1866년 프랑스인 신부와 많은 천주교도들을 처벌한 사건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같은 해 7월에는 대동강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던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평양인들이 불태워버렸다.
 
1871년 지방의 농민수탈 근거지였던 서원을 47개를 제외하고는 폐쇄했다.
 
이해 4월에는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대원군정권은 대내적으로 봉건적 개혁정책을,
 
대외적으로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왕권안정 및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꾀했다.
민씨집권기
 
1873년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으로 대원군이 물러나자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정권은 왕비의 척족세력이 장악했다
 
(→ 명성황후). 1875년 강화도에서 일본 군함 운양호 포격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듬해인 1876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탈피, 대외개방정책을 취하여
 
제국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한편 안으로는 개화정책을 실시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개화정책을 관장케 하고,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는 한편,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다.
 
그러나 이런 개화정책은 1882년 구식군인과 도시빈민들의
 
무장봉기를 낳게 하고, 대원군의 재등장을 초래했다.
 
민씨정권은 청 세력을 개입시켜 봉기를 진압하고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했다.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등의 체결과 청군의 주둔으로
 
청에 더욱 예속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민씨정권 타도, 청과의 관계 단절,
 
근대 자본주의국가 수립 등을 내걸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그뒤 1894년 반제반봉건을 내세운 갑오농민전쟁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친일개화파·보수유생층의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에 집권 개화파정권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홍범14조를 제정하여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했지만,
 
반침략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채 일본에 의존한 개혁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1895년 삼국개입에 따른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살해하고 친일세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의 의병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
 
일정권은 붕괴되었다.
 
대한제국기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어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다.
 
고종은 보수세력과 일부 개화파들을 끌어들여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하에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이것은 각종 제도개혁,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 등을 실시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자주적 개혁을 지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선의 식민지화를 승인받았다. 또한 일본은 이해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박탈과 내정간섭을 본격화했다.
 
이에 고종은 1907년(광무 11)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침략의 부당성과 을사조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에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군대를 해산시켰다.
 
1910년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 죽었다. 독살설 속에 치러진 그의 장례는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저서에
 
주연집 珠淵集〉이 있다. 능은 홍릉(洪陵)이다.

 

 


 

  
고종 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과 순종.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입었던 붉은색 곤룡포 차림으로
 1890년무렵의 모습이다. 아직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기 전이라,
고종이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황룡포가 아닌 홍룡포 차림이다




고종황제와 신하들의 모습.




1910년 한일병탄 직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자리를 함께 한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과
대한제국 황족들. 앞줄 가운데 모자를 벗은 사람이 고종 황제이고, 그 오른쪽이
 순종, 고종의 왼쪽은 영친왕이고, 그 옆은 데라우치 초대 조선총독.





고종이 대한제국 초기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국한문친서.
고종은 1909년 초 국외망명을 시도할 정도로 일제의
한국침략에 강경하게 맞선 군주였다.




일본 관리들이 쓰는 모자와 의상을 입고 궁궐을 나선 고종.
왕의 행차때 사용하는 일산을 받쳐들고 있지만 어가를
매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다.
1919년 촬영.



1919년 집무를 보기 위해 겨울옷을 입고 선원정에서 인정전으로
나서고 있는 고종황제의 모습

 

 

>































러시아 공사관 내 고종 황제 거실. 황제용 더블 베드-

황태자용 싱글 베드-응접 세트가 전부였고, 옆 방에서 상궁 둘이
번갈아 기거하며 수발을 들었다.




고종이 파천해 집정할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고종황제의 후궁 양씨(1882년생, 덕혜옹주의 생모).




엄황귀비. 명성황후의 상궁으로 있다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황제를 모셨고, 이어 왕자 은(영친왕)을 낳았다. 1906년에
진명여학교를 설립, 한국 근대교육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권오창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진영.




1903년 11월 29일자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에 보도된 고종황제와 미국인 에밀리 브라운양 결혼 기사. [유일한 미국인 황후 어떻게 대관했는가]라는 제목으로 브라운양의 클로즈업된 모습과, 고종과 브라운 양이 일산(日傘)으로 가린 연(輦.임금의 수레)을 타고 궁을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한문 앞을 지나고 있는 고종황제의 국상행렬.




고종황제 국장때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고종황제 국상 전날의 대한문 앞 모습.




1921년 고종황제 제사때의 모습.

중앙이 순종황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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