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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정치이념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 정치·외교·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유일한 지도이념이다.
조선노동당 규약 서문(2010년 9월 28일 개정)에는 “조선노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하는 주체형의 혁명적 당"이라고 하였다.
2009년 4월 개정된 사회주의헌법은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완전히 삭제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제3조)라고 규정하여, 주체사상과 더불어 김정일이 내세운 선군사상(先軍思想)을 강화하였다.
주체사상의 형성배경이 김일성 1인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주체사상의 전개 발전 과정도 김일성 1인독재 권력 강화와 관련된다.
북한에서 주체라는 용어가 정치적으로 최초로 사용된 것은 1955년 12월 28일 개최된 당(黨)선전선동원대회에서 행한 김일성의 연설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한 데 대하여”에서 비롯된다.
김일성은 당시 전후 복구건설사업을 전개하면서 6·25전쟁 패전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정적들을 숙청하는 데에서 주체를 내세우다가 중·소간 이념분쟁이 격화되자 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다시 주체를 정치외교적 명분으로 활용하였다.
1970년 제5차 당대회에서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영역을 포괄하여 종합적인 사상체계로 이론화하였으며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이후에는 김정일에 의해 주체사상이 ‘김일성주의’로 정식화되어 사상체계와 원리 및 방법이 더욱 발전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주체사상이라는 뚜렷한 개념적 정의를 내리지 않고 정치권력의 필요에 따라 변용되고 추가되었다.
1950년대에는 사상과 경제에서의 주체와 자립을 의미하다가 1960년대에는 군사에서의 자위(自衛), 정치·외교에서의 자주를 구현하는 지침으로 활용되었다.
북한의 정치사전에는 “주체사상이란 한 마디로 말하여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다”라고 김일성이 교시하였으며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 김정일은 주체사상에 대해 수령의 지위와 역할을 절대화, 구체화한 혁명적 수령관과 사회정치적 생명체 이론을 추가시켜 주체사상은 수령의 올바른 영도를 받아야 하고 사람이 자주성·창조성·의식성을 가지고 자기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혁명의 주체는 ‘수령·당·대중의 통일체’로 사회 전체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생사운명을 같이 한다고 하여 북한사회를 배타적인 이념적 혈연집단으로 결속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세습체제의 정당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1980년대 말에 생겨난 ‘우리식대로 살자’는 구호는 주체사상에 기초한다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목표로, 외부사조에 흔들리지 않고 수령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옹호할 것을 교육시키고 있다.
주체사상과 더불어 북한정치의 노선을 결정하고 있는 것은 북한의 혁명전략이다.
북한의 혁명목표는 첫째, 북한지역에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 둘째 남한지역에서의 인민민주주의 혁명, 셋째, 세계 공산화 혁명을 달성하는 데 있다.
북한은 대내적으로 사회주의의 완전승리를 이룩하기까지 과도기단계의 혁명목표로 물질적 요새와 사상적 요새의 2가지 고지를 점령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질적 요새점령이란 사회주의의 물질적·기술적 토대구축을, 사상적 요새점령은 사회 전체를 혁명화·노동계급화하여 사람들의 사상을 공산주의적으로 개조함을 의미한다.
또 이러한 과도기단계에서의 2가지 혁명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사상·기술·문화의 3대혁명을 수행하는 것을 당면과업으로 제시하였다.
이 중에서 사상혁명을 통해서는 인간개조 및 정치사업을, 기술혁명은 대중적 기술혁신운동과 생산성향상 방안 탐색을, 문화혁명은 환경위생 및 생활문화 향상 등으로 체제가 요구하는 사회주의 생활양식으로의 개조를 의미한다.
북한은 이상의 3대혁명 추진을 위해 ‘3대혁명 소조운동’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 등을 전개해왔다.
그 내용은 남한사회에서 1단계 혁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 내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을 건설하며 그 주위에 노동계급을 결속시켜 혁명의 주력군을 편성하고 보조역량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통일전선
이와 함께 북한은 세계혁명을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한 중요한 고리의 하나로 보고 모든 반제(反帝)·반미(反美) 역량의 통일전선 형성과 국제공산주의운동, 노동운동 등의 단결을 주장해왔으나,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퇴조와 이념의 변화 등으로 북한 자체의 혁명기지 보존에 전력하고 있는 실정이며, 1990년대 이후 '3대혁명 소조운동'도 미미해졌다.
한편,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 뒤로 '선군사상'을 비롯하여 '붉은기 사상', '강성대국' 등이 주체사상의 하위 실천이념들로 활용되었다.
이는 경제난국에 대처하고 체제를 안정화하기 위한 행동강령적 성격이 짙다.
선군사상 또는 선군정치는 글자 그대로 군사를 우선시하는 정치로서 '군사를 국사 중의 제일 국사로 내세우고 군력 강화에 나라의 총력을 기울이는 군사 선행의 정치'로 정의할 수 있다.
붉은기 사상은 사회주의가 붕괴하는 시대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체제 수호의 논리로 강조되었다.
강성대국론은 사상·정치의 강국 건설, 군사의 강국 건설, 경제의 강국 건설을 목표로 한다.
북한의 정치체계
북한 정치체제의 특징은 1당 지배체제, 유일 지배체제, 세습 지배체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정권기관이나 정치조직은 최고영도자와 당의 영도 아래 사업해야 한다.
최고영도자·당·계급·대중이 하나의 전일체를 이루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에서 당은 최고 형태의 혁명참모부이자 향도적인 영도 역량이다.
최고영도자는 당과 국가를 지도하고 당의 혁명전통과 사상·노선을 제시하며, 당의 최고 수뇌로서 당과 대중을 통일 단결시키는 유일한 중심이다.
따라서 북한의 정권은 최고영도자의 혁명사상을 실현하는 정치기구로서, 조선노동당의 노선과 정책의 집행자로서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정권 기능으로서 주요 역할은 첫째, 반혁명적 요소 제거 및 독재수행 기능,
둘째, 법적 제재를 수행하는 통제적 기능,
셋째, 사상·문화 혁명을 추진하는 문화교양적 기능,
넷째, 경제건설을 추진하는 경제조직적 기능,
다섯째, 혁명의 주체적 임무를 수행하는 대외적 기능으로,
이상의 정권기관의 권리행사는 모두 법적 형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북한 권력의 심장부 역할을 하고 있는 조선노동당은 1945년 10월 13일에 창설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모체이며 북조선공산당·북조선노동당을 거쳐 조선노동당으로 개칭되었다.
분국 창설 초기까지도 서울의 조선공산당이 ‘당중앙’으로 인정되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8월 29일 중국 옌안[延安]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발족, 이어 1948년 8월 인민공화국 정권수립을 위하여 남조선노동당과 연합중앙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949년 6월 30일 남북의 노동당은 1국1당 원칙에 따라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었다.
조선노동당의 이념과 목표는 역대 당대회를 통해 계속 수정되었다.
제1차 당대회(1946.8)와 제2차 당대회(1948.3)에서 채택한 규약은 당의 이념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규정하고 투쟁목표를 통일정부 수립에 두었으나,
제3차 당대회(1956.4) 규약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혁명전통을 접목시켰고, 당의 최종목표를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두었다.
제4차 당대회(1961.9) 규약에서는 당이 항일투쟁에서 이룩한 혁명전통의 계승자임을 강조하였으며,
제5차 당대회(1970.11) 규약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 김일성주체사상을 당의 지도이념으로 표방하였다가
제6차 당대회(1980.10)에서는 김일성주체사상만을 유일한 당이념으로 명문화하고 최종목표를 전한반도의 공산주의사회 건설과 사회 전체의 주체사상화로 변경하였다.
당의 조직과 운영면에서도 초기에는 매년 1회 개최되는 당대회, 3개월마다 개최되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권한이 막중하였으나 정치위원회와 비서국제가 강화·신설되어 당의 운영은 당원의 합의보다는 통치자를 정점으로 한 소수집단의 하향적 지시에 따르는 운영체계로 바뀌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창설될 때 당원이 4530명인 것이 1961년 9월 1일 북한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당원 131만 1568명, 당세포수 6만 5000개였다.
그러나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 참가한 당대표가 3220명(결의권 대표:3062명, 발의권 대표:158명)인 점을 감안하면 당시 당원수는 약 320만 명 정도로 추계된다.
이를 기준으로 1개 세포당 당원을 15명으로 추정(당 규약상 5~30명)하면 21만 개 정도의 당세포가 조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북한은 당세포수를 막연히 수십만 개에 이르는 것으로 발표하였으며, 1980년 이후 지금까지 당세 확장이 상당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은 중앙집권제 원칙하에 모든 지역별·부문별로 계서적 조직을 가지고 있고 하급 당조직은 상급 당조직을 선거하고 상급 당조직은 하급 당조직의 사업을 계통적으로 지도·검열한다. 모든 당원은 당조직에, 모든 당조직은 당중앙위원회에 절대복종하도록 되어 있다.
당중앙위원회는 필요에 따라 정치·경제·군사기관에 직속으로 정치국을 두고 정치국은 해당기관에 조직된 당위원회의 집행부서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
당정책의 결정은 형식상 각급 당위원회 회의형식을 거쳐 이루어지나 실제로는 통치자의 교시나 명령에 좌우된다.
일단 당회의에서 채택된 제반 정책은 비서국에서 집행한다.
중앙위원회의 비서국에는 10명 내외의 비서를 두고 지방당위원회의 비서처에는 책임비서와 비서들이 있다.
북한의 당대회는 형식상으로는 조선노동당의 최고지도기관이다.
당대회는 당중앙위원회와 중앙검사위원회 활동의 총화와 선거, 당강령과 규약의 채택 및 수정 보완, 당노선과 정책 및 전략전술의 기본문제 결정 등과 같은 사업을 수행하게 되어 있으나 사실상 당중앙위원회 또는 정치국의 결정사항들을 만장일치로 가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앙위원회는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의 모든 당사업을 관장하는 당조직의 최고지도기관이다.
중앙위원회는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 총비서와 비서를 선거하고 비서국과 군사위원회를 조직한다.
중앙위원회의 후보위원은 결의권 없이 발언권만 가지며, 준후보위원은 생산노동에 직접 참가하는 핵심당원에서 선출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중앙위원회는 6개월에 1회 이상 전원회의를 소집하도록 되어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중앙과 지방의 당·정기관 및 경제기관 등의 책임자들이 참가하는 확대전원회의를 개최하기도 한다.
전원회의에서 취급, 토의된 안건의 대부분은 경제문제가 주류를 이룬다.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전원회의 사이에 중앙위원회 명의로 당의 모든 사업을 결정하고 지도하는 사실상의 최고 핵심부서이다.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직후 개최된 제1기 제1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회로 처음 조직되었으며,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으로 개칭하고 정치국 내의 옥상옥(屋上屋)의 기관으로 김일성·김정일·오진우로 구성된 상무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중앙위원회 비서국은 간부인사, 당내 문제, 기타 당면과제들을 정기적으로 토의 결정하고 그 집행을 지도하도록 되어 있다. 또 비서국은 중앙위원회의 각 부서를 일상적으로 지휘·감독하는 당의 중추기관으로서 정치체계 전반에 걸쳐 당의 지도·통제 역할을 수행한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북한군의 각급 부대에 설치된 당조직 전체를 지도·지휘하는 군사부문의 최고 당정책결정기구이다.
이 위원회는 당의 군사정책을 토의 결정하며, 군수산업과 군사력 강화를 위한 사업을 조직·지도한다.
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는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를 하거나 당의 노선·정책·규약을 준수하지 않는 당원들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당원의 신소(민원)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당중앙검사위원회는 당대회에서 선거하여 구성되며 당의 재정경리사업을 검사하는 기능을 맡고 있다.
그 외의 지방조직으로 지방당대표회가 있다. 지방당대표회는 해당 지방당조직의 최고지도기관으로 3년에 1회 소집하기로 규정되어 있으나 규정된 기간보다 빨리, 또는 늦게 소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방당대표회에서는 해당지방당위원회와 검사위원회 및 상급 당회의에 파견할 대표를 선거하고 당해 지방당위원회와 검사위원회의 사업을 총화하도록 되어 있다.
노동당의 외곽단체로서는 근로단체 명칭을 띠고 있는 조선직업총동맹,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조선사회주의
북한은 1948년 인민공화국 헌법(11장 104조)을 채택한 이래 5차례에 걸쳐 부분적으로 수정해오다 1972년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에서 인민민주주의 헌법을 폐기하고 전문 11장 149조로 된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였다.
사회주의 헌법의 특징은 사회주의제도를 법적으로 정착시키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한다는 명문으로 국가 기관 체계를 주석 중심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국가주권을 대표하는 주석과 국가주권의 최고지도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를 신설하고 종래의 내각을 단순한 행정집행기관인 정무원으로 격하시켰다.
1990년대에 들어와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는 등 국제정세와 안보환경이 급변하자 1992년 4월 9일 제9기 제3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종전의 헌법을 대폭 개정한 전문 7장 171조의 새로운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였다. 이후 1998년 전문 7장 166조로 개정하였고, 2009년과 2010년에 다시 전문 7장 172조로 개정하였다.
1992년의 개정헌법은 이념과 지도노선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침으로 명시함으로써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를 부각하는 한편, 국방이라는 별도의 장을 신설, 군의 사명을 사회주의 제도의 보위에 두고 4대군사노선의 관철을 명시함으로써
사회주의체제의 고무를 위한 군의 역할과 성격을 헌법에 구체화하였고, 당이 국가를 영도한다는 조항을 신설하여 당우위노선을 재확인하였다.
이와 함께 국방위원회를 중앙인민위원회에서 분리하고 국가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가 가지고 있던 군사 관련 제반 기능과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이관함으로써 군사정책의 수행 일원화와 김정일의 군부장악을 법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또 형식적 추인기관에 불과하였던 최고인민회의의 권한을 헌법 및 법령의 채택·수정, 대내외 정책의 기본원칙 수립, 주석·국방위원회 위원장·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및 위원들의 선거와 소환, 전쟁과 평화에 관한 문제의 결정 등으로 강화하였다.
1998년 개정된 헌법은 서문을 신설하여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영구 주석'으로 추앙하면서 북한의 헌법이 김일성헌법임을 명기하였다.
또 주석제와 중앙인민위원회를 폐지하고 그 기능을 국방위원회와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로 각각 분산한 것이 특징이다.
기존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를 승격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두고 대외 국가대표기관의 기능을 부여하였으며,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명목상 국가 수반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또 국정 집행기관인 정무원을 내각으로 바꾸고 그 권한을 확대하였다.
내각은 5위원회, 31성, 1원, 1은행, 2국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이밖에 행정경제 위원회를 인민위원회에 흡수하여 지방정책 수립 및 집행에서 인민위원회와 행정경제위원회로 이원화되어 있던 것을 통일적으로 수행하도록 하였다.
2009년 개정된 헌법은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모두 삭제하고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최고영도자로 명시한 것이 특징이다.
또 국방위원장이 국가의 전반사업을 지도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국방위원회가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기관이 되었다.
1992년 개정헌법을 통하여 종전까지 국가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가 가지고 있던 일체의 군사관련 기능과 권한이 국방위원회로 넘어갔고, 1993년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군권을 완전 장악한 뒤 1998년, 2003년, 2009년 잇달아 재추대되었다.
현행 헌법상 국방위원회는 국가주권의 최고 국방지도기관으로서 국가의 중요정책 수립, 전반적인 무력과 국방건설사업 지도 등의 임무와 권한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정치인숙청
1. 연안파 숙청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후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의 정치집단.
일본이 패망하자 중국 연안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 계열의 김두봉(金枓奉)·최창익(崔昌益)·무정(武亭)·김창만(金昌滿)·윤공흠(尹公欽) 등 연안파가 중국공산당의 후원 하에 입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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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파 세력은 정치적 성격을 띤 무장 세력이었다.
입북 직후부터 빨치산파, 국내파, 소련파 등과 함께 북조선 5도행정국을 비롯하여 창군 과정에 관여하였으며, 소련 군정에 연립적인 형태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파에 의해 정치적 입지가 약해져, 6·25전쟁과 종파사건을 통해 북한지도부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부는 1945년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개최하였으며 1945년 10월 28일 소련군은 ‘북조선 5도행정국’(5도10국)을 정식으로 발족했다.
최초 각국의 책임자인 국장은 조선민주당과 공산당, 연안파를 모두 안배하여 연립적인 성격으로 구성하였다.
연안파 세력은 1946년 2월 16일 조선신민당을 창당하여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소시민, 인텔리, 중산층을 지지기반으로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고자 하였다.
북조선 공산당은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합당대회를 개최하고, 당 명칭을 ‘북조선 노동당’으로 개칭하고 위원장에는 김두봉, 부위원장에는 김일성, 주영하를 선출했다.
해방직후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중국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출신들이 1945년 9월 중순경 입북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중국 연안(延安)연안에서 입북한 김두봉은 수하의 조선의용군 약 4,000명을 입북시키기 위해 신의주(新義州) 안동(安東)(지금의 丹東)에 이들을 대기시켜 놓고 소련 군정 당국과 교섭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 내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이라는 정치결사대를 조직하고 모택동(毛澤東)중국공산당의 비호를 받으면서 중국 연안에 그 거점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정학교를 설립하여 정치군사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간도(間島)와 남북 만주 일대에 공작원을 보내 모병과 아울러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소련군사령부의 보류로 입북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여러 가지 정치적인 고려로 동년 11월 중순 소련군 제25군 밴꼬프스키의 입국허가를 통해 입북하게 되었으나 이미 소련파와 빨치산파에 의해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기고 난 후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입북한 조선의용군은 공산당 평북도당이 지정하는 신의주 중학교에 숙소를 정하고 각계각층의 환영도 받았으나 그날 밤 평안북도 보안부장 한웅이 지휘하는 보안대에 의해 기습적으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다시 안동으로 축출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소련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북한을 장악하게 하려는 정치공작이 계획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김일성은 1946년초 각 도 철도보안대를 창설해 나가는 과정에서 빨치산파, 소련파 외에도 연안파인 주연, 유용구, 조소향, 백낙철, 김만영 등을 기용하였으며, 또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를 창설하는데 빨치산파가 중심이 되고, 연안파 출신 박효삼(朴孝三), 김강 등 30여명을 참가시켰다.
그러나 이들 연안파 세력들은 상당수가 6·25전쟁 기간 동안 김일성과 빨치산파에 의해 패전책임 전가로 제거되기 시작하였다.
해방이후, 북한 땅에서 인민이 만세 부른 4명이 이었는데,,첫번째에는 김일성, 두 번째에는 박헌영, 세번째에는 무정장군, 네번째에는 김두봉선생 이었습니다.
당시 평양시내에는 "김일성만세" 벽보보다 오히려 "박헌영만세" 벽보가 더 많이 붙여 있을 정도였지요.
그중 무정이 김한중 등과 함께 첫 숙청 대상이 되었다.
무정은 연안파의 거두로서 전략전술에 뛰어나 김일성에게는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결국 무정은 1950년에 패전의 책임으로 제거되었다.
무정: 김무정,, 일명 무정장군
화북의 조선독립동맹 소속의 독립군조직인 조선의용군 사령관이며, 독립군사상 최대의 전투인 태행산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3000명의 독립의용군을 이끌고 60000명의 일본군을 격퇴...그 일본군사령관이 한국인인 홍상익준장)
무정장군은 그냥 단순한 중국공산당 한인간부 내지,, 홍군의 한인장성이 아닌 중국공산당사의 기둥인 "대장정" 에 참가하여 완주한 유일한 한국인 간부입니다
모택동 휘하 홍군의 포병사령관까지 지내다,,조선의용군 사령관으로 연안파를 이끌고 ,입국하여 ,,6.25때 북한 2군단을 맡아 남한을 멸망직전 까지 밀어붙이는 괴력을 발휘한 장군입니다..
그런 무정장군이 평양방위사령관으로 , 백선엽에게 평양을 빼앗기고 패각했다는 이유로 숙청..
감히 죽이지 못하고, 회의장에서 견장이 뜯겨지는 수모를 당하고, 강계의 모란봉 지하극장 공사장으로 끌러갔다.(소련군 대위따위가 장군은 무슨..........대놓고 김일성을 깔보고 무시하다 ,,1빠다로 숙청당함 )
방호산: 조선족 출신 장령으로 중공군 166사단장까지 올랐다가 연안파로 함께 입국
6.25전쟁 당시 북한군 6사단장으로 참전,,기막힌 전격기동작전을 펼쳐,,혼자 힘으로 호남일대를 제패하고 ..
진주,마산까지 진출하는 엄청난 전공을 올린 북한군 최고 명장
미군이 필사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면,, 부산이 함락당하는 것은 시간문제...
한마디로 한국을 1950년대에 멸망시킬 뻔 했는 장군,,
역시 연안파 숙청시 함께 숙청당하여 행방불명
1956년 6월과 7월에 김일성이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에 국내에서는 최창익이 이끄는 연안파의 주도적 인물들이 김일성과 그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이들은 집체적 지도 체제를 수립할 것과 엄격하게 통제되어 온 당 기구를 완화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박창옥을 비롯한 상당수의 소련파와 김두봉, 최창익 등 다수의 연안파 인물들이 당대회에서 여전히 당 고위직에 선출되어 있었고, 김일성 일행의 방문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동년 8월 30일부터 당 중앙위 제3기 8월 전원회의가 개최되었고, 이 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등이 김일성 노선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연안파의 김일성에 대한 도전은 바로 이 회의를 통해 외부에 표출되었다.
직업 총동맹의 위원장인 연안파의 서휘는 직업 동맹의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정치적 자주성과 파업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발언하였고, 연안파의 윤공흠은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였고 최창익은 중공업의 치중을 비난하고 경제계획을 개편할 것을 촉구하였다.
김을규는 인민군의 전통이 빨치산이 아니라 농민운동에서 계승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연안파로서 조선 인민군 정치 국장이었던 최월종과 최종학 같은 군 주요 지휘관들도 최창익 일파의 움직임에 동조하였다.
1956년 8월 연안파의 비판에 대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파들은 대대적인 역공을 취하였다.
김일성은 최창익이 심지어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를 포기하고 중립화에 기초한 정치체제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고 비난했다.
김일성은 군부 안에서도 김을규와 같은 연안파들이 빨치산의 전통에 도전했다고 밝혔다.
최용건, 김창만, 이종옥 등이 윤공흠을 반박했고 회의장 중간 중간에 배치된 빨치산파 대의원들은 심하게 반발하면서 회의를 파장시켰다.
결국 윤공흠, 최창익, 김두봉 등의 공격은 무위로 끝나고 윤공흠을 비롯한 연안파들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8월 종파사건’으로 유명한 이 사건은 연안파가 권력에서 축출되고 김일성 등 빨치산파의 권력을 공고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후 연안파 중에는 유일하게 김창만이 생존하였다.
종파사건시 연안파의 인물들은 국내파들의 경우와는 달리 기소되기는 하였지만 처형당하지는 않고 당과 정부로부터 축출되었다.
이 때 직접적인 가담자는 아니었지만 연안파의 최고지도자 김두봉도 그들과 함께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파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었고 파벌투쟁은 빨치산파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되었음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연안파 세력의 축출로 4차 당대회 이후 권력문제와 관련해서 김일성 앞에는 더 이상의 정적은 없게 되었다.
2. 소련파 숙청
해방 직후 소련군정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소련 국적 한인의 2세로 입북 시기에 따라 1진부터 5진으로 분류된다.[2] 이들 외에 해방전 김일성이 속했던 소련의 제88국제여단 (소련)
총 40여명 규모로 1945년 8월 9일 대일 전투에 앞서 첩보공작을 하다 해방을 맞은 박창옥, 한일무, 이학용, 김원길, 김성훈 등과 대일전투에 참가한 정률(해군군관, 본명 정상진(鄭尙進, 1918~2013))[2][3], 최종학(대위), 최흥국(대위), 최표덕(중좌), 정학준(군관), 최왈렌친(상위), 해방 이후인 1945년 8월 29일 소련 진주군 제25군의 7부(군정치부)와 함께 평양에 들어간 강미하일 소좌, 오기찬 대위를 비롯한 전동혁(시인), 조기천(시인), 임하(극작가), 김세일
총 53명 규모로 1945년 10월 중순 경 평양에 도착한 박영빈
1945년 12월 초순 경 평양에 도착했으며, 조만식허가이(당부위원장), 박의완(내각부수상), 방학세(사회안전상), 김재욱(평남도당위원장·군총정치국장), 강상호(내무성 부상), 이춘백(군정찰국장), 김택영(사법성 부상), 기석복(로동신문
1946년 여름에 평양에 도착한 기술자 및 간부 그룹으로 남일(인민군 총참모장·외무상·내각부수상), 장익환(교육성 부상), 김동학(최고검찰소 부소장), 박원무(전기성 부상), 김영삼(전기성 부상), 김학인(내각호위처장), 박일(김일성대
김일성과 함께 88 여단유성철 (인민군 작전국장), 최원 (인민군 정찰국장)[4]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당시 선출된 중앙위원 43명 중 소련파는 허가이, 박창식, 김열, 김재욱, 태성수, 한일무, 전성화, 김영태 등 8명[5] 으로 대부분 친김일성 성향을 가진 국내파와 함께 빨치산파의 김일성[6] 이후 1948년에 열린 2차 당대회에서는 총 67명의 중앙위원 중 허가이, 박창옥, 김재욱, 김열, 한일무, 이희준, 김승화, 기석복, 태성수, 박창식, 이동화, 방학세, 김영수, 김찬 등 14명이 선출[7] 되어, 빨치산파와 함께 중앙위원 숫자가 크게 늘어나며 김일성의 입지를 강화[8] 하였다.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개인 숭배가 비판된 것이 계기가 되어 세력화, 최창익 등의 연안파와 함께 김일성에 도전했으나[9] 1956년 8월 종파 사건
총참모장 남일은 소련군 대위출신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도 참전한 전쟁영웅으로, 김일성에 충성한 덕분에 살아 남았지만,, 결국 1976년 교통사고로 사망.
그를 치어 죽인 자동차의 번호는 91로 시작하는 김정일 호위차량,,,
그의 죽음과 함께 군과 내각에서 근무하던 그의 아들들고 소리 없이 증발하였고, 남일의 사망은 김정일의 숙청이었다는 게 정설입니다.
북괴군4군단 반란모의: 소련파 이상조는 당시 북괴군 부총참모장으로 휴전후 소련대사로 임명, 소련으로 떠났고, 연안파 장평산은 휴전후 , 포병사령관 및 4군단장이었는데 , 함께 모의하여 김일성에 대해 대대적 반격을 준비했는데 실패..
장평산은 아오지 특별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처형, 이상조는 그대로 소련에 정치적 망명, 정치학을 공부한 뒤. 80년대 와서 우리나라에 와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소련파와 연안파가 숙청된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의 권력을 공고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61년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개최된 제4차 당 대회는 과거의 종파주의를 청산하고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 동료들만이 지휘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건설로 향하는 발판이 됐다.
제4차 당 대회는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파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었고, 파벌투쟁은 빨치산파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됐음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
4차 당대회 이후 권력문제와 관련해서 김일성 앞에는 더 이상의 정적은 없게 됐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김일성은 가계우상화와 본인의 절대화에 매진했다.
남로당계 숙청
1953년 남로당계열인 박헌영김일성의 보고가 있은 후, 노동당은 각 정당·단체들에게 당성(黨性) 검토를 하게 하는 한편, 박헌영·이승엽 등을 체포·구속했다. 53년 7월 30일 이승엽·조일명·임화·박승원·이강국·배철·윤순달·이원조·백형복·조용복·맹종호·설정식의 12명이 기소되어 8월 3일부터 6일까지 심리가 진행되었다.
기소장에는 ①미제국주의
이들 중 이원조 징역 12년에 재산몰수, 윤순달 징역 15년에 재산몰수, 나머지 10명은 모두 사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1953년 총정치국장 박헌영도 숙청, 사형선고를 받고, 평북 철산군 산골짜기에 끌러간 후 2년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 55년 12월에 정식 기소되고, 처형당했다..
그의 재판을 위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특별재판소를 설치, 최용건
박헌영의 기소내용은 ①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위 ②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행위 ③공화국 정권 전복음모 행위 등이었다.
12월 15일 열린 공판에서 박헌영은 사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으며, 그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갑산파 숙청
이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 세력으로서 광복 이후 남로당파, 소련파, 연안파 등 다른 계파를 차례로 몰아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빨치산파
그러나, 김일성에게서 김정일로 권력이 이양되기 전 후계 구도 확립 문제 및 경제 정책에 대한 관점 차이로 인해 1967년 기존 권력층의 일부가 숙청되는데, 이때 실각한 박금철, 리효순, 김도만, 허석선 등만을 따로 묶어 '갑산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1930년대 조국광복회 사건, 일명 '혜산 사건' 때 국내에서 거점으로 활동한 항일무장조직 출신으로서 김일성
이들은 김일성 유일사상이 만연하기 전에 실학과 같은 민족전통의 혁명사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967년 노동당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당간부들에게 목민심서
당시 인민무력부장이자 김일성의 유격대 동지였던 김참봉의 숙청이유::
총참모장 최광과 탁구를 치다가 김일성에게 전화가 왔다면 전해준 전화기에 ....지금 탁구 치는게 안보여...
없다고 해...........
이 한마디에 김일성에 괘심죄에 걸려 갈아버리려던 것이 그 시초
결국 인민부력부장 김창봉과 그의 심복인 총청치국장겸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을 비롯한 수 많은 장령들이 또다시 생사불명으로 사라지고...
총참모장 최광은 같이 탁구쳤다는 이유만으로 10년간 황해도 협동농장에서 트렉터를 모는 신세로 전략
1970년 대 만주파 계열 장정들도 숙척::
그 시작은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오빠이자 부수상을 지낸 군원로 김광협이 김일성에 대한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에서 시작
김창봉, 허봉학, 김광협은 모두 함경북도 화성의 16호 정치수용소로 끌려가 최후를 맞이함
갑산파를 숙청한 김일성은 이듬해인 1968년 자기의 생일을 국가 명절로 지정하는 등 개인 우상화에 박차를 가했고, 황장엽 등을 동원해 김일성 유일사상인 주체사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
북한에서는 갑산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박금철 등 숙청당한 인물들을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부르고 있으며,[2] 조국광복회 조직과 혜산 사건을 서술할 때도 당시 체포되어 사형당한 리제순(이효순의 동생)이나 옥중 고문으로 건강을 잃은 박달[3]
빨치산파 숙청
1930년대 북만주 지역에서 김일성 등을 중심으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소련군과 함께 입북한 후 정권을 장악한 정치 집단
김일성, 임춘추, 최현, 김책, 안길 등 빨치산파들은 1930년대 북만주를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일제의 토벌에 쫓겨 소련령 하바로프스크 지역으로 들어가 소련군을 지원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소련의 첩보부대였던 ‘88여단’에서 활동 하던 중 해방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88여단’ 시절부터 소련군부의 신임을 받았으며 입북 후 그 후광으로 정치적 입지를 쌓았다.
김일성 등 빨치산파는 소련군과 함께 평양에 등장하였다. 김일성은 국내 공산주의자들보다도 소련에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 받고 있었으며, 메레츠코프(Meretskov, M.A.)·스티코프(Shtykov, T.F.)·치스챠코프(Ivan M. Chistiakov)·레베제프(Nikolai. G. Lebedev) 등 많은 인사들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소련군사령부는 소련군이 점령한 38°선 이북지역에 새로운 당 중앙 지도기관과 정규군을 구성하여 한반도 공산주의 운동의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여기서 김일성 등 빨치산파들이 ‘공산주의의 핵심’을 자처하며 급부상 하였다. 그들은 해방 직후 북한사회에 등장한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결속력과 응집력이 가장 강한 단체였다.
빨치산파는 입북 후 각 도청 소재지마다 적위대를 편성하여 무장조직을 확대시키면서 소련군정을 대신하여 경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소련군 정치사령부의 지령에 따라 북한 전역에서 경찰관서를 장악하여 일본경찰의 무기를 소지하였으며, 각 도·시·군·면·리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우익계 활동에 압력을 가하여 짧은 기간 안에 북한 전역을 장악하였다.
소련군정은 각 파벌간의 투쟁으로 인한 혼란을 조기에 수습하기 위해 김일성 옹립을 서둘러 1945년 10월 8일부터 ‘북조선 5도회의’를 소집했고, 10일부터 13일까지는 ‘조선공산당 이북5도 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14일에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일련의 행사를 통해 소련 군부는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후 김일성은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였다.
또한 김일성빨치산파는 권력을 장악하면서 군대 장악에 집착하였다.
빨치산출신 손종준, 최병열, 김준동, 박승철 등이 평양학원 설립에 주축이 되었으며, 김책·안길·강건(姜健)·최용건·최충국(崔忠國)·박영순(朴英順)·오백룡(吳白龍)·무정·박일우(朴一禹)·주연(朱然) 등이 회합하여 군 창건을 준비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노동당의 창당으로 보다 많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하였고, 이러한 여세를 몰아 1948년 제2차 당대회를 개최해 빨치산파, 소련파, 연안파, 국내파를 망라한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이어 그는 1950년 6·25전쟁을 통해 정적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전쟁 패전책임을 빌미로 1950년에 무정을 제거했고 1951년 11월에는 소련파의 실력자 허가의를 제거했다.
김일성의 빨치산파들은 1956년 제3차 당대회에서 대거 등장하여 크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위원현황을 보면, 중앙 위원회의 정위원에는 11명이, 후보 위원에는 6명이 선출되었고, 6명의 최고위급 중앙 위원 가운데서는 4명이 빨치산 출신이었다.
중앙 위원회 위원인 11명의 빨치산은 서열순으로 김일성, 최용건, 김일, 박금철, 김광협, 최현, 유경수, 김경석, 이영호, 김창덕, 이송운 등이며, 중앙 위원회 후보 위원인 6명의 빨치산 출신은 석산, 오진우, 최광, 최용진, 김창봉, 서철 등이었다.
제3차 당대회가 끝난 지 채 2개월도 안 된 1956년 6월 1일부터 7월 14일까지 김일성은 10명의 대표단과 함께 소련과 동유럽의 9개국을 방문하여 경제 원조를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부재중에 연안파의 반대 움직임을 파악하고 모두 제거하였다.
1958년 2월 8일 조선 인민군 창설 10주년 기념 연설에서 김일성은 처음으로 인민군은 만주에서 전개했던 그의 빨치산 항일 무장 투쟁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1961년 9월에 열린 제4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오랫동안 그를 지지해왔던 옛 빨치산 동료들을 당과 정부, 그리고 군의 주요 요직에 등용하였다.
김일성의 빨치산들이 공공연히 지배 세력으로 부각된 것은 1961년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개최된 제4차 당대회에서였다.
이 대회에서는 85명의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선출되었는데, 새로 선출된 57명 중에 25명이 빨치산 출신들로 구성되었고, 21명 정도는 사회주의는동청년동맹이나 조선인민군으로부터 새롭게 충원된 젊은 간부들이었다.
일부 빨치산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나 과거에 빨치산이었던 이제순의 친척 이효순처럼 빨치산들과 직접 가족관계로 연결되어 있거나 그들은 추종하는 사람들이었다.
제4차 당대회에서는 빨치산 출신이거나 그들에 의해서 훈련되었거나, 가족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중앙 위원회의 80%를 차지했다.
1946년 제1차 당대회에서 4명의 중앙 위원으로 출발했던 빨치산들은 15년 만에 다른 파벌들을 모두 제거하고 당을 장악하게 된것이다.
중앙 위원회 간부 선거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당대회의 마지막 날에 개최된 중앙 위원회 제1차 전원 회의에서 김일성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최용건, 김일, 박금철, 김창만, 이효순 등 5명이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상임 위원회 정 위원11명, 후보 위원으로 4명이 각각 선출되었는데 김창만과 소련파 출신의 남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빨치산 출신이거나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제4차 당대회는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었으나 빨치산들의 대대적인 권력 장악은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예상치 못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북한에서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방비를 늘리고 국방을 강조하는 여파로 빨치산 장군들이 정치에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1962년부터 1966년에 이르는 동안, 북한의 군사력 강화를 부추기고 빨치산 장군들의 정치적 우세를 뒷받침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남한 정치의 변화에도 있었다.
이와 같이 복합적인 요인들이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켰고 정치적 우위를 점한 빨치산 군부 세력은 그 대응책으로서 북한을 군사화하는 한편, 일련의 대남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게 되었다.
1968년 말에 이르러 김일성은 빨치산 출신 장군들의 지나친 권력 행사와 북한의 군사화가 안고 있는 폐단에 눈을 돌리고 그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대남 침투 공작의 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연락국 총책 허봉학은 빨치산이 아닌 민간인 김중린으로 교체되었다.
이어 빨치산 출신의 고위 장군으로 당 비서 겸 정치 위원이었던 부수상 김광협, 민족 보위상 김창봉, 인민군 총참모장 최광, 정치 위원인 해군 제독 이영호, 당비서 겸 사회 안전상 석산이 축출되었고, 이외에도 최민철, 정병갑, 김자린, 김창덕 등의 빨치산 출신 장군들도 제거되었다.
이들의 제거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결합하여 평생 그를 뒷받침해왔던 빨치산들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책: 항일유격대 출신으로 입북당시 김일성보다 높은 소련군소좌이고, 북한 정국의 부수상이며, 6.25전쟁때 , 평양에 나자빠졌던 김일성을 대신하여 북괴군의 전선사령관으로 실제 전쟁을 지휘함
군사능력, 행정업무, 모든 면에서 뛰어난 북한 최고의 브레인이었고, 그의 명성은 중국,소련에서도 자자했습니다.
김일성 대신 김책을 앉히는게 낫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철저한 김일성의 심복이자 친구라 무시.
김일성과 공,사석에서 "야" "자" 트는 몇 안되는 인물로 김일성이 극도로 총애하고 의지했던 인물..
그런데 51년 평양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공식적인 사인은 과로사....
실제 원인은 "연탄까스 중독사"
전선을 총지휘하는 북괴군의 전선사령관이 연탄까스로 죽었다는 말도 안되는 사건이 발생
실제 내막은 그 바쁜 전쟁통에 최고사령관이라는 김일성이 간호병 출신 "김성애" 를 첩으로 앉혀 깨를 뽁는다고 정신이 없었다고....
이로 인해 김책과 김일성은 심한 말다툼이 있었고, 그 다음날 김책은 연탄까스 중독으로 시체로 발견됨
마치 히틀러가 롬멜을 죽인 후 애도한 것 처럼,,,슬피 울었다고 함
김일성은 1960년대 말에 이르러 빨치산파의 지지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지위가 확고해졌고, 자신의 지지 세력이라 하더라도 강력한 군사집단의 위협으로 여겨지자 과감하게 제거하였다.
김일성은 빨치산 장군들의 제거로 1960년대의 군사 정책을 마감하고, 소련, 중국과의 관계도 정상적으로 회복되자 1970년 11월의 제5차 당대회를 통해서 전문 기술 관료들과 빨치산의 전통에 따라 훈련받은 젊은 지도자들을 대폭적으로 기용하여 경제개발 사업과 정치체제 개선 작업에 주력하였다.
제5차 당대회에서 혁명 제2세대 충성 분자들의 부상과 함께 두드러지게 눈에 띈 것은 김영주, 김성애를 비롯해서 박성철, 양형섭, 허담 등 김일성 직계 친척의 등용이었는데, 이것은 장차 김일성이 자신의 독재와 그의 친척들의 정치 기반을 강화해 나가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죄다 숙청하고 나니 북괴군의 전쟁수행능력이 바닥을 기다 못해 땅속에 파묻힐 지경이라 결국 다음 시대의 지휘관들을 양성하기 위해 뭔가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김일성, 그리고 후계자로 떠오른 김정일은 당시까지 건재했던 소련의 군사학교로 만경대혁명학원을 나온 인재들을 유학 보냈고 그 중에서 <프룬제 군사학교>를 다녀온 군관들을 최고의 엘리트로 대우하며 각 군의 요직에 배치하였습니다.
그들은 항일 유격대와 6.25 참전용사들의 자제들이었고 그들의 부친들이 김일성과 동기를 먹고 자신들은 김정일과 친구 먹던 사이들인지라 김부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믿을 만한 진골들이었는데 <너무 친했다>는 것이 뜻밖의 부메랑이 되었습니다. 바로 김정일에 대해 너무 잘 알다 보니 <저 뽀그리가 지도자는 개뿔....>이라는 생각들을 갖게 된 것이지요. 게다가 이들은 타고난 근성으로 소련의 군사학교에서도 톱을 달리던 인재들이었고 북괴군 최고의 지휘관들로 이름을 날리다 보니 비록 김정일은 <나와 함께 전쟁을 할 인재들>이라며 좋아했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니가 꼴에? 풋....> 이러고 있었습니다.
이들 소련 유학파의 거두는 최룡해의 매부이자 북괴군 부총참모장인 홍계성 상장이었고 김일성의 외가 친척인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도 가담했으며 인민무력부 작전부처장 겸 전투훈련국장 안종호도 합세하였습니다.
(흔히 안종호가 부총참모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소련 유학파의 거두이자 부총참모장은 안종호가 아니라 홍계성입니다.)
이들은 소련에서부터 KGB와 모의하여 자신들의 쿠데타가 성공할 경우 소련이 자신들의 정권을 밀어줄 것을 요청했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제거할 계획부터 차근차근 짜기 시작했는데 군 창건 60주년인 1992년 4월 25일 열병식 때 주석단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퍼레이드를 하는 탱크로 포를 쏴서 한 큐에 일타 쌍피로 갈아버린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스케일이 크고 아름답다....)
또한 소련 유학파 출신의 사단장 5명이 더 가담하여 북괴군 5개 사단이 김정일에게 반기를 들고 봉기하기로 모의를 하였고 열병식에 동원된 그 탱크는 평양방어사령부 땅크사단 소속이었는데 그 땅크사단장이 소련 유학파 출신의 김일훈 소장이었습니다. 게다가 탱크 차장과 조종수, 탄약수, 사수, 부사수, 포수까지 전부 한 패거리로 배치하여 그날 제대로 탱크가 뜨기만 하면 실패할 수가 없는 계획이었지요.
그러나 이 계획은 실로 어이없이 실패했는데 인민무력부 땅크교도지도국장 박기서 대장이 평양방어사령부의 탱크 대신 자신이 관할하는 인민무력부의 탱크를 동원할 것을 강력히 밀었고 게다가 이 박기서란 놈이 김일성의 사촌동생이라 그 말이 먹혀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탱크 하나 바꼈을 뿐인데... 역사가 바뀌어버렸고 그나마 소련 유학파들은 비밀을 철저히 숨기고 후일을 기약했으나 다른 곳에서 일이 새어나 버렸습니다.
(이래서 과거 사육신 이래로 결심을 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들고 일어나는 게 답이다. 가장 완벽한 작전계획도 적과 처음 마주치는 순간 휴지조각이라는데 계획이 다소 틀어졌더라도 일단 부딪쳐 보았어야 했다.)
이미 1년 전인 1991년에 소련이 멸망한 터라 KGB를 비롯한 각종 정보기관의 요원들도 백수건달이 되어 떠도는 신세가 된 자들이 많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당시 러시아 대사였던 손성필에게 쿠데타 모의를 돈을 받고 밀고했고 이에 김정일은 인민무력부 보위국에 명령하여 그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에 대한 무자비한 소탕을 지시합니다.
1993년 2월 8일에 인민무력부 8호동 회의실에서 중대한 회의가 있다고 하여 도착한 소련 유학파 군관들은 보위국장 원응희가 이끄는 작전조에 포위되었고 홍계성과 강영환을 비롯한 장령급 지휘관만 70여명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998년까지 5년 간 소련 유학파 군관들에 대한 대숙청이 시행되었고 <50세 미만의 모든 소련 유학파 군관들을 처단>하고 말았지요. 이 숙청으로 장령 30여명, 좌관 100여명, 위관 70여명 등 200여명이 넘는 소련 유학파들이 총살되고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군복을 벗고 현재까지 감시대상이 되어 있으며 이후 북괴는 두 번 다시 외국에 군사유학을 보내지 않음은 물론 남침전쟁을 위해 갈고 다듬어 놓은 지휘부가 궤멸당하는 뼈아픈 타격을 입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개이득~~~
이 사건이 우리 입장에서는 더더욱 개이득인 이유는 결국 저 소련 유학파들도 빨갱이였기에 저들의 목적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축출한 후 북한을 다시 <정상적인 공산주의 국가>로 되돌리고 곧바로 남침전쟁으로 <대한민국을 적화통일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공식을 깨어버린 예화인데 결국 이 사건으로 남침전쟁을 일으킬 대남 강경파들이 없어지고, 동시에 북괴군의 주요 지휘부가 절단이 나고, 북괴군이 반신불수가 되었으니 실로 대한민국에 있어서 천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민무력부 보위국은 <보위사령부>로 승격되고 그 수괴인 원응희는 <보위사령관>이 되어 김정일의 숙청 전문 사냥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그동안은 군사지휘관을 감시하기 위한 정치장교만을 파견하였으나 이 사건부터는 정치장교를 감시할 보위장교도 파견하여 북괴군의 지휘체계는 더욱 요지경이 되었습니다. 지휘관ㆍ정치지도원ㆍ보위지도원 세 명의 서명이 모두 들어가야 명령이 작동하는 그런 희한한 구조로 말이지요.
(반란이 일어나는 거야 막겠지만 저렇게 해서 제대로 전투를 할 수가 있나? 참고로 정치장교의 호칭은 연대급 이상은 <정치위원>, 대대급 및 그 이하는 <정치지도원>입니다. 지휘관의 총괄은 총참모부, 정치장교의 총괄은 총정치국, 보위장교의 총괄은 보위사령부가 맡으며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인민무력부장의 수하이지만 실제로는 총정치국장이 가장 실세이지요.)
그러나 아직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프룬제 군사학교 유학생들의 모의가 실패한 후 4년 뒤, 아직 소련 유학파들에 대한 숙청이 한창이던 1996년에 함경북도 지역을 담당하는 북괴군 6군단에서 김정일에 대항하는 대대적인 반란이 모의되었습니다.
* 필자 주
: 북괴군 6군단은 청진시 나남구역에 사령부를 둔 국경수비대로 3개 보병사단, 1개 포병사단, 4개 방사포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란이 진압된 후 함북에서 강원도로 옮겨 명칭도 6군단을 뒤집어 9군단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 반란의 주모자는 뜻밖에도 6군단장이 아닌, 군단장을 감시하라고 파견한 군단 정치위원인 모 중장이었고 게다가 정치위원을 감시하라고 보내놓은 보위원까지 정치위원과 합세하여 반란을 모의했던 것입니다. (......) 이 정치위원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완을 발휘하여 6군단 직할대 및 예하 사단, 연대까지 모조리 한통속으로 만들었고 사단장, 사단 정치위원, 연대장, 연대 정치위원을 비롯한 예하부대의 지휘관과 정치위원, 보위지도원까지 몽땅 포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함북지역 도당과 도 인민위원회, 도 안전부와 보위부까지 죄다 한통속이 되어 모의를 하였으니 6군단은 물론 함경북도 전체가 김정일에 대항하여 봉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북괴군 6군단은 우리나라로 밀사를 파견하여 김영삼 대통령의 도움을 요청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6군단이 봉기하여 함북 일대의 주요 항만들을 열어놓을 테니 그리로 국군이 상륙하여 도와달라는 것이지요. 이게 성공하였다면....)
6군단 자체가 워낙 후방의 향토부대라 전투력이 일선 부대에 비해 후달렸던 터라 군단 정치위원과 휘하 지휘관들은 우선 군단의 전투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군수물자 조달 목적으로 외화벌이를 빙자한 암거래로 많은 달러와 자금을 마련했고 반란에 반대하는 군단장을 죽여 버리는 강수를 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후임으로 온 군단장이 김정일의 측근인 김영춘이었고 반란 세력은 일단 숨을 죽이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6군단 사령부가 위치한 나남구역을 담당하는 안전보위부의 여성 보위원이 군단 정치위원의 쿠데타 준비를 눈치 채고 도 안전보위부에 보고하였으나 이미 도 안전보위부도 반란세력과 한통속인 터라 보고서를 서류함에 넣고 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성 보위원은 보통 근성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 길로 밤을 새워 평양으로 달려가 보위사령부에 제보하였고 이로 인해 6군단의 반란 모의가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김정일의 쿠데타 진압 명령이 떨어지고 6군단 정치위원과 주요 지휘관들을 회의가 있다는 구실로 함남 이원 비행장으로 불러낸 후 도착하자마자 모조리 체포하였습니다. 하필 그 시점에 평양에서 <전군 중대장ㆍ중대 정치지도원 대회>가 있어 전 북괴군의 중대장들과 중대 정치지도원들이 평양으로 집결하였는데 집결하던 도중 6군단의 중대장ㆍ중대 정치지도원들이 탄 트럭들을 보위사령부의 작전조가 포획하여 끌고 가버렸고 일선에서 전투를 이끌 중대장들이 모조리 사라지자 6군단은 그 자리에서 반신불수가 되어버려 그 며칠 후 평양에서 파견된 쿠데타 전문 진압부대인 독립전투여단이 6군단 주요 간부들의 주택을 봉쇄하고 체포 작전을 벌임으로써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6군단장 김영춘은 총참모장으로 승진하고 6군단의 주요 간부진들은 대부분 숙청되었으며 아예 군단 자체를 뿌리 뽑아 강원도로 옮기고 6자를 뒤집어 9군단으로 개칭하기에 이르렀으니 북한판 <이시애의 난>이 될 뻔했던 사건이었습니다.
6군단의 반란이 진압된 후 더 이상 북괴군의 반란 모의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문인숙청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북한의 문학
김일성은 먼저 남로당 박헌영 일파를 숙청하고 월북문인들 가운데 남로계 문인으로 지목된 임화, 김남천, 이태준, 설정식 등 상당수의 문인들을 문단에서 제거한다.
전쟁 직후의 복구작업에 들어서기 전에 이루어진 문인숙청은, 문학 예술가들의 당적 통일성을 파괴하려는 일체의 종파주의적 행위를 거부하고, 대중의 혁명투쟁 의식과 전투의식을 마비시키는 부르주아 문학사상을 분쇄해야 한다는 당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문단숙청과 사상통제를 실현한 후에, 북한당국은 전후 복구사업과 경제발전을 위해 문학 예술인들을 다시 조직 동원하게 된다.
<천리마운동>으로 지칭되고 있는 전후 복구사업의 수행은 북한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정착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대중에 대한 사상적 통제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