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개가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된 것은 지금부터 40년 전인 1938년이다. 개는 보통 10년이면 수명이 다하고 3년이면 손자를 볼 수 있으므로 개를 중심으로 생각할 때는 이미 10대 이상의 세월이 흐른 옛날 옛적의 일이다. 나는 갓난아기 적부터 천연기념물의 등록 표지견표를 단 우리집 진도개 "월이"의 시중을 받으며 자라났다. 방안에 흥건히 뒤를 보아 놓으면 개가 들어와 말끔히 그 뒤를 먹어 치웠고 행여나 어머니의 수고를 끼칠세라 혀로 내 엉덩판과 사타구니를 햝음으로써 걸레로 뒤를 닦아내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내가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우리 "월이"는 늘 나와 동무가 되어 놀아 주었고 내가 소년이 되어 들에 나가게 되었을 때는 월이의 아들 과 딸이 장성하여 나를 호위하고 길을 달려 뱀 따위의 흉물을 쫒아 주었다. 국민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우리집의 "월이", "황구", "백생이", "노랭이"를 데리고 산에 나가 노루 사냥을 하였고 때때로 꿩을 잡아왔으면 밤이 늦어 장에 가신 아버님을 마중갈 때면 그들은 그 무섭다는 도깨비나 도둑을 몰아 내는 든든한 군사 노릇을 해 주었다. 이처럼 나는 우리집 개가 든든하고 좋았으나 어머님은 먹이가 너무 많이 든닥 가끔 짜증을 내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의 아버님은 "우리집은 집터가 세어서 개를 여러마리 길러야 하고 개가 컹컹 짖어대야 집터를 이겨서 집이 잘 되는 거여"하고 욱박질러서 어머님의 불평을 막아 버리셨다. 그 즈음에 보통 진도개 값은 쌀 한말 값에도 채 못 미쳤고 사냥할 줄 모르는 개는 똥개라고 하여 키워서 잡아먹었으며 강아지를 낳으면 하루 품삯으로 나눠 주었다. 하루 품삯이라야 봄에 부인들이 반나절 동안에 보리밭의 김을 매주는 일이었으며 지금의 진도 노임으로 따지면 칠백원쯤 되는 돈이었다. 우리집은 언제나 이름 있는 사냥개 종자만을 받아다 길렀기 때문에 우리 개가 동네에서 가장 일등 개였다. 그러나 강아지 값이 비싸지 않아서 친척들이 달라고 하면 주고 이웃집 아줌마가 아기를 낳게 되었으니 뒤 치우개로 달라고 부탁하면 선선히 나눠 주곤 했다. 아버님이 폐결핵으로 고생하시면서 우리 집에서 개는 빛을 보게 되었다. 폐결핵 환자는 노루피를 먹는 것이 좋다고들 했으므로 아버님의 약을 구해주는 우리 개들이 귀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개들을 몰고 산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뻘 되는 노랭이는 주인인 내가 왜 저희들을 산에 데려왔는지를 잘 알아차리고 동쪽 산마루에 내달아 의젓이 몸을 사리고 앉아 있고 암캐 백생이는 열심히 코를 내두르며 노루가 지나간 길을 뒤졌다. 이럴 때면 이제 사냥을 배운 지 일년쯤 된 황구와 월이는 제어미 뒤를 건성으로 쫒아가면서도 무엇인가 알 듯 싶은지 컹컹 짖어댔다. 노루의 몸은 보지도 못했으면서도 코로 냄새만을 맡아 노루의 뒤를 쫒는데 그렇게 해서 한시간쯤이 지나면 틀림없이 숲속에 잠들어 있는 노루를 찾아내고 만다. 이때부터 우리 개들과 노루의 필사적인 도망과 추격의 장거리 경주가 시작된다. 어미가 노루를 찾아내 쫒아가면 뒤늦게 노루를 발견한 황구와 월이는 신바람이 나서 어미인 백생이의 진로가 방해되는 것도 아랑곳없이 내달려 가지만 마음만 조급하게 쫒던 탓인지 곧 힘이 지쳐 금새 노루를 잃고 고개를 두리번 거린다. 그러나 암캐 백생이만은 서두르는 법이 없이 꾸준하게 코를 연신 땅에 댄 듯한 자세로 노루가 도망친 길을 용케도 잘 쫒아간다. 얼마쯤 이런 추격이 계속되다 보면, 혼자 동쪽 산마루에 앉아 있던 노랭이가 컹컹 소리를 쳐 위협하며 쫒겨오는 노루를 앞에서 몬다. 노련한 노랭이는 백생이가 노루를 몰면그 노루가 어느 길목을 돌아 동쪽 산마루 쪽으로 도망쳐 오는지를 알고 있다. 노루와 개가 같은 장소에서 경주를 시작하면 개가 노루의 속력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사냥에 익숙해진 개들은 어느 산의 노루는 쫒으면 어느 길목을 통해 어느 산으로 도망친다는 것을 대개 알아 버린다. 무엇을 잘 잊는 사람에게 "너 노루고기 먹었구나"라고 놀려대는속담이 있는데 그 말처럼 노루란 짐승은 어찌된 셈인지 개에게 쫒기면서도 산을 하나쯤 넘고 나면 자신이 쫒기고 있는 처지라는 사실을 잊는 것인지 또는 "산을 넘었으므로 개가 여기까지 나를 쫒아오지는 못하겠지"라고 생각하는 탓인지, 우두커니 서서 사방을 관망하거나 아예 풀을 뜯어먹으면서 쉬고만다. 개는 노루의 이 속성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러므로 전력 투구를 해서 쫒는 것이 아니라 여유있게 산등성이를 넘어 잠깐 노루의 행방을 살핀 다음에 노루의 뒤를 바짝 다가가서 덮친다. 이때면 노루는 다급해져서 "액액" 소리를 치면서 산을 미끄러져 계곡으로 도망친다. 노루는 뒷다리의 힘이 좋고 길어 산을 오를 때는 쏜살같이 뛰지만 산을 내려갈 때는 앞다리가 짧고 힘이 부족해 엎어지기가 일쑤다. 개는 이때를 놓치지 않는다. 이때만은 개가 경주해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진도개들은 노루를 뒤에서 물지 않는다. 두 세마리의 개를 데리고 사냥을 가면 사냥에 익숙해질수록 개들은 분산해서 질주하면서 협공을 하기 때문에 일직선 경주에서는 주력이 빠른 노루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지치고 경주에 져서 어느 개엔가 목덜미를 물리고 만다. 이때 지른 노루의 처량한 비명은 참으로 가슴 아프다. 나이 어린 나는 개와 노루의 이 경주를 뒤쫒을 수가 없다. 그래서 노루와 우리 개들의 경주가 시작되면 나는 관망하기 좋은 산마루에 올라 어디서 노루가 잡히는지 살펴본다. 노루의 비명이 들리면 나는 "노랭아! 백생아!"를 외치며 소리난 곳으로 달려간다. 황구와 월이는 어미개나 아비개가 노루 목덜미를 물고 숨을 거두도록 짓이기고 있는 틈새에 쫒아가 아무데나 살갗을 몇번 물어 기를 죽여 놓고는 노루 잡은 것이 자랑스러운 듯 소리쳐 부르는 나를 향해 달려온다. 나는 월이와 황구의 안내를 받아 잡아 놓은 노루가 숨을 거둔 곳을 확인하고 집을 향해 소리친다. 병상에 누워 집안 일을 돌보지 않던 아버님도 이때만은 허리춤을 움켜쥐고 피를 빨 대롱과 칼을 들고 산으로 달려오신다. 목을 잘라 울대에 대롱을 대고 피를 마시고 난 뒤에 아버님은 즉석에서 노루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현장에서 개들에게 나눠주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누루를 집으로 운반시킨다. 사냥이 끝나고 금방 내장이라도 나눠 주지 않으면 개들은 사냥에 성의를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을이나 겨울 사냥은 노루가 힘차고 날래서 하루 종일 쫒고 쫒기는 경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철은 보리가 익어가는 초여름이 좋다. 이때는 노루들이 새끼를 낳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을 때라 철없는 새끼들은 어미를 찾느라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 위치가 쉽게 파악된다. 개들이 새끼노루를 찾아내면 멀리 있던 어미 노루도 새끼를 보호할 본능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새끼가 있는 주위에서 멀리 벗어나진 않고 맴돌아 잡기가 쉬워진다. 우리집은 이처럼 아버님의 약이 되는 노루피를 구하기 위해 인근에서 사냥을 잘한다는 개가 있으면 쌀 한가마까지도 주고 얻어다가 길렀고 일부러 사냥개와 교미시키기 위해 노력을 함으로써 좋은 개를 길렀다. - 다음편에 계속_ |
첫댓글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후배가 김정호님의 조카임을 알고 김정호님께서 집필하셨던 '진도견'이라는 책을 30여년 전에 빌렸는데 누군가 제게서 빌려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지금도 반환을 못하고 있습니다.
항상 미안하고 죄스럽게 생각하고 있네요.
저도 좋은 분께서 확대 복사한 책을 선물해 주셔서 많은 공부가 되었는데
나중에 원본을 구하여 소장하고 있습니다.
30여년 전에 빌리신 것이라면 벌써 시효가 지났으니 이제는 미안해하실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ㅎㅎ
@누룩 ㅎㅎㅎ
감사합니다.
빌렸기에 되돌려주는 것에는 마음의 시효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로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