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철종 3)~1919. 1. 21.
조선 제26대 왕(1863~1907 재위).
개요
자본주의 열강이 침입하는 중에 재위했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뒤 황제라 칭했고, 광무개혁을 실시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자 했으나,
이 사건으로 폐위되었다.
1919년에 죽었는데 그의 독살설은 3·1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이름은 희(熙),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초자는 명부(明夫), 자는 성림(聖臨), 호는 성헌(誠軒)·주연(珠淵).
아버지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하응(昰應)이며,
어머니는 부대부인 민씨이다.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1863년 철종이 아들이 없이 죽자 안동김씨와 반목하던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즉위 후 10년간은 아버지인 대원군이 섭정했
다. 1865년 경복궁의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강제징수했다.
1866년 프랑스인 신부와 많은 천주교도들을 처벌한 사건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같은 해 7월에는 대동강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던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평양인들이 불태워버렸다.
1871년 지방의 농민수탈 근거지였던 서원을 47개를 제외하고는 폐쇄했다.
이해 4월에는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대원군정권은 대내적으로 봉건적 개혁정책을,
대외적으로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왕권안정 및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꾀했다.
1873년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으로 대원군이 물러나자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정권은 왕비의 척족세력이 장악했다
(→ 명성황후). 1875년 강화도에서 일본 군함 운양호 포격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듬해인 1876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이를 계기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탈피, 대외개방정책을 취하여
제국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한편 안으로는 개화정책을 실시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개화정책을 관장케 하고,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는 한편,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다.
그러나 이런 개화정책은 1882년 구식군인과 도시빈민들의
무장봉기를 낳게 하고, 대원군의 재등장을 초래했다.
민씨정권은 청 세력을 개입시켜 봉기를 진압하고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했다.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등의 체결과 청군의 주둔으로
청에 더욱 예속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민씨정권 타도, 청과의 관계 단절,
근대 자본주의국가 수립 등을 내걸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그뒤 1894년 반제반봉건을 내세운 갑오농민전쟁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친일개화파·보수유생층의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에 집권 개화파정권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홍범14조를 제정하여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했지만,
반침략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채 일본에 의존한 개혁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1895년 삼국개입에 따른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살해하고 친일세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의 의병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
일정권은 붕괴되었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어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다.
고종은 보수세력과 일부 개화파들을 끌어들여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하에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이것은 각종 제도개혁,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 등을 실시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자주적 개혁을 지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선의 식민지화를 승인받았다. 또한 일본은 이해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박탈과 내정간섭을 본격화했다.
이에 고종은 1907년(광무 11)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침략의 부당성과 을사조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에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군대를 해산시켰다.
1910년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 죽었다. 독살설 속에 치러진 그의 장례는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저서에
주연집 珠淵集〉이 있다. 능은 홍릉(洪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