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서울에는 늘 즐길 거리가 많다. 늘 새롭고, 짜릿하다. 대한민국의 5분의 1이 살고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변화의 폭이 그 어느 곳보다 빠르고 경쟁이 치열하다. 대전이 '노잼의 도시'라고 한다면, 서울은 '유잼의 도시'라고 불러야 할까. 한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쇠퇴의 분위기가 풍기던 곳이 시간이 흐르면 어느샌가 젊은이들이 모이는 힙한 곳이 되어 있다. 문래동, 성수역, 서촌과 북촌이 그랬다. 이 중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이끌고 있는 곳을 꼽자면 역시 을지로가 아닐까 싶다.
서울의 중심, 을지로
서울시 중앙에 있는 중구에서 사람들의 교류가 활발한 중 하나가 을지로다. 종로, 청계천로, 퇴계로와 함께 서울시의 대표적인 상업 및 업무 지구로 꼽히는 이곳은 도로 전 구간을 지하철 2호선이 지나며 그 밖에도 3,4,5 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으며 지하철뿐만 아니라 다양한 버스 노선이 지나기에 교통이 편리하다. 을지로 1가부터 7가까지 거리마다 특징이 있는 것도 이곳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 다른 분위기를 풍기지만 전반적으로 산업의 모든 것을 판매하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서울에서 무엇을 하든 간에 을지로에만 가면 해결책이 있다고 할 정도다.
을지로 1가와 2가는 명동과 남대문과 가까우며 고급 호텔과 백화점, 그리고 각종 금융 기관이 밀집해있다. 을지로 3가에는 을지로동주민센터가 있으며 영화관과 의료기관, 건축내장재 상점이 밀집해있다. 을지로 4가는 세운 상가를 비롯하여 조명, 건축자재 및 내장재를 파는 상가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을지로 5가는 방산시장, 중부시장 등 대형 재래시장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을지로 6가와 7가는 스포츠용품 상가와 더불어 전통적인 의류도매시장들이 가까이 있다.
▲ 거리마다 각자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계속 걷게 만드는 곳, 을지로.
나에게 을지로는 만물상이었다. 디자인을 배우던 학생 시절부터 세운 상가, 방산시장, 의류도매 시장을 들르며 각종 산업에서 쓰이는 부품을 탐구했다. 아이디어가 막히면 일단 거리로 나서는 것이 다반사였다. 코를 찌르는 묘한 냄새가 진동하던 아크릴 가공 가게, 이렇게 많은 종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자재들이 즐비했던 건축 부자재 가게, 화려한 조명이 제 모습을 뽐내는 조명 가게 등을 둘러보며 황홀경에 젖었다. 각종 천이 끝도 없이 쌓여있는 가게들을 걷다가 천이 내뿜는 먼지 때문에 재채기가 수도 없이 나오기도 했다. 눈과 코가 매웠지만 마트나 일반 가게에서 보기 힘든 천이나 레이스, 부자재들을 보며 눈을 뗄 줄 몰랐다. 서울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재래시장에서는 없는 물건이 없었다. 다양하고 알록달록하고 바삐 움직이는 것들을 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좁고 허름해 보이는 가게들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전문적인 물품을 팔았고, 가게 안의 주인들은 각자 분야에서만 통하는 특별한 언어를 썼다. 무엇이든 간에 초짜였던 나는 거리를 걸으면서 전문적인 지식을 알음알음 배워나갈 수밖에 없었다. 을지로 거리를 배회하면서 제조 산업의 역사를 느끼고, 공부한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 을지로의 노포는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고, 그래서 친근하다.
또한 나에게 을지로는 전통이 가득한 먹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며 장사를 해온 가게에 '서울미래유산'이라는 표시가 있지만, 학생 때에는 그런 표시가 없었다. 그저 분위기 따라, 또는 주변에 있다는 이유로 찾은 식당에는 늘 어르신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어르신이 있는 곳은 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설렁탕의 진득한 맛, 냉면의 오묘한 시원한 맛, 보글거리는 찌개의 소박한 맛 모두 을지로를 다니면서 알게 된 맛이다. 이런 경험 탓인지, 나에게 맛집이라고 인식되는 곳은 을지로의 노포들처럼 약간은 오래되었으면서 허름한 곳, 그리고 푸근한 정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거기에 어르신들이 무심하게 식사를 하고 계시면 금상첨화다.
힙지로, 오래된 건물과 젊음에 흐르는 곳
그렇게 학생 때에는 을지로를 하루가 멀다 하고 다녔건만, 졸업 후에는 그다지 많이 가지 못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학생 때와 다른 관심사를 가지게 되었고 변한 일상에 적응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가지 못했다가, 다시 찾은 을지로는 생각보다 더 많이 변해있었다. 건물은 그때 그대로였지만, 건물 내부에 자리 잡은 콘텐츠가 바뀌었기에 느낌이 달라진 것이다. 낡은 건물과 오래전에 만든 듯한 간판들 사이로, 젊은 감성이 슬며시 느껴졌다. 아예 예전 건물의 모습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카페, 식당을 만들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 곳들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줄을 서고 SNS에서 유명하다는 곳은 아예 간판이 없는 곳들이 많았다. 간판이 없어 오히려 신비로운 곳을 탐방한다는 느낌에 사람들이 몰리는 듯했다.
세운 상가 3층, 을지로 3가 주변은 이렇게 새롭게 변한 분위기의 매력을 느끼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이곳에서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통과 트렌드가 만나 조화를 이룬다. 현재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레트로 감성이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시간을 보낸 을지로의 거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그 어느 곳보다 세련되고 트렌디한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을지로가 '힙지로'로 불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치 있는 젊은 감성이 녹아든 곳은 각기 다른 개성을 뽐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끈다.
▲ 분명 을지로인데, 홍콩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을지 장만옥'
▲ 베트남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식당, '촘촘'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해외의 감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음식점은 을지로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코로나 시대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틔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든다. 홍콩의 한 골목에 있는 것 같은 독특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식당에서는 홍콩에서 먹고 감탄했던 가정식을 맛볼 수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베트남의 한 식당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는 식당에서는 쌀국수와 반미가 입을 즐겁게 했다. 분위기와 맛 덕분에 잠시 해외여행을 한 기분은 을지로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 을지로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와인 바는 각각의 독특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을지로의 밤은 '노가리 골목'이 대표적이다. 터줏대감인 을지 OB 베어를 중심으로 주변의 맥줏집들이 노가리와 더불어 맥주를 판매하는 거리는 이제 서울의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했다. '을지로 페스트'라 불리는 한여름에 열리는 노가리 골목의 맥주 파티는 을지로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덕분에 을지로의 밤 시간에는 생맥주를 즐기러 모이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좀 더 색다른 맛을 찾는 이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런 트렌드에 맞춰 을지로에는 와인 바가 성행한다. 빈티지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감성적인 와인 바와 더불어 모던한 분위기의 와인 바까지. 다채로운 매력을 가진 와인 바에서 을지로의 색다른 매력을 느끼는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하다.
▲ 을지로에는 노가리 골목과 더불어 골뱅이 골목도 유명하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골뱅이 골목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세련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거리를 마주칠 수 있다. 이것이 을지로의 매력인 듯하다.
쇠퇴해 갔던 을지로는 젊은 피를 수혈받으며 사뭇 달라진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렇지만 예전의 분위기도 함께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독특하고,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에게 매력적인 곳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서울 중심에 위치해있으며 편리한 교통과 더불어 모든 세대에게 다채로운 매력을 전달할 수 있는 을지로는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