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 들어선 아파트의 입을 꾹 다문 방들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거실 창을 열고 방마다 문을 열어 투명한 가을바람으로 잠시 거풍을 시킨다. 안방, 책 방, 옷 방 1, 옷방 2, 그러고 보니 사람보다 물건이 차지한 방들이 더 많다. 언제부터일까, 방의 숫자가 이렇게 늘어난 것은. 뿌루퉁하던 방들이 참았던 숨을 토한다. 종일 우두커니 저들끼리 쉬고 있었던 기운이 텁텁하면서도 썰렁하다. 그 서늘한 공기를 난방 장치의 힘으로 데우는 저녁, 왠지 방에게 미안하다.
어쩌다가 ‘단 칸 방’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이면 가슴이 멈칫한다. 지나간 시절을 떠올려 주는 한마디 말이 더 이상 찡할 수가 없다. 낱낱의 글자들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시간들을 깨워 놓아 머리 위로 둥둥 떠다닌다. ‘단칸방’ 그것은 보리밥 밀가루 수제비 개떡과 함께 떠오르는 옛 결핍의 상징 아니던가.
“처음으로 방이 두 개 있는 아파트로 이사 갔을 적에,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요.”
어떤 어머니가 TV 방송에서 자기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회상하며 했던 말이다. 물질적 부(富)를 누리게 된 지금, 스타 남매의 잇따른 자살로 자식들을 가슴에 묻은 채 살고있는 어머니다. 그 말이 눈물보다 아팠다. 사람들은 스타의 자살에 놀라움과 안타까움으로 한동안 떠들썩했지만 부질없는 거품처럼 곧 가라앉았다. “제발 죽지 마세요, 죽으면 안 돼요.” 애원한다는 어린 외손자와 외손녀를 홀로 껴안아야 하는 그녀다. 지금의 많은, 방들 앞에서, 오래전 방이 두 개인 아파트를 갖게 되었던 때를 그렇게 그리워하였다. 너무 좋아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서로의 이름을 불러 보곤 했다는 그때, 아마 사방의 벽조차도 서로 흐뭇하게 마주 보며 따스한 공기를 뿜어냈을 것 같다.
기억 속에 방 한 칸이 있다. 아버지가 객지로 나가시고 어머니와 동생들과 올망졸망 머리를 맞대고 살던 내 어릴 적의 방이다. 식구들은 온기로 그 방을 데우고 정을 먹으며 동화 속 이야기처럼 예쁘고 많은 방들을 꿈꾸었다. 꿈속의 방들은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모두 포함한 방이어서 보리밥과 밀가루 수제비 같은 것은 다시는 먹지 않겠노라고, 행복이 넘치도록 찰랑거려 남루함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어설프게 그린 내 방의 의미였다.
많은 날들이 흘렀다. 결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인내’라는 험로를 걸어온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일 테다. 낡은 집 좁은 골목길과 코흘리개 아이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촌이 규격대로 들어찼다. 편리하고 풍족하고 바쁜 현대 도시의 배경이다. 시끌시끌한 삶의 활기와 오감을 자극하는 색과 향과 소리들이 사방에 넘쳐난다. 윤택한 세상이다. 그런데 마음속은 왜 자꾸 허기지는 것일까.
횅한 마음뿐 아니다. 풍요 속 그늘은 더 시리다. 넓은 하늘 아래 후줄근한 육신 하나 건사할 곳 없이 하루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둡고 비좁은 쪽방이 도시 속에 숨어 있고 비만 오면 물 담그는 지하 셋방의 아픔도 엎드려 있다. 탈세 의혹, 이중 계약서, 위장 전입의 호화로운 저택 앞에서 유난히 초라하며, 심신을 달래 줄 방은 까마득하기만 한 사람들이다. 소슬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다가올 시련의 시간에 더욱 막막하지만, 먹고 잘 곳이 마땅한 사람들에겐 그들이 이방인일 뿐이다.
방인들 제구실을 너끈히 해내고 싶지 않을까. 필요에 따라 잠시 잠깐 들르거나 번쩍이는 가구들로 치장된 채 박제된 방이 아니라, 체온이 있고 사랑이 있는 사람들을 품어 방 본래의 의무를 다하고 싶을 게다. 함께 깔깔대고 눈물 흘리고 어루만지며 주인의 지친 몸과 마음까지 보듬어 주는 진정 편안한, 휴(休)의 방이고, 싶을 터이다. 그렇게 사람 냄새가 깃든다면 방들이 절로 훈훈해질 것이다.
물질 풍요의 도시, 황금 냄새를 풍기며 줄지어 선 초고층 아파트 단지는 이름도 생소하고 다양하다. 그 안엔 호화스런 ‘룸’들도 많다. 한데 금빛 패널의 빌딩 숲 어디에는 식구들로 북적대던 옛 방이 그리워 자주 먼산바라기를 하는 눈빛이 담겨 있기도 하다.
어느새 가을이 깊다. 드높은 하늘 밑 한가을 속에 담긴 들녘엔 알알이 익은 오곡백과가 숙성된 빛깔을 풀어낸다. 결실의 계절이면서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을에, 다시 입을 꾹 다문 우리 집 휴(休)의 방들이 자꾸만 서늘하다. 살가운 기운으로 방을 데우고 마음속 방에도 풍성한 온기를, 불어 넣어 봐야겠다. 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를 정녕 살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건 넘치는 물질이 아니라 숨결이 닿는 사랑과 정이라는 것을. 아늑한 방과 마음을 나누는 이웃과 지혜로운 책 한 권이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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