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희 동시 레시피 연재-오늘의 날詩(홍시의 날씨)
홍시의 날씨
박스에 담겨 천안까지 왔어요.
영문을 몰라 겁이 났지만 동무들과 함께라 위로가 되었어요.
하동 대봉감. 박스에 뼈대 있는 집안임을 자랑하여서인지 작가의 방으로 모셔지더군요. 방에는 피아노가 있었어요.
작가라는 작자가 피아노 건반은 안 치고 컴퓨터 자판은 무수히 두드리더군요.
우리는 두 곳으로 배치되었어요. 피아노 위에 열. 바닥 상자 카페트 위에 스물.
피아노 위와 방바닥의 위계는 어찌 될까요?
누가 더 빨리 전향할까요? 높은 곳과 낮은 곳. 햇볕의 빈부격차를 고찰해요.
손 청진기로 꼬욱 가볍게 누르며 몸 상태를 진단하네요.
지금은 안되지. 그럼. 우리는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됐다고. 좀 더 기다리라고.
한껏 까칠, 떨떠름하고 근엄하게 외쳤어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성질 급한 녀석들이 말랑말랑해져서 제 발 등을 찍지 뭐예요.
여기는 감 포로수용소인 줄 내 진즉 알지 못한 게 후회되고 뼈가 시리네요.
동무들이 하나씩 뽑혀 나가요. 홀로코스트. 시작이에요.
홍시로 전향하면 풀려나는 게 아니라 먹히는 인생이라니요.
우리의 떫음을 시간이라는 교관이 길들였어요. 시나브로 물렁, 달콤해지고 말아요.
홍시가 되기 전에는 껍질과 한 몸이 되어 매끈하게 반짝였어요.
홍시가 되어서는 순순히 껍질을 떨궈내요. 작가란 작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성숙해졌다고, 내줄 때를 안다고, 아집이 꺾였다고, 농축된 아름다움이라고.’
이런 말들 모두 가스라이팅인 거 누가 모를 줄 알아요?
어서어서 달콤해지라는 명령을 가장한 농락이라는 거.
앗, 할머니가 오셨어요. 며칠간 머물다 갈 거라네요.
아침이면 할머니는 암탉이 달걀을 낳았나 점검을 하듯
“홍시가 익었나? 어느 녀석을 고를까?” 어슬렁거리며 정찰을 도네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오늘 홍시의 날씨는 언제 걷힐지 모르는 안개 속 불안이라고 말하겠어요.
4×5 가지런했던 줄이 흐트러지고 빠진 이처럼 듬성듬성 자리가 났어요.
안개가 자욱하게 흐린 날은 우울해지기 쉬우니 차라도 마시면서 힘을 내길 바랄게요.
혹시, 홍시?/김미희
여기는 대봉감 포로수용소
언제 불려 나갈지 모른다
떫음을 버리고
달콤 홍시가 되면 당하는 일
순순히 따라나선다
성격도 변했다 말랑 달달하게
*김미희 littleg2001@naver.com
200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달리기 시합’으로 등단,
『어찌씨가 키득키득』 『예의 바른 딸기』,『동시는 똑똑해』
『외계인에게 로션을 발라주다』, 『마디마디 팔딱이는 비트를』, 『실컷 오늘을 살 거야』,『순간이 시가 되다, 폰카 시』,『놀면서 시 쓰는 날』,『뒹굴뒹굴 시 쓰기 좋은 날』 과 동화 『도토리 쌤을 울려라』 외 여러 권을 썼습니다
첫댓글 역시 김미희 작자님의 글은 멋이있어요^^ 저의 동화시 <보고싶어>를 게재해준 문예지라 저도 기쁘네요^^
ㅎ감사합니다 선생님~^^
^^